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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 2:13-22> 주의 전을 사모하는 열심히 나를 삼키리라, 성전 정화사건, 이방인의 뜰, 기도하는 집, 옛 성전을 헐고 성령의 전을 지으라
1. 말씀의 배경
오늘 말씀은 마 21:12-13, 막 11:15-17, 눅 19:45-46절에도 유사한 말씀이 나옵니다. 오늘 말씀은 예수님의 사역 초기에 일어난 1차 성전정화 사건이고 다른 복음서의 말씀은 후기에 일어난 2차 정화사건으로 보고 있습니다. 두 개의 별개의 사건이라면, 예수님의 사역초기와 마찬가지로 사역후기에도 유대인들은 여전히 성전에서 장사를 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사건이 일어난 것은 유월절이 가까운 때입니다. 이 사건의 영적 의미를 깨닫게 하는 주요한 포인트입니다. 유월절과 관련해서 이 말씀의 영적 의미를 해석하고 이해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결론적인 내용을 조금 말씀드리면, 기존의 율법에 따라 드리는 유월절 제사의 어린 양을 내 쫓으시고, 자신이 유월절 어린 양이 되심을 가르쳐 주는 사건인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는 유월절 어린 양되시는 예수님을 통하여, 자신과 같이 모든 믿는 자들의 마음 속에 성령이 거하는 성전을 세우고자하는 것입니다. 이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자신이 삼켜지는
열심을 낸 사건인 것입니다. 끝.
▶ 오늘 말씀의 내용을 정리해 보면, 사람들은 유월절 절기를 지키기 위해서 많은 사람들이 각지에서 모여들었습니다.
예수님도 예루살렘에 올라가셨습니다. 그런데 예루살렘 성전을 보시고 성전 안에서 소와 양과 비둘기 파는 사람들과 돈 바꾸는 사람들이 앉아 있는 것을 보신 것입니다 (14절)
여기서 성전(헬, 히에론)은 성전의 모든 뜰까지를 포함한 전체 성전을 말합니다. 그들은 성전 뜰에서 장사를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성전의 뜰은 남자의 뜰, 여자의 뜰, 이방인의 뜰이 있는데, 가축이 있고 장사하는 사람들이 있는 것으로 보아 이방인의 뜰로 보입니다.
※ 19절의 성전(헬, 나오스)은 성소와 지성소가 있는 성전입니다.
이런 모습을 보고 예수님은 노끈으로 채찍을 만드셔서 양이나 소를 다 성전에서 내쫓으시고, 돈을 바꾸는 사람들의 돈을 쏟으시고 상을 엎으시고, 비둘기 파는 사람들에게 여기서 가져가라고 하시면서 “내 아버지 집으로 장사하는 집을 만들지 말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에게도 이런 모습이 있나? 할 정도로 분노하신 것입니다.
외식하는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에게 “화 있을진저” (눅 11:42-52, 마 23:13-29) 하시는 모습도 있었지만 여기서는 행동까지 하십니다.
상을 뒤엎고 소와 양을 내쫓을 정도로 엄청난 영적 분노를 발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2. 왜 이렇게 분노하셨을까요? 그 이유가 있는 것입니다.
1) 16절에, 우리가 이미 아는대로 “내 아버지 집을 장사하는 집”으로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거룩해야 할 성전을 더렵혔습니다. 뜰은 백성들이 기도하는 곳입니다 (마 21:13, 막 11:17, 눅 19:46). 이방인의 뜰이라고 하더라도 이방인들이 기도해야 하는 곳인 것입니다. 성전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 되어야 합니다(사 56:7, 막 11:17)
그런데 기도해야 할 그 곳에서 장사를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장사가 필요하면
성전 바깥에서 해야 하는 것입니다.
▶ 그들은 왜, 장사를 하고 있었을까요?
