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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3월 15일 1편
오전 5시. 어제는 그래도 많은 부분이 해결됐다. 일단 기름을 350리터 탱크에 가득 채우고, 300리터를 더 싣고 나니 마음 든든하다. 별 걱정 없이 푹 잔 것 같다. 덴마크 친구들과 저녁을 잘 먹고 10시 이전에 잠자리에 들었더니 개운하다. 새벽엔 상당히 쌀쌀했다. 이불 속에서 발이 시릴 정도였다. 어제 토스가 한 말이 생각난다. 이제 남쪽으로 300마일만 가면 날씨가 아주 따듯하다. 그 아래로 가면 점점 더워진다. 항해 중에 사계절을 다 맞는다. 5년 전 나와 같은 코스를 통과한 김석중 선장님께서 많은 조언을 해 주신다. 좋은 마리나도 추천해 주시는데 들러 갈지 고민 중이다. 마리나 한 번 들어갈 때마다 너무 많은 돈이 들어간다. 무섭게 들어간다. 코스마다 들러 관광도 하고 여유를 가지는게, 진짜 세일링일텐데 제법 금전적 여유가 있어야만 그런 여유를 즐길 것 같다. 전에 말했지만, 두 사람이 일 년간 세계일주하는 데 2천만 원을 말한 외국 유튜버가 기억난다. 도대체 그들은 어떤 세계일주 항해를 한 것일까? 나는 그런 극악한 장거리 항해는 하고 싶지 않다.
이집트 다시 좀 더 언급하자. 1인 25달라 씩 75달라를 내고 박시시 까지 100달라 이상을 써서 입국허가를 받았다. 그러나 에이전트들이 마리나 밖을 벗어나지 못하게 한다. 마리나 초소 경찰도 마찬가지다. 심지어 마리나 내의 식당에 가도 에이전트가 여권을 다 걷어 간다. 이게 무슨 자유국가인가? 북한이 이정도 일까? 문제는 이런 통제 하에 에이전트들이 세일러들을 대상으로 악랄한 착취하는 거다. 식당가도 메뉴를 주지 않고 식당주인이 돈 계산하는 것이 아니라 에이전트들이 계산한다. 한국으로 따지면 여행 가이드가 제멋대로 음식 값을 정하는 거다. 엄청난 뒷돈을 챙긴다. 어제는 대략 식사비의 4배 이상을 받았다. 물건 사는 것도 마리나 밖을 못나가고 에이전트를 통해서 산다. 당연히 중간 돈을 챙긴다. 이 정도라면 이집트는 정상국가라고 할 수 있을까? 이래서 수많은 세일러들이 이집트에 치를 떨고 간다. 그들이 자기나라로 돌아가서 어떤 말을 할까? 나는 글을 써서 한국의 세일러들에게 알린다. 에이전트 미꾸라지 몇 마리들이 이집트 전체의 이미지를 더럽힌다.
라고 적고 있는데, 누가 왔다. 보니까 오늘 파일럿 모하메드다. 8시에 출항한단다. 뭐지? 어제 미국군함이 지나가서 오전 10시쯤 간다고 했는데, 부랴부랴 출항준비를 하는데, 흰 옷을 입은 여자 조사원이 왔다. 이스마일리아 마리나의 발전과 재건축을 위한 의견 청취를 위해 왔단다. 솔직하게 말해줘? 제발 그래 달란다. 이집트 사람들 선량하고 경치는 멋지다. 하지만 다른 나라들과 너무 다르고 힘들다. 우리는 비자가 있는데 다른데 나갈 수가 없고, 모든 것을 에이전트를 통해야 한다. 그리고 그래서 가격이 너무 다르다. 그녀도 공감한다. 이미 다 아는 눈치다. 몇몇 에이전트들이 이집트의 이미지를 나쁘게 만든다. 이곳에 온 많은 세일러들이 공감하고 있다. 그리고 마리나 시설들이 너무 열악하다. 맞다, 그래서 우리가 이렇게 건설하는 거다. 잘 되길 빈다. 돌아보니 어느새 에이전트가 와서 엿듣고 있다. 그러거나 말거나. 에이전트는 다시 미국 배 때문에 10시에 가야 한단다. 뭐야? 이 사람들. 다시 두 시간 남았다.
이때 여자 조사원이 쇼핑백 하나를 건넨다. 진짜 수에즈 마리나에서 주는 선물이다. 감사하다. 나중에 열어보니, 기념 모자, 기념 티셔츠, 기념 컵이 들어 있다. 리나 것 까지 세 개다. 이건 정말 감사하네. 멋지네.
