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산대사삼가귀감三家龜鑑
청허당은 청허 유정 서산대사를 기리는 뜻에서 붙여진 당호입니다.
서산대사하면 삼가귀감三家龜鑑이 떠오릅니다.
서산에게는 세 권의 귀감이 있습니다.
하나가 선가귀감이고 둘이 도가귀감이며 마지막 하나가 유가귀감입니다.
삼가란 동아시아의 가장 주요한 사유체계인 선가(불가), 도가, 유가를 의미합니다.
서산은 이 세 개의 귀감을 통하여 삼가를 회통하고자 했던 바, 그 회통의 기준이 이심전심, 견성성불, 즉심시붕이라는 선의 정신입니다.
그는 이 선의 정신을 근거로 불교경전과 도가의 경전 그리고 유가의 경전을 일이관지一以貫之 즉 모든 것을 하나의 원리로 꿰뚫어 이야기하고자 한 것입니다.
삼가귀감을 이야기하면 또 떠오르는 사람이 있죠?
바로 부사浮査 성여신(1546~1632)입니다.
단속사에 불을 지른....
지난 번 진행한 산청의 산줄기 중에서 발췌합니다.
단속사라!
불교의 선종과 교종의 만남을 보여주던 단속사!
휴정(1520~1604, 서산대사)이 삼가귀감을 저술하면서 유가의 글을 맨 뒤에 둔 것에 분개하여 젊은 혈기에 단속사에 불을 지르기도 했던 부사 성여신(1546~1632)의 분기탱천한 모습이 어른거립니다.
잠깐 단속사를 봅니다.
단속사의 단속斷俗은 속세와의 인연을 끊는다는 말일 게다. 금계사였던 원래 이름을 단속사로 바꾸면서까지 용맹정진하려는 수도승의 의지가 자못 결연해 보인다. 지금은 보물 72호와 73호로 지정된 동·서삼충석탑 두 기와 당간지주만이 예전의 화려했던 영욕의 역사를 보여주고 있다. 이 보물인 탑 두 기가 있다고 하여 붙여진 탑동마을의 단속사로 들어가 볼까?
참고 사진 : 단속지의 동서 삼층석탑
1487년 9월의 남효온이나 1489년 4월의 김일손은 우리와 같이 산청에서 곧바로 웅석봉을 통하여 점촌을 지나 단속사로 온 게 아니라 당시는 단성현이어서 현내리란 이름으로 불렸을 단성면 소재지를 통하여 들어왔다. 웅석봉이 길을 막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광제암문廣濟嵒門’이라는 글귀가 새겨진 바위를 보고 이곳에 들었다 했다. 이 단속사의 창건과 관련해서는 두 가지 설이 있다.
“신라 경덕왕 7년(748년) 대내마 이순이 임금에게 총애를 받고 있었는데 어느 날 관직을 버리고 승려가 되어 단속사를 창건하고 그곳에 거처했다.”는 ‘이순’설과, 삼국유사 신충괘관조에 의하면 763년 신충이 벗들과 함께 지리산에 들어가 왕을 위하여 단속사를 짓고 죽을 때까지 왕의 복을 빌었다고 하는 ‘신충’설 등이 그것이다. 1489년 김일손의 두류기행록에 위하면 “신라의 유순(이순의 오기인 듯)이 녹봉을 사양하고 불가에 귀의해 이절을 창건하였다.”는 그 절의 승려의 말을 인용한 것을 보면 ‘이순’설이 맞는 것 같다.
참고 사진 : 단속사지의 정당매
이 단속사를 얘기하려면 매화나무 자세히는 정당매를 빼놓을 수 없다. 이 단속사에서 공부하던 조선 전기의 학자 강희안(1417~1464)의 조부 강회백이 이 절에서 공부를 할 때 손수 매화나무 한 그루를 심었는데 뒤에 급제하여 정당문학이라는 벼슬에까지 이르게 되자 이 매화나무가 ‘정당매’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다. 김일손의 ‘정당매 시문후’에 이 내용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이 단속사가 한국 불교사에서는 상당한 비중을 차지한다. 즉 통일신라시대나 고려시대를 통하여 선종이나 교종과 관련하여 아주 중요한 임무를 수행했던 사찰이었던 것이다. 여기에 8세기 초 신라 승려 신행(704~779)이 등장한다. 그는 당나라에서 북종선을 배워와 신라에 그 불법을 전했는데 그 최초의 사찰이 바로 이 단속사이기 때문이다.
중국의 선종을 볼까? 인도의 불교를 중국으로 가지고 온 달마대사가 세운 중국의 선종은 8세기 초 크게 북종선과 남종선으로 나뉜다. 북종선은 중국 선종 4대 조사 도신의 법맥을 계승한 선종 불교로서 당시 교종이 성행하던 신라사회에 불교사상의 폭을 넓히는 계기가 됐다.
신라 왕실이나 귀족사회와 깊게 연결이 되어 있는 이 단속사가 중요한 역할을 하는 이유는 위 신행과 그의 스승인 법랑에서 비롯되는 바, 이들의 활동은 김헌정의 ‘단속사 신행선사비’에 잘 나타나 있다. 도신이 입적하자 신행은 중국 선종 6조인 신수의 법손法孫 지공에게 사사師事해서 크게 깨달은 후, 759년 단속사에 머물면서 북종선을 전파하는데 노력했다. 하지만 교종과 선종을 아우른 북종선은 신라 중대왕실이 무너지면서 쇠퇴하기 시작하였다.