제물로 드려야 하는 소와 양은 정결한 흠 없는 1년생을 드려야 하는데, 제물을 검사하는 과정에서 통과하기 위하여 흠 없는 제물을 사야했습니다. 퇴자를 맞지 않기 위해서라도 말입니다. 여기에 이권이 개입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 이유는 먼 곳에 있는 사람들은 소와 양을 멀리서 끌고 올 수도 없기 때문에 제물을 살 수 밖에 없었습니다.
돈을 바꾸는 것은 20세 이상 유대인 남자나 개종한 이방인은 성소의 세겔로 반 세겔을 생명의 속전으로 내야하므로 성전에 드릴 수 있는 화폐로 환전을 해야 했던 것입니다(출 30:11-16).
유대인 디아스포라나 개종한 이방인들이 가지고 온 돈은 시이저의 화상이나 이방 군주의 화상, 이방 우상의 상징이 들어가 있어 성전세로 낼 수가 없었습니다. 베드로와 예수님도 성전세를 낸 기록이 성경에 있습니다.
가버나움에서 반 세겔 받는 자들이 베드로에게 너의 선생은 왜 반 세겔을 내지 않느냐고 했을 때, 예수님은 임금의 아들은 안내도 되는데 그들이 실족하지 않기 위하여 베드로에게 바다로 가서 낚시로 잡은 고기 입을 열면 한 세겔을 얻을 것인데 너와 나를 위하여 주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이 성전세입니다 (마 17:24-27)
이런 제물을 사고 파는 것과 돈을 바꾸는 배후에 대제사장과 산헤드린공의회가 관련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상인들에게 이권을 주고 막대한 뒷 돈을 받아 이익을 챙겼던 것입니다.
원래 정결한 제물을 드리고자 하는 순수한 마음으로 시작된 것이나 점차 돈에 눈이 멀어 성전을 장사하는 집을 만들고 만 것입니다.
구약적 제사 개념에서는 거룩한 성전에서 거룩한 제물이 드려질 때 하나님 받으시고 죄를 사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지 못한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분노한 것입니다.
사실 남이 기른 그런 제물을 사서 정결한 짐승을 드린다고 해도 하나님 보시기에 온전한 제사는 되지 못하는 것입니다.
자기가 온갖 정성을 드려 기른 정든 짐승이 죽는 모습을 보면서 자기 죄에 대한 온전한 회개가 일어나야 하는데, 남이 기른 짐승을 사서 드리니 온전한 회개가 없이 마음이 실리지 않는 형식적으로 제사가 드려지게 되는 것입니다.
▶ 이것이 오늘날 우리들에게 가르치는 교훈은 무엇일까요?
성경은 우리가 성령이 거하는 전이라고 했습니다 (고전 6:19), 그러므로 우리는 성전입니다. 성전된 우리들 마음 속에 오늘 말씀과 같이 이런 장사하는 것들로 가득차 있을 때 주님은 엄청난 분노를 발하시고 뒤엎어 버리신다는 것입니다. 물론 실제 예배하는 장소에서도 장사를 해서는 안됩니다. 그러면 예배가 방해되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예배하는 마음이나 장소가 더럽게 하는 것들을 뒤엎어서라도 정결하게 하시길 원하시는 것입니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마음이 부패하여지고 진리를 잃어버린 자들이 경건을 이익의 방편으로 생각하고 이에서 다툼이 일어난다”고 했습니다 (딤전 6:5).
마음이 부패해지고 진리를 잃어버리면 이상한 짓들을 하여 성전을 더럽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 생활을 이익의 방편으로 생각하기도 합니다. 교회에서 이익을 위하여 서로 다투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 마음의 성전과 예배의 장소에서 이익을 위하여 소와 양과 비둘기를 팔고 돈을 바꾸는 일이 있습니까? 경건을 이익의 방편으로 삼고 있는 것이 있습니까? 그래서 다툼이 일어나고 있습니까?
이런 마음, 이런 성전을 예수님의 열심으로 헐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예배당에서는 기도하고, 찬송하고 예배를 해야 하는데, 다 장사꾼이 되어서 온통 장사하는 마음으로 차 있으면 주님은 뒤 엎어버릴 것입니다.
