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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게시판 스크랩 백제 역대 왕조
봉우리 추천 0 조회 9 11.09.05 07:06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백제 역대 왕조

1. 온조왕

■ 백제 제 1 대 왕

■ 재위 - 서기전 18 ∼ 서기28

엄밀한 의미에서는 위례성에 토대를 둔 백제 왕실의 시조이다. 현존 문헌들에는 백제의 시조로 전하는 인물들이 여러 명이며, 온조는 그 중의 하나이다. 백제 초기에는 북쪽에서 한반도 중서부 일대에 남하한 부여족의 여러 집단들이 연맹체를 결성하고 있었다. 그들 중 먼저 미추홀에 정착한 집단이 먼저 큰 세력으로 대두하였고, 그에 뒤이어 패권을 잡은 것이 위례성의 집단이었다. 그리고 미추홀에서 일어난 집단의 시조로 전하는 것이 비류이고, 그 뒤에 권력을 장악한 위례성 집단의 시조가 바로 온조이다. 《삼국사기》등에는 온조의 아버지를 동명이라 하는 한편, 동명을 백제의 시조라고도 하였다. 현존문헌들에 의하면, 북부여, 고구려, 백제 등 부여족 사회들은 모두 동명을 시조라 하고, 그를 숭배하는 제전을 각기 가지고 있었다. 온조의 아버지가 동명이라 하는 것도 그러한 부여족 일반의 상황과 관계가 있으리라 생각된다. 또한 온조와 비류가 형제라고도 하였는데, 이는 두 집단의 연맹관계를 형제의 관계로 강조하기 위하여 만든 연맹설화의 구성에서 오는 것으로 보인다. 《삼국사기》 등에 온조왕 치세의 일이라고 한 것들의 상당부분은 실제로는 백제의 발전과정에서 점차적으로 이루어진 일들을 소급해놓은 것이다. 이를테면, 온조왕대에 마한지역 전체를 통합한 것으로 되어 있는데, 그러한 영토의 개척은 실제로는 훨씬 후대에 이루어진 일이다. 또한, 백제연맹체의 주도권이 미추홀 왕족으로부터 위례성 왕족에게 넘어간 것이 온조왕대였다는 것도 의문의 여지가 있다. 연맹장의 역할을 넘어서는 강력한 왕권이 확립되는 것도 온조왕대에서 훨씬 후대인 고이왕대에나 이루어졌다고 보는 것이 통설이다.

2. 다루왕

■ 백제 제 2 대 왕

■ 재위 - 28 ∼ 77

?∼77(기루왕 1). 백제의 제2대왕으로 28년부터 77년까지 49년 재위했다. 온조왕의 맏아들이며 제3대 기루왕의 아버지이다. 온조왕 28년에 태자가 되었다가 온조왕이 죽자 즉위하였는데 성격이 관대하고 후덕하며 위망이 있었다고 한다. 다루왕의 다스릴 당시에 대한 대한 《삼국사기》의 기록에는 말갈과의 전투가 자주 나타난다. 이 말갈의 실체는 알 수 없으나, 백제를 건국한 부여족이나 백제에 복속된 마한과도 다른 부류로 생각된다. 이들 말갈은 이전부터 낙랑 등 한군현의 사주를 받아 백제를 침공하고 있었다. 이는 아직 한반도 중서부지역의 작은 세력에 불과하였던 백제가 외세와의 대결 속에서 성장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서기 33년 남부 주군으로 하여금 벼농사를 짓게 하였다고 하는데, 이는 아마 청동기시대에서부터 시작되었던 벼농사가 어떠한 계기로 이때 크게 장려된 것으로 보인다. 《삼국사기》에는 63년 낭자곡성까지 영토를 넓히고 신라에 사신을 보내어 만나기를 청하였다고 하나, 당시의 백제 상태로 볼때 믿기 어렵다.

3. 기루왕

■ 백제 제 3 대 왕

■ 재위 - 77 ∼ 128

?∼128. 백제의 제3대왕으로서 77년부터 128년까지 재위했다. 제2대 다루왕의 맏아들로서 33년(다루왕 6)에 태자로 책봉되어, 77년에 다루왕이 죽자 왕위를 계승하였다. 《삼국사기》의 기루왕 치세에 대한 내용에는 천문이변, 지진, 큰 가뭄, 태풍, 기상이변 등에 대한 간략한 기록이 대부분이다. 기록의 내용에 흉년, 재난 또는 흉조를 뜻하는 것들이 많은 것은 기루왕이 다스린 시대의 백제가 큰 시련기였음을 반영하는 것으로 보인다.

4. 개루왕

■ 백제 제 4 대 왕

■ 재위 - 128 ∼ 165

?∼165. 백제의 제4대 왕으로서 서기128년부터 165년까지 백제를 다스렸다. 아버지는 제3대 기루왕이다. 132년(개루왕 5)에는 북한산성을 쌓았다. 155년에는 신라의 아찬 길선이 모반하다가 탄로가 나 도망왔는데, 신라왕이 글을 보내어 돌려주기를 청하였으나 보내지 않았다. 이에 신라왕이 노하여 침공해왔으나 잘 막았다. 《삼국사기》에는 개루왕의 아들로 제5대 초고왕과 둘째 아들로 제8대 고이왕을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고이왕이 개루왕의 아들이라 함에는 문제가 있다. 재위기간만 38년이므로 죽을 때의 개루왕은 노령이라 하겠는데, 고이왕의 즉위는 개루왕의 죽은 해에서 69년 뒤이며, 그 뒤에도 고이왕은 52년간 재위한 것으로 되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고이왕은 개루왕의 아들이 아니라 개루왕의 방계후손이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고이왕의 선대계보를 개루왕에게 연결시킨 것은 당시 백제왕실의 여러 혈족들 중에서 개루왕을 기점으로 하는 지파가 존재했던 때문으로 생각된다. 제21대 개로왕은 일명 근개루왕이다. 이렇게 후대의 왕이 개루왕의 이름을 따고 있음도 그러한 지파 의식과 관련된 것일 가능성이 있다.

5. 초고왕

■ 백제 제 5 대 왕

■ 재위 - 166 ∼ 214

?∼214(구수왕 1). 백제 제5대왕으로 서기166년부터 214년까지 재위에 있었다. 개루왕의 맏아들로 소고왕 또는 속고왕이라고도 불렸다. 개루왕 말년에 신라에서 모반을 꾀하다가 발각되어 백제로 도망해온 아찬 길선의 송환문제로 양국 사이에 불화가 생겼다. 이로 말미암아 초고왕의 즉위 후 신라와의 공방전이 되풀이되었다. 188년(초고왕 23)신라의 모산성을 공격하였고, 189년 7월 신라군과 구양에서 싸우다가 패배하였다. 190년 신라의 서쪽 국경지대의 원산향을 공격한 뒤, 추격해오는 신라군을 와산에서 크게 격파하였고, 204년에는 신라의 요차성을 함락시키고 성주 설부를 전사시키는 전과를 올렸다. 이와 같이 이 시기에 양국 사이의 주된 전장은 예천, 옥천, 보은을 잇는 소백산맥 일대였다. 한편, 북한강 상류를 타고 내려오는 말갈의 침입에 대비하여 210년 적현, 사도 두 성을 쌓아 동부의 민호를 옮겨 충실하게 하였다. 214년 북부 출신 진과로 하여금 말갈의 석문성을 공격하여 탈취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말갈은 날랜 기병으로 술천 지역까지 침범하기도 하였다.

6. 구수왕

■ 백제 제 6 대 왕

■ 재위 - 214 ∼ 234

?∼234. 백제의 제6대왕으로 귀수왕이라고도 한다. 214년부터 234년까지 재위했다. 그런데 이 무렵은 백제가 아직 연맹체를 이루고 있었으므로, 그 연대가 정확하다 해도 국가체제 성립 후의 재위와는 의미가 다를 수 있다. 제5대 초고왕의 맏아들이며, 제7대 사반왕은 그의 맏아들이고 제11대 비류왕은 둘째 아들이라 전하는데, 그렇다면 연대상의 문제가 있어 그대로 믿기는 어렵다. 구수왕은 키가 7척에 풍채가 빼어나 비범했다고 하며, 온조계 왕족 출신으로, 구수왕대를 경과하는 동안 온조계 왕족에 큰 변동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삼국사기》에는 구수왕이 죽은 뒤 아들 사반왕이 왕위를 계승했으나 어려서 정치를 할 수 없기 때문에, 초고왕의 아우인 고이왕이 즉위했다고 전한다. 여기서 고이왕이 초고왕의 아우라 함은 연대상으로 모순된다. 고이왕은 구수왕과는 온조계 왕실 내의 서로 다른 지파출신으로 추정되고 있다. 구수왕의 사망 뒤 고이왕의 즉위와 사반왕의 폐위는 곧 초고왕에서 구수왕으로 계승된 지파의 몰락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인다. 《삼국사기》의 구수왕대의 기록은 말갈, 신라 등과의 전투로 점철되어 있다. 그러한 전투들은 대부분이 백제의 참패로 끝나고 있고, 구수왕대말에는 혹심한 가뭄이나 기근 등의 재난까지도 겹치고 있다. 연맹체제하에서 이러한 사실들은 구수왕이 속한 초고왕계 세력의 몰락에 결정적인 영향을 줄 수 있는 것들이다. 한편, 고이왕의 즉위는 백제의 국가체제 형성에 하나의 전환점을 이루고 있었다. 이는 구수왕대말의 왕실교체가 당시의 광범위한 정치, 사회적 변동과도 관련됨을 뜻한다. 초고왕계의 재등장은 그뒤 비류왕의 즉위로 이루어지는데, 그의 후손으로는 근구수왕이 있다. '근구수'는 '구수'와 어떠한 관계가 있음을 나타내는 왕명으로 보인다.

