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공연이 그런 것은 아니지만 종종 클래식 콘서트는 단 한번 공연 감상의 기억이 오랜 추억으로 남기도 한다. 지금으로부터 12년전인 2005년에 고양에서 엘리아후 인발 지휘로 베를린심포니 오케스트라가 말러 교향곡 5번을 연주했을 때의 그 세련됨과 단단함과 명징함의 해석은 큰 인상으로 남아 지금까지 종종 추억으로 삼곤 했는데 연주단체의 이름을 베를린 콘체르트하우스 오케스트라로 바꾸었으나 같은 지휘자와 같은 곡으로 다시 내한했을 때 기대감이 더 커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12년의 세월은 몇 가지 면에서 해석과 표현을 달리 보여준 듯 하다. 예전의 연주가 세련되고 단단한 연주였다면 이번에는 연주기능적으로는 다소 떨어지는 듯한 거친 소리였지만 자연스러움이 묻어나는 자유분방한 연주를 들려주었다. 콘세르트헤보우 오케스트라라면 더 이쁜 소리를 냈을 것이고 베를린 필의 연주였다면 좀더 통제가 확실한 연주를 들려주었을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콘체르트하우스는 이들과는 달리 자신들의 소리의 정체성을 지니면서 말러 5번의 색깔을 보여주기 시작했다.
인발과 콘체르트하우스가 들려주는 말러 5번의 특징적인 핵심중의 하나는 폴리포니에 대한 거의 완전한 구현이다. 즉, 주 멜로디에 일체화된 소리를 들려주며 모든 악기가 복종하는 것이 아니라 각기 악기 파트의 소리를 다양하게 들려줌으로써 다성부적인 말러의 색깔을 여과없이 드러내는 표현이다. 이는 관객들로 하여금 말러가 폴리포니의 특성을 지닌 작곡가임을 인지함에도 그 체감을 어느 때보다 더욱 느꼈던 공연으로 추억하게 될 것이다.
콘체르트하우스는 또한 중저음의 소리를 죽이지 않고 거칠면서도 강하게 들려줌으로써 독일적인 색채의 오케스트라가 어떠한 것인가에 대한 인상도 새삼 심어주었다. 베를린 필이 세련되고 글로벌한(!) 느낌의 음색을 보여주고 있고, 바이에른방송 교향악단이 부드럽고 우아한 음색을 들려준다는 점에서 이들이 비독일적이다라고 단정하는 것은 무리지만 콘체르트하우스는 드레스덴 스타츠카펠과 더불어 우리가 익히 알고 있던 전통적인 독일의 색깔에 더 가까운 것이 사실이다. 물론 이는 현재 상임으로 활동하고 있는 지휘자의 스타일에 기인하는 바가 클 것이다.
엘리아후 인발은 전체의 5악장에서 1,2악장을 쉼없이 연이어 연주했고 4,5악장을 쉼없이 연주함으로써 이 곡이 전체적으로는 3부작의 곡이라는 말러의 지시를 충실히 따랐다. 그는 서정적이거나 포인트가 될만한 곳에서 군데군데 콧노래를 흥얼거리면서 이 곡이 노래하는 곡임을 상기시켜 주는 듯 했다. 그는 특정 구절의 템포 루바토(연주 속도 조절)을 통해 말러 곡이 주는 밀당(!)의 매력을 오버하지 않는 선에서 구사했다. 4악장은 대부분의 이들에게 가장 서정적이고 노래에 가까운 악장이지만 콘체르트하우스는 이 서정적인 단선율에 가까운 아다지에토의 악장에 과한 감정을 불어넣기 보다는 여전히 폴리포니의 색깔을 드러냄으로써 이 곡이 얼마나 다양한 시선과 해석에서 감상될 수 있는지를 확인시켜 주었다.
4악장의 서정성과는 별개로 2악장에서 저음 현과 고음 현의 강렬한 대비로 시작하는 부분에서도 콘체르트하우스의 매력은 그대로 드러났는데 특히 4분이 지나면서 188마디 즈음에서 시작되는 첼로의 느리고 서정적인 소절은 말러 5번의 전체 소절 중에서 가장 아름답게 들렸다고 고백하고 싶다. 거칠지만 무겁고 자연스러우면서도 다채로운 저음의 소리는 무뚝뚝하지만 내재된 서정성을 매력적으로 들려주었다.
엘리아후 인발은 이보다 앞선 서울시향과의 차이코프스키 5번에서도 드러내기도 했지만 강력한 통제력을 구사하지 않으면서도 악단원들의 능력과 자발성을 믿고 여유있게 곡의 흐름을 지시하는 데 장점을 지닌다. 그렇기에 악단원들의 기본실력이 탄탄한 바탕을 이루어야만 연주의 매력이 잘 살아나는 것임은 두말할 것이 없을 것이다.
이날 인발의 말러 5번에 대한 관점은 악기 각각의 자발성을 살리되 콘체르트하우스의 색깔인 독일적인 중저음의 스타일을 유지하는데 있었다. 위에서도 잠깐 언급했지만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의 베를린 필이라면 이보다는 더 일사분란한 통제된 소리를 주문했을 것이고 마리스 얀손스의 콘세르트헤보우라면 이보다는 더 이쁘고 우아한 소리를 주문했을 것이다. 이는 표현과 해석의 차이에서 발생하는 것이어서 어느 것이 더 낫냐고 말하는 것은 우문일 것이다. 그러나 내가 보건대 인발이 바라보는 해석은 말러가 바라는 해석에 상당히 가깝다. 아마도 이날 공연에 적지 않은 이들이 감명을 받았다면 연주를 잘했다거나 자기 취향에 가깝게 들려주었다기 보다는 말러 곡이 지닌 원래의 의미에 가깝게 들려줌으로써 말러의 곡을 좋아하는 이유의 원천성을 새삼스럽지만 새로이 확인시켜준 것에 있었을 것이다.
공연은 음반제작과 달리 당일 지휘자와 단원들의 시차적응을 포함한 컨디션, 공연장의 소리와 환경, 관객들의 분위기 등 외에도 일일이 열거하기 힘든 변수로 인해 그날이 최고의 공연이 될지 안될지는 누구도 장담할 수 없다. 최고의 결과가 나오지 않더라도 장점만을 잘 받아들이는 관객이라면 즐거울 수 있겠지만 행복하게도 이날은 취향의 호불호, 연주능력기술의 높낮이를 떠나 다수가 즐거워 할만한 공연이었다. 단 한번 공연의 추억이 평생을 갈 수 있다는 점은 여전히 유효하다.
첫댓글 저도 말러5번
행복하게 즐감했드랬어요~^^
디테일한 감상평 즐겨 읽었습니다.
맵시자님도 보셨었군요. 특강이나 공연장에서도 더 자주 뵙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