사역이란 이름으로 돈을 벌기 위하여 사역의 장을 열면 안됩니다. 은사가 있어 사역의 장을 열었다면 그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삯 꾼과 같이 돈를 벌기 위하여 목회를 하고, 돈을 벌기 위하여 교회를 나오고 하는 모든 것들이 예수님께서 뒤 엎을 다 장사하는 것들입니다.
▶ 유대인들은 예루살렘 성전을 초기에는 ”장사하는 집“ (요 2:16)으로 만들었지만 예수님 사역 후반부에는 ”강도의 소굴“이 되었던 것입니다. (마 21:13, 막 11:17, 눅 19:46). 장사하는 집이 결국에는 강도의 소굴이 된 것입니다.
강도의 행위는 강제로 빼앗는 것입니다. 장사는 조금 억울하더라도 서로 주고 받지만 강도는 빼앗는 것입니다. 장사와 차원이 다른 죄인 것입니다.
이 정도가 되니 주후 70년에 예루살렘 성이 무너질 때 성전도 무너지는 것입니다.
더러운 성전이 완전히 무너져야 새로운 성전을 지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루살렘 성전이 무너진 것도 새로운 성전을 세우기 위함입니다. 건물 성전이 아닌 새로운 성령이 거하시는 마음의 성전 말입니다.
주님은 이런 성전을 세우고자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사모하는 열심을 가지고 계신 것입니다.
[요한복음 2:17] 제자들이 성경 말씀에 주의 전을 사모하는 열심이 나를 삼키리라 한 것을 기억하더라
우리 마음의 더러운 성전을 다 무너뜨리고 파괴하고 뽑아버리시기 바랍니다.
2) 우리 주님이 분노한 가장 큰 이유는 이것입니다.
이제는 예수님이 유월절 어린 양이 되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만 백성을 위하여 십자가에 죽으시는 어린 양이 되심으로 더 이상 그런 짐승의 제물은 필요가 없습니다.
예수님을 예표했던 기존의 어린 양들은 유월절 참 어린 양이신 예수님의 그림자이므로 이제는 다 쫓아내야 합니다. 돈 바꾸는 상도 뒤 엎어야 합니다. 더 이상 이런 것들은 필요가 없습니다. 그래서,
“다 성전에서 쫓아 내시고“, ”상을 엎으시고” (15절)
주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이후에는 율법에 따른 그런 제사는 하나님께서 더 이상 받으시지도 않습니다. 히브리서 저자는 시편 40:6절 말씀을 인용하여 이렇게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히브리서 10:5] 그러므로 주께서 세상에 임하실 때에 이르시되 하나님이 제사와 예물을 원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나를 위하여 한 몸을 예비하셨도다
이제는 유월절 어린 양으로 오신 예수님 한 분이 있으면 족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한번의 피 흘리심으로 족합니다. 다른 짐승들 더 이상 죽을 필요도 없고 해마다 제물을 가져올 필요도 없습니다.
그리고 성전세도 더 이상 필요없습니다.
그러므로 옛 제사 관련 모든 재물을 다 쫓아내어야 합니다. 그러면 눈에 보이는 성전도 필요없으니 성전도 허물어져야 합니다. 성전세 돈 바꾸는 상도 다 엎어야 합니다. 그래서 AD 70년에 이 성전이 허물어집니다.
이제는 눈에 보이는 성전에서 눈에 보이는 제물을 가져와 제사드리는 것을 원하지 않으시고, 예수님을 통하여 부어지는 성령의 전을 세우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토록 분노하신 것입니다.
우리 예수님은 자신이 성전인 것을 샘플로 보여주고 계십니다 (요 2:21). 예수님이 성전되시는 이유는 예수님 안에 성령이 충만하기 때문입니다 (요 3:34,막 1:10). 예수님과 같은 모습으로 예수를 믿는 자들로 성령이 충만하게 거하시는 성전을 세우고자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들에게 그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보여주시는 맏아들입니다 (롬 8:29)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들 속에 있는 지난날 구약적 성전과 제물도 허물어져야 합니다.