7. 사반왕

■ 백제 제 7 대 왕

■ 재위 - 234

생몰년은 알려지지 않으며 다만 백제의 제7대왕이라는 것만 알려진다. 아버지는 구수왕으로 234년에 즉위하였지만, 곧 폐위된 것으로 전한다. 사반으로 표기되기도 한다. 아버지는 구수왕이다. 《삼국사기》 고이왕 즉위조에는 구수왕이 사망하자 그의 맏아들인 사반왕이 왕위를 계승했지만, 어려서 정치를 할 수 없기 때문에 곧 폐위되고, 고이왕이 즉위하였다 한다. 사반왕과 그 선대로 이어지는 기존 왕통에 대해 고이왕은 먼방계출신에 불과했다. 그 때문에 사반왕의 폐위와 고이왕의 즉위는 정치적 세력의 교체로 이해되고 있다.

8. 고 이 왕

■ 백제 제 8 대 왕

■ 재위- 234 ∼ 286

▶ 출신에 대한 논의

백제의 제8대왕으로 서기 234년부터 286년까지 재위했다. 초고왕의 동생으로서, 제6대 구수왕이 죽은 뒤 장자 사반왕이 왕위를 계승하였다 그러나 어려서 정사를 감당하지 못하자 사반왕을 폐위시키고 왕위에 오르니 곧 고이왕이다. 고이왕의 출신에 대해서는 몇가지 설이 있다. 먼저 《주서》 및 《수서》의 백제전에 보이는 '백제시조구태'의 '구태'를 '구이'로 읽고 이것은 '고이'와 음운상으로 통한다고 보아 '구이=고이'로 해석함으로써 고이왕을 백제 고대국가의 실질적 건국자로 보는 견해가 있다. 반면,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에 고이왕을 '초고왕모제'라고 한 것을 '초고왕 어머니의 동생'으로 해석하여 고이왕은 온조왕계와는 계보를 달리하는 우태 - 비류계 출신이라고 보는 견해도 있다. 이밖에 《신찬성씨록》에는 고이는 '구이' 또는 '고모'로 표기되어 있다.

▶ 지배체제의 정비

고이왕은 즉위 후 국가체제의 정비와 왕권 강화에 주력하여 고대국가로서의 백제의 기반을 다져놓은 인물이었다. 집권력의 강화를 위하여 좌장을 설치하여 내외 병마권을 관장하게 함으로써 족장들의 독자적인 군사력을 약화시켰다. 그리고 지배체제의 정비를 위하여 중앙관등제를 마련하였다. 고이왕 때의 중앙관제에 대해서는 《삼국사기》에는 이른바 '6좌평 16관등제'가 고이왕 27∼28년에 완비된 것으로 기술되어 있다. 이 기록을 토대로 하여 백제 16관등제의 완성시기를 고이왕 때로 보는 학자의 견해도 있다. 그러나 이 고도의 정비된 관등제는 《주서》 및 《구당서》와 비교해 볼 때 고이왕 때에 완성된 것으로 보기 어렵다. 다만 이때는 좌평급, 솔급 등의 관등이 설치되어 뒷날 16관등제의 토대가 마련되었다. 이중 좌평은 솔급의 귀족들로 이루어진 귀족회의의 의장의 기능을 가진 것으로 보인다. 중앙에 있어서 이와같은 관등제의 설치는 백제의 지배층 내에 편입된 대소 족장세력들을 체계화한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그만큼 집권적인 지배체제와 권력장치가 마련되었음을 말하는 것이다. 고이왕은 또 관리들의 뇌물수수를 금지하는 범장지법을 제정하고 이를 위반한 자에 대해서는 3배를 배상하게 함과 동시에 종신토록 금고케 함으로써 관리들의 규율을 강화하였다. 그리고 국가의 경제력을 강화하기 위하여 나라의 남쪽 평야지대에 논을 개간하도록 하여 농업생산력의 증대를 장려하였다.

▶ 대외정책

한편, 이 시기에 있어서 백제의 대외관계는 두 방면에서 커다란 전환을 보게 되었다. 하나는 마한과의 관계이고, 하나는 중국군현과의 관계이다. 마한과의 관계에 있어서는 직산에 자리잡은 목지국의 세력을 압도하여 이전의 부용관계를 청산하고 한강유역의 실질적인 영도세력으로서의 위치를 확립하였다. 그리고 낙랑군, 대방군과의 관계에 있어서는 이전의 소극적이고 방어적이었던 자세에서 벗어나 적극적이고 공격적인 자세로 바꾸었다. 백제와 중국군현과의 관계가 변화하기 시작한 것을 보여주는 예로서는, 유주자사 관구검이 대방태수 궁준과 낙랑태수 유무가 고구려를 공격하였을 때 고이왕은 그 틈을 타서 낙랑군의 변경을 공격한 일이 있다. 또한, 한나라와 낙랑군, 대방군 사이에 분쟁이 일어났을 때 대방군을 선제공격하여 대방태수 궁준을 전사하게 한 사건의 배후에도 고이왕이 이끄는 백제의 힘이 작용하였을 것이다.

▶ 평가

이와 같이, 고이왕 때는 안으로는 지배체제를 정비함으로써 집권력의 강화를 보게 되었고, 밖으로는 영역의 확대와 더불어 중국군현의 이이제이적인 기미책에서 벗어나 중국군현과 대등한 위치에 올라서게 되었다. 이러한 토대 위에서 고이왕은 고대의 정청으로서 왕위와 신위가 뚜렷하게 구분된 남당을 설치하여 국정을 이끌어 감으로써 그 지배력과 권위를 더욱 과시할 수 있었다.

9. 책계왕

■ 백제 제 9 대 왕

■ 재위 - 286 ∼ 298

?∼298(분서왕 1). 백제 제9대왕으로서 서기286년부터 298년까지 재위에 있었다. 일명 청계 또는 책체라고도 한다. 고이왕의 맏아들이며, 왕비는 대방왕의 딸 보과이다. 체구가 장대하고 의지가 굳세었다고 한다. 286년(책계왕 1)에 고구려가 대방을 공격하였을 때, 대방왕이 사위인 그에게 구원을 요청하자 군사를 보내어 고구려군을 물리쳤다. 이 때문에 고구려와의 사이가 나빠져, 고구려의 침입에 대비하여 아차성과 사성을 건설하였다. 그러나 298년 한군과 맥인의 침입에 맞서 싸우다가 전사했다.

10. 분서왕

■ 백제 제 10 대 왕

■ 재위 - 298 ∼ 304

?∼304(분서왕 7). 백제의 제10대왕으로서 재위기간은 298년부터 304년까지이다. 제9대 책계왕의 맏아들로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의표가 뛰어나 부왕의 사랑을 받았다고 한다. 한군현 세력의 침입을 막다가 부왕이 전사하자 왕위를 계승하였다. 분서왕도 부왕과 마찬가지로 낙랑 등 한군현 세력에 대하여 강경책을 폈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하여 304년(분서왕 7)에는 낙랑군의 서쪽 현을 공격하여 차지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해에 분서왕은 낙랑이 보낸 자객에게 피살됨으로써 고이왕의 손자인 분서왕이 피살된 뒤 고이왕계가 몰락하고 초고왕계가 다시 왕권을 장악하게 되었다. 제11대 비류왕 다음에 분서왕의 아들 제12대 계왕이 잠시 왕위에 있었던 것으로 전하나, 고이왕계의 몰락을 막지는 못하였다.

11. 비류왕

■ 백제 제 11 대 왕

■ 재위 - 304 ∼ 344

?∼344. 백제의 제11대왕으로, 《삼국사기》에는 제6대 구수왕의 둘째 아들이고, 제7대 사반왕의 아우라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이 혈족관계는 비류왕의 재위시기와 모순되는 면이 있어 의문점이 있다. 구수왕은 234년까지 재위하였으며, 비류왕은 그보다 70년 뒤에 즉위하여 40년간 재위한 것으로 되어 있어 연대에 무리가 나타난다. 비류왕의 즉위는 그무렵 백제왕실 지파들 사이의 세력교체와 함께 이루어졌다. 비류왕의 혈족관계와 재위년 사이의 모순도 그같은 왕실 지파간의 세력교체에 대한 역사서술과 관련된 것일 가능성이 있다. 당시 백제왕실은 개루왕에서 갈라진 고이왕계와 초고왕계의 두 지파가 세력을 다투고 있었다. 초고왕의 아들인 구수왕을 계승한 사반왕은 즉위하자 곧 폐위되었으며, 방계인 고이왕이 왕위를 차지하였다. 그뒤 왕위는 고이왕의 아들 책계왕과 손자 분서왕에게 계승되었다. 그러나 책계왕과 분서왕 모두가 한군현 세력과의 분쟁에서 연달아 피살되는 사태를 당하여, 고이왕계의 세력은 큰 타격을 입게 되었다. 초고왕계인 비류왕의 즉위는 바로 이때 이루어졌다. 비류왕의 즉위는 초고왕계의 재집권을 뜻한다. 비류왕 다음에 고이왕계인 분서왕의 아들 계왕이 즉위하였지만 그 재위는 2년 만에 끝나고, 다시 비류왕의 아들 근초고왕이 즉위하여 그뒤 초고왕계 내에서 왕위계승이 계속되었다. '근초고왕'이라는 왕명은 '초고왕'과의 연관성을 나타내는 왕명이라 할 것이다. 초고왕계인 비류왕은 고이왕계의 3대가 집권한 뒤에 즉위하였으므로 그는 구수왕의 아들이 아닌 손자, 또는 보다 먼 후손이될 것이다.

