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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및 자료실 스크랩 漢나라 시대 서예의 특징
청운 추천 0 조회 42 09.08.03 15:16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5. 漢나라 시대 서예의 특징

1). 隸書의 변천 및 완성

隸書의 명칭이 가장 먼저 등장하는 책은 班固의『漢書․藝文志』와 許愼의『說文解字․敍』이다.『漢書․藝文志』에 “(秦)始造隸書矣, 起於官獄多事. 苟趨省易, 施之於徒隸也.”(秦나라 시대에 처음으로 隸書를 만들었는데 官獄에 일이 많아지는 것에서 기원하였다. 일이 많아지고 복잡해짐에 따라 徒隸를 두어 문자를 간략화 하게 되었다.)라 하였고『說文解字․敍』에서는 隸書를 秦나라의 八體 가운데 하나라 하였으며 “····初有隸書, 而趣約易, 而古文由此絶矣.”(秦나라가 통일한 후 처음으로 隸書를 만들었다. 隸書로서 간편하고 쉬운 것을 추구할 수 있었으므로 古文이 사라져 버렸다.)라 하여 秦나라에서 처음으로 隸書를 만들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 기록들은 모두 秦나라 시대에 번잡한 官獄의 사무를 처리하기 위해 만들어진 일종의 簡化字라 설명하고 있다. 이밖에도 秦나라 시대의 程邈이 隸書를 만들었다는 기록이 전하고 있다. 隸書의 출현하고 사용된 시대에 관한 연구는 매우 오래 전부터 행하여졌으며 많은 학자가 저술을 남기고 있다. 그러나 예전에는 출토되는 자료가 적었기 때문에 대부분 앞사람의 기록이나 전설에 의존하였으므로 대부분의 학설이 구체적이지 못하였다. 서체의 탄생과 변천에 관한 연구 자료로서 가장 좋은 자료는 실물 자료이고 그 다음이 역사책 등의 기록이다.

隸書라는 이름이 처음으로 등장하는 기록은 漢나라 시대의 서적이며 漢나라 시대에 보편적으로 사용되었다는 것이 일반적인 학설이다.『漢書』나『說文解字』의 기록에 隸書의 명칭이 秦나라 시대에 이미 사용되었다는 기록은 있으나 언제 어떻게 붙여 사용하였는지에 관한 정확한 기록은 전하지 않는다.『漢書․藝文志』의 “施之於徒隸”를 근거로 하여 ‘徒隸’가 隸書라는 이름의 근원이라는 학설과 衛恒의『四體書勢』에 “令隸人佐書”(하급관리로 하여금 書寫 기록을 돕게 하였다.)를 근거로 하여 隸書의 이름이 붙여졌다고 하는 학설이 대체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분명한 것은 隸書의 ‘隸’는 처음에는 그 효용성과 서사 환경에 의해 붙여졌다는 것이다. 隸書의 효용은 篆書의 번거로움에서 벗어나 빠른 기록이 가능하게 하였으며 秦나라의 관청에서 篆書의 보조 역할을 하였다. 秦나라 시대까지 공식적 장소에서 隸書가 사용된 것은 일반 문서의 기록이나 서신의 왕래이었으며 隸書를 많이 사용하는 계층이 하급관리인 까닭으로 ‘徒隸’, ‘隸人’ 등의 뜻이 있는 ‘隸’자가 붙여진 것으로 보인다.

현재까지 출토되고 있는 자료를 근거로 할 때 隸書가 탄생하여 사용된 시대는 戰國시대로 나타난다. 1970년대 이후 戰國시대의 문자 자료가 많이 출토되고 있으며 그 중에서 隸書의 싹이 움트고 있는 金文과 비교적 성숙한 隸書로 쓰여진 簡帛 작품이 대량으로 발견되었다. 戰國시대의 여러 나라 가운데에서도 楚나라와 秦나라의 문자에서 隸書의 싹이 일찍부터 나타나고 있으며 특히 秦나라의 문자는 隸書로의 변천이 매우 빨리 진행되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秦나라는 周나라의 전통을 많이 이어받아 다른 六國에 비해 문화적 보수성을 띠고 있으나 문자의 사용에 있어서는 매우 혁신적인 면모를 보인다. 北京大學의 裘錫圭 교수는 논문『秦漢時代的字體』에서 秦나라는 일상적인 문자의 사용에서 서사의 간편함을 위해 원래의 자형을 바꾸고 개선하는 과정에서 俗體가 출현하게 되었는데 이것이 隸書 탄생의 기초라고 설명하였다. 이와 같은 주장은 漢나라의 班固나 許愼이 설명한 것과 비교할 때 隸書 탄생의 동기는 비슷하나 시대가 앞당겨지고 있는 것이 다른 점이다.

秦孝公(서기전 361) 이후의 銅器 銘文과 陶文 등에는 이미 隸書로의 변화가 상당히 진행되고 있는 문자가 많이 나타나고 있다. 羊자를 隸書의 ‘羊’으로 氵변을 氵’로 쓰고 있는 등 많은 筆劃이 이미 篆書의 형태를 벗어나고 있다. 戰國시대의 말기와 秦나라가 중국을 통일한 이후에 쓰여진 簡帛 자료에는 隸書가 이미 성숙되어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70년대에 발견된『睡虎地秦簡』은 筆法과 結體에서 象形性를 거의 모두 떨쳐 버리고 古體字에서 今體字로의 변화를 완료하고 있다.『睡虎地秦簡』의 몇몇 글자가 篆書의 筆法과 筆勢를 유지하고 있으나 전체적인 筆劃과 자형을 漢나라 시대의 簡帛 隸書와 비교할 큰 차이를 보이지 않는다. 또한 筆劃도 둥글고 부드러운 곡선 위주에서 轉折 부분이 각이 지고 직선으로 변하며 波磔이 성숙되어 있다. 이와 같은 자료들을 근거로 할 때 戰國시대의 중 후기에 발전한 민간 서예에서 결국 隸書가 탄생하였으며 秦나라를 중심으로 발전하고 성숙하게 되었음을 알 수 있다.

