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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및 자료실 스크랩 漢나라 시대의 書論
청운 추천 0 조회 33 09.08.03 15:17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4. 漢나라 시대의 書論

한자가 의미의 기록과 전달, 禮樂과 敎化의 효용성 이외에 예술의 영역으로 창작되고 감상의 대상으로 인식되기 시작한 것은 漢나라 시대의 후기 이후라 할 수 있다. 이 때는 古體에서 今體로 완전히 탈바꿈한 시대로 隸書와 草書는 완성되고 楷書와 行書가 기초를 형성하였다. 象形性이 농후한 古體에서 추상적 부호로 이루어진 今體로 隸變을 완성한 후부터 筆劃과 자형에 작가의 주관적 요소를 더하려는 예술로서의 자각이 싹트게 되었으며 그 사상은 결국 書論으로까지 발전하게 되었다.

중국의 미술사와 미학에서 서예 미학이 차지하는 비중은 매우 크다. 유럽의 고대 미학을 이야기할 때 건축미에 정통하지 않고서는 자리할 수 없는 것과 같이 중국의 고대 미학을 연구할 때 서예를 이해하지 못하면 그 맥을 짚었다고 할 수 없다. 유럽의 건축이 서양의 미학 정신을 대표하는 것 이상으로 서예가 중국 예술 정신을 집약적으로 표현하고 있기 때문이다. 중국의 예술품 중에서 가장 오래되고 가장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것이 서예이며 내면의 예술 정신은 중국의 사상과 철학은 물론 심미적 탐구의 핵심이 되고 있다. 漢나라 시대는 서예의 눈부신 발전이 있었을 뿐 아니라 철학, 교육 등 문화의 여러 방면에서 높은 수준에 달한 시기이다. 서예 이론의 측면에서 바라볼 때 이 시대가 비록 시작에 불과한 단계이지만 書法藝術의 정신과 미학 사상은 이미 높은 수준에 도달해 있었다.

漢나라 시대의 미학 정신을 잘 표현한 이론이면서 서론에서도 항상 응용하는 중요한 이론은 揚雄의 ‘心畵’설이다. 揚雄(서기전 53-서기 18)의 저서인『法言』과『太玄』은 그의 철학과 미학 사상을 집약적으로 표현해 내고 있는 저술이다.『法言』은 論語를,『太玄』은『周易』을 모방하여 儒家의 미학 사상을 표방하는 동시에 道家의 사상을 겸비하여 표현하고 있다.『法言․問神』에 “言, 心聲也; 書, 心畵也.”(말은 마음의 소리요, 글은 마음의 그림이다.)라 하여 말과 글의 심미적 특징을 마음과 연결하여 집약적으로 표현하였다. 揚雄의 心畵설을 처음으로 서론에 응용한 사람은 宋나라 시대의 朱長文이다. 그는『續書斷』에서 ‘書, 心畵’를 인용하여 서예의 본질을 해석하고 있다. ‘書, 心畵’가 揚雄의 가슴속에서는 문장의 심미적 본질을 설명하는 말이었으나 朱長文이 서예의 심미적 본질로 인용한 이후 많은 서론가들이 서예의 근본을 대신하는 내용으로 사용된다.

‘書, 心畵’가 서예 미학의 중요한 관건으로 성립된 까닭은 서예의 심미적 특징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마음과 표현된 형태는 별개의 것이 아니므로 서예 작품과 작가는 서로 분리되지 않는다. 마음의 표현이 형태를 지니게 되면 그 형태는 언어, 문자, 형상 부호(그림, 조각, 음악 무용 등)의 세 가지로 이루어진다. 서예는 언어, 문자, 형상 부호의 특징을 모두 소유하고 있는 까닭으로 가장 직접적이고 강렬한 마음의 표현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서예를 ‘心畵’라 하며 또 ‘其人’이라 하는 것이다.