예전의 단속사의 규모는 “광제암문에서 짚신을 갈아 신고 절을 한 바퀴 돌고 나오면 다 헤졌다.”거나 “쌀뜨물이 10리 밖에서도 보였다.”는 말들로 알 수 있다. 김일손은 그가 이 단속사를 방문했을 때에는 절이 황폐화 되지 시작하여 승려가 거처하지 않는 방이 수백 칸이었다고 그리고 있다. 그런 절이 억불숭유 정책과 사찰에 대한 과도한 노역과 세금으로 쇠락하다가 1568년 이 절에서 공부하던 유생들이(특히 성여신) 불상을 훼손하고 경판을 불태운 사건이 있은 후 그 속도가 더해지다 1598년 정유재란 때 완전히 소실되어 현재의 터만 남아 있다
( -졸고 '현오와 걷는 지리산 둘레길' 초고 중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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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이 어떻게 유교를 논하나’불·유·도-3교의 가르침 정리한<삼가귀감> 목판본 파괴‘괴기스럽다’ 사천왕상 불태워 절터엔 석탑 두기만 덩그러니 동부 지리산의 관문, 경남 산청군 신안면 원지에서 경호강을 건너면 단성면으로 들어서게 된다. 지리산 천왕봉 아래 중산리에 이르는 국도 20호선 ‘지리산 가는 길’을 이곳에서는 ‘지리산대로’로 명명해 놓았다.경호강을 가로지르는 단성교에서 도로를 따라 5km 남짓 진행하면 ‘남사예담촌’이 나온다. 오래된 돌담길과 고택, 그리고 회화나무 풍경으로 잘 알려진 곳이다. 그런데 이곳 마을 뒤 언덕에는 뜻밖에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흔적이 서려있는 ‘역사의 현장’이 있다. 바로 ‘이사재’라는 곳이다. 이순신 장군이 경남 합천에 있던 권율장군의 도원수부로 백의종군하는 길에 하룻밤을 묵고 간 곳으로, 박호원이라는 사대부의 머슴이 살던 곳이다. 난중일기에는 이날 밤새도록 퍼붓는 비에, 불편한 방에서 겨우 밤을 지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백의종군길에 나선지 두 달여, 몸서리치는 고문과 모친의 장례도 제대로 치르지 못한 자괴감과 회한이, 퍼붓는 비와 더불어 온통 그 비좁은 공간에 뒤엉켜 있었음을 짐작해 본다.남사예담촌을 지나 지리산 방향으로 잠시 진행하면 삼거리가 나온다. 이곳에서 직진 방향 지리산 가는 길을 버리고 오른쪽 청계·입석 쪽으로 향한다. 마치 가로수처럼 도열해 있는 감나무와 가을걷이에 분주한 시골 풍경과 함께 7km 정도 달리면 ‘단속사지’가 나온다. 산골마을 한가운데 석탑 두 기가 덩그러니 서있는 황량한 풍경을 지닌 곳이다. 한때 수많은 사람들로 붐벼, 속세와의 인연을 끊는다며 단속사(斷俗寺) 라는 이름을 지니게 되었다지만, 이제 절집은 사라지고 세상 사람들에게 집터로 내어준 지가 오래되었다.1568년 당시 이곳 단속사에서는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청허당 서산대사가 편찬한 ‘삼가귀감’ 목판이 파괴되고, 이 절의 사천왕상이 불태워지는 사건이 벌어진 것이다. ‘삼가귀감’은 서산대사가 ‘유불도(儒佛道)’가 이루려 하는 것은 다르지 않다’라는 취지로 불교(선가귀감), 도교(도가귀감), 유교(유가귀감)의 좋은 내용들을 정리하여 합본한 것인데, 이 책을 출판하기 위해 판각해 놓은 목판을 진주 유생 성여신과 그 일행이 깨부수고, 또 절집의 사천왕상 모습이 괴기스럽다며 불을 질러버린 것이다.1549년(명종4) 승과에 급제하고, 선교양종판사라는 벼슬로 서울 봉은사에 머물던 서산대사는 자신이 해나갈 본연의 일은 수행에 있다는 것을 깨닫고, 어린 나이에 출가하였던 지리산 자락 하동으로 다시 돌아오게 된다. 이때부터 본격적인 수행을 하면서 후학들의 공부를 위해 삼가귀감을 편찬한 것이었다. 그런데 성여신이 목판을 깨부순 이유가 참으로 황당하다. 삼가귀감에 유가의 글을 맨 마지막에 두었기에 그러했다는 것이다. 물론 중(僧)이 감히 어떻게 유교를 논하느냐는 비아냥과 함께. 이때 서산대사의 세속 나이는 49세, 성여신은 23세 되던 때였다.그리고 이 사건의 전말을 전해들은 성여신의 스승 남명 조식 선생은 ‘공자께서 언행이 대범한 사람을 취한 까닭(광간 狂簡)’ 운운하며, 다소 과격하긴 했다하면서도 은근히 성여신의 행동을 두둔한다. 모르긴 해도 남명선생과 서로 공경하며 교류해오던 서산대사는 사건의 당사자로 혈기왕성한 20대의 성여신보다, 남명의 태도에서 더욱 서운함 혹은 무력감을 느꼈을지도 모를 일이다. 당시 남명은 서산대사의 제자인 사명대사에게도 시를 써서 주고, 문집에 글을 남기고 있을 정도로 종교를 떠나 서로 교류해오고 있었으니 말이다. 아무튼 그 사건 이후 서산대사의 행적은 지리산에서 서서히 자취를 감추게 되고, 훗날 묘향산에서 큰스님의 모습으로 나타나게 된다. 그런데 어떠한 인연인지 더욱 놀라운 것은 서산대사의 속가명이 ‘최여신’으로, 성여신과 같은 ‘여신汝信’이었다는 것이다.
조용섭/‘지리산권 마실’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