12. 계왕

■ 백제 제 12 대 왕

■ 재위 - 344 ∼ 346

?∼346. 백제 제12대왕으로 344년부터 346년까지 재위했다. 분서왕의 맏아들이다. 그런데 분서왕의 뒤를 이어 제11대왕이 된 사람은 왕실 내의 다른 파벌 출신인 비류왕이며, 그 이유를 《삼국사기》에는 당시에 그가 어렸기 때문이라 하였으나, 그것만이 전부로는 생각되지 않는다. 분서왕과 계왕은 고이왕의 후손으로서, 초고왕의 후손인 비류왕과는 왕실 내에서 서로 다른 계파였다. 그리고 비류왕의 즉위는 분서왕이 낙랑의 자객에게 피살된 상태에서 이루어졌으며, 그 뒤에는 고이왕계가 몰락하고, 초고왕계가 집권하는 왕실 계파간의 세력교체가 있었다. 그 사이에 재위한 계왕의 통치기간은 2년 정도에 불과하였다. 이러한 사실들은 경쟁 세력들과의 관계에서 계왕의 즉위나 집권이 순탄하지 않았음을 암시해준다.

13. 근초고왕

■ 백제 제 13 대 왕

■ 재위 - 346 ∼ 375

?∼375. 백제 제13대왕으로 346년부터 375년까지 백제를 다스렸다. 비류왕의 아들로서 일본의 《고사기》에는 '조고왕'으로, 《일본서기》에는 '초고왕'으로 표기되어있다.

▶ 왕권강화

즉위한 뒤 왕권의 강화와 확립에 주력하여 왕위계승에 있어서 초고왕계의 계승권을 확고히 하였다. 이는 왕과 아들 근구수왕의 왕명이 초고왕과 구수왕에 '근'자를 가하여 이루어진 데서 알 수 있다. 또, 진씨가문에서 왕비를 맞아들여 왕실을 지지하는 배경세력으로 삼았다. 그리고 지방에 대한 통제를 보다 효율적으로 하기 위해 영역을 분정하여 지방 통치조직을 만들고 지방관을 파견하였다. 이로써 왕은 중앙집권화를 보다 확고히 할 수 있었다.

▶ 정복활동

한편, 근초고왕은 왕권확립을 바탕으로 하여 사방으로 정복활동을 활발히 전개하였다. 정복활동을 살펴보면, 남으로는 영산강유역을 중심으로 백제의 세력권에서 이탈해 있던 마한의 잔여세력을 경략, 복속시킴으로써 전라도지역 모두를 지배영역으로 확보하였다. 그리고 낙동강 서쪽에 위치한 가야세력에도 손을 뻗쳐 이들을 부용하게 함으로써 영향권내에 넣었다. 이렇게 남방지역의 평정이 일단락된 후 북방으로의 진출을 도모하였다. 이러한 북진은 당시 남진정책을 추구하고 있던 고구려와의 대립을 불가피하게 하였다. 양국의 군사적 충돌은 369년 치양성 싸움에서부터 비롯되었으며, 그 절정은 371년에 벌어진 평양성싸움이었다. 이 싸움에서 태자와 더불어 정예 기병 3만을 거느리고 평양성을 공격하여 마침내 고구려의 고국원왕을 전사시키고 대방고지까지 차지하는 개가를 올렸다. 이리하여 백제는 사상최대의 영역을 차지하게 되었다.

▶ 대외활동

또 근초고왕은 정복활동과 더불어 대외활동도 활발히 전개하였다. 우선 고구려에 대항하기 위해 신라와 동맹관계를 강화함으로써 한반도에서의 힘의 균형을 이룩하였으며, 중국의 동진과도 외교관계를 수립하여 동진으로부터 영동장군영낙랑태수에 책봉되기도 하였다. 한편, 중국이 호족의 침입으로 분열된 시기를 이용, 요서지방으로 진출하여 백제군을 설치하였다. 백제의 요서지역 진출은 요동지역으로 진출하여 오는 고구려 세력을 견제함과 동시에 상업적인 측면에서의 무역기지의 확보라는 의미도 있었다. 이와 더불어 일본열도방면으로도 활발히 진출하여 백제계통의 세력들과 긴밀한 관계를 가졌다. 백제와 일본열도의 세력과의 관계에 대한 물적 증거로는 일본의 이소노가미신궁에 간직되어온 '칠지도'가 있다. 이 칠지도는 당대의 금석문 자료로서 칼에 새겨진 명문의 내용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설이 분분하지만 그 내용의 핵심은 이칠지도가 근초고왕 때에 만들어져 왜왕에게 하사됐다는 것이다. 또, 한편으로는 백제가 위치한 지정학적인 유리한 조건을 이용하여 고대상업활동을 활발히 전개하였다. 한대이래 중국 황해연안에서 한반도의 서남해안으로, 다시 일본열도로 이어지는 해상교통로는 한족의 동방침입과 동시에 고대상업로로서도 중요한 길이었다. 그런데 낙랑군과 대방군이 멸망되고 북중국에는 수로에 익숙하지 못한 호족이 들어서게 되자 이 전통적인 해상교통로와 상업로는 백제가 계승하게 되었다. 이리하여 백제는 요서지역에 설치한 무역기지와 한반도와 일본지역에 자리한 백제계 세력들을 연결하여 고대상업망을 형성함으로써 무역의 중심구실을 하게 되었다.

▶ 문화의 진흥

또, 문화의 진흥과 일본으로의 전수면에서도 중요한 구실을 하였다. 대방지역을 점령하면서 중국계 사람들을 포섭하여 백제문화의 질을 높였고 나아가 일본열도에 새로운 문물을 전수하여주었다. 그 좋은 예로서는 왕인과 아직기 등을 일본에 보내어 《천자문》과 《논어》를 전해줌으로써 일본에 유학사상을 일으킨 것을 들 수 있다. 이처럼 지배영역의 확대와 통치조직의 정비를 통하여 왕권이 확립되고 문화가 발전하게 되자, 이와 같은 신기운을 배경으로 박사 고흥으로 하여금 《서기》라는 국사책을 편찬하게 하였다. 《서기》의 편찬은 왕실중심의 계보정리와 더불어 왕실전통의 유구성과 신성성을 과시하고 왕권의 위엄을 돋보이게 하려는 데서 취해진 조처였다고 할 수 있다. 이와 같이 하여 근초고왕대는 백제의 최대 전성기를 이룰 수 있었다.

14. 근구수왕

■ 백제 제 14 대 왕

■ 재위 - 375 ∼ 384

?∼384. 백제 제14대왕으로 375년부터 384년까지 재위했다. 근초고왕의 맏아들이며, 비는 아이부인으로 침류왕을 낳았다. 《일본서기》에는 '귀수' 로, 《신찬성씨록》에는 '근귀수'로 표기되어 있다. 태자 때부터 부왕을 도와 적극적으로 정복활동을 하여 369년 치양성 전투에서는 고구려군을 격파하여 5천여명을 포로로 잡았으며, 특히 371년 평양성 전투에서는 죄를 짓고 고구려로 도망갔다가 다시 귀순해 온 사기의 군사기밀 제보로 고구려군을 대파하였다. 즉, 사기의 제보에 따라 고구려군의 허실을 파악한 뒤 고구려군 제일의 정예인 적기부대를 공격하여 크게 격파하였다. 승세를 잡아 패주하는 고구려군을 추격하여 수곡성까지 진군한 뒤, 돌을 쌓아 경계를 표시하고서 회군하였다. 이때 더 북진하려 하자 장군 막고해가 "만족할 줄 알면 욕되지 않고, 그칠 줄 알면 위태롭지 않다"는 노자의 《도덕경》의 구절을 인용하면서 만류하였다. 즉위 후에는 왕명에서 보듯이 근초고왕대에 확립된 초고왕계의 왕위 계승권을 확고히 하였으며, 장인인 진고도를 내신좌평으로 삼아 정사를 위임하였다. 그리고 남하해 오는 고구려에 대해서는 공격과 수비 양면에서 적극적으로 대처하여, 한반도에서의 힘의 균형을 유지하였다.

