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기에 갈라진 논을 걸으면 넘어라 뻐르루스"Perlus" : 쁘르리스 주(Negeri Perlis)
쁘르리스 주(Negeri Perlis)는 대부분 논이었으며, 원래 끄다 주(Negeri Kedah)에 속해 있었다. 종종 시암(Siam) 혹은 아쩨Aceh)의 지배하에 놓였었다. 18세기 후반인 1786 년에, 끄다(Kedah) 술탄은 시암(Siam)과 버마(Burma)의 군사적 위협으로부터 영국의 군사적 보호를 요청하고, 영국은 끄다(Kedah) 술탄으로부터 삐낭(Penang)과 스망 쁘라이(Semang Perai : 현재 Wellesley)를 임대하기로 한다.
그러나 1821년에 시암(Siam)이 끄다(Kedah)를 침략했음에도 불구하고, 영국은 방관하였으며 마침내 끄다(Kedah)는 시부리(Syburi)라는 이름 하에 시암(Siam) 통치 아래 들어갔다. 시암(Siam)이 끄다(Kedah)를 정복한 후에, 영국은 뻬락(Perak) 안에서 이권들이 사라질 것같이 느꼈다.
1825년에, 새롭게 뻬락(Perak) 술탄이 된 술탄 압둘라(Abdullah)는 시암(Siam)에 속한 빠따니(Pattani)의 레만(Reman)의해 빼앗긴 끌리안 인딴(Klian Intan), 슬라롱(Selarong) 및 따섹(Tasek), 잃어버린 훌루 뻬락(Hulu Perak)의 지역들을 탈환해 줄 것을 로버트 풀러턴(Robert Fullerton, the Governor of Penang, 1824-1829)에게 서한을 보내 강력하게 요구했다. 협조하지 않으면 영국 동인도회사와 뻬락(Perak)은 무역이 없을 것임을 강조했다. 이에 영국 측면에서 뻬락(Perak)에서의 익권에 손해를 우려하여 1825년 7월 31일에 영국인 장교, 함장 핸리 버니(Henry Burney)를 리고르(Ligor)에 보내 협상을 시작했다. 슬랑오(Selangor)를 공격하려는 경향이 있는 시암(Siam)의 군사 통제권자인, 리고르(Ligor)의 왕, 뻬락(Perak) 또는 슬랑오(Selangor)를 공격하지 말 것을 경고했다. 그러나 리고르(Ligor)의 왕은 영국이 뻬락(Perak)을 간섭하지 않는 전제로 슬라오(Selangor)를 공격하는 어떠한 형태든 멈출 것이라 했다.
1826년에는 Raja Bendahara Chulan bin Raja Inu ibni Almarhum Sultan Ahmaddin이 왕세자(Raja Muda : 술탄 후계자)였다. 그의 사촌인, Raja Abdullah bin Raja Abdul Rahman ibni Almarhum Sultan Ahmaddin가 총리(Raja Bendahara)에 임명됐다. 술탄 압둘라(Abdullah)의 동생인, Raja Ahmad ibni Almarhum Sultan Abdul Malik Mansur Shah은 왕자(Raja Kechil Tengah : 중간 서열 왕자)가 되었다.
같은 해 6월에, 태국은 버니 협약(Burney Treaty)을 영국 동인도회사(English East Indies Company)와 체결했다. 다시 버니 함장(Captain Burney)의 협상으로, 이 경제 협약은 시암(Siam)의 요구 사항은 4 곳의 믈라유 지역, 즉 끄다(Kedah), 끌란딴(Kelantan), 쁘르리스(Perlis) 그리고 뜨렝사누(Terengganu)의 지배권을 인정하는 것이었다. 그 반면 그 영국 동인도 회사가 빵꼬르(Pangkor) 섬과 슴빌란(Sembilan)을 얻는 동시에 뻬락(Perak)은 시암(Siam)의 속국으로부터 독립되도록 되어있었다.이 빵꼬르(Pangkor) 섬은 해적 행위의 억제를 위해 영국에 넘겨졌었지만, 1874년에 빵꼬르(Pangkor) 조약 이후까지 영국에 의해 점령되지 않았다.