시간에 여유가 생겨 톨스 배에 갔다. 다들 이제 일어나는 중이다. 커피를 끓이기에 나도 한 잔 받았다. 큰 잔에 가득 준다. 톨스에게도 그 조사원 여자가 왔단다. 톨스는 어제 식당 이야기를 다했단다. 너무 엉터리라고. 톨스에게, 우리 아내가 어제 열 받아서 그 식당 후기를 찾아왔는데, 별 점 1이 너무 많고, 다들 우리와 같은 경험을 했더라. 그런데 너 여기 며칠 더 있어야 하는데 괜찮겠니? 괜찮다며 자기도 후기를 쓸 거란다. 나도 후기를 쓸 거냐고 묻기에 물론 이집트를 벗어나면 아주 자세히 쓸 거다! 라고 했다. 톨스는 윈디 기상예보를 보니 앞으로도 5일간 더 있어야 한단다. 톨스 너 고생이 많겠다. 하니 톨스는, 우린 그 이후에 유럽으로 가거 등? 너는 이제부터 홍해와 인도양으로 가잖아? 하며 나를 놀린다. 맞다. 한 방 먹었다. 같이 즐겁게 웃는다.
덴마크 사람들은 아침으로 시리얼에 우유를 부어 먹는다. 보니까 빵과 양배추도 있다. 빵은 버터를 발라 먹고, 양배추는 마요네즈를 뿌려 먹는다. 물은 아마 커피 마시는데만 쓰는 것 같다. 항해 식을 제대로 먹는다. 우리 음식은 맛나지만, 물을 많이 사용한다. 설거지까지 해야 한다. 장거리 항해를 하려면 더 고려해야 한다. 는 전적으로 나의 오해였다. 다시 가보니 닭고기 수프를 끓이고 있다. 부엌칼이 잘 안 들어 스위스 나이프로 양파를 썰며 눈물을 흘린다. 슬퍼? 내가 농담을 건넨다. 허락을 받고 배 사진을 찍어 한국의 벗들에게 보내준다. 이 와중에 톨스는 해적 위험 자료 최신판을 보내준다. 진심으로 벗을 대해주는 친구다.
10시 30분. 에이전트는 소식도 없고 연락도 없다. 오늘 중에 가는 건가? 어두워지면 곤란한데? 톨스는 자기들은 수에즈에서 정오에 출발해서 오후 8시에 이스마일리아에 도착했다고 한다. 우리도 그럴 수 있겠네. 젠장. 그러나 파일럿 모하메드는 11시에 왔다.
11시 출항해서 이스마일리아를 빠져 나오자 마치 탈옥을 한 듯 시원했다. 1,600RPM. 5,6~6.1노트 속도도 괜찮고 바람도 강하지 않다. 이스마일리아에서 수에즈까지 가는 운하는 훨씬 복잡했다. 큰 배들이 줄지어 지나며 장관을 이룬다. 운하 폭도 좀 더 좁았다. 작은 삼각돛을 단 낚시 배들이 종횡무진이다. 긴장된다. 두 시간을 가니 거대한 호수가 나온다. Great Bitter Lake 다. 가운데 큰 선박들이 정박되어 있다. 뭔가 문제가 있어 속도가 나지 않는 배들이다. 고장 난 배들도 있단다. 뒤를 돌아보니 거대한 컨테이너선들이 일렬종대로 오고 있다. 평생 단 한번 보는 구경이다. 파일럿 모하메드가 여기서는 오토파일럿을 쓰면 안 된단다. 이해가 간다. 운하도 구불구불하고 큰 배 낚시 배가 막 지나다니는데 오토파일럿 쓸 상황이 전혀 안 된다. 오늘 7시간 운항은 완전 긴장, 완전 수동이다. 점심은 아내가 만들어 준 잼 바른 식빵이다.
수에즈 운하는 양쪽에 부이라고 부르는 쇠말뚝들이 있다. 그 말뚝을 우측에 두고 3~20미터 떨어져 가는 거다. 호수에 들어갔는데, 갑자기 오른쪽에 거대한 콘크리트 원통들이 있다. 고장 난 배들이 정박하는 곳이란다. 갑자기 쇠말뚝 부이가 안 보인다. 아주 멀리 하나가 보인다. 아하! 저기까지는 그냥 콘크리트 원통들을 보고 가나보다. 콘크리트를 오른쪽에 두고 가는데 갑자기 왼쪽 5미터 지점에서 쇠말뚝 부이가 나타난다. 간당이 서늘해진다. 나는 오른쪽만 보이기 때문에 전혀 왼쪽에 쇠말뚝을 못 보았다. 야, 이러다가 사고 나는구나. 쇠말뚝이 안보이면 먼저 찾아야 하는데, 아, 여기는 콘크리트 말뚝인가 보다 하고 지레짐작 했다. 선무당 사람 잡는다. 다시는 이러지 말자. 안보이면 먼저 찾고, 정말 없으면 그때 상황판단을 하자. 한동안 쇼크로 정신이 멍했다. 큰일 날 뻔 했다.