“書, 心畵”가 서예의 심미적 특징을 표현한 관건으로 자리잡은 사상적 기초는 儒家의 철학과 도가의 미학 사상이다. 儒家와 道家의 공통 철학인 ‘天人合一’의 사상은 마음과 손이 하나가 되어야 한다는 ‘心手相應’의 서론 사상을 탄생하게 하였다. 마음과 손, 마음과 서예를 하나로 이해하는 것은 마음과 형체가 둘이 아님을 강조하는 유가와 도가의 사상과 일치한다. 또한 서예의 형태미를 자연에 비유하고 그 내재된 정신을 자연계 만물의 심미적 특징에서 구하는 것을 道家의 ‘道法自然’ 사상과 서로 통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역대 書論에서 가장 중요하게 연구한 분야는 서예 미학과 서예사 그리고 서예 이론과 서예 기법이며 중점적으로 거론하는 심미적 범주는 마음과 형태 그리고 自然이었다.

서예 이론사에서 최초의 서론으로 기록되는 저술은 晉나라 시대 衛恒의『四體書勢』에 실려 있는 崔瑗(서기 78-143)의『草書勢』이다. 唐나라 시대의 張懷瓘은『書斷』에서 崔瑗을 “善章草, 師於杜度, 點畫之間, 莫不調暢.······ 章草入神, 小篆入妙.”(杜度에게서 배웠으며 章草에 매우 뛰어났다. 點畫이 고르게 균형 잡혔으며 유창하다. 章草의 수준은 입신의 경지에 올랐고 小篆은 玄妙한 수준에 달했다.)라 하여 章草와 小篆에 뛰어났었다고 평하였다. 당시 杜度와 崔瑗을 草書의 양대 산맥으로 불렀으며 조금 뒤에 나타난 草聖인 張芝는 자신의 수준을 崔瑗과 비슷하고 杜度에 못 미친다고 평가할 만큼 草書에 뛰어났다고 전한다.『草書勢』는 蔡邕의『篆勢』,『九勢』, 衛恒의『古文字勢』,『隸勢』 및 索靖의『草書勢』 등의 이론 세계의 근본이 되었다. 勢는 외형과 정신의 합체로서 표현될 수 있는 것으로 그 가운데 포함된 藝術 사상은 매우 풍부하다고 할 수 있다.

崔瑗은『草書勢』에서 草書가 탄생의 원인을 사회 전반의 필요에 의한 필연적인 결과로 보았다. 경전의 수요가 많아지고 행정 관청의 일이 복잡해짐에 따라 문자의 수요는 급격히 증가하게 되어 문자 자체의 간략화가 필요하게 되었다. 또한 문자의 書寫 속도가 빨라야 할 필연성에서 草書의 탄생 원인을 분석해 내었다. 草書의 효용을 실용성으로 분석해 낸 반면 藝術로서의 아름다움을 형태미, 운동성의 외형미, 작가의 정신과 사상을 표현하는 내면적 아름다움으로 이해하였다. 서예에서 외형적 미와 내면적 정신을 찾아내고 또 분석하는 서예 미학은 이 천년의 이론사에서 핵심이 되는 내용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草書의 외형적 미감을 설명하기 위해 ‘觀其法象’(草書의 법도와 형태를 관찰한다)이라는 이론을 주장하였고 형태의 아름다움을 심미적 범주로 설명하였다. 또 ‘方不中矩, 圓不副規.’(직각자에 맞춘 각이 아니고 곱자에 맞지 않는 圓이 아니다,)라는 草書 형상의 심미적 요구는 篆書나 隸書와 다른 새로운 차원의 형태미를 탄생하게 하였다. 그리고 草書의 운동성을 대자연에 존재하는 만물의 움직임에 비유하여 생동감 있는 筆劃과 자형이 草書의 율동과 흐름을 결정하는 근본 요소로 분석하여 설명하였다. 변화무쌍한 음률의 가락과 율동이 草書예술의 심미적 특징이라는 이해는 草書의 형태와 내면의 정신을 잘 표현한 이론이라 생각된다.

崔瑗은 草書를 작가의 사상과 정서를 가장 잘 표현할 수 있는 예술로 평가하였다. 草書의 풍부한 형태미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면 그 형상과 선 그리고 먹색과 章法등에서 작가의 감정과 사상을 엿볼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작가의 정신적 수양과 사상의 높은 경계를 변화무쌍한 草書의 형상을 빌리고 또 선과 먹색으로 표현할 수 있으므로 작품을 감상하는 사람은 작품을 매체로 하여 작가와 간접적 대화를 나눌 수 있는 것이다. 서예는 단순한 외형적 표현 예술이 아니라 자연계에 존재하는 만물의 심미적 특징과 작가의 정신 세계를 함께 표현할 수 있는 서정 예술로 평가하였다.