隸書는 戰國시대의 秦나라에서 이미 일상에서 사용되는 서체로 자리 잡았으며 통일 이후에는 小篆과 함께 공식 書體의 자리를 차지하였다. 小篆은 국가의 중요한 행사에 사용되어 법령을 기록하거나 황제의 비석을 세우는 등의 용도로 사용되었으며 문서의 기록이나 서신 등의 왕래에서는 隸書를 사용하였다. 秦나라 시대에 일상 생활에 주로 사용되던 隸書가 西漢시대에 들어와서는 일상 생활의 기록 뿐 아니라 국가의 중요한 기록을 남기는 용도로도 사용되기 시작하였다. 현재까지 남겨진 西漢시대의 隸書 자료는 대부분이 簡帛이고 刻石은 많지 않다. 그러나 簡帛에 기록된 내용이 역사, 법률, 경서 등 국가의 중대 사건이나 교육 사업의 내용들로 隸書가 이미 일상의 내용을 기록하는 수준을 넘어서 書體 사용의 주도적 자리에 진입하고 있음을 엿 볼 수 있다. 西漢과 新莽시대를 거치면서 刻石 隸書도 古體字의 형태를 버리고 완전한 今體字로 탈바꿈한다. 秦隸와 西漢의 簡帛 隸書에 남아 있던 몇몇 篆書의 筆劃을 모두 떨쳐 버리고 완벽한 今體字로서의 변혁인 隸變을 완성하게 된다. 東漢의 중기 이후에는 小篆은 碑額, 印章, 瓦當 등 특수한 목적으로만 사용될 뿐 隸書가 공식 서체의 자리를 독점하게 되었다. 桓帝와 靈帝시대에는 刻石 隸書도 완전히 성숙하여 표준 隸書가 완성되었다.

桓帝와 靈帝시대의 표준 隸書는 波磔이 발달되었으며 기본적으로 한 글자에 하나의 波磔을 보유한다. 가로획과 捺畫에 주로 波磔이 사용되며 波磔의 收筆 방향은 行筆의 방향보다 위로 향하고 있다. 또한 왼쪽 아래로 내려가는 筆劃인 撇劃도 收筆에서는 위를 향하여 마무리하였다. 이와 같은 형세 때문에 隸書의 이름이 八分의 새로운 이름으로 부르기도 한다. 표준 隸書의 結體는 대부분 偏方形을 취하고 있으며 대칭의 結字로 이루어져 있다. 행간과 자간을 뚜렷하게 구분하고 자간의 간격을 매우 넓게 띄운 布置와 장방형의 章法 등이 표준 隸書의 특징이다.

東漢의 표준 隸書는 八分으로 불리기도 하며 또 分隸, 分書, 楷書 등으로 불리기도 하였다. 문헌의 기록을 근거로 할 때 八分의 명칭은 東漢시대의 후기와 三國시대 사이에 출현하였다. 八分의 명칭이 최초로 기록된 문헌은 晋나라 시대의 衛恒이 쓴『四體書勢』로 漢나라 후기와 魏나라 초기의 邯鄲淳, 梁鵠 등이 八分을 잘하였다고 기록하였다. 그러나 八分의 개념은 매우 복잡하여 현재까지 몇 가지 학설이 전한다. 漢나라 시대의 蔡文姬는 그의 아버지 蔡邕의 말을 인용하여 小篆에서 20%을 버리고 80%를 취한 것을 八分이라 하였으며 唐나라 시대의 張懷瓘과 李陽氷은 隸書가 八자와 같은 형세를 취하고 있기 때문에 八分이라 불렀다고 하였다. 그밖에 北朝시대의 王愔과 宋나라 시대의 郭忠恕 등도 八分에 대하여 여러 가지 주장을 하고 있으나 李陽氷과 張懷瓘의 주장을 많은 사람들이 받아들이고 있다.

淸나라 시대의 劉熙載는『藝槪․書槪』에서 “未有正書以前, 八分但名爲隸. 旣有正書以後, 隸不得不名八分.”(楷書가 탄생하기 이전에 八分은 隸書만을 일컬었으나 楷書가 사용된 후에는 隸書를 어쩔 수 없이 八分이라 불렀다.)하여 唐나라 시대까지 楷書의 이름이 隸書, 楷書, 眞書, 正書 등 여러 가지 이름으로 불리며 漢隸와 구별되지 않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八分이라는 명칭이 사용되었다고 하였다. 隸書라는 명칭은 書體를 사용하는 사람과 용도에서 특징을 찾아내어 붙여졌으며 그 형태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이름이다. 隸書가 漢나라 후기에 완성되어 성행할 때 또 다른 書體가 만들어지고 사용되었다. 草書는 이미 오래 전부터 사용되었으며 隸書와 구별되고 또 그 서체의 특성으로 고정된 이름이 붙여졌으나 隸書와 楷書가 혼용된 형태의 서체는 그대로 隸書로 불리며 완전한 楷書로 발전하였다. 그러나 새로운 서체인 楷書가 唐나라 시대까지 隸書로 불리기도 하였기 때문에 漢隸를 다른 이름으로 부를 필요를 느끼게 되었다. 漢隸가 楷書와 가장 구별되는 특징이 波磔이며 撇劃과 捺畫의 형세가 八分의 형세와 닮아서 八分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다는 학설이 가장 보편적 학설이다.

예전에는 八分이라는 명칭이 東漢시대의 표준 隸書를 가리키고 있었다. 八자가 표준 漢隸의 撇畫과 波磔의 공통된 특징을 내포하고 있으며 分자는 八자가 취하는 相背 즉 서로 등을 대하고 있는 분별된 筆勢운동을 잘 지적되고 있다. 표준 隸書를 八分이라는 말로 표현하는 것은 隸書의 예술적 특징을 잘 지적한 말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1970년대 이후 秦나라와 西漢의 簡帛 隸書가 다량으로 출토되어 波磔과 八分세가 東漢의 표준 隸書보다 일찍 戰國시대에 이미 만들어졌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八分의 명칭을 漢隸에만 한정적으로 사용할 수 없으며 波磔이 분명한 隸書를 모두 八分으로 불러야 한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현대에는 隸書와 楷書의 개념을 분명하게 구별하여 서체의 이름으로 사용하고 있으며 두 서체가 이름으로 인하여 혼동되는 예는 없다. 그러나 아직도 隸書의 영역 안에서는 古隸, 今隸, 八分 등의 이름이 혼동되어 불리고 있다.

