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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약의 열 말씀 강론 08
출애굽기 20:13
살인
이 말씀을 계명으로 이해하는 대부분의 해석은 육적인 살인을 하지 말아야 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고 더 나아가 영적인 살인, 심리적 살인, 간접 살인을 해서는 안 된다는 식의 해석이다. 적어도 이 계명은 교도소에 있는 살인자에게 적용되지 대부분은 자신과는 상관없는 계명이라고 생각하다보니 나와 관계있는 계명으로 이해시키기 위해 광범위하게 해석한다. 조금이라도 교회 생활을 한 사람들 대부분은 이렇게 배웠기 때문에 마음의 상처를 주고받는 것도 살인을 하고, 살해를 당한 것으로 생각한다. 또한 그 원인이 대부분 미움에 의한 분노와 복수심에 있다고 보기에 사람을 사랑하고 하나님께서 주신 생명을 소중히 여기는 교훈이 이 계명 속에 담긴 중요한 의미로 받아들인다. 이런 의미로 이해한다면 불교에서 살생하지 말라는 것과 무엇이 다른가?
그런데 성경 많은 곳에 기록되어 있지만 대표적으로 신명기 7:2, 여호수아 10:40, 11:11 등을 보면 하나님께서 가나안 땅의 족속들을 철저히 진멸하라고 하셨다. 다시 말해서 살인을 하라고 말씀하셨다. 굳이 이런 말씀들이 아니라도 시편 137:9에 보면 “네 어린 것들을 바위에 메어치는 자는 복이 있으리로다”라는 말씀을 대한다면 어떤 느낌이 드는가? 구약에 드러난 하나님은 정말 끔찍하고 잔인한 하나님 아닌가? 그러면서도 이스라엘에게는 살인하지 말라고 말씀하시는 모순된 하나님이신가?
열 말씀에서 12절까지는 부연 설명이 있었지만 13절 이하에서는 아주 간략하게 말씀한다. 그러다보니 이렇게 짧고 간략하게 주어진 계명들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예수님의 해석을 참고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래서 마태복음 5:21 이하에서 예수님께서 살인하지 말라고 하시며 형제에게 노하거나 욕하는 자는 하나님의 심판을 받고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는 식으로 해석하고자 한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고 그 말씀을 마음에 담는 것이 구원과 연관된 것이라는 측면에서 생각했을 때 상대방의 마음에 큰 상처를 주었느냐 안 주었느냐 하는 것이 나의 구원과 연관되어 있느냐 하는 문제로 생각해 보아야 한다. 다른 사람들에게 마음의 큰 상처를 주었다고 심판을 받고 결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는 것인가? 즉 구원을 받지 못하는 것인가? 구원은 우리의 윤리적이고 도덕적인 행위에 의한 것이 아니라고 성경은 분명히 밝히고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어떤 때에는 상대를 죽이라고 하시고 또 어떤 곳에서는 살인하지 말라고 말씀하시는데 이는 하나님의 모순이 아니라 하나님은 항상 언약을 중심으로 일하신다는 차원에서 이해하여야 한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전쟁에서 언약의 원수는 언제나 도륙해야 할 대상이고 언약의 백성들 사이에는 살인하지 말라고 율법을 주신 것이다. 그렇다면 이것이 무슨 뜻인가?
십계명은 단순히 계명이 아니라 열 말씀, 즉 완전한 진리와 생명을 담은 언약의 말씀이라는 것이다. 그러기에 하나님께서 계명으로 주시고 우리에게 이렇게 살아야 하고 이렇게 살지 못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는 말씀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진리의 말씀으로 보여주는 복음이라는 것을 우리는 계속 확인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이 구체적인 설명이 없다는 것은 이미 주어진 말씀의 문맥에서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 전제되어 있다.