漢나라 시대의 후기에 草書는 창작과 감상의 예술적 위치에 올랐으며 매우 유행하였다. 동시에 草書의 능력으로 관직을 주거나 받으려는 사람들이 생겨나게 되었다. 趙壹(서기 130-185)은 草書로서 관직을 얻으려는 사람들은 비판하고 草書의 근본을 밝힌『非草書』를 저술하였다.『非草書』가 표면상으로는 草書와 草書를 광적으로 연마하는 사람들을 비난하는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으나 이 문장에 書論史에 끼친 영향은 매우 크다. 그 이유는 내용의 정면보다는 반면이 암시하고 있는 것으로 草書의 유행과 영향력에서 찾을 수 있다.

趙壹은 字는 元叔으로『後漢書』에 靈帝시대 光和 원년(서기 178)에 入京하여 활동한 인물로 유명한 辭賦家라고 기록되어 있다. 전해지는 서예 자료를 근거로 할 때 靈帝시대는 刻石 隸書가 가장 발전하였을 뿐만 아니라 簡帛의 草書도 이미 매우 성숙하여 광범위하게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趙壹의『非草書』는 서예 자료와 함께 草書가 매우 유행하였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자료이다. 당시의 대다수 문인들은 草書의 창작에 심취하였을 뿐만 아니라 심한 경우에는 밥 먹는 일조차 잊어버리고 탐닉하는 일이 많아졌다고 기록하였다. 이와 같이 草書에 탐닉함으로서 발생하는 해악을 걱정하여 草書를 비난하였다. 趙壹이『非草書』에서 草書를 비난한 내용은 그것이 간편함을 쫓는 書體로 성인의 업적이 아니라는 내용이 첫째이다. 시대의 필요에 의한 간편함으로 탄생한 草書를 많은 사람들이 그 본래의 의미를 도외시하고 草書를 위한 草書를 쓰고 있는 것을 비판한 것이 둘째 내용이다. 셋째는 입신양명의 공리 표준에서 바라볼 때 草書는 아무런 직접적 효용이 없다는 것이다. 草書를 잘 쓰는 것과 정치를 하고 백성을 잘 살게 하는 것과는 상관이 없으며 사대부들의 문화적 사명과는 관계가 없는 것이므로 草書에 탐닉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라 설명하였다. 그러나 草書 자체를 완전히 부정하지는 않았다.

『非草書』가 草書와 草書에 탐닉하는 사람들을 비난하는 내용인 것에는 틀림이 없으나 문장 속에 草書의 심미적 특징뿐 아니라 사회적 효용까지 심도 있게 다루고 있으므로 서론의 중요한 항목으로 인정되고 있다. 趙壹은 마음과 손 그리고 서예의 세 가지 문제를 거론하였다. 이것은 王僧虔이『筆意贊』에서 설명한 ‘心手達情’사상과 孫過庭이『書譜』에서 주장한 ‘心手雙暢’의 서예 미학 사상의 근원이 되었다.『非草書』의 등장은 漢나라 후기에 草書가 이미 성숙하였을 뿐 아니라 서예의 창작과 연구가 높은 수준에 도달하였음을 설명하여 준다. 또한 東漢후기에 서예가 감상을 주목적으로 창작하는 자각 예술의 상태에 들어가고 있음을 나타내고 있다. 작가와 작품의 관계와 마음과 육체의 문제를 제기하여 心手達情의 경지를 설명하고 서예는 작가의 성정에 따른 예술임을 입증하고 있다. 이와 같은 관점은 서예가 작가의 개성을 중요시하며 수양과 사상 경계로 높은 경지의 작품을 창작할 수 있다는 이론을 제시하였다.