1826년에, 끄다(Kedah)는 쁘르리스(Perlis)와 사뚠(Satun)과 함께 시암(Siam) 왕국의 몬똔 시부리(Monthon Syburi) 주 안에 병합되었다. 그러나 시부리(Syburi, Kedah : 끄다) 정황에서 많은 문제점으로 인해, 1833년에, 국왕 라마 III세(Rama III)는 시부리(Syburi, Kedah : 끄다)를 꾸방 빠수(Kubang Pasu), 시부리(Syburi, Kedah : 끄다), 쁘르리스(Perlis) 그리고 사뚠(Satun) 등 4부분의 Mueang으로 분할할 것을 명령했다. 그는 Mueang Satun을 낚꼰 시 땀마랏(Nakhon Si Thammarat) 아래 두었다. 1897년에 출랄롱꼼 라마 4세(Chulalongkorn Rama V) 국왕은 새롭게 세워진 몬똔 시부리(Monthon Syburi) 아래 네 도시를 재통합했다.
1826년 10월에는, 영국은 뻬락(Perak)과 로 협약(Low Treaty)을 체결했다. 영국 해군의 함장, 제임스 로우(James Low)가 버니 협약(Burney Treaty)의 세부 사항에 따라 시암(Siam)으로부터 모든 영향을 대응하기 위해 의사규정들을 가지고 술탄 압둘라 의 법정에 보내졌다. 어떠한 형태든 시암(Siam)과 그리고 어떤 말레이 국가들과 더 이상 정치적 거래가 없을 것이라는 술탄 압둘라(Sultan Abdullah)의 합의에 의해, 제임스 로우 함장(Captain James Low)는 강력히 시암 관리자들(Siam advisers)을 내보낼 것을 요구했으며, 그 협약에 대한 결론을 내렸다.
이것은 1826년에 버니 함장(Captain Burney)와 제임스 로우 함장(Captain James Low)은 두 말레이 주(뻬락과 끄다)와 시암(Siam)의 관계들을, 그들의 명분상의 군주로서 인정하는 협정들을 낳았다. 버니 협약(Burney Treaty)에서, 끄다(Kedah) 술탄 아후맏 따줃딘(Ahmad Tajuddin)의 왕권을 회복되지 못하도록 그를 추방했다.
그리고나서 술탄 아흐맏(Sultan Ahmad)과 그의 무장한 추종자들은 12년(A.D.1830년–A.D.1842년) 넘게 그의 왕정 회복을 위해 성공적으로 싸웠다. 1842년에, 술탄은 마침내 시암(Siam)의 조항들을 받아들이는 것에 동의했다. 끄다(Kedah)에 대한 그의 왕권이 그에게 회복되었다.
그러나 시암은 쁘르리스(Perlis)를 방콕(Bangkok)에 직접적인 봉신으로서 속국으로 분리하여 놓았다. 시암(Siam)은 라자 롱 끄록(Raja Long Krok)을 쁘를리스(Perlis)에서 시암(Siam)의 지배자로, 동시에 대리 지배자로서 시이드 후세인 자말룰라일(Syed (or Sayyid) Hussain Jamalullail) 세웠다.
마침내, 1843년 5월 20일에, 이주자 핟흐라미 아랍 시이드(Hadhrami Arab Sayyid)의 친손자이고, 끄다(Kedah) 술탄의 외손자인, 시이드 후세인 자말룰라일(Sayyid Hussain Jamalulail)가 첫번째 쁘를리스의 왕이 되었다. 쁘르리스(Perlis)가 독립 군주국가 되었다.
끄다(Kedah)와 마찬가지로, 1909년 앵글로-시암협약(the Anglo-Siamese Treaty of 1909)은 시암(Siam)이 말레이반도 서해안의 봉신국가들, 즉 끌란딴(Kelantan), 뜨렝가누(Trengganu), 그리고 몬똔 시부리(Monthon Syburi : 끄다'Kedah', 쁘르리스'Perlis' 그리고 태국에 남아 있는사뚠'Satun'을 포함함.)을 영국(Great Britain)에게 이양할 것을 강요했다. 시암(Siam)은 단지 사뚠(Satun)만 존속했다. 그 후에 1910년에 사뚠(Satun)은 몬똔 뿌껫(Monthon Phuket) 아래로 옮겨졌다. 꾸방 빠수(Kubang Pasu), 시부리(Syburi, Kedah : 끄다), 쁘르리스(Perlis)은 영국에 넘겨졌다.