“살인하지 말라”라는 말씀은 히브리어로 두 단어인데 ‘로 티르차흐’로 미완료형으로 써서 명령형으로 이해한다. 히브리어 표현 그대로 하면 ‘죽이지 않을 것이다’라는 말이다(번역 과정에서 ‘사람’이라는 개념을 삽입하였다). 이 말의 원형은 ‘라차흐’인데 ‘죽이다, 깨다, 나누다, 가르다, 산산조각을 내다’라는 뜻이다. 같은 단어를 잠언 22:13에서 “찢기겠다”라고 번역하였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여기에 왜 이런 의미의 말씀을 하신 것일까? 그것을 이해하기 위해서 성경에서 이 단어가 쓰이고 있는 본문에 대한 의미를 생각해 보아야 한다. 특히 민수기 35장에 집중적으로 쓰이고 있는데 ‘도피성’에 대한 말씀이다. 즉 이스라엘 공동체 내에서 일어난 살인에 대하여 말씀하실 때 이 단어를 사용하고 있다. 그런데 여기서 말씀하는 이스라엘 공동체란 어떤 공동체인가? 순수하게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후손으로서 이스라엘 민족이라는 의미가 아니다.
출애굽기 12장에 보면 “37 이스라엘 자손이 라암셋을 떠나서 숙곳에 이르니 유아 외에 보행하는 장정이 육십만 가량이요 38 수많은 잡족과 양과 소와 심히 많은 가축이 그들과 함께 하였으며”(출 12:37-38)라고 하였다. 순수하게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혈통적 후손만 아니라 수많은 잡족, 즉 이방인들도 포함되어 애굽에서 건짐 받았다. 이들에 대하여 스데반은 “광야 교회”라고 언급하였다.
시내 산에서 말하던 그 천사와 우리 조상들과 함께 광야 교회에 있었고 또 살아 있는 말씀을 받아 우리에게 주던 자가 이 사람이라(행 7:38)
혈통과는 상관없는 상태의 공동체를 신약에서 교회라고 하였다. 교회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로 통일된 상태, 즉 예수 그리스도를 머리로 한 그의 몸이 된 자를 말한다(엡 1:10-11, 4:13-15, 갈 3:26-29). “나는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낸 네 하나님 여호와니라”(출 20:2)라고 열 말씀의 서두에서 말씀한 바와 같이 애굽에서 구원을 얻은 자들에게 주어진 언약의 말씀이다. 이스라엘은 언약의 공동체이고 이 말씀은 바로 이들에게 주어진 말씀이다.
히브리어에서 ‘살인하다, 살해하다’라는 단어는 몇 가지가 있는데 심판의 대상으로 죽여야 할 때는 ‘나카’(신 7:2, 수 10:40, 11:11 등)를 쓰고, 당연히 죽어야 할 죽음이라는 의미를 지닌 것에는 ‘하라그’(창 4:8, 34:26, 왕상 18:13, 삼하 3:30, 시 44:22 등)를 사용한다. 그런데 여기서는 ‘라차흐’를 썼다는 것은 단순히 “살인하지 말라”라는 명령이 아니라는 의미이다. 즉 이스라엘이라는 공동체가 어디에 근거하고 있으며, 어떤 상태에 있어야 하는가를 설명하고 보여주기 위한 말씀이라는 뜻이다. 즉 언약에 근거하여 그 언약의 궁극적 성취를 보여주기 위한 상태에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애굽의 종에서 불러내어 자기 백성, 자기 아들이라고 말씀하셨다는 것은 단순히 하나님과는 달리 별도로 존재하는 상태로 불러내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과 하나로 만드셨다는 의미가 담겨 있다. 그래서 레위기에서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려고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여호와라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레 11:45)라고 말씀하시어 이스라엘 공동체를 하나님과 같이 거룩의 존재로 만드신다는 약속을 하셨다.
이런 점에서 이스라엘 공동체 안에 살인을 한다는 것은 하나님과 하나 된 공동체를 나누고 깨어 산산조각을 내는 것이기에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아야 한다는 뜻이다. 이 여섯째 계명이 단순히 계명이 아니라 언약의 말씀이라면 하나님께서 자신의 열심으로 애굽에서 불러내어 하나님과 하나 된 이스라엘 공동체를 나누고 깨뜨려지도록 하지 않을 것이라는 약속이다. 즉 애굽에서 건짐 받은 너희들은 이제 살인하지 않아도 될 뿐만 아니라 살인하지 않는 자로 만들 것이라는 하나님의 약속으로 주신 말씀이다.