▶ 우리는 그동안 우리 안에 구약적 성전을 오래동안 세워왔습니다. 이게 허물어져야 합니다.
유대인들이 46년 동안 헤롯성전을 짓고 있었던 것처럼, 우리 안에 구약적 성전을 오래동안 짓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주님이 오셔서 진정한 성전을 세우기 위해서는 아무리 오래동안 지었고 화려하고 멋진 성전이라도 허물 때가 된 것입니다.
우리들 속에 지어왔던 구약적 성전이 무엇일까요?
믿음으로 사는 것이 아닌 율법적으로 살았던 것, 그래서 남을 법의 잣대로 정죄하면서 살았던 것, 내면의 아름다움 보다도 외면만 화려하게 치장한 외식하는 신앙생활의 모습들, 더구나 경건을 이익의 방편으로 생각하여 교회를 이용하여 사역을 이용하여 돈을 벌고자 했던 모든 것이 그동안 46년 동안 구약적 성전을 짓고 있었던 모습들이었습니다.
그래서 남들이 볼 때 아릅답습니다. 화려합니다. 웅장합니다. 돈도 많습니다. 명예도 주어집니다. 그러나 이제는 필요없습니다. 헐어버려야 합니다. 하나님은 반드시 헐어버릴 것입니다.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무너질 것입니다 (마 24:2, 막 13:2, 눅 19:44)
[누가복음 21:6] 너희 보는 이것들이 날이 이르면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뜨려지리라
언젠가는 그 안에서 가증하게 여기는 우상숭배가 이루어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단 11:31.마 24:15).
그 안에 성령이 거하시는 성전을 세우시고자 하는 주님의 사모함과 열심이 헐어버릴 것입니다.
3. 주의 전을 사모하는 열심히 나를 삼키리라 (17절)
이 말씀은 시편 69편 말씀을 인용한 말씀으로 주님의 십자가 고난과 관련된 예언적 말씀입니다.
[시 69:9] 주의 집을 위하는 열성이 나를 삼키고 주를 비방하는 비방이 내게 미쳤나이다
예수님께서 성전을 사모하는 열심이 자신을 십자가에서 죽게 했고 비방이 다가왔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사모하는 열심은 ”젤로스“로 동사는 ”제오“(끓이다, 뜨겁다)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성전을 향한 열심, 열정은 물이 뜨겁게 끓는 정도의 열심인 것입니다. 이 열심이 자신을 죽음까지 몰고갔다는 것입니다.
왜, 예수님은 죽기까지 주의 전을 향한 열심을 가지고 계실까요?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셔야 보혜사 성령이 우리에게 오시고, 우리 안에 거하심으로 우리가 성령의 전이 되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16:7]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실상을 말하노니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
예수님이 죽으시고 하늘로 떠나 가셔야 성령님, 보혜사가 오신다는 것입니다.
우리를 성령님이 거하시는 성전을 삼고자 하는 예수님의 사랑은 자신이 십자가에서 삼켜지는 사랑인 것입니다. 그토록 자신이 삼켜지더라도 우리의 옛 성전을 헐고 새 성전을 짓고 우리 안에 가히고자 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4:20]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
우리와 하나되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 예수님께서 죽기까지 사모하면서 우리가 성령이 거하는 성전이 되기를 원하시는데, 우리가 할 일은 우리의 옛 성전을 헐어버리는 일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몸이 성령이 거하는 성전이 되어야 합니다.