2) 草書의 성숙과 行書와 楷書의 탄생

漢나라 시대 서예의 특징으로 가장 중요한 것은 隸書의 발전과 刻石 隸書의 완성이라는 점에는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러나 隸書가 漢나라 시대에 사용된 유일한 書體는 아니며 또 漢隸가 완성된 후 결코 영원불멸의 고정된 형태로 전해지는 것은 더욱 아니다. 漢나라 시대의 隸書 그 자체의 변화라는 측면에서 분석하여도 簡帛 隸書와 刻石 隸書의 크게 두 갈래의 줄기로 발전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刻石 隸書도 西漢 초기의 篆勢가 많이 함유된 筆劃과 자형에서 東漢 후기에 波磔이 성숙하고 偏方形의 筆劃과 자형으로 끊임없는 변화를 거듭하였다.

書體의 변천이라는 광범위한 관점에서 살펴볼 때 漢나라 시대의 서예는 이후의 어느 시대보다도 많은 변화가 간직되어 있다. 戰國시대의 六國 문자에 잉태하고 있던 草書와 楷書 그리고 行書 등 今體書의 모든 영역이 출현하여 새로운 書體의 완성과 또 다른 변화를 예견하고 있었다. 결론적으로 말해 漢나라 시대에는 篆書, 隸書, 草書, 楷書, 行書의 모든 書體가 출현하였거나 완성되었다고 할 수 있다. 行書와 楷書는 魏晉南北朝시대에 완성되고 唐나라 시대에 楷書의 완전한 법칙이 생겨나지만 문자학적 측면에서의 字體는 漢나라 시대에 거의 형성되었다. 따라서 書體변화에 관한 측면에서의 연구는 漢나라 시대까지 획을 긋거나 좀더 뒤로 미루어 魏晉南北朝시대까지만 적용될 뿐이다. 그 이후의 시대에서는 서예의 품격과 流波 혹은 작가와 작품의 심미적 특징에 관한 문제를 연구의 대상으로 삼을 뿐 書體 변천의 연구는 이루어지지 않는다.

草書의 ‘草’자는 ‘正’자와 상대되는 개념으로 이해할 수 있으며 草書의 넓은 의미는 草篆, 草隸, 藁草, 章草, 今草, 狂草 등으로 사용된다.『宣和書譜․草書敍論』에 “則謂之草, 則非正也.”(草書의 ‘草’자는 ‘正’과 상대되는 것이다.)라 하여 草書의 뜻은 ‘草稿’ ‘藁草’ 등과 같이 완성되지 않았거나 정제되지 않은 뜻과 같은 넓은 의미로 사용되었다고 하였다. 좁은 의미에서는 筆劃과 筆法, 자형 등에서 일정한 형태와 법칙을 갖추고 있는 서체의 하나로 章草, 今草, 狂草에 국한되어 사용하는 개념이다.

草書는 戰國시대에 싹트기 시작하여 漢나라 시대에 이미 성숙한 書體이다. 東漢의 許愼은『說文解字‧敍』에서 “漢興有草書 ”(漢나라가 건국하고 草書가 생겨났다.)라 하였고 趙壹은『非草書』에서 “草書之興, 起自秦末. ”(草書가 생겨난 것은 秦나라 후기이다)라 하여 草書의 탄생이 漢나라 이전으로 기록하였다. 또한 先秦시대와 漢나라 시대의 簡牘 가운데에서 草書의 筆勢가 나타나는 작품이 많이 있으며 漢 武帝시대부터 明帝시대(서기전 140-서기전 74)의 簡牘에서 연대가 확실히 기록된 것으로 草書의 筆勢를 완전히 갖춘 작품이 상당수 발견되었다. 그리고 桓帝시대의『神爵二年簡』(서기전 60)과 元帝시대의『永光元年簡』(서기전 43)등에서 이미 완전히 성숙한 草書가 나타나고 있다. 이와 같은 문헌과 실물을 근거로 할 때 草書가 탄생한 것은 秦나라 이전이며 완성되고 성행한 시기는 漢나라 시대임을 알 수 있다.

草書가 簡帛 隸書보다는 늦게 완성되었으나 草書가 隸書에만 근원을 둔다든지 혹은 楷書나 行書에서 변천한 서체 결코 아니다. 草書는 小篆, 隸書, 楷書, 行書와 함께 戰國시대의 六國 문자에 근원을 두고 있다. 그러나 小篆은 官方에서, 隸書는 민간에서 서체 변천의 주도적 자리를 차지하고 변천하는 것에 밀려나 隸書가 거의 완성되는 것을 기다려 다시 발전하게 된다. 草書가 비록 簡帛 隸書보다는 늦게 완성되지만 刻石 隸書보다는 훨씬 먼저 성숙하는 특징을 보인다. 이와 같은 상황은 정리하면 先秦시대의 六國 문자에서 正體는 小篆으로, 俗體는 草書와 隸書로 변천하였고 小篆이 완성되고 난 후 隸書가 정체의 자리를 차지하였고 草書는 章草와 今草로 나누어졌다고 분석할 수 있다. 戰國시대의 후기와 秦나라 시대에 민간에서 사용하는 隸書가 먼저 완성되고 漢나라 시대에 가서 官方 정체로 자리잡는 것과 같이 草書도 西漢과 東漢 초기에 민간에서 보편적으로 쓰이다가 漢나라 후기와 魏晉시대에 완성된다. 이와 같은 것을 볼 때 서체는 먼저 민간에서 광범위하게 사용된 후 완성되어 官方에서도 사용되는 것을 알 수 있다. 西漢시대의 일반인들이 사용하는 隸書속에 草書의 筆勢를 사용한 것이 많이 나타나는 것은 戰國시대의 보통 사람들이 篆書속에 隸書의 筆劃을 함께 사용한 것과 비슷한 것이다.