15. 침류왕

■ 백제 제 15 대 왕

■ 재위 - 384 ∼ 385

?∼385(침류왕 2). 백제 제15대왕으로 서기 384년부터 385년까지 재위에 있었다. 근구수왕의 맏아들이며, 어머니는 진씨로 추정되는 아이부인이다. 아신왕은 그의 맏아들이다. 백제에서 처음으로 불교를 공인한 왕으로, 384년(침류왕 1) 9월 호승 마라난타가 동진에서 오자, 그를 맞아 궁중에 머물게 하고 예로써 대접하니 백제에서 불법이 이로부터 시작되었다. 또, 다음해 2월 한산에 불교사원을 세우고 10명의 승려를 두었다. 이러한 불교공인과 신봉은 그 무렵 뿌리깊은 토속신앙에 젖어 있던 백제사회에 적지 않은 파문을 일으켰을 것이다. 이를테면 법흥왕대의 신라의 경우처럼 전통적인 토속신앙의 처지에서 불교를 이단으로 비난하는 여론이 일어나거나, 그에 따른 지배층 내부의 반발도 있었을 가능성이 있다. 그러한 추정은 침류왕의 신변의 변화와도 연결될지 모른다. 한산에 불교사원을 세운 지 9개월 후에 갑자기 사망한 것으로 되어 있고, 그 다음 왕위는 아들이 아니라 동생 진사왕에게로 넘어갔기 때문이다.

16. 진사왕

■ 백제 제 16 대 왕

■ 재위 - 385 ∼ 392

?∼392. 백제 제16대왕으로서, 385년부터 392년까지 백제를 다스렸다. 근구수왕의 둘째 아들이며 침류왕의 동생으로, 용맹하고 총명하고 지략이 많았다고 한다. 즉위에 대하여 《삼국사기》에는 침류왕이 죽자 태자가 어리기 때문에 숙부인 진사가 즉위하게 되었다고 하였으나 《일본서기》에는 진사가 태자 아신에게 돌아가야 할 왕위를 빼앗은 것으로 되어 있다. 즉위 후 남진하여 내려오는 고구려와 치열한 전쟁을 벌였다. 386년(진사왕 2) 15세 이상의 백성을 동원하여 청목령에서 북으로는 팔곤성에, 서쪽으로는 바다에 이르는 관방을 쌓았다.

390년 달솔 진가모로 하여금 고구려의 도곤성을 공격하게 하여 200여명을 포로로 하는 전과를 올렸다. 그러나 고구려 광개토왕의 뛰어난 용병술에는 당하지 못하여, 392년 석현성 등 10여성과 한수 이북의 여러 부락이 고구려군에 의하여 함락되었다. 또 천연의 요새지인 관미성도 함락되었다. 이렇듯 고구려의 남진에 따른 군사적 압박으로 시종 고전을 면하지 못하였고 많은 영토를 상실하였다. 죽음에 대하여 《삼국사기》에는 구원의 행궁에서 사냥하다가 죽은 것으로 되어 있으나, 《일본서기》에 따르면 침류왕의 태자 아신의 세력에 의하여 제거된 것으로 보인다.

17. 아신왕

■ 백제 제 17 대 왕

■ 재위 - 392 ∼ 405

?∼405. 백제의 제17대왕으로 재위기간은 392년부터 405년까지이다. 백제 15대 침류왕의 맏아들로 아방왕 또는 아화왕이라고도 한다. 한성 별궁에서 태어났는데, 신비한 빛이 밤을 밝혀주었다는 출생설화가 전한다. 아들로는 제18대 전지왕과 훈해, 설례가 있다. 《삼국사기》에는 침류왕의 사망 당시(385)에 그가 어렸기 때문에 16대왕에는 숙부인 진사왕이 즉위하였다고 하나, 불과 9년 뒤인 394년 전지의 태자책봉과 405년경 전지, 설례 등의 왕위다툼을 보면, 385년경에는 이미 아들까지 있었을 것이니 그때 아신왕이 어렸다 함은 의문이다. 진사왕의 즉위는 다른 어떤 상황 때문일 가능성이 있다. 아신왕 치세의 가장 큰 문제는 광개토왕이 이끄는 고구려의 남침이었다. 아신왕의 즉위 직전인 392년과 396년(아신왕 5)에 고구려의 대대적인 침공을 받았다. 이에 아신왕은 거듭 반격하고자 하였으나 모두 실패하고 말았다. 왜와 동맹을 맺게 된 것도 이같은 고구려 세력에 대처하기 위함이었다.

18. 전지왕

■ 백제 제 18 대 왕

■ 재위 - 405 ∼ 420

?∼420. 백제 제18대왕으로 405년부터 420년까지 백제를 다스렸다. 직지 또는 진지라고도 하며 《송서》에는 여영으로 표기되었다. 아신왕의 맏아들이고 왕비는 팔수부인으로서 해씨집안 출신이다. 태자로 있을 때 부왕인 아신왕에 의하여 397년(아신왕 6)에 왜에 인질로 보내졌다. 이는 아신왕이 고구려의 남진압력에 대항하기 위하여 왜와의 우호를 도모하고 그 관계를 보다 돈독히 하고자 하는 목적에서 나온 것이었다. 그가 인질로 있을 때인 405년에 아신왕이 죽었다. 이때 아신왕의 동생 훈해가 섭정을 하면서 그의 환국을 기다렸는데, 막내동생 설례가 형을 죽이고 스스로 왕이 되었다. 부왕의 부음을 듣고 왜에서 귀국하던 중 한성인 해충으로부터 국내정세 변화와 경솔한 입국을 하지 말라는 간청을 받아들여 해도에 머물렀다. 그뒤 백성들이 설례를 죽이고 왕으로 추대하였다. 전지왕의 즉위는 해씨세력의 지지에 힘입은 바가 컸다. 그리하여 즉위 후 해충을 달솔로 삼고 한성의 조 1, 000석을 하사하였고, 해수를 내법좌평, 해구를 병관좌평에 각각 임명하였다. 그리고 부인을 해씨집안에서 맞아들이게 되었다. 이로써, 이전의 진씨왕비족 시대는 퇴조를 걷게 되었다. 이와 더불어 서제인 여신을 내신좌평으로 삼았다가 408년(전지왕 4)에 상좌평(上佐平)으로 임명하면서 군국정사를 위임하였다. 이는 백제에 있어서 상좌평제의 시초가 되었다. 한편, 대외관계에 있어서 동진과 긴밀한 외교관계를 유지하여 416년에 진동장군 백제왕의 작호를 받았으며, 왜와의 우호관계도 계속 유지하였는데, 야명주를 보내온 왜의 사자를 우대하고 또 왜에 비단 10필을 보내기도 하였다.

19. 구이신왕

■ 백제 제 19 대 왕

■ 재위 - 420 ∼ 427

?∼427. 백제의 제19대왕으로서 420년부터 427년까지 백제를 다스렸다. 제18대 전지왕의 맏아들이며, 제20대 비유왕은 그의 아들이다. 구이신왕은 중국대륙의 세력과 연결하여 백제가 장악한 황해연안의 해상무역권을 유지하고, 또한 팽창하는 고구려 세력에 대처하려 하였다. 그것은 그전부터 형성된 백제와 남조의 송나라와의 외교관계를 더욱 강화하는 것으로 전개되었다. 구이신왕은 423년과 425년에 송나라에 사신을 파견했고, 송나라로부터 진동대장군의 칭호를 받았다. 425년 이후는 매년 사신의 파견이 있었는데, 이는 송나라와의 관계가 보다 긴밀해졌음을 뜻한다. 이같은 백제와 송나라와의 결속은 북조와 고구려가 연합한 세력권과 치열하게 각축하고 있었던 결과이다.

20. 비유왕

■ 백제 제 20 대 왕

■ 재위 - 427 ∼ 455

?∼455(비유왕 29). 백제 제20대왕으로서, 구이신왕의 맏아들이며 제21대 개로왕은 그의 맏아들이다. 풍채가 수려하고 말을 잘하여 사람들의 높임을 받았다 한다. 429년(비유왕 3)에 중국 남조의 송나라에 사신을 파견하였고, 다음해에는 송나라으로부터 선왕이 받았던 사지절도독 백제제군사 진동장군백제왕이라는 작호를 다시 받았다. 이는 송과의 동맹정책이 비유왕대에도 계속되었음을 뜻한다. 또한, 왜와의 동맹관계도 그대로 유지되어 사신이 오가고 있었다. 한편 새로운 변화도 있었는데, 433년에 이르러 신라에 화친 사절을 파견하였다. 당시 신라는 고구려의 보호국 상태에 놓여 있어 백제와 적대하고 있었다. 그 결과 당시 고구려의 지배에서 벗어나고 있었던 신라의 호응을 얻어 고구려에 대항하는 나제동맹이 형성되었다.

21. 개로왕

■ 백제 제 21 대 왕

■ 재위 - 455 ∼ 475

▶ 도림의 계락

백제의 제21대왕으로서 455년부터 475년까지 백제를 다스렸다. 근개루왕이라고도 하며 이름은 경사이다. 비유왕의 맏아들로서 왕위를 계승하였고, 22대왕인 문주왕은 그의 아들이다. 475년에 백제는 그 발상지이자 중심부인 한강유역 일대를 고구려에 빼앗기고 개로왕은 포로가 되어 살해되었다. 475년의 이러한 참담한 패배에 대해 《삼국사기》 개로왕 21년조에서는 고구려 장수왕의 간첩으로 파견된 승려 도림의 계략에 의한 것으로 설명되어 있다. 도림은 개로왕이 바둑을 좋아하는 점을 이용하여 왕의 신임을 얻은 뒤, 개로왕으로 하여금 고구려의 침공에 대비할 생각을 못하게 하는 한편, 화려한 궁궐의 축조 등 대대적인 토목역사를 일으키게 함으로써 국력을 피폐화시켰다고 하였다. 이 기록은 당시의 상황을 생동감 있게 전해주는 면도 있지만, 도림의 계략에만 연결시킨 단순화된 설명은 보충이 필요하다.