만약 누군가에 의해 살인을 당하였다면 관계된 자는 살인한 자를 당연히 죽이고 싶을 것이다. 이를 그대로 둔다면 살인은 끝없이 반복될 수밖에 없는데 그것을 어떻게 중지시킬 수 있는가? 다시 말해서 살인한 자가 다시 살인을 당하지 않으며, 살인으로 이스라엘의 공동체가 깨어지고 나누이며 산산조각 내는 것이 언제 끝날 것인가? 살인의 악순환을 끊고 회복을 기대할 수 있는 것으로 하나님께서 주신 제도가 도피성이다.
11 너희를 위하여 성읍을 도피성으로 정하여 부지중에 살인한 자가 그리로 피하게 하라 12 이는 너희가 복수할 자에게서 도피하는 성을 삼아 살인자가 회중 앞에 서서 판결을 받기까지 죽지 않게 하기 위함이니라 … 28 이는 살인자가 대제사장이 죽기까지 그 도피성에 머물러야 할 것임이라 대제사장이 죽은 후에는 그 살인자가 자기 소유의 땅으로 돌아갈 수 있느니라(민 35:11-12, 28)
살인을 한 자가 도피성이라는 피난처에 거하다가 대제사장이 죽은 이후라야 자기 소유의 땅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는 것은 대제사장의 죽음을 간절히 기다리는 상태를 통해 복음을 설명하려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시편 기록자 외에 성경 곳곳에서 피난처 되신 하나님을 나타내고 있다(시 46:1,7,11, 59:16, 62:7, 렘 16:19, 17:17, 욜 3:16 등).
하나님께 가까이함이 내게 복이라 내가 주 여호와를 나의 피난처로 삼아 주의 모든 행적을 전파하리이다(시 73:28)
진리는 하나이다. “독생자”(요 1:14, 3:16, 요일 4:9)라는 ‘모노게네스’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 한 분이시라는 의미이다. 그래서 히브리서 기록자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언약을 온전히 성취하셨기에 영원한 대제사장이시며 피난처라고 선언한다.
18 이는 하나님이 거짓말을 하실 수 없는 이 두 가지 변하지 못할 사실로 말미암아 앞에 있는 소망을 얻으려고 피난처를 찾은 우리에게 큰 안위를 받게 하려 하심이라 19 우리가 이 소망을 가지고 있는 것은 영혼의 닻 같아서 튼튼하고 견고하여 휘장 안에 들어 가나니 20 그리로 앞서 가신 예수께서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라 영원히 대제사장이 되어 우리를 위하여 들어 가셨느니라(히 6:18-20)
결국 살인이란 하나이신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 예수 그리스도와 내가 하나 되게 하신다는 이 언약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하고 율법을 지켜 하나님을 섬기려고 하는 상태를 의미한다. 진리의 말씀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로 나타내신 하나인데 그것을 (산산조각 내어) 율법의 조항으로 만들어 하나님을 섬기려고 하는 것이 살인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44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대로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그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그가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라 45 내가 진리를 말하므로 너희가 나를 믿지 아니하는도다 46 너희 중에 누가 나를 죄로 책잡겠느냐 내가 진리를 말하는데도 어찌하여 나를 믿지 아니하느냐 47 하나님께 속한 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나니 너희가 듣지 아니함은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하였음이로다(요 8:44-47)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신 대상이 이방인들이 아니었다. 말씀을 잘 알고 오랫동안 하나님을 믿고 섬긴다는 유대인들을 향해 하신 말씀이다. 그들을 마귀 새끼라고 하시며 처음부터 살인한 자라고 하셨다. 살인한 자는 진리가 그 속에 없는 자이며 진리에 서지 못한 자이다. 이런 점에서 유대인 바리새인들만 아니라 우리 역시 늘 살인하는 자다. 거기서 벗어날 수 없는 자이다. 예수님께서 산상수훈에서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를 대하여 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혀가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마 5:22)라고 폭로하신 것이 바로 이런 차원이었다.