草書는 隸書와 비슷하게 형성되었으나 隸書보다 변천 속도가 느리고 또 官方의 正體로 자리잡지 못하고 俗體로서만 이어져 내려와 오늘에 이르고 있다. 漢나라 시대에는 章草가 보편적으로 사용되어 실용성과 사회성을 동시에 갖추고 있으나 今草가 탄생하고 또 狂草가 나타나게 되자 읽고 쓰기가 어렵고 통일성이 적은 까닭으로 점차 개인적 용도로 사용하게 되었다. 그러나 草書의 예술적 위치는 매우 높으며 다른 어느 書體보다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발전하여 왔다. 趙壹은『非草書』에서 漢나라 시대의 사람들이 다른 일을 못할 정도로 草書를 열심히 공부하였으며 서예로서 관직을 얻으려 하고 학문을 게을리 하는 것을 비평하였다. 이것은 당시에 草書가 매우 성행하였음을 증명하는 것이며 또 草書로서 심미적 감정과 정서를 표현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게 한다. 小篆, 隸書, 楷書 등 正體字가 官方 正體로서 공식적 실용성을 위주로 발전해 온 반면 草書와 行書는 개인적 실용성을 위주로 발전하고 또 漢나라 후기와 魏晉시대에 예술로서 인식되어 발전해 왔다. 서예가 예술의 한 영역으로 자리잡기 시작한 시대는 漢나라 후기이며 그 공로는 草書에 있다고 평가할 수 있다.

漢나라 시대 이전에는 章草와 今草가 草書로 통일되어 불렸으며 魏晉시대 이후부터 명칭이 분리되어 사용되었다. 현재까지 전해지고 있는 자료를 근거로 하면 漢나라 시대의 草書는 대부분이 章草이며 今草는 상대적으로 양이 적고 狂草는 후대에 나타나고 있는 서체이다. 唐나라 시대의 張懷瓘은『書斷』에서 “章草卽隸書之捷.”(章草는 隸書를 빨리 쓴 것이다.)라 하였으며 宋나라 시대의 黃伯思는『東觀餘論』에서 “凡草書分波磔者名章草.”(草書를 나누어 波磔이 있는 것을 章草라 한다.)라 하여 章草의 뜻과 그 특징에 대하여 설명하였다.

章草라는 명칭이 붙여진 유래에 관한 학설은 여러 가지가 전해지고 있다. 漢나라 元帝시대의 史游가『急就章』을 쓴 것에서 생겨났다는 설, 杜度가 草書에 뛰어나 章帝가 草書로서 상소문을 올리게 하여 붙여졌다는 설, 章帝가 서예를 좋아하여 붙여졌다는 설, 南朝시대에 王羲之와 王獻之의 行書와 草書가 유행하여 그들이 쓴 今草와 구별하기 위하여 漢나라 시대의 法則이 갖추어진 것을 章草 라 불렀다는 설 등이 있다. 현대의 書學者들은 章草의 ‘章’자를 ‘章楷’, ‘章程書’의 ‘章’자와 같이 이해하여 법칙이 있는 草書를 章草라 부른다는 학설에 설득력을 부여하고 있다.

『急就章』은 漢나라 元帝시대의 史游(서기전 48-서기 33)가 지었다고 전하나 그 墨迹 진본은 남아 있지 않는다. 唐나라 시대의 張懷瓘은『書斷』에서 南朝 宋나라 王愔의 말을 인용해 “漢元帝時史游作急就章.”(漢나라 元帝때 史游가 急就章을 지었다.)이라 하였다. 王愔은 章草의 명칭이 붙여진 것을 急就章과 연관지어 설명하였다. 따라서 후대의 사람들이 章草라는 이름을 急就章에서 생겨난 것이라 주장하게 되었으나 이것은 설득력이 부족하다. 急就章은 史游가 공부하는 사람들로 하여금 한자를 쉽게 익히게 하기 위하여 편찬한『急就篇』의 다른 이름이다. 현재 전하는『急就章』은 三國시대 吳나라의 皇象이 章草로 다시 쓴 것을 말하며 宋나라 시대에까지 그 眞迹이 전하였으나 그 후 잃어버리고 지금은 石刻本인 松江本만이 전해지고 있을 뿐이다.

漢나라 시대에 隸書가 완성되고 草書가 매우 성숙하면서 법칙이 매우 엄격한 漢隸는 草書의 영향을 매우 많이 받게 된다. 국가의 중요한 기록이나 刻碑를 세울 때에는 표준 隸書를 사용하였으나 일반적인 서사 활동에서는 새로운 서체가 사용되었다. 隸書와 楷書, 隸書와 草書의 중간 형태인 이와 같은 서체를 현대의 문자학자와 書學者는 新隸體라 부르기도 한다. 楷書와 行書로의 書體 변화는 隸書를 간략화 하거나 隸書에 草書의 筆法을 더하여 서사할 때 매우 자연스럽게 생겨나는 현상이다. 隸書의 波磔을 버리고 起筆과 收筆을 엄격하게 처리하면 楷書로 변하게 되며 또 草書의 筆法을 첨가하여 흘려 쓰는 정도를 비교적 많게 하면 자연스럽게 行書로 변할 수 있다. 楷書는 小篆이나 표준 漢隸와 같이 官方 正體의 전통을 따라 변천하고 성숙되었으며 行書는 민간 俗體로 발전하며 성숙하였다. 楷書와 行書는 붓의 사용과 매우 밀접한 관계가 있으며 일상적인 서사 생활에서 필연적으로 형성될 수밖에 없는 여러 가지 조건을 갖추고 있다.

東漢 중 후기의 簡牘과 陶甕에는 楷書와 行書의 筆劃과 자형을 갖추고 있는 서체가 상당수 나타나고 있다.『永和二年簡』(서기 137)과『熹平元年甕』(서기 172) 등에서 楷書와 行書로의 변천이 분명하게 진행되고 있는 자형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그리고 魏나라 초기의 楷書가 매우 성숙되어 있는 것을 볼 때 漢나라 후기에 楷書와 行書로의 서체 변화가 급속히 진행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楷書와 行書가 書體 사용의 주도적 위치에는 오르지 못하고 兩晉과 南北朝시대를 기다려 완성을 맞이하게 된다. 따라서 楷書와 行書에 관한 상세한 설명은 魏晉南北朝시대의 서예사 편으로 미루는 것이 좋을 것 같다.