▶ 고구려와의 관계

이 기록의 설명과는 달리 개로왕은 475년 이전부터 고구려의 침공에 대비하는 조치를 취했고, 469년에는 고구려의 남부지역을 선제공격하는 한편, 고구려와의 사이에 요충지인 청목령에 방벽을 설치하여 방어태세를 보강하였다. 472년에는 북위에 구원병을 요청하는 국서를 보내, 북위가 백제와 함께 고구려를 협공할 필요성과 그의 성공 가능성을 설득하려 했다. 이는 북위의 세력을 이용하여 고구려의 남침세력을 분산, 약화시키려는 개로왕의 외교적인 시도였으나 실패로 끝났다. 당시 남조의 송과 대치하고 있던 북위로서는 요동까지 아우르며 동북아시아의 대제국으로 발전하고 있는 고구려와 적대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 내정의 실패

개로왕은 전대부터 결성된 제라동맹을 유지하고 강화하는 데도 힘썼던 것으로 보인다.

475년에 개로왕이 왕자(뒤의 문주왕)를 보내 구원을 요청하자, 신라가 군대 1만명을 파견해 준 것은 동맹관계 때문이었다. 개로왕이 이처럼 고구려의 남침위협에 고심했음에도 불구하고 고구려의 침공을 받자 백제는 힘없이 무너졌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백제를 공격한 고구려의 병력은 3만이었는데, 백제는 불과 7일 만에 방어선이 무너지고 도성이 공격을 받아 개로왕은 탈출하다가 잡혀 참수되고 말았다. 고구려의 3만 병력에 백제가 이토록 무참히 짓밟히게 된 중요한 원인의 하나는 내정의 실패였다. 개로왕은 왕권강화를 시도하여 왕족중심의 집권체제를 만들려고 하였다. 개로왕이 458년에 송나라에 관작제수를 요청한 11명을 보면, 그의 두 아들 여도와 여곤을 위시한 8명이 왕족인 여씨 반면, 당시 백제의 큰 세력이었던 해씨나 진씨는 없었다. 또한, 문주왕은 왕자로서 백제의 최고관직인 상좌평을 지냈다. 이러한 사실들은 개로왕이 구래의 귀족들을 배제시키면서 왕족중심의 집권체제를 추구했음을 보여주는데, 그것은 왕권강화를 위한 시도이기도 했다. 개로왕이 왕궁을 거대하게 짓는 등의 큰 토목공사를 일으킨 것도 왕의 권위를 높이려는 시도였다. 그러나 귀족세력들이 그대로 존속하는 속에서 그들을 배제시킨 왕족중심의 집권체제는 백제 내부의 정치적 결속을 와해시키고, 백제왕실의 영도력 자체도 약화시켰다. 개로왕은 백제사람으로서 고구려에 망명하여 고구려군의 선봉장이 된 재증걸루와 고이만년에게 잡혀 살해되었다.

▶ 실정

개로왕이 죽고 문주왕이 즉위하자 귀족인 해구의 반란이 있었다. 이는 개로왕의 왕족중심 정권운영이 백제 지배층 내에 왕실에 대한 적대세력을 만들었고, 그로 인한 지배층의 내분이 심화되었음을 보여준다. 또한, 무리한 왕궁건축 등의 강행은 하층민을 위시하여 널리 국민들의 왕실에 대한 원망을 가져왔을 것이다. 《삼국사기》 도미전에 나타나는 개루왕은 고구려 영토와의 위치로 보아 근개루왕, 즉 개로왕으로 보이는데, 이 전설적인 내용에서 왕은 잔인한 방법으로 하층민의 아내를 빼앗으려 한 폭군으로 묘사되고 있기도 하다. 도성이 함락되기 직전에 개로왕이 자신의 과오를 후회하며, "백성은 쇠잔하고 군대는 약하니, 비록 위급한 일이 있어도 누가 나를 위해 기꺼이 싸우려 하겠는가."하고 탄식했다 함도, 개로왕이 널리 국민들의 신망을 잃고 있었음을 반영하는 것이다. 묻힌 곳은 알려지지 않는다.

22. 문주왕

■ 백제 제 22 대 왕

■ 재위 - 475 ∼ 477

?∼477. 백제 제22대왕으로 재위기간은 475년부터 477년까지이다. 제21대 개로왕의 아들이고, 제23대 삼근왕의 아버지이다. 한강유역 일대를 빼앗긴 직후에 즉위하여 웅진으로 천도한 것이 바로 문주왕이다. 왕자로 있을 때는 부왕을 보좌하여, 최고관직인 상좌평을 역임하였다. 475년(개로왕 21) 9월 고구려에게 서울 한성이 포위되는 위기를 맞아, 동맹국인 신라에 구원을 청하러 파견되었다. 그러나 구원병 1만인을 얻어 돌아왔을 때는 이미 도성이 함락되고 개로왕은 살해된 뒤였다. 문주왕은 이러한 상황에서 즉위하였다. 그해 10월 피난지인 웅진을 새 도성으로 정하고, 참담한 패전 뒤의 수습에 임하였다. 건국 이래의 중심지를 상실한 백제사회는 큰 혼란에 휩싸여있었다. 한강유역에서 온 난민들을 정착시켜야 하였고, 본거지를 잃은 왕족 부여씨나 해씨, 진씨 등 부여족 계통 구귀족들의 지배권력은 남부에 토착하고 있던 사택씨, 연씨 등 마한계세력의 도전을 받게 되었다. 또한 개로왕 때의 왕권강화 및 왕족 위주의 집권체제에 억눌렸던 구귀족들의 반발로, 부여족계통 구귀족들 내부에 갈등이 있었다. 참담한 패전으로 왕실의 권위가 떨어졌으며, 난립된 귀족파벌들을 조정해야하는 상황에서 성품이 우유부단하였다고 하는 그는 정치적 판단을 내리기가 어려웠을 것이다. 귀족들의 통제에 실패한 문주왕은 재위 3년만에 당시 정권을 장악한 병관좌평 해구의 자객에 의하여 피살되었다.

23. 삼근왕

■ 백제 제 23 대 왕

■ 재위 - 477 ∼ 479

?∼479(삼근왕 1). 백제 제23대왕으로 477년부터 479년까지 백제를 다스렸다. 삼걸왕 또는 임걸왕이라고도 기록되어 있다. 문주왕의 맏아들로서 477년 9월 문주왕이 피살된 상태에서 13세의 어린 나이로 즉위하였다. 당시 백제는 고구려에게 쫓겨 웅진으로 천도한 475년(문주왕 1)이래로 왕실의 권위가 떨어지고, 귀족들이 발호하여 통제하기 어려웠다. 또한, 마한계 세력들이 새로운 집권층으로 등장하며, 구래의 부여계 귀족들이 주도하던 권력체계를 무너뜨림에 따라 정국은 더욱 어지러웠다. 이러한 와중에서 문주왕은 권력을 장악한 병관좌평 해구에 의하여 살해되고, 삼근왕이 즉위하였다. 해구의 권력은 이미 문주왕으로서도 제어하지 못하였으니, 어린 나이로 즉위한 삼근왕도 모든 정사를 그에게 일임할 수밖에 없었다. 해구는 그뒤 삼근왕 2년 신흥세력인 은솔 연신과 더불어 대두성에서 반란을 일으켰다가 토벌되었다. 당시 해구의 반란을 토벌한 것은 한성시대 이래의 또 다른 귀족세력 출신인 진씨세력이었는데, 해구의 반란이 평정된 다음해 삼근왕이 죽은 것을 진씨세력의 정치적 변란의 결과로 보는 견해도 있다.

24. 동성왕

■ 백제 제 24 대 왕

■ 재위 - 479 ∼ 501

▶ 왕권강화를 위한 노력

?∼501(무령왕 1). 백제 제23대왕으로서 재위기간은 479년부터 501년까지이다. 이름은 모대 또는 마제, 여대라고도 한다. 21대 문주왕의 동생인 곤지의 아들로서 담력이 뛰어나고 활을 쏘는 솜씨가 빼어났다. 삼근왕 때에 일어난 병관좌평 해구의 반란을 평정한 뒤 실권을 장악한 진씨 세력에 의하여 옹립된 것으로 보인다. 삼근왕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동성왕은 웅진 천도 초기의 정치적 불안을 종식시키고 실추된 왕권을 강화하기 위하여 여러가지 조처를 취하였다. 첫째로, 금강유역권을 지배기반으로한 신진세력들을 중앙귀족으로 등용하여 한성에서 이동하여 온 귀족과의 세력균형을 꾀하여 정치적 안정을 도모하였다. 이 시기에 등장한 신진세력으로는 사씨, 연씨, 백씨 등을 들 수 있다. 이러한 신진세력들은 점차 세력기반을 확대하여 동성왕 후기에는 해씨, 진씨 등 한강유역에서 내려온 옛 귀족을 대신하여 정치적 실권을 장악하게 됨으로써 지배세력의 구성상에 변화를 초래하였다. 둘째로, 동성왕은 고구려의 군사적 압력에 보다 효율적으로 대처하기 위하여 신라와 혼인동맹을 맺어 신라의 이찬 비지의 딸을 왕비로 맞이하였다. 그리하여 동성왕은 신라가 살수원에서 고구려와 싸울 때 원병을 파견하였고, 또 고구려가 백제의 치양성을 공격하였을 때는 신라에 원병을 요청하는 등 공동전선을 형성하여 고구려에 대항하였다. 셋째로, 동성왕은 웅진천도 이후 고구려 수군에 의하여 서해의 해상 교통로가 차단당하여 국제적 고립에 빠진 상황을 타개하기 위하여 남제에 사신을 파견하여 대 중국 외교관계를 재개하였다. 넷째로, 동성왕은 궁실을 중수하고 나성을 축조하여 수도의 면모를 갖추었으며, 또 우두성, 사현성, 이산성 등을 축조하여 수도의 방어망을 정비하였다. 그리고 사정성, 가림성 등을 축조하여 중앙에서 관리를 파견함으로써 지방에 대한 중앙의 통제력을 강화하였다.