그러나 하나님의 열심으로 우리를 진리의 말씀이시고 영원한 피난처(도피성)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 불러서 하나님과 하나가 되게 하셨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하나님과 하나가 되었다는 것은 이제 깨뜨릴 수 없는 상태가 되었기 때문에 살인하지 않는 자로 만드신 것이다. 그러므로 “살인하지 말라”라는 말씀은 지켜야 할 계명으로 살생을 해서는 안 된다든지 더 나아가서 상대를 인격적인 살인이라도 해서는 안 된다는 뜻으로 주신 것이 아니라 살인하지 않는 자, 즉 하나님의 대적자가 되지 않고 하나 된 상태로 만드신다는 하나님의 언약의 말씀이다. 그 언약의 말씀이 예수 그리스도로 이 땅에 오셔서 온전히 이루셨기에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와 한몸된 상태를 결코 깨뜨리지 않도록 성령께서 계속 그렇게 이루어나가실 것이다. 성도는 바로 이러한 은혜 안에 있는 자이다(20230621 강론/주성교회 김영대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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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목사님, 지난 번부터 "부지중에 살인한 자" 에서 의문이 생깁니다. 민수기에선 살인한 자는 죽여라. 라고 되어 있고, 부지중에 살인한 자는 복수당할 것을 피할 수 있게, 판결이 나기전에 죽임당할 것을 막기 위해서라고 되어 있었습니다.
그럼, 부지중에 살인한 자는 구원을 받을 은혜를 처음부터 받은 것이고, 목적을 가지고 살인한 자는 은혜를 받지 못한 자라고 생각해도 될까요?
이렇게 적으면서도 그게 뭣이 중한디? 라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만...ㅎㅎㅎㅎ
"부지중에" 라는 말이 자꾸 머리에 남네요.
제가 깊이 생각하지 못한 부분을 질문 주셨네요
덕분에 묵상할 수 있는 시간이 되어 감사드립니다.
"부지 중에"라는 말은 '실수나 고의가 아닌 부주의에 의한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죄는 악의 권세요 힘이기에 살인을 행한 것으로만 말할 수 없습니다.
다시 말해서 살인을 행하든 행하지 않든 인간은 죄인입니다.
그런 면에서 목적을 가진 살인이나 부지중의 상태나 다 동일하게 죄 가운데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살인이라는 것으로 율법을 통해 우리의 죄를 폭로하고 드러내 주시면서
하나님의 심판 가운데 있는 상태를 말씀하시기 위함이고
부지 중의 살인으로 대제사장의 죽음(희생)으로 자유를 얻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구원이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은혜를 보여주시기 위함인 것입니다.
"부지 중에 살인한 자는 구원을 받을 은혜를 처음부터 받은 것이고,
목적을 가지고 살인한 자는 은혜를 받지 못한 자"라고 보는 것은
우리의 행위에 대한 문제로 죄를 규정하는 것이고 또한 인간 구원에 초점을 맞춘 이해라고 생각됩니다.
집사님의 물음에 좀 찾아보다가 일요일 강론 준비로
많은 시간을 할애할 수 없어서 몇 군데만 확인하였는데
성경에 "부지중에"라는 표현이 많이 나오는데
레위기 4장이나 5장 등과 민수기 35장에서의 표현이 다릅니다.
다음에 기회 있으면 좀더 깊이 묵상하고 성경을 찾아보고
말씀드릴 기회가 있으리라 생각됩니다.
@김영대 레4,5장과 민수기35장 표현이 다르다...
읽어봐도 전 알 수가 없네요. ㅎㅎㅎㅎ
표준새번역과 비교해 볼때, "깨닫지 못할 때" 와 "실수로" 정도인 것만 알겠습니다.
계속 읽어보고, 생각해보겠습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