3) 蔡邕과 張芝 등 전문 서예가의 활동

漢나라 시대는 刻石 隸書가 완성되고 草書와 楷書 그리고 行書가 성숙되거나 출현하여 서예가 예술로서 찬란한 꽃을 피울 수 있도록 토대를 마련한 시대라 평가할 수 있다. 여러 書體가 구비되고 그 쓰임새가 많아지는 것과 함께 수많은 작품이 창작되었다. 따라서 많은 서예가가 탄생하였을 것으로 추정되지만 서예 작품에 작가의 이름을 남기는 풍습이 유행하지 않은 까닭으로 서예가의 이름이 기록되어 전하는 작품은 많지 않은 편이다. 서예가의 탄생은 창작 수준을 높이는 동시에 서예 이론을 낳게 하여 기법과 심미적 특징을 분석하는 수준을 높여 書藝學의 새로운 영역을 탄생하게 하였다.

西漢의 서예가로는 西漢 초기에 문자의 정리에 많은 공을 세운 蕭何, 元帝시대에『急就篇』을 지어 문자의 학습에 도움을 준 것으로 평가되는 史游가 전하고 있다. 東漢시대의 서예가는 桓帝와 靈帝시대에 行書를 창조했다고 전하는 劉德升, 草書에 능한 것으로 평가되는 杜度와 張芝, 隸書에 능한 師宜官과 蔡邕, 懸針法과 垂露法을 창조했다고 전하는 曹喜 등이 문헌으로 전해지는 유명한 서예가이다. 이 가운데에서 刻石이나 摹刻本의 작품이 전해지며 기록의 신빙성이 있는 漢나라 시대의 걸출한 서예가로는 蔡邕과 張芝를 꼽을 수 있다. 그리고 서예가이면서 서예 이론인『草書勢』를 저술한 崔瑗과『非草書』를 쓴 趙壹등이 전해지고 있다. 또한 이들 서예가와 서예 이론가 이외에 문자학의 연구에 금자탑이라 할 수 있는『說文解字』를 지은 許愼이 있다.

蔡邕(서기132-192, 혹은 133-192)은 陳留圉(지금의 河南省 杞縣) 사람으로 字는 伯喈이며 東漢 桓帝와 靈帝시대의 刻石 隸書가 가장 성행한 시대에 생애의 대부분을 보냈다. 獻帝시대에 左中郞將이라는 높은 벼슬에 올랐기 때문에 사람들은 蔡中郞이라 부르기도 한다. 그는 서예에 능했을 뿐 아니라 문학과 경학 그리고 음악에도 뛰어난 자질을 갖춘 걸출한 학자요 위대한 예술가였다고 기록되고 있다.『後漢書․蔡邕傳』에 “少博學, 師事太傅胡廣, 好辭章數術天文, 妙操音律.”(어려서부터 넓게 공부하였으며 太傅胡廣을 스승으로 모시고 문장과 數術 그리고 天文을 배워 뛰어났으며 音律에도 조예가 깊었다.)이라 하여 蔡邕의 多才多能한 재질에 대하여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後漢書』에 蔡邕이 누구에게서 서예를 배웠는지에 관한 기록은 보이지 않는다. 다만 전하는 설에 의하면 嵩山에서 帛書를 얻어 筆法을 배웠다고 한다. 晋나라 시대의 衛恒은『四體書勢』에서 蔡邕이 嵩山에서 배운 筆法은『九勢』에 기록된 筆法과 같다고 하며 李斯와 曹喜의 서예를 배웠다고 하였다. 또한 당시의 太學인 鴻都門을 수리할 때 칠공이 벽에 솔질하는 모습을 보고서 飛白書를 창조하였다고 전하기도 한다. 그리고 여러 문헌에『蔡郞碑』,『玄文先生李休碑』,『汝南周勰碑』,『王子喬碑』,『度尙碑』,『郭泰碑』,『陳寔碑』 등의 서예 작품을 남겼다고 기록되어 있으나 지금까지 전하는 것은 매우 적다.

蔡邕의 서예에 대하여 평가한 역대 書學者와 서론은 晋나라 衛恒의『四體書勢』, 南朝 梁武帝의『古今書人優劣評』, 唐나라 張懷瓘의『書斷』과 竇臮의『述書賦』 그리고 李嗣眞의『書後品』, 淸나라 包世臣의『藝舟雙楫』 등 무수히 많다. 包世臣은『藝舟雙楫․歷下筆譚』에서 “中郞變隸而八分, 魏晋以來, 皆傳中『郞之法.”(蔡邕은 古隸를 변화하여 八分을 완성하였으며 魏晋 이후에는 모두 蔡邕의 법을 계승하고 있다.)이라 하여 蔡邕이 隸書를 표준화 시켰으며 隸法의 근본이 되었다고 평가하였다. 蔡邕의 작품으로 전하는 것은『熹平石經』,『眞定宜父碑』,『范巨卿碑』 등이 있으며 서론으로『大篆贊』,『小篆贊』,『九勢』,『隸書勢』,『筆論』 등이 있다.

『後漢書․蔡邕傳』에 의하면 靈帝시대의 熹平四年(서기 175)에 蔡邕등이 황제의 윤허를 얻어 鴻都門 밖에『周易』,『尙書』,『春秋』,『論語』,『魯詩』,『儀禮』,『公羊傳』의 石經을 세웠다고 전한다. 이것을『熹平石經』이라 부르며 모두 46점의 刻經으로 높이가 3m, 넓이가 1m 20cm가 넘었다고 한다. 매 刻碑마다 35, 매 행마다 70-80자의 표준 隸書를 앞뒤로 새겨져 있었다고 전한다.『熹平石經』은 隸書로만 새겨져 있으므로『一字石經』이라 불리기도 한다.『熹平石經』이 있었다는 기록은 많이 전하고 있었으나 刻經은 전하지 않다가 1922년 洛陽의 太學자리에서『熹平石經』의 殘石들이 발견되었다. 秦나라가 六國의 篆書를 小篆으로 통일하여 小篆을 완성한 것과 같이『熹平石經』은 隸書를 표준화하여 완성시킨 것이 커다란 성과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일부 학자들은 이 殘石들이 원래의 熹平石經이 아니라 후대에 摹刻한 것들이라 주장하기도 한다.