▶ 해외경략

이밖에 동성왕은 탐라가 공납을 바치지 않자 이를 응징하기 위하여 무진주까지 친정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궁궐 동쪽에 임류각을 세우고 진귀한 짐승을 기르는 것에 대한 신하의 간언을 물리쳐버리는 전제군주적인 풍모를 보이기도 하였다. 한편, 《남제서》백제전에 의하면 동성왕은 사법명, 찬수류 등의 장군을 중국 요서지역에 파견하여 북위군을 격파한 것으로 되어 있다. 이 기사는 백제의 요서지역 진출의 근거자료로 활용되고 있으며, 또 여기에 보이는 왕, 후, 태수, 장군 등의 관명은 백제의 해외경영문제와 관련하여 주목되는 자료이다.

▶ 좌절된 개혁

이처럼 동성왕은 신진세력을 등용하여 신구귀족 사이에 세력균형을 도모하고, 또 일련의 왕권강화책을 추진하여 천도 초기의 정치적 불안정을 극복하기는 하였다. 그러나 신진세력의 힘이 점차 증대하여 왕권에 압력요소로 작용하게 되자 동성왕은 신진세력에 대한 견제조처를 취하게 되었고, 그러한 조처 중의 하나가 공주지역을 기반으로 한 위사좌평 백가를 가림성 성주로 강제로 내보낸 것을 들 수 있다. 동성왕의 이같은 견제는 백가를 위시한 신진세력의 불만을 초래하여 마침내 백가세력은 동성왕이 사비서원에서 사냥하는 틈을 타서 왕을 암살하였다. 동성왕의 피살에 대하여 《일본서기》에는 동성왕이 포학무도하므로 국인이 제거하였다고 되어 있는데, 이때의 국인은 백가를 비롯한 반왕파세력을 지칭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백가세력에 의한 동성왕의 암살은 전제적 왕권강화에 대한 귀족들의 반발이 만만하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그렇지만 동성왕대에 추구된 일련의 정책은 한성함락 이후 축소된 백제왕실의 지배기반을 확대시켜주었고 나아가 무령왕, 성왕대의 정치적 안정과 문화발전의 토대를 놓아주게 되었다고 할 수 있다.

25. 무녕왕

■ 백제 제 25 대 왕

■ 재위 - 501 ∼ 523

462∼523. 백제 제25대왕으로, 이름은 사마 또는 융이라 했다. 동성왕의 둘째아들, 혹은 개로왕의 동생인 혼지·곤지의 아들로서, 동성왕의 배다른 형이라 한다. 이처럼 그의 계보에는 이설이 있으나 공주 송산리 왕릉에서 발견된 지석에 의하면 그는 462년에 출생하였다. 8척의 키에 아름다운 용모를 가졌으며, 성품은 인자하고 관대하였다고한다. 501년 12월 위사좌평 백가가 보낸 자객의 손에 동성왕이 쓰러지자 뒤를 이어 즉위하였으며, 이듬해 정월 가림성에 웅거하여 저항을 꾀하고 있던 백가를 토벌하였다. 그의 재위연간은 백제가 공주에 수도를 정하고 고구려와 말갈의 침략에 대비한 시기로, 그는 이를 효과적으로 수행하면서 국력회복에 힘썼다. 즉, 501년 달솔 우영을 보내어 고구려 수곡성을 습격하였고, 503년 마수책을 태우며 고목성에 쳐들어온 말갈을 격퇴하였다. 그뒤 506년 말갈이 다시 고목성에 쳐들어오자, 이듬해 고목성의 남쪽에 두개의 책을 세우고 장령성을 축조하여 이에 대비하였다. 고구려·말갈과의 싸움은 그뒤 계속되어 507년 고구려 장군 고로가 말갈과 합세하여 한성을 치고자 횡악 방면으로 쳐들어오자 이를 격퇴하였다. 512년 고구려가 가불성과 원산성을 함락시켜 약탈을 자행하자, 친히 군사 3,000명을 거느리고 위천의 북쪽으로 진출하여 고구려 군사를 크게 무찔렀다. 523년 좌평 인우와 달솔 사오 등에 명하여 한북주의 15세 이상 장정을 동원, 쌍현성을 쌓게 하였는데, 이때 이를 독려하기 위하여 친히 한성에 행차하기도 하였다. 이처럼 고구려·말갈의 침입에 착실히 대처하는 한편, 중국 남조의 양과도 외교관계를 강화하여 512년과 521년 두 차례에 걸쳐 사신을 보냈다. 그리하여 521년 양으로부터 사지절도독백제제군사영동대장군의 작호를 받았다. 한편, 512년 상차리, 하차리, 사타, 모루 등 네 현을 합병하였다고 하는데, 이는 섬진강유역의 어느 곳으로 짐작되고 있다. 513년과 516년 오경박사 단양이와 고안무를 각기 왜국에 보내어 문화계발을 돕게 하였다. 또한, 그는 민생의 안정에도 노력하여 506년 기근으로 백성들이 굶주리게 되자 창고를 풀어 이를 구제하였고, 510년 영을 내려 제방을 수축하는 한편 국내의 유랑인들을 구제하여 고향에 돌아가 농사를 짓게 하였다. 그리하여 민심이 크게 그를 따랐다. 523년 5월 7일 62세를 일기로 죽었으며, 2년 뒤인 525년(성왕 3)8월 12일 공주 송산리에 안장되었다. 시호는 무녕이다.

26. 성왕

■ 백제 제 26 대 왕

■ 재위 - 523 ∼ 554

▶ 가계와 인품

무녕왕의 아들이며, 이름은 명농이다. 《양서》 백제전에는 이름을 명이라 하였고, 《일본서기》에는 명왕 또는 성명왕으로 표기되어 있다. 《삼국사기》에는 "지식이 영매하고 결단력이 있어 나라 사람이 성왕으로 칭하였다."라 하였고 《일본서기》에는 "천도지리에 통달하여 그 이름이 사방에 퍼졌다."라고 찬양하고 있어서 그의 인물 됨됨이가 비범하였음을 알 수 있다.

▶ 사비천도

동성왕·무녕왕이 웅진 초기의 정치적 불안정을 수습하면서 추진해온 왕권강화정책을 계승하여 538년(성왕 16)에 사비로의 천도를 단행하였다. 성왕의 사비천도는 고구려의 남침이라고 하는 외부세력의 강요에 의하여 행해졌던 웅진천도와는 달리 성왕의 의도적인 계획하에 단행된 것이다. 따라서 이 사비천도는 왕권과 국력 강화정책의 마지막 마무리 작업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 사비천도에는 사비지역의 토착 신진세력이었던 사씨의 정치적 지지가 강하게 작용하였다.

▶ 해외교류와 불교진흥

사비천도 후 국호를 일시 '남부여'라 개칭하여 부여족으로서의 전통을 강조하였다. 그리고 중국의 양조와 빈번한 교류를 가지면서 모시박사, 공장, 화사 등을 초빙하고 열반등경의를 수입하여 백제문화의 질적 수준을 향상시키는 데 크게 힘썼다. 또한 성왕은 인도로부터 범어로 된 5부율을 가지고 온 겸익을 우대하여 고승들을 모아 5부율을 번역시키고 아울러 담욱, 혜인 등이 지은 율소 30권에 친히 비담신율서를 써서 백제신율을 성립시켰다. 성왕의 이러한 계율의 장려는 불교 교단의 정비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달솔 노리사치계 등을 일본에 파송하여 석가불금동상 1구, 번개약간, 경론 약간권을 보내어 줌으로써 일본에 불교를 전파하게 되었다. 이밖에도 성왕은 의박사·역박사 등의 전문가와 기술자를 교대로 파견함으로써 일본에 대한 선진문물의 전수자로서의 구실을 하였다.

