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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은 수렁에 빠진 대구 |
[김용락 칼럼] "언론의 책임도 크다. 지식인의 책임은 없는가?" |
내 전공인 문학이야기로 시작해서 좀 그렇다. 하지만 이야기를 펼쳐보자.
문학비평에 보면 ‘신비평’(New Criticism)이라는 게 있다. 1920년대 미국에서 시작해서 1960년대 초반까지 세계문학 비평계의 일단을 담당했다. 한국문단에서도 1960년대 백철이라는 비평가가 소개하면서 한국문학에서도 부분적으로 활용된 비평이론이다. 간단하게 말하면, 그 이전에는 평단의 주류 문학비평이론이 ‘역사주의비평’인데, 이 비평방법은 작품의 외적 요인 가령 작가, 인종, 언어, 역사와 같은 2차 정보를 작품분석에 중요한 근거로 사용하는 반면, 이에 반발해서 생긴 신비평은 작품 외적인 요인은 가능한 한 제외하고 작품 자체만 두고 미학적으로 분석하는 비평이론이다.
그러니까 작품 분석을 언어와 조직을 가진 '그 자체로서의 텍스트'만을 다룬다고 할 수 있다. 텍스트의 부분들이 어떻게 연관되어 있는가, 그 텍스트가 어떻게 '질서'와 '조화'를 얻는가, 그 텍스트가 어떻게 '아이러니', '패러독스', '긴장' '양가성' 그리고 '애매성'을 포함하고 해결하는가를 추적하는데 관심이 있을 뿐이다.
미국의 남부 이데올로기와 '신비평'
신비평에 대해 역시 미국의 저명한 비평가인 프레드릭 제임슨이라는 사람이 이 비평 방법에는 ‘남부이데올로기’가 배경에 있으며, 1920년대 미국의 대학이 대중화될 때 대폭 늘어난 ‘얼간이’ 대학생들을 가르치기 편하게 고안된 비평방법이라고 비판한 적이 있다.
미국 대학이 대중화되면서 대학생 수가 급격히 늘어나니까 이들에게 작품의 2차 자료인 작가의 생애, 언어, 민족과 같은 개념을 다 가르쳐서 문학작품을 분석하는 게 힘에 부치니까 작품 자체만 다룬다는 뜻이다.
미국의 남부이데올로기란, 17세기에 유럽에서 처음 미국남부로 건너온 이주민들이 남부지역에 터를 잡고, 면화, 담배 등의 농작물을 대규모로 재배하면서 아프리카에서 건너온 흑인들을 노예로 부리면서 농장의 대지주 살았던 정신을 말한다. 당연히 이들은 정치적으로는 보수적이고 종교적으로는 복음주의 프로테스탄트 기독교를 고수해 왔다. 그러나 알려진 바처럼 남북전쟁에서 남부가 패하면서 노예가 해방되고, 북부지역의 산업화가 발달하면서 미국의 중심은 북부로 옮겨가게 된다.
그러나 남부의 대지주들은 여전히 흑인노예를 부리는 대지주로서의 백일몽에 빠져있다. 그러니까 남부이데올로기란 보수적이면서 현실의 변화를 수용하지 않는 정신 상태를 말하는 것이다. 현대에 들어와서도 미국 남부가 타 지역에 비해 정치 경제적으로 후진성에 빠져 허덕이는 것도 다 이런 배경 때문이라는 게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남부의 이런 정신은 노예들이 뭘 많이 알고 사회현실에 관심을 갖게 되면 통치하기 힘드니까 무식하게 살도록 교묘히 세뇌하고, 역시 대학생들에게도 정치, 경제나 사회과학을 읽히지 않아 일종의 ‘무뇌아’ 만들겠다는 전략이 숨어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문학적 표현 방법이 바로 신비평이라는 게 제임슨이나 신비평 비판자의 논리인 것이다.
추락하는 대구
지난 7월 30일자 <영남일보>를 읽고 불현듯 오래 전에 읽은 미국의 남부에 대한 생각이 떠올랐다. 지금 대구가 미국의 남부가 밟았던 침체와 후진의 늪과 다른 점이 무엇인가? 이 신문의 ‘대구는 어디까지 추락하는가?’라는 특집기사에서 대구의 현재 모습을 잘 그리고 있다. 그 기사에서 7월 29일 통계청이 발표한 2000∼2007년 지역별 연평균 지역내총생산(GRDP) 성장률(연쇄지수기준)에 따르면, 지난 7년간 대구의 경제성장률은 2.9%로 전국 16개 광역단체 가운데 꼴찌에 랭크됐다. 1위인 충남의 3분의 1에도 못미쳤다.
▲ <영남일보> 2009년 7월 30일자 신문 1면
대구의 1인당 지역 내 총생산액(GRDP)은 2007년 기준 1천306만원, 전국 평균을 100으로 봤을 때 64% 수준이며, 1위인 울산(4천450만원)의 30%에도 미치지 못하고, 제주(1천604만원)보다도 낮은 꼴찌였다. 이 같은 지역경제 침체는 국가연구개발사업 비중에서도 그대로 나타나 교육과학기술부가발표한 2008년 국가연구개발사업 투자 지역별 추이에서도 대구의 국가연구개발사업 비중은 7개 광역시 중 6위에 그쳤다.
경제지표의 수치만 이런 게 아니다. 대구는 실제 피부로 느끼는 경기도 어렵고 도시 자체도 활기가 없고, 자부심과 자긍심이 사라진 지 오래된 도시처럼 보인다. 야망을 가진 젊은이들도 보이지 않는다. 물론 경제지표가 대구의 모든 것을 말해주는 것은 아니고, 물질적인 삶이 한 지역의 삶의 가치를 전부 말하는 것도 아니라고 자위를 해도 그가 대구사람인 이상은 이런 기막힌 현실에 대해 씁쓸하고 안타까운 심정인 것은 사실이다.
여.야.진보.보수, 가리지 않고 대책 마련할 때
‘대구는 특정고 출신과 특정 정당이 정치·행정 권력을 장악, 오랫동안 집단 간 경쟁 없이 주류층을 형성해오다 보니 도시전체가 정체된 것’이라고 분석(백승대)도 공감이 가고, ‘남을 인정하지 않고, 나 아니면 안 된다는 폐쇄적인 생각을 가진 대구병’ (홍덕률) 때문이라는 진단에도 역시 공감이 간다.
한때 섬유도시로 잘 나가고,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로 이어진 30여 년 간의 집권 시절에 쌓은 허위의식 때문에 대구가 깊은 수렁에 빠진 것은 사실이다. 그렇다면 이 병통을 어떻게 치료할 것인가? 금방 생각해도 특단이 있을 것 같지는 않다. 지역의 특정 정치집단, 무능한 지도자의 책임이 없지 않지만, 비판세력을 자임하고 있는 언론의 책임도 크다는 게 내 생각이다. 이렇게 책임 소재를 따지다 보면 대학 교수를 비롯한 지식인 그룹은 책임이 없는가? 결코 책임 없다고 말 할 수 없을 것이다.
모두의 책임이지만, 정치 지도자나 언론, 대학과 같은 공적 기구의 책임이 더 크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다. 이 병통이 최악의 상태로까지 가기 전에 여, 야, 진보, 보수 가리지 않고 뭔가 대책을 마련해야 할 때가 된 것은 분명하다.
[김용락 칼럼 28] 김용락 / 시인. 경북외국어대 교수.
평화뉴스 칼럼니스트 daegusc@hanmail.net
▲ <영남일보> 2009년 7월 30일자 신문 1면
▲ <영남일보> 2009년 7월 30일자 신문 3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