『後漢書․蔡邕傳』에 “經籍去聖人久遠, 文字多謬, 俗儒穿鑿, 疑誤後學.”(經書의 서적이 옛 성인으로부터 오래되어 문자가 많이 틀리게 되었다. 일반 儒家들이 아무렇게나 억지로 끼워 맞추어 후학들에게 많은 의혹을 가져온다.)라 하여 蔡邕은 書體와 經書의 표준화를 목적으로『熹平石經』을 세운 것으로 기록하였다.『熹平石經』은 漢나라 시대 儒學의 부흥과 경학의 발전을 배경으로 세워졌다고 평가된다. 당시 鴻都門에서 공부한 학생은 천명에 달하였으며 儒家의 經書를 배우는 것이 학습의 주목적이었고 서예와 詩賦도 겸비하여야만 했다. 따라서 蔡邕은 鴻都門의 학생들로 하여금 경서의 올바른 내용을 배우고 또 서예의 수준을 높이기 위한 목적으로 직접 글씨를 쓰고 새기는 것을 감독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宋나라 시대의 洪適은『隸釋』에서『熹平石經』의 규모와 당시 사정으로 미루어 蔡邕 혼자서 그 많은 경서를 다 쓴 것으로 보기는 어렵다고 추정하기도 하였다.『熹平石經』은 漢隸를 표준 隸書로 완성시키는데 중심 역할을 하였으며 훗날의 石經 서예의 형성에 많은 영향은 미치고 있다고 평가된다.『熹平石經』이후로 나타나는 대표적 石經으로는 曹魏시대의『三體石經』과 唐나라 시대의『開成石經』이 있으며 宋, 明, 淸나라 시대에는 수많은 石經이 있다. 또한 石經에 기록하는 경전도 儒敎의 경전에 국한되지 않고 佛敎 경전과 道敎 경전 등 다양한 石經 문화가 출현하였다.

石經 문화와 서론의 체계를 형성하고 표준 漢隸의 기틀을 세우는 등 蔡邕이 漢나라 시대의 서예사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매우 크다. 그리고 그의 서예가 가족과 師徒 세습으로 이어져 후대에 많은 영향을 끼치고 있다. 蔡邕의 書法은 딸인 蔡琰(字는 文姬)로 이어져 시댁인 河東 衛씨 가문인 衛覬, 衛瓘, 衛恒, 衛夫人 등의 서예가를 낳게 하였다. 이들은 鐘繇와 王羲之로 연결되는 정통 서예를 탄생하게 하는 밑거름이 되었다. 또한 文姬의 여동생은 泰山 羊씨 가문으로 시집가서 아버지 蔡邕의 書法을 전수하였으며 南朝시대 강남 서예의 대가인 羊欣을 탄생하게 하였다. 이상과 같이 蔡邕의 書法이 중국 서예에 끼친 영향은 매우 크지만 현재까지 남아 있는 墨跡 작품이 없는 것이 몹시 아쉬울 따름이다.

張芝의 字는 伯英이며 敦煌(지금의 甘肅省)사람이다. 生卒년대가 정확하지 않으나『後漢書․張芝傳』에 漢나라 獻帝시대의 初平년간(서기 190-193)에 아버지와 함께 陝西省의 華陰으로 이주했다는 기록으로 미루어 靈帝시대에서 獻帝시대에 중점적으로 활동한 인물로 추정된다. 張芝의 일생에 관한 기록도 많지 않으며 그 내용도 草書에 관계되는 기록이 대부분을 차지한다.

劉宋시대의 羊欣은『采古來能書人名』에서 “臨池學書, 池水盡墨.”(연못가에서 서예를 공부했는데 연못의 물이 모두 먹색으로 변했다.)이라 하여 張芝가 서예의 연마에 각고의 노력을 하였음을 말하여 주고 있다. 또한 王羲之도『論書』에서 “久尋諸舊書, 惟鍾張故爲絶論, 其餘爲是小佳, 不足在意.”(옛날의 서예를 깊이 연구해 보니 오직 鍾繇와 張芝가 뛰어나며 그 이외는 좋지 못하여 마음에 두기에 부족하다.)라 하였고 또 “吾眞書勝鍾, 草故減張.”(나의 楷書는 鐘繇보다 뛰어나며 草書는 張芝보다는 못하다)이라 하여 張芝의 草書가 매우 뛰어났음을 지적하였다. 東晋시대 이후의 많은 書論에서도 張芝의 草書가 東漢시대 草書 중에서 최고 수준일 뿐 아니라 역대 草書 가운데서도 가장 높은 수준으로 평가하고 있으며 草聖으로까지 부르고 있다.

張芝는 杜度와 崔瑗의 草書를 배웠으며 후에 독보적인 위치에 올랐다. 南梁의 庾肩吾는『書品』에서 “工夫第一, 天然次之.”(노력이 일등이며 천부적 소질은 두 번째이다.)라 하여 張芝는 서예의 연마에 남다른 노력을 한 서예가임을 설명하고 있다. 또 鐘繇와 王羲之의 서예와 더불어 ‘上之上品’의 위치로 평가하였다. 張芝의 草法은 索靖으로 이어졌으며 당시 衛覬, 蔡邕, 劉德升의 가문과 더불어 4대 書派를 형성하여 東漢 후기와 魏晉南北朝시대의 서예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東漢 후기에 草書가 많은 서예가들의 사랑을 받기까지는 張芝의 영향이 매우 컸으며 草書 과열 현상까지 나타나게 되었다. 趙壹의『非草書』는 이러한 현상을 역설적으로 지적하고 있는 서론이다. 張芝의 草書가 서예계를 진동시키고 草書의 대 유행을 가져온 이유는 역대 書論중에서 張芝의 草書에 관한 특징을 귀납해 보면 그 이유를 짐작할 수 있다.