▶ 관제정비

이와 더불어 사비천도를 전후하여 웅진시대 이래 행해졌던 내외관제를 정비하여 지배체제의 정비와 통치질서를 확립하였다. 중앙관제로는 1품 좌평에서 16품 극우에 이르는 16관등제와 전내부 등 내관 12부와 사군부 등 외관 10부로 된 22부제가 정비되었다. 또 왕도의 통치조직으로서는 수도를 상부, 전부, 중부, 하부, 후부의 5부로 구획하고 5부 밑에 5항을 둔 5부5항제를 정비하였다. 그리고 지방통치조직으로는 종래의 담로제를 개편하여 전국을 동방, 서방, 남방, 북방, 중방의 5방으로 나누고 그 밑에 7∼10개의 군을 두는 5방, 군, 성(현)제를 정비하였다. 이와같이 중앙관제와 지방의 통치조직을 정비함으로써 성왕은 정치운영에 있어서 귀족회의체의 정치적 발언권을 약화시켜 왕권중심의 정치운영체제를 확립할 수 있었다.

▶ 외교와 국방

그리고 성왕은 국제관계에도 힘을 기울여 전대부터 유지되어온 신라와의 동맹관계를 그대로 지속함으로써 고구려의 남진압력에 대항하여 나갔다. 그리고 양 및 왜와의 외교관계를 유지하면서 무역과 이에 따르는 문화교류를 적극적으로 추진하면서 백제의 국제적 지위를 높였다. 한편, 성왕은 숙원의 과제라고 할 수 있는 고구려에게 빼앗긴 한강유역 탈환 작업에 나섰다. 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그는 551년에 백제군을 주축으로 하여 신라군과 가야군으로 이루어진 연합군을 일으켰다. 이 연합군은 북진하여 백제군이 먼저 고구려의 남평양을 공격하여 격파함으로써 기선을 제압하여 고구려군을 패주시켰다. 그 결과 백제는 한강 하류의 6군을 회복하였고 신라는 한강상류의 10군을 차지하게 되었다. 그러나 신라의 진흥왕은 나제동맹관계를 무시한 채 한강 하류유역을 탈취하고자 당시 남북으로부터 군사적 위협에 처하여 있던 고구려와 밀약을 맺고 553년에 군사를 돌이켜 백제를 공격하여 옴으로 백제는 한강 하류유역을 신라에 빼앗기게 되었다. 신라의 공격으로 백제의 실지회복이 수포로 돌아가게 되매 성왕은 554년에 비전파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신라에 보복을 하기 위한 군사를 일으켰다. 이 신라보복군에는 가야의 원군도 합세하였다. 백제의 이와같은 군사동원으로 양국간의 대결은 피할 수 없게 되었다. 이때 양국의 싸움은 관산성에서 그 절정을 이루었다. 이 싸움에서 초기에 우세를 보였던 백제는 성왕이 구천지역에서 신라복병의 기습공격을 받아 전사함으로써 대패하고 말았다. 이 전쟁에서 백제는 왕을 비롯하여 4인의 좌평이 전사하고 3만인에 달하는 사졸들이 전사하는 결정적인 타격을 입고 말았다. 이러한 패전의 결과로 국내 정치정세도 심대한 영향을 받아 동성왕 이후 성왕대까지 확립되었던 왕권중심의 정치체제가 귀족중심의 정치운영체제로 전환하게 되었다. 이와 더불어 1세기 이상 신라와의 사이에 맺어졌던 나제동맹관계는 이 싸움 이후부터 완전히 결렬되었다. 이리하여 양국은 최후까지 적대적으로 대결하는 관계로 빠져버리게 되었으며 이는 한반도에 있어서 삼국의 역학관계의 성격을 결정짓게 되었다.

27. 위덕왕

■ 백제 제 27 대 왕

■ 재위 - 554 ∼ 598

위덕왕1525(성왕 3)∼598(위덕왕 45). 백제 제27대왕으로 554년붜터 598년까지 백체를 통치했다. 성왕의 맏아들로 이름은 창이라 한다. 태자 때 성왕을 도와 신라에 대한 정토에 앞장섰다. 당시 성왕은 신라와 동맹하여 백제군을 중심으로 신라군과 가야군으로 구성된 북진군을 일으켜 고구려공격에 나섰다. 그 결과 백제는 475년(문주왕 1)에 고구려에 빼앗겼던 한강하류의 6군(郡)을 회복하는 데 성공하였다. 그러나 동맹국인 신라가 백제를 배반하고 고구려와 밀약을 맺은 뒤 무력으로 한강하류 유역을 차지하게 되자 성왕의 노력은 모두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이에 격분한 성왕은 신라에 대한 보복공격을 꾀하였다. 이때 백제의 조정에서는 신라정토를 반대하는 귀족세력이 있었지만 이들의 반대를 물리치고 정토군을 일으키는 데 적극적인 소임을 한 사람이 바로 태자 창이었다. 신라정토군의 선봉에 나선 창은 마침내 관산성 전투에서 대패하고 말았다. 그 결과 백제는 성왕과 4명의 좌평을 비롯하여 3만명에 가까운 사졸이 전사하였다. 성왕의 전사로 태자 창은 왕위에 올라 위덕왕이 되었다. 그러나 관산성 패전에 대한 귀족들의 책임추궁으로 정치적 곤경에 빠지게 되었고 반면에 귀족들의 정치적 발언권이 증대되었다. 그 결과 백제의 정치체제는 이전의 왕권중심체제에서 점차 귀족중심의 정치운영체제로 바뀌게 되었다. 즉위 후 대외관계에 있어서는 신라와 고구려에 대하여 적대적인 정책을 추구하였다. 그리하여 웅천성을 공격하여 온 고구려군을 물리치고 598년(위덕왕 45)에 수나라가 고구려 공격을 준비하고 있음을 알고 자진하여 군도가 되기를 청하는 등 고구려와 첨예하게 대립하였다. 그리고 신라에 대하여서도 관산성패전을 설욕하기 위하여 빈번히 국경을 침범하였다. 반면에, 중국의 남북조의 여러 왕조와 외교관계를 가짐으로써 국제적 고립을 면함과 동시에 고구려를 견제하려고 하였다. 그 결과 북제로부터 570년에는 사지절 시중 거기대장군 대방군공 백제왕에 책봉되고, 571년에는 사지절 도독 동청주제군사 동청주자사에 책봉되기도 하였다. 그리고 수나라가 중국을 통일하자 경축 사절을 보냈고, 또 수나라로 하여금 고구려를 공격하도록 충동하기도 하였다.

28. 혜왕

■ 백제 제 28 대 왕

■ 재위 - 598 ∼ 599

?∼599(법왕 1). 백제 제28대왕으로 598년부터 599년까지 재위했다. 이름은 계이고 헌왕이라고도 한다. 성명왕, 즉 성왕의 둘째 아들로서 형인 위덕왕이 죽은 뒤 왕위를 계승하였다. 한편 《삼국유사》 왕력에는 혜왕은 위덕왕의 아들이라고 하였으나, 이는 위덕왕의 이름을 명으로 잘못 정리한 데 따른 착오로 보인다. 혜왕의 맏아들은 제29대 법왕이다. 혜왕의 치세는 국세가 극도로 약화되고 사회 내부의 모순이 심화되고 있던 때로 보인다. 전 시대에 귀족들의 활동무대이자 경제적인 원천을 이루었던 황해 연안의 무역기지들은 고구려의 진출로 일차적인 큰 타격을 받았고, 그뒤 진흥왕 당시의 신라가 한강유역을 점령하여 황해로 진출하게 되면서부터는 해상활동은 신라에도 미치지 못하게 되었다. 그리고 드디어는 중국대륙이 수나라에 의하여 통일되자 중국본토에 남아 있던 기지들마저 완전히 상실하고 말았다. 한편 남쪽 일본열도 역시 왜의 국가체제 성립으로 백제의 영향권에서 떨어져 나갔다. 이렇게 밖의 활동무대를 상실한 귀족들은 백제 내부의 한정된 경제적 원천을 차지하려고 심한 내분상태에 빠져들게 되었다. 혜왕의 재위기간이 1년에 불과하고, 다음 왕인 법왕의 재위기간도 1년에 불과하다. 이처럼 왕의 단명한 상태가 거듭되는 것은 당시 백제의 정세와 관련된 것으로 보인다.

29. 법왕

■ 백제 제 29 대 왕

■ 재위 - 599 ∼ 600

?∼600(법왕 2). 백제 제29대왕으로 재위기간은 599년부터 600년까지이다. 이름은 선 또는 효순으로 제28대 혜왕의 맏아들이며, 제30대 무왕의 아버지이다. 한편 《수서》에는 창왕(위덕왕)의 아들이라고 하였으나 이는 잘못이다. 599년에 즉위하여 살생을 금하는 영을 내려 민가에서 기르는 사냥하는 매는 놓아 보내고 어로나 사냥의 도구는 거두어서 불태워버렸다. 그리고 600년(법왕 2)에는 왕흥사라는 대규모 사찰을 지었다. 이러한 조처는 불력을 빌려 왕국의 번영을 기구한 것이었다. 그 당시 백제는 이미 한강유역 전부와 지금의 남양만일대의 대중국 무역기지를 신라에게 빼앗겨 커다란 경제적 타격을 받았고 안으로는 귀족의 내분으로 곤경에 빠져 있었다. 그런데 불교 계율을 민간에까지 강행하는 등 구복적인 신앙에 의존하려는 법왕의 정치가 그러한 문제의 실제적인 해결책이 될 수는 없었다.

