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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 기행 / 투우의 나라
스페인, 즉 에스파냐를 향할 때 제일 먼저 떠오른 것은 투우였습니다. 선배들도 에스파냐를 제대로 알려면 투우를 이해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투우에 그 나라만의 역사와 문화와 특징 있는 민족성이 잘 함축되어 있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투우는 황소와 인간이 죽음을 걸고 대결하는 경기입니다. 관중은 물론 인간의 승리를 기대하며 그 승리가 눈앞에 실증되었을 때 열광하지만, 그 열광은 황소의 죽음에 대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투우는 보통 1회에 3명의 투우사가 각각 2마리의 황소를 1마리씩 상대해서 차례로 싸웁니다. 3명의 투우사가 6마리의 황소와 6차례 대결을 하는 셈인데, 1마리와 싸우는 시간은 보통 20분. 따라서 한번 경기가 벌어지면 2시간 정도 계속됩니다.
투우사에게는 2명의 피카도르(Picador: 말을 타고 창으로 황소의 덜미를 찔러 격분케 하는 사람)와 3명의 반데리예로(Banderillero:황소의 등에 3쌍의 창을 꽂는 사람)가 따릅니다.
투우가 시작되면 투우사(Matador)가 물레타(Muleta:투우용 붉은천)를 흔들며 황소를 리드합니다. 이때 2명의 피카도르가 말을 타고 달리며 창으로 덜미를 찔러 황소를 격분시킵니다. 이어 3명의 반데리예로가 묘기를 연출하며 황소의 등에 3쌍의 창을 꽂습니다.
이러한 전위 플레이가 5분 만에 끝나면 투우사가 단신으로 황소와 맞서는 차례가 됩니다. 주어지는 시간은 15분. 15분 안에 이 흥분한 황소의 심장에 칼을 꽂아야 합니다. 투우사는 붉은 물레타를 교묘하게 흔들며 맹렬하게 달려드는 황소를 멋지게 따돌리는 묘기를 수없이 되풀이 합니다. 투우사의 묘기가 연출될 때마다 원형경기장 전체가 뜨겁게 달아오르며 관중들은 열광합니다. 드디어 지친 황소가 잠시 멈추어 서는 순간, 투우사는 황소의 어깨에서 심장을 향하여 힘차게 칼을 꽂습니다.
엄숙한 죽음과의 대결에서 승리한 투우사에게 관중들은 "오라 데 베르도 (Ora de Berdo)! 오라 데 베르도!" 를 외치며 아낌없는 환호와 함께 흰 손수건을 흔듭니다. 흰 손수건을 흔드는 것은 승리한 투우사에게 죽은 황소의 귀를 잘라 주라는 관중의 요구입니다.
멋진 경기를 펼친