唐나라 시대의 張懷瓘은『書斷』에서 역대의 서론을 종합하여 張芝의 草書를 “草之書, 字字區別, 張芝變爲今草, 如流水速, 拔茅連茹, 上下牽連, 或借上字之下而爲下字之上, 奇形離合, 數意兼包.”(漢나라 草書는 글자마다 구별이 있었으나 張芝가 변화시켜 今草를 탄생하였다. 張芝의 草書는 마치 흐르는 물결과 소가 띠를 연이어 빼어 먹는 것과 같이 위와 아래 글자가 연결되어 있다. 어떤 글자는 위 글자의 아래 부분이 마치 아래 글자의 위 부분인 것 같이 기이한 형태와 많은 의미가 함께 나타난다.)라 하여 흐름이 뛰어나고 많은 의미가 함축되어 있다고 평가하였다. 漢나라 시대의 중 후기에 광범위하게 사용되어진 草書는 章草 이다. 章草는 그 법칙이 비교적 엄격하여 결구와 布置가 구속되며 글자가 篆書와 隸書처럼 한 자씩 독립되어 있는 것이 특징이다. 張芝의 草書는 運筆이 자유롭고 筆劃의 많고 적음과 자형의 크기에 따라 결구와 布置가 다양하다. 또한 상하 글자의 筆劃이 자유롭게 연결되거나 끊어질 뿐 아니라 筆勢가 연결되고 혈맥이 통하는 것이 특징이다. 이와 같은 자형과 결구의 흐름은 당시의 서예가로 하여금 창작의 즐거움을 맛볼 수 있게 하였다. 또한 감상하는 사람에게 筆勢의 흐름에서 시간성의 심미적 사유를 할 수 있는 즐거움을 주었으며 흐름이 있는 공간에서 소리 없는 음률을 감상할 수 있는 기회를 주었다. 張芝의 草書는 작가와 감상하는 사람 모두에게 書法藝術의 새로운 아름다움을 창작하고 감상할 수 있는 기회를 주었다. 당시의 사람들은 이 새로운 서예의 아름다움을 맛보기 위하여 그렇게도 열심히 草書를 연마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한다.

張芝의 墨跡은 전하지 않으며 宋나라 시대의『淳化閣帖』에『冠軍帖』,『終年帖』,『今欲歸帖』,『二月八日帖』,『秋凉平善帖』이 실려 있다. 이 중에서『秋凉平善帖』만이 章草이고 그 밖의 네 가지는 모두 今草이다.『淳化閣帖』에 실려 있는 今草는 서풍이 매우 활달하고 자유로워 狂草에 가깝다고 평가된다. 그러나 宋나라 시대의『淳化閣帖』이 東漢의 張芝로부터 거의 천 년에 이를 만큼 세월이 떨어져 있으므로 그 진위가 분명하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쉽다.

4) 隸變의 완성 및 書法 예술의 탄생

秦나라의 서예와 문자에 대한 공헌은 규범을 정하고 하나의 서체를 하나의 자형으로 통일한 것이다. 戰國시대의 六國에서 사용하던 여러 형태의 서체를 秦系 문자를 중심으로 통일하고 사용한 書體가 大篆, 小篆, 刻符, 蟲書, 摹印, 署書, 殳書, 隸書 등 여덟 가지 書體이다. 이 여덟 가지 서체를 자세히 살펴보면 隸書 이외의 나머지는 모두 篆書 계열의 서체이고 小篆과 隸書를 제외한 나머지 서체는 문장을 기록하는 용도보다는 印章을 새길 때나 병영의 깃발에 쓰는 등 비교적 특수한 용도로 사용된 서체임을 알 수 있다. 따라서 秦나라에서 통일하여 공식적으로 사용한 서체는 小篆과 隸書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두 서체의 사용 장소와 용도는 조금씩 달랐다. 小篆은 官方의 正體로 법률의 기록이나 詔書 그리고 황제의 刻碑를 세우는 등의 용도로 사용되었고 隸書는 일반적 문서나 저술, 서신 등의 일상 생활에 많이 사용되었다. 그러나 小篆은 쓰고 새기기 어렵고 시간이 걸릴 뿐 아니라 익히기에도 많은 어려운 점이 있어서 통일된 후 오래 유지하지 못하고 官方 정체의 자리를 隸書에게 물려주고 지나간 하나의 서체가 되어 버린다.

先秦시대에 사용되던 篆書 계통의 古體字에서 隸書, 楷書, 行書, 草書 등 今體字로의 서체 변천을 隸變이라 부른다. 隸變이 시작된 시기는 春秋 戰國시대로 거슬러 올라가지만 그것이 완성된 시기는 漢나라 시대이다. 漢나라 시대에는 簡帛 隸書는 물론 刻石 隸書가 완성되고 草書가 성숙하였으며 楷書와 行書가 자형의 기초를 닦은 시대이다. 隸變은 서예사와 한자의 변천사에서 字體와 書體의 혁명이라고 표현할 수 있다. 隸變의 근본적 특징은 한자의 형태가 象形性의 結體에서 추상성의 結體로 부호화 된 것이다. 篆書의 형태는 그것이 상징하는 물상의 외형에 근본을 두지만 隸變 이후의 書體는 점과 선의 순수한 결합으로 물상의 형태에 속박되지 않는다. 순수한 점과 선의 결합은 한자 결구의 제한과 공간 布置의 제약에서 해방되어 새롭고 자유로운 筆劃가 결구를 탄생하게 하였다. 隸書는 筆劃과 결구의 규범이 엄격하지만 古體字의 자형과 結體를 따르지 않고 새로운 筆劃과 자형으로 탄생하였으며 隸變을 주도하였다.

隸變은 다양한 書體의 출현과 결구의 자유를 가져왔으며 서사 활동을 예술의 위치로 끌어올리는 역할을 하였다. 小篆은 비록 다양한 자형으로 이루어져 있으나 起筆, 收筆, 行筆 등 筆劃의 변화가 적으며 규칙이 엄격하여 서예가의 마음이 들어갈 틈새가 매우 부족한 까닭으로 예술로서 발전할 여지가 적었다. 漢隸는 篆書 계통의 書體보다 풍부한 선의 변화를 가지고 있으며 結體와 결구가 좀더 자유로운 특징이 있다. 서예에서 筆劃으로 표현되는 선의 아름다움은 그것들의 조합인 공간 분할과 떨어질 수 없는 관계를 가진다. 小篆은 筆劃이 정적이고 규범적인 결구인 반면 隸書의 筆劃은 간편함과 빠른 筆寫의 요구에 부합하여 동적이며 비교적 자유로운 결구이다. 선의 유동성과 운율의 조화는 시간과 공간 형식의 변화에서 실현되며 이것은 古體字의 小篆에서는 찾기 어려운 미감이나 今體字에서는 잘 나타나는 심미적 범주이다. 篆書 계열의 서체에서 아직 완성되지 못한 필순과 書順은 漢隸에서는 이미 정형화되어 순서에 따른 筆勢가 매우 뚜렷해졌다.

