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II) 한국에 있어서의 세계관 연구의 현재와 미래
이와 연관해서 우리 자신의 문화현실을 돌아보는 것도 유익할 것이다. 기독교 세계관 연구가 우리에게 최초로 소개된 것은 기독교 학문 연구회의 전신인 스타디구릅들에서 비롯한다. 그것은 기학연의 발단과 80년대 상황에 연관되어 있다. 당시의 정치적 상황에 대응한 몇몇 복음적인 신앙인들의 기여가 컸다. 그러나 이제 어느덧 현실이 변하여 오늘날의 세계관 연구는 문화시대라는 새로운 배경을 맞이하게 되었다. 여기에는 해방신학등 이데올로기 싸움과 월터스토프가 말하는 경제정의와 평화 실현의 맥락과 더불어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문화적 배경을 추가해야할 전세계적 현실과 우리 현실 사이에는 상당한 유사한 패러랠리즘이 존재함을 볼 수 있다.
이런 세계적 추세속에 90년대에 들어서 우리의 문화현실은 큰 전환기를 맞고있다. 또 문화현실의 변화는 이미 한국교계에도 많은 자극을 주었고 교계가 이에 대안 마련에 부심하고 있다. 왠만한 교회는 사경회나 부흥회를 연상하게 하는 그럴 형편이 못되면 보통 한두차례에 걸쳐 문화특강을 열고있다. 교회의 문화적 관심은 전시대에 알려졌던 수준을 훨씬 넘어서고 있다. 그러나 정작 이러한 잔치에 참여도는 기대에 못미치고 있다. 이러한 잔치가 대상으로 하는 가히 문화세대라고 할 수 있고 실제로 대중문화의 주체적 소비자인 청소년과 젊은이들이 별로 매력을 느끼지 못하기 때문이다. 교회가 문화적인 면에 신경을 쓸수록 오히려 젊은이들을 잃어가고 있는 것 같다. 한국교회의 전반적 현실은 급변하는 문화추세에 대한 바른인식과 대안의 부재로 특징지워질 수 있다. 이러한 모습은 이미 각종의 후진성으로 나타나 빈곤한 결과를 낳고있다. 즉 뒷북치기, 관심의 부재, 전문가의 부재와 아마추어리즘, 미래에 대한 비젼의 부재, 전략의 부재, 후원과 연구의 부재, 연구기관의 부재를 들 수 있다. 이것은 가히 총체적 부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현실이 이렇듯 날로 화려해져만 가고 사람답게 사는 환경조성은 뒷전인 요즈음의 문화추세에 대한 비판으로서의 밝은 문화운동이 중요하다. 우리 현실에는 화려하지만 그 속이 어둡고 추하고 악한 문화 대신에 밝고 소박하며 바른문화가 필요하다. 자세히 살펴보면 요즘 우리들 주변에는 음란과 폭력의 문화라는 새로운 형태의 폭력에 의한 피해자들이 적지않다. 이러한 문화가 화려하게 피어날수록 우리는 신앙생활에 장애를 느끼고, 우리의 청소년의 정신과 육체는 멍들고, 사회는 죄악에 물들어 갈 것이 뻔하다. 특히 문화산업에 종사하는 우리의 형제 자매들은 이런 문화에 저항하다가 생활 기반을 잃고 극한의 어려움을 호소하고 있다. 이런 현실 속에 만일 경건이나 기타의 다른 종교적 의무의 이름으로 문화운동을 피하려고 한다면 그것은 무책임한 일이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하나님 말씀에 불순종 하는 일이다.
초대교회로 부터 신실한 기독교인들은 문화의 영을 분별하고 기독교적 원리의 입장에서 비판하는 안목과 나아가 그 문화를 복음의 능력으로 변혁하고자 하는 열정이 있었다. 이처럼 기독교인의 문화운동에는 변혁에의 열정이 중요하다. 요즘 문화연구가들이 잘 보여주듯이 역사와 사회속에 주어진 환경이나 전통은 그것을 수용하는 과정에서 제이의 자연과 같이 작용할 뿐, 완전한 결정적 요인은 아니다. 그래서 문화는 일종의 전략이라 할 수 있다. 우리가 급변하는 문화현실, 특히 대중문화의 영을 분별하는 안목을 갖고 그에 따른 바른 전략을 갖출 때, 우리는 이시대의 문화를 바로 비판하고 변혁하므로 치유하는 임무를 보다 잘 감당할 수 있게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