영국은 판무관을 쁘르리스(Perlis) 왕국의 주도인 아라우(Arau)에 설치했다. 2차 세계대전(World War II) 중에, 끄다(Kedah : 끌란딴Kelantan을 포함한)는 일본에 침략을 받은 말레이반도의 첫부분이었다. 2차 세계 대전(World War II) 중에 일본과의 동맹의 보답으로 쁘르리스(Perlis)는 시암(Siam)으로 예속되었다. 그러나 이 단시간의 동맹은 일본의 항복과 함께 종료되었다.
2차 세계 대전(World War II) 이후, 쁘르리스(Perlis)는 영국의 지배아래 다시 돌아갔다. 1946년에 말라야 연합(the Malayan Union)의 일부가 되었다. 그리고 나서 1957년에 말라랴 연방(The Federation Malaya)이 되었고, 최종적으로 1963에, 말레이시아 연방(The Federation of Malaysia) 국가가 되었다.
1958년 이래, 끄다(Kedah)의 세습 술탄은 뚜안꾸 압둘 할림 무앋잠 샤(Tuanku Abdul Halim Mu'adzam Shah)이었다.
쁘르리스 주(Negeri Perlis) 이름의 유래에 관한 역사는 명확하지 않다. 쁘르리스(Perlis)란 이름의 유래에 관한 이야기되어지는 추측이나 설들이 많이 있다.
말레이 역사학자 하지 부용 아딜(Haji Buyong Adil) 이란 인물에 따르면, "야자열매가 표류하다"라는 의미의 시암어 단어 “Phrau Loi” (Maphrau Loi ??????????)에서부터 쁘르리스(Perlis)의 유래가 있다는 이야기가 많다.
첫째로, 그 단어는 잘못 발음되어졌고 말레이인들에 의해 발음이 가르쳐졌다. 그리고 “Phrau Loi”는 ‘Pereleh’ 또는 "Perlis"이 되었다.
둘째로, 출처는 끄다 왕국으로부터 부여하다(Kurnia)의 의미를 지닌 "Peroleh"라는 단어로부터 쁘르리스 주(Negeri Perlis) 이름이 유래했다는 것이다. 그 단어가 축약되어서 "Perlis"가 되었다고 전해진다.
셋째로, 쁘르리스 주(negeri Perlis)의 언급은 부낏 믕울랑(Bukit Mengulang)에 있는 한 무덤에서부터 찾을 수 있다. 즉 똑 쁘르리스(Tok Perlis) 무덤이다. 이 무덤은 누산따라에서 발견된 한 이슬람법학자(Ulama)인 똑 쁘르리스(Tok Perlis)의 것이다.
넷째로, 쁘를리스 주(negeri Perlis) 이름의 유래는 ‘perlus’에서다. 대부분의 쁘를리스의 땅은 논이다. 건기에는, 논 바다닦이 갈라진다. 걷는 사람은 넘어‘terperlus’질 것이다. "perlus"(넘어지다)라는 단어에서 쁘를리스(Perlis)를 얻었다 한다.
아흐맏 이스마일(Ahmad Ismail)과 야짇 맛(Yazid Mat)의 공저한 책에 따르면, 쁘르라스 주(negeri Perlis) 이름은 쁘르리스 나무(pokok perlis)로 알려진 한 나무 종류로부터 유래한다. 이 나무는 전에 쁘르리스 지역에 매우 많이 자랐다. 무엇보다도 삥기르 숭아이(pinggir sungai)에 많았는데 지금은 이 나무는 전부 사라지고 없다.
비록 많은 쁘르리스 주 이름에 대한 유래들이 있지만, 대부분의 역사학자들은 쁘르리스 주(negeri Perlis) 이름은 쁘르리스 나무(pokok perlis)의 이름을 기념하기 위해 붙혀졌다고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