[고린도전서 6:19]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 자신의 것이 아니라
유대인들은 이런 영적 원리를 모르고 잇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요한복음 2:20] 유대인들이 이르되 이 성전은 사십육 년 동안에 지었거늘 네가 삼 일 동안에 일으키겠느냐 하더라
주님은 눈에 보이는 이 성전도 헐어지기를 바랬던 것입니다. 마치 자신의 육신이 헐어져서 다시 부활하심과 같이 구약적 제사를 드리는 이 성전도 헐어지고 각자의 마음속에 하나님이 거하시는 새로운 성전이 세워지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제4성전을 필요없습니다. 에스겔 성전도 지금 이 땅에서 세워지는 것이 아니라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이루어지는 영적 성전인 것입니다. 포로된 그들에게 소망을 주기 위한 이상적인 성전인 것입니다.
<맺는 말>
오늘 말씀을 더 영적으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오늘 말씀 앞 뒤의 내용도 보아야 합니다.
앞에는 물을 포도주로 만드신 예수님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요 2:1-11). 이것은 예수님을 통하여 새로운 포도주를 마셔야 하는 시대가 왔다. 새로운 포도주를 새 가죽부대에 넣어야 하는 시대가 왔다. 그래서 물세례 차원에서 성령세례 차원으로 변해야 한다. 구약적 차원에서 신약적 차원으로 바뀌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 말씀을 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을 통하여 성전도 제사도 바뀌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구약적 성전, 제사를 엎고 성령이 거하시는 성전을 세워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 후에는 어떤 내용이 나옵니까? 니고데모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런데“ (헬, 데)로 시작합니다. 앞의 내용을 반대로 받을 때 사용하는 단어로 ”그런데, 그러나, 그러나 오히려“이런 뜻입니다.
”너희들은 46년 동안 겉은 화려한 성전을 짓고 있지만 그 속은 장사하는 집이요 강도의 소굴이 되었다. 그 안에는 하나님 거하실 수 없고 죄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그래서 너희들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 그러나 봐라, 이러면서 니고데모 이야기를 하시는 것입니다.
그는 나의 표적을 보고 찾아 왔다. 그가 나를 믿음으로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서 성령이 거하시는 새 성전을 짓고 있다”
이 말씀을 하고 싶은 것입니다.
유대인들에게 니고데모라는 한 개인이 예수를 믿어 성령으로 새로운 성전을 짓고자 하는 것을 샘플을 보여주고자 하는 것입니다. 왜, 이렇게 연결시키
예수님과 니고데모의 주요 화제가 ”물과 성령으로 거듭남“에 대한 이야기를 하시는 것으로 보아 우리는 이런 예수님의 의중을 짐작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요 3:5-8)
니고데모는 그 뜻이 ”백성의 승리“ 라는 뜻입니다.
※ 니코스 (승리) + 데모스(백성)
그의 이름도 그의 마음에 성령이 임하는 새 성전을 지어는 승리하는 백성의 모습을 암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결국 니고데모는 요 3장에서 주님을 만난 후에 요 7장에서 예수님을 잡고자 하는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을 책망합니다. ”우리 율법은 사람의 말을 듣고 그 행한 것을 알기 전에 심판하느냐“ (요 7:51), 그리고 예수님 죽으신 후에 장례를 위하여 몰약과 침향 썩은 것을 백 리트라 (32.7kg)쯤 가져 옵니다 (요 19:39).
이 정도가 되었다면 그는 예수님을 믿은 사람인 것입니다. 새 성전을 지은 사림인 것입니다
우리들 마음에 성령이 거하시는 전을 짓고자 하는 예수님의 열심을 아셨습니까?
자신을 십자가에 내어 주더라도 새로운 성전을 짓고자 하는 열심입니다.
우리들 속에 모든 더러운 것, 장사하는 마음, 강도와 같은 마음을 회개하시고 그동안 오래동안 지어왔던 구약적 성전을 다 부수셔야 합니다. 옛 사람이 삼켜져야 합니다. 그러면 보혜사 성령께서 임하시어 우리들 가운데 새 성전을 짓고 거하실 것입니다.
주님이 사모하는 열심으로 세우기를 원하시는 성령의 전을 세우셔서 주님이 내 안에, 내가 주님 안에 가하는 여러분들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