Great Bitter Lake 뒤로 또 다른 호수가 있다. 배들이 계속 온다. 지나던 낚시 배에 꼬마도 같이 노를 젓는다. 우리를 보더니 고기를 사라고 소리친다. 파일럿 모하메드에게 부탁을 한다. 처음에 내 에이전트가 수에즈에 가면 물, 전기, 와이파이 다 된다고 하나도 걱정 말라고 했다. 그러나 수에즈에서 온 덴마크 친구 톨스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거기는 아예 앵커링 해야 한다더라. 나는 지금 아기도 있고 발도 다쳤다. 도저히 딩기로 이동 못하니 선착장에 무어링 해줘라. 파일럿 모하메드는 알겠다며 어딘가 전화한다. 그러더니 큰 문제는 없을 것 같다고 한다. 다행이다. 파일럿 모하메드는 6녀 1남의 막내이며 유일한 아들이다. 어머니를 모시고 같이 살고 부친은 20년 전에 돌아가셨다고 한다. 일주일에 4일은 파일럿 일을 하고, 2일은 터그선에서 일하고 하루는 쉰단다. 아들만 셋이라고 한다. 책임 막중한 가장이다. 진솔한 남자다.
6노트 이상 나오던 배가 갑자기 4.5노트로 속도가 준다. 보니 역 조류다. 바람까지 18노트 역풍. 이래서는 오늘 8시 도착이다. 나는 2,100rpm 으로 속도를 늘인다. 보통이라면 8노트가 나와야 한다. 5.1노트다. 6시 30분 도착예상이다. 그때 전화가 온다. 수에즈 마리나에서, 오늘은 앵커링하고 내일 아침 10시에 무어링해 준다는 거다. 나는 알겠다고 했는데, 아내가 갑자기 폭발했다. 포트사이드에서 만난 첫 에이전트가 다 거짓말 한 거라고 화를 낸다. 애기 데리고 어떻게 바다 한가운데 있냐고 나한테 따진다. 그런다고 답이 나오냐고! 나도 우울하다. 그저께 에이전트에게 전화하니 다 된다고 걱정 말라고 하고서는, 그 이후로는 전화도 안 받는 놈. 파일럿 모하메드가 네 아내 화났냐고 묻는다. 나는 화가 아니라 너무 실망해서 저렇다고 하니, 또 전화한다. 그러더니 수에즈에 좁은 자리가 있단다. 가보고 자리가 있으면 비집고 들어가자. 그리고 내 첫 에이전트 번호를 달란다. 왜? 물으니 나대신 싸워준단다. 그놈 정말 나쁜 거짓말쟁이라고 화도 낸다. 에이전트는 역시 전화를 안 받는다. 무책임한 사기꾼 맞다. 6시 30분. 어둑해 질 때 수에즈에 도착했다. 마리나 항안으로 들어가 자리를 찾을 때쯤엔 상당히 어둡다. 멀리서 보니 손전등 불빛이 보인다. 거기에 사람들이 많다. 자세히 보니 34피트 쯤 되는 세일요트가 있고 그 배에 같이 묶으란다.
천천히 접근해 어둠속에 배를 접근 시킨다. 바람이 강하다. 작은 요트에서 몇 사람이 나와 내 무어링을 돕고, 마리나 보트 한 대가 나와 앵커링을 돕는다. 선수는 앵커링을 하고 선미는 무어링이다. 배를 건너 선착장으로 바로 나갈 수 있다. 그러다 앞 쪽 무어링을 포기하고 작은 요트 옆의 큰 파워보트에 묶는다. 그저께 포트사이드에서 만났던 러시아배다. 뛰어나와 배를 같이 묶어주는 젊은이들은 프랑스 친구들이다. 너무 고맙다. 배를 잘 묶고 수에즈 에이전트 무스타파를 만났다. 인상이 좋은 젊은이다. 파일럿 모하메드는, 나는 너를 위해 최선을 다했다. 만족하냐? 고 묻는다. 당연히 만족하지. 너는 진짜 벗이다. 수에즈에서 어려운 일이 있으면 언제든 전화하라고 한다. 우리는 포옹을 하고 헤어진다. 그가 한국에 오면 나도 그를 위해 최선을 다 할 거다. 나는 수에즈 에이전트 무스타파에게 질문을 쏟아 붓는다. 전기는? 내일 오케이, 물은? 내일 오케이. 샤워시설은? 24시간 오케이. 와이파이는? 그건 없다. 포트사이드 에이전트가 거짓말을 해댔지만, 파일럿 모하메드가 여기저기 불나게 전화해 어떻게든 선착장에 무어링하게 도와주었다. 그래도 와이파이는 결국 거짓말로 남았다. 나쁜 에이전트 놈.
우리배의 무어링을 도와 준 프랑스 젊은이들은 세계일주 항해 중이다. 그들과 함께 마리나 밖 레스토랑에 갔다. 마리나 문을 나서자, 자유다! 이제야 진짜 이집트를 만나는 느낌이다. 저녁을 먹으며 그들이 진짜 세계일주 세일러들이라는 것을 알았다. 정말 우리나라 젊은이들에게 소개해주고 싶은 청년들이다. 나는 이들의 이야기를 자세히 따로 정리하기로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