崔瑗과 趙壹의 서론과 함께 漢나라 시대의 서론으로 蔡邕의『筆論』,『九勢』,『篆勢』,『筆賦』 등이 있다. 蔡邕의 서론은 漢나라 서예 이론의 집대성이라 평가되며 후대에 끼친 영향도 매우 크다.『篆勢』는 晉나라 시대 衛恒의『四體書勢』중에 포함되어『晉書․衛恒傳』에 전하고 있으며『筆論』과『九勢』는 宋나라 시대 陳思의『書苑菁華』에 처음으로 보인다.『筆論』과『九勢』가 宋나라 시대 이전의 문헌에는 기록되지 않고『書苑菁華』에 처음으로 기록된 것을 이유로 蔡邕의 이론이 아닐 것이라 주장하는 학자도 있다.『筆論』과『九勢』의 진위에 대한 고증은 미루어 두고 두 이론이 서예 이론사에 많은 영향을 끼친 것은 명백한 사실이므로 전통에 따라 蔡邕의 서론으로 설명한다.『筆賦』는 붓의 특성을 찬양한 것이라 진정한 書論이라 볼 수는 없지만 書論의 연구에 참고할 수 있는 내용이다. 蔡邕이 書論에서 중점적으로 거론한 내용은 筆勢와 體勢의 미학 범주와 작가의 마음이 움직이는 실마리이며 만물에 내재된 미를 서예의 심미적 표준으로 이해한 것이다. 勢는 體勢와 筆勢의 두 가지 영역으로 이해하였으며 筆劃의 결구로 이루어진 結體는 각 글자의 본래 모습과 크기에 筆劃의 많고 적음에 따르도록 요구하였다. 기운이 생동하는 예술적 효과를 勢를 가장 잘 표현한 작품으로 이해하는 蔡邕의 이론은 서예 이론사에서 형태와 내면의 정신으로 서예를 평가하는 전통 서론의 기초가 되었다.

蔡邕은『九勢』에서 “書肇於自然”(서예의 시작은 자연에 근원을 두고 있다.)이라 하여 자연계에 존재하는 만물이 서예 미학의 기초라 하였으며 그 다음에 음양과 형세 등이 차례로 생겨났다고 보았다. 서예는 서체의 형태뿐 아니라 심미적 요구까지도 자연에 근원을 두고 있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을『老子』의 ‘道法自然’ 사상과『周易』의 ‘一陰一陽之爲道’의 사상과 상통하는 이론이다. 서예와 자연이 하나인 것은 나와 자연이 둘이 아니라는 도가 사상과 연관 지을 수 있으며 결국 나와 서예가 둘이 아니라는 결론을 얻을 수 있는 書論의 심오한 철학이다.

『筆論』의 내용은 蔡邕이 첫머리에서 논술한 “書者散也”(서예는 표출하는 것이다.)의 한마디에 모두 함축되어 있다. 서예와 작가의 문제를 제기하여 학문 철학 정서 등 작가의 모든 것이 창작의 관건이 되는 것으로 이해하였다. 창작할 때 먼저 정신을 깨끗하게 하고 성정에 따르면 만물의 형태와 그 심미적 특징을 상징할 수 있는 작품을 할 수 있다는 것을 강조하였다. 세속의 먼지를 털어 버리고 無爲의 경지에 도달하는 정신 상태로서의 ‘散’ 철학은『老子』의 ‘散木’과 ‘無爲’의 사상을 기초로 하였다고 이해할 수 있다. 끝에서 “縱橫有可象者, 方得謂之書矣.”(만물을 상징하는 뜻이 있어야 비로소 서예라 할 수 있다.)라 하여 만물의 심미적 특징을 표현하여야 좋은 서예라 하였다. 이와 같은 이론은 蔡邕의 서론에서 일관되게 등장하는 내용으로 崔瑗이 주장한 ‘法象’의 이론과 그 심미적 요구가 같음을 알 수 있다.

『篆勢』는 篆書가 象形性을 기초로 이루어진 서체이기 때문에 자연계 만물의 형상과 심미적 특징을 筆劃과 결구를 빌어서 표현하여야 좋은 작품을 할 수 있다고 강조한 문장이다. 작가의 철학과 사상적 경계인 정신은 勢를 결정하는 중요한 요인이며 또 勢는 형태의 심미적 특징을 결정하는 중요한 요소라고 설명하였다.