30. 무왕

■ 백제 제 30 대 왕

■ 재위 - 600 ∼ 641

?∼641. 백제 제30대왕. 600년부터 641년까지 41년간 백제를 통치했다. 이름은 장 또는 무강, 헌병, 일기사덕이라고도 하였다.

▶ 불안한 즉위초기

제29대 법왕의 아들이며, 제31대 의자왕의 아버지이다. 무왕 직전의 혜왕과 법왕은 모두 재위 2년 만에 죽었다. 그 무렵 백제는 내외의 정세가 악화되고 귀족간의 내분이나 왕실권위의 약화에 직면하고 있었는데, 거듭되는 왕의 단명은 그러한 사태를 더욱 악화시켰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한 문제들은 무왕의 즉위로 어느 정도 완화되었던 것 같다. 41년간에 달하는 무왕의 재위기간동안 왕권은 안정을 되찾았다. 이와 같은 왕권의 안정은 무왕이 재위기간 동안 집요하게 추진해온 신라 침공과 같은 정복전쟁의 승리에 힘입은 것이다.

▶ 실리외교의 추진

무왕의 신라 서쪽 변방에 대한 빈번한 침공은 백제군의 낙동강 방면으로의 진출을 가져와, 신라에 대한 군사적 압박을 한층 가중시켰다. 결과적으로 이는 신라와 당나라의 군사적인 유착을 강화시켜주는 계기를 마련해주었으나, 국내의 정치적 안정과 정복전쟁의 승리에 힘입어 무왕대의 백제는 국제문제에도 보다 적극적인 자세를 지킬 수 있었다. 동아시아의 양대세력인 고구려와 수나라가 각축전을 벌일 때 무왕은 어느 한 쪽에 가담하기보다는 양쪽의 대결을 이용하여 어부지리를 취하려고도 하였다. 뿐만 아니라 무왕은 강화된 왕권의 표징이자, 왕권의 존엄을 과시하려는 목적에서 대규모 역사를 단행하였다.

▶ 왕권의 강화

630년 사비궁을 중수하였으며, 634년 왕궁의 남쪽에 인공호수와 그 안에 인공섬이 조성되었는데, 그 모습은 신선이 산다는 방장선산을 방불하게 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같은해 그 무렵 백제의 중심적인 사원으로서 웅장하고 화려하였다는 왕흥사도 완성을 보았다. 왕흥사는 600년 법왕이 착공한 뒤에 죽자, 아들인 무왕이 30여년 만에 완성시킨 것이다. 왕흥사는 그 이름에서도 암시되지만, 왕이 건립을 주도하였고 몸소 불공을 드리는 곳이어서, 왕실의 원찰 또는 왕과 특별히 밀착된 사원으로 보인다. 이와 같은 역사는 왕권의 안정을 반영하는 것이기에 귀족내부의 분쟁요인 등이 근본적으로 해결된 것은 아니지만, 그러한 갈등이 표면화되는 것은 어느 정도 억제되었음을 뜻한다. 대왕포라는 지명과 함께, 무왕과 그 신하들이 그곳에서 흥겹게 어우러져 즐겼다는 고사가 전해지는데, 이것은 표면적으로는 태평한 백제지배층의 상황을 보여준다. 강화된 왕권에 힘입어 무왕은 재위 후반기에는 익산지역을 중시하여 이곳에 별도를 경영하고, 나아가 장차 천도할 계획까지 세우고 있었다. 그리하여 궁성이 될 왕궁평성을 이곳에 축조하는 동시에, 흔히 궁성 안에 있어서 내불당의 성격을 띠고 있는 제석사를 창건하기도하였다. 또한, 막대한 경비와 시간을 들여 동방 최대규모의 미륵사를 같은 익산에 창건하기도 하였다. 무왕은 익산천도를 통하여 귀족세력의 재편성을 기도한 것이다.

▶ 익산천도 시도와 실패

비록, 익산천도는 이루지 못하였지만, 옥천회전 패배 이후 동요된 백제왕권은 무왕 때에 와서 급속히 회복되었다. 그리하여 아들인 의자왕이 즉위 초기 정치적 개혁을 통하여 전제왕권을 구축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해 주었다. 이처럼 무왕 때의 백제는 정복전쟁의 승리와 더불어 사비궁의 중수나 왕흥사와 미륵사의 창건과 같은 대규모역사가 시행될 정도로 전제왕권이 강화되고, 대외적으로 발전이 이루어졌다. 사비시대 정치사에 있어 한 획을 긋는 위치에 있는 무왕은 《삼국유사》에 인용된 서동설화 속의 무강왕과 흔히들 관련짓고 있다. 그런데 서동설화는 여러 시대의 전승들이 복합, 형성된 것일 가능성이 커서, 단순한 일원적 해석은 위험하다. 예컨대, 동성왕과 관련된 혼인설화와 무왕대의 미륵사창건 연기설화 외 무령왕이 즉위 전 익산지역의 담로장으로 이 지역을 다스린 데서 생겨난 이야기가 주된 줄거리라는 견해도 있기 때문이다. 무왕의 능은 익산시 팔봉동에 있는 쌍릉으로 추정하는 견해가 유력하다. 고려시대 이미 도굴된 바있는 쌍릉은 1916년에 조사되었는데, 그에 따르면 사비시대의 능산리고분의 묘제와 일치되고 있음이 밝혀졌다.

31.의자왕

■ 백제 제 31 대 왕

■ 재위 - 641 ∼ 660

▶ 유학의 장려

생몰년 미상. 백제 제31대 마지막 왕으로 641년부터 660년까지 백제를 다스렸다. 무왕의 맏아들로서 태자 때부터 효로써 부모를 섬기고 형제와 우애가 깊어 '해동증자'로까지 칭송되었고, 또 아들의 이름을 효로 지을 정도로 효도의 덕을 강조하였다. 이러한 유교사상은 당나라의 국학에 자제를 보내어 입학시키는 등 유학에 대한 깊은 관심을 가졌던 부왕인 무왕의 영향이 컸던 것으로 보인다.

▶ 왕권의 강화

즉위한 뒤에는 관산성 패전 이후 귀족중심의 정치운영체제에 일대개혁을 단행하였는데, 즉 642년(의자왕 2)에 제왕자의 아들 교기를 비롯하여 모매여자 4명과 내좌평 기미 등 고명인사 40여명을 섬으로 추방한 것이 그것이다. 그 결과 귀족세력에 대한 왕권의 통제력이 보다 강화되었다. 대좌평 사택지적이 나지성으로 은퇴한 것도 이때의 정변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 외교정책의 전환과 그 결과

대외관계에 있어서는 지금까지 고구려와 중국에 대하여 취해온 양면적인 외교노선을 수정하여 친고구려정책으로 돌아섰다. 이러한 정책변경에는 고구려의 연개소문의 집권과 연개소문의 대중국 강경노선정책 및 신라와 당나라의 밀착관계가 크게 작용한 것 같다. 고구려와 연계성을 확립한 뒤 의자왕은 신라에 대하여 보다 적극적으로 압력을 가하였는데, 642년에는 친히 군대를 거느리고 신라를 공격하여 미후성 등 40여 성을 함락시켰으며, 또 장군 윤충으로 하여금 군사 1만명을 거느리고 신라의 대야성을 공격하게 하여 성을 함락시키고 성주 품석과 그 처자를 죽이는 등 신라를 큰 곤경으로 몰아넣었다. 그리고 고구려와 연합하여 신라의 당항성을 공격하여 당나라와의 교통로를 차단하려고도 하였으며, 645년 당나라가 고구려를 공격할 때 신라군을 동원한 틈을 타서 신라의 서쪽방면의 7성을 공취하기도 하였다. 또, 신라에 대한 공격을 중단하라는 당나라의 위협적인 권고에도 불구하고 655년에는 고구려·말갈과 더불어 신라의 북쪽 경계의 30여 성을 공파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의욕적인 활동도 만년에 이르러 사치와 방종, 귀족들의 내부 분열때문에 결실을 맺지 못하였고, 더구나 궁중 안에서는 군대부인이 권세를 장악하고 어진 사람을 마구 죽이는 바람에 국가의 통치질서는 붕괴되고 말았다. 여기에 더하여 빈번한 신라와의 전쟁은, 거둔 승리 못지않게 국력을 피폐시키고 백성을 도탄에 빠지게 하였으며, 한편으로는 고구려와 백제의 연합으로 인해 한반도에서 고립된 신라는 당나라와 연합하지 않을 수 없었다.

▶ 신라에 멸망

660년 나당연합군은 백제공격을 개시하여 소정방이 거느린 당군은 수로로 백강을 건너오고, 김유신이 거느린 신라군은 탄현을 넘어 왕도로 육박해왔다. 계백이 거느린 5천명의 결사대는 황산벌전투에서 신라군에게 패배하고 금강하구에서 당군을 막던 군사도 패배함에 따라 수도 사비성은 나당연합군에게 포위되었다. 사세가 다급하여지자 왕은 사비성을 버리고 태자와 함께 웅진성으로 피하였다가 사비성이 함락되자 마침내 당나라 군대에 항복하고 말았다. 그 결과 백제는 개국한 지 678년 만에 망하고 말았으며, 왕은 태자 효, 왕자 융 및 대좌평 사택천복 등 대신, 장사 88명과 백성 1만2천여명과 더불어 당나라로 압송되어 갔으며 거기서 병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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