隸書의 가장 큰 특징이 波磔의 筆劃과 偏方形의 결구이다. 波磔은 隸書의 운동성과 운율의 조화, 속도와 힘의 변화를 표현할 수 있는 좋은 수단으로 작가의 사상과 정서를 나타낼 수 있다. 中鋒과 側鋒, 方筆과 圓筆, 藏鋒과 露鋒 등의 다양한 運筆로 빠르고 느린 筆勢, 무겁고 가벼운 筆勢를 표현할 수 있으며 剛柔와 陰陽의 생명력 있는 심미적 범주를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다. 장방형의 小篆 結體는 세로의 體勢와 운동성을 나타내며 감상하는 사람에게 엄숙하고 경건함을 느끼게 하는 반면 隸書는 수평의 筆勢와 넓게 뻗어 나가는 體勢로 평화와 안정감 그리고 개방된 미감을 느끼게 한다.

隸書의 특징이 小篆과 비교 될 때는 훨씬 자유롭고 예술적 요소를 많이 간직하고 있다고 할 수 있으나 正體字가 기본으로 가지는 여러 가지 제약은 피할 수 없었다. 小篆, 隸書, 楷書 등 正體字는 다소의 차이는 있으나 筆劃의 起筆과 收筆이 분명하고 결구가 규칙적으로 이루어지는 등 많은 제한적 요소가 있는 것은 사실이다. 표준 隸書가 官方 正體의 자리에 오르므로 하여 국가의 법률 문서나 刻碑에 중점적으로 사용되었다. 따라서 簡帛 隸書에 비해 자율성과 개방성이 뒤떨어지게 되었으며 통일되고 규범적인 자형으로 고정되었다. 官方에서 漢隸가 공식 서체로 완성되는 것과 때를 같이하여 민간에서는 草書가 성행하고 楷書와 行書의 새로운 서체가 탄생하였다. 章草는 隸書의 筆劃과 결구를 기초로 하여 비교적 규범적이고 단정하여 문서를 기록하거나 저술 활동 등에 사용되었으며 今草는 아직 완전하게 자리 잡지는 않았으나 草稿를 쓰거나 창작 활동에 사용하였다.

漢나라 시대의 후기에 서예가 예술로서의 위치에 오를 수 있도록 하는 데 가장 많은 공헌을 한 서체는 草書라 할 수 있다. 草書도 隸書와 함께 戰國시대에 이미 隸變의 진행 과정에 진입하였으나 隸書에게 주도적 자리를 양보하고 난 후 隸書가 완성할 수 있도록 돕는 역할을 하였다. 草書와 같은 筆法과 간략하게 結體하는 방법은 篆書의 복잡한 筆劃과 결구를 간소화하여 隸書가 완성되는 사상적 기초가 되었다. 隸書가 성숙한 다음 草書는 隸書의 筆法과 결구 속으로 조금씩 파고 들어가 자신만의 독특한 영역을 구축하였을 뿐 아니라 隸書의 심미적 범주를 확대시키는 역할까지도 하였다. 草書는 자신의 고유한 자형과 筆劃이 특징을 갖추고 있으면서도 어떠한 서체와도 잘 결합하는 성질이 있는 매우 특수한 서체이다. 草書가 완성되기 이전에는 篆書에 응용되어 草篆으로, 隸書에 응용되어 草隸의 형태로 끈질긴 생명력을 발휘하며 이어져 왔다. 이와 같은 특성이 있는 草書가 漢나라 후기에 자신만의 독특한 자형을 구비하고 완성되면서 서예가의 사랑을 한 몸에 받으며 예술의 창작 대상으로 확고한 자리를 굳히게 되었다.

隸書와 草書가 완성되고 성행하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가장 뚜렷한 특색은 書寫 경험의 예술적 승화로 자각 상태의 예술로 접근하고 있는 것이다. 漢나라 후기에 桓帝와 靈帝시대에는 隸書의 완성과 草書가 성숙되는 등 서체 내부의 변화뿐 아니라 문자의 사용이 광범위하여 형식상에서도 상당한 변화를 맞이하고 있다. 秦나라 시대부터 이미 刻石서예가 발전하기 시작했으나 그 숫자도 적을 뿐 아니라 현대의 시각에서 볼 때 이미 남겨진 진품은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므로 진정한 의미의 刻石 서예의 성과는 漢隸에서 찾을 수 있다. 또한 서적을 출판하고 경서를 베끼는 용도로 章草가 광범위하게 사용되었으며 草書도 개인적 용도로 사용되면서 문자를 기록하는 행위로서가 아닌 감상하는 예술 목적으로 서예를 창작하기 시작하였다. 특히 漢나라 중기 이후에는 종이를 만드는 기술이 발전하여 비교적 쉽게 구하여 쓸 수 있었으므로 서예가 자각 예술로서 자리를 잡아가는 밑거름이 되었다.

隸書는 공식 서체의 위치를 지키고 있었기 때문에 시대가 바뀌고 세월이 흐르면서 그 자리를 새로운 正體인 楷書에게 내어 주었다. 小篆이 그랬던 것처럼 역사 속으로 숨어 있다가 淸나라 중기에 碑學이 성행하는 때를 기다려 새롭게 창작의 대상으로 등장하였다. 그러나 草書는 개인적 용도를 주목적으로 하였기 때문에 비록 완성되기까지 더 오랜 시간이 걸렸으나 완성되고 난 후 지금까지 완성될 당시와 같은 용도와 목적으로 꾸준히 사랑 받고 있다. 草書가 서예의 위치를 자각 예술의 위치로 끌어올리고 또 서예가에게 예술적 표현 대상으로 가장 사랑 받을 수 있었던 원인은 작가의 예술성을 표현하기 에 가장 알맞은 서체이기 때문이다. 後魏의 江式은『論書表』에서 “其形劃雖無厥誼, 亦是一時之變通也.”(그 자형과 筆劃은 비록 고정된 형태가 없지만 때에 따라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다.)라 하였으며 唐나라 시대의 孫過庭은『書譜』 “草貴流而暢.”(草書는 流暢함을 귀하게 여긴다.)이라 하여 草書가 고정된 형식이 없으며 유창함을 표현할 수 있는 서체라 하였다. 고정된 형태가 없기 때문에 작가의 사상과 심미적 감정을 펼치기에 적합하여 서예가들이 창작의 대상으로 가장 사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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