蔡邕의 서예 미학 사상은 유가의 사상을 근본으로 하고 있으나 老莊의 사상적 영향을 많이 받았다. 서예의 근본이 자연과 음양에 있다고 이해하고 있으며 창작을 작가의 정서와 사상을 표현하는 것으로 ‘無爲’의 경지에서 자연스럽게 표현되는 것이라는 사상은 老莊의 철학에서 출발하고 있는 것이다. 서예의 심미적 기초는 대자연의 만물에 있으므로 만물의 미를 인식하고 표현하는 것은 形과 勢를 표현하는 동시에 내면의 정신적 경지를 높이는 방법이 되는 것이다.

漢나라 시대의 書論를 연구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것이 許愼의『說文解字․敍』이다. 許愼은(대략 서기 58-147) 東漢의 汝南(지금의 河南省 鄢城)사람으로 자는 叔重이다. 經學과 문자학에 뛰어났으며 古文經學派의 한 사람이다.『說文解字』는 古文經學派과 今文經學派의 대립이 한창일 때 古文經學의 사상을 기초로 하여 탄생한 저작이다.『說文解字』는 西周시대 이후의 문자를 집대성한 것이고 또 古文經學과 訓詁學을 완성한 저작이라 할 수 있다.『說文解字』는 한자의 자형을 小篆을 기초로 하여 분석하고 그 근원을 연구한 문자학의 전문 서적이다. 문자의 형태와 偏旁의 구조에 따라 부수를 14개 항목 540部로 나누고 총 9353자를 六書의 원리에 따라서 분석하였으며 重文 1163자를 부가하였다. 字體는 小篆을 중심으로 하였으며 重文은 古文 혹은 籒文의 書體로 기록하였다. 현재에 전하고 있는『說文解字』는 許愼의 원본이 아니라 宋나라 시대의 徐鉉(서기 917-992년)과 徐鍇(서기 920-974년) 형제의 판본이다.

『說文解字』가 서론사에서 중요하게 인식되는 이유는『說文解字․敍』에서 문자의 기원, 한자의 造字法과 用字法, 六書의 해설, 문자 변천 등에 관하여 광범위하게 거론하였기 때문이다. 또한 서예 미학의 근본적 연구에도 높은 안목으로 탁월한 견해를 나타내고 있다. 許愼이 서예 미학의 핵심으로 거론한 사상은 문자의 象形性이다. 이러한 象形性은 문자가 탄생과 연관 지었으며『周易․繫辭下』편을 인용하여 문자의 창조를 ‘觀象’에서 출발하였다고 이해했다. 이와 같은 사상은 한자의 造字法과 用字法인 ‘六書’의 인식에서 뚜렷하게 나타난다. 象形, 指事, 會意, 形聲, 轉注, 假借 등 六書의 내용 가운데 ‘象形’을 한자 구성의 가장 근본적 특징으로 인식하였다. 許愼은 ‘象形’을 “畵成其物. 隨體詰詘”(물체 형태의 모양에 따라 그 물체의 형상을 그렸다.)이라 하여 문자의 근본이 물상에 있음을 강조하였다. ‘指事’도 추상적 개념에서 출발한 것이기 때문에 ‘象形’과 서로 통하는 특징을 내포하고 있으며 ‘形聲’과 ‘會意’도 ‘象形’의 기초 위에서 발전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六書’가 ‘象形’에 기초한 것이라는 인식은 “書者如也”라는 이론으로 발전하였다. 淸나라 시대의 段玉裁는『說文解字․注』에서 “書者如也”의 ‘如’자를 “謂如其事物之狀”(如라고 말하는 것은 그 글자가 가리키는 사물의 형상이다.)이라 설명하고 있다. 따라서 許愼의 문자와 서예의 본질로 인식한 것은 그 글자가 상징하는 형태인 것이다. 후대의 서예 이론가들은 이와 같은 이론을 서예 미학에 심미적 요구에 인용하고 있다. “書者如也”의 이론은 서예의 객관적 심미 특징을 대표하는 이론으로 주관적 심미 특징을 표현한 “書, 心畵”의 이론과 함께 형태와 내면의 정신으로 나누어지는 서예 비평의 길을 열어 놓았다. 이러한 사상은 淸나라 시대의 劉熙載가『藝槪․書槪』에서 서예는 그 사람의 학문이며 재능이고 또 뜻으로 “書, 如其人”이라 하는 미학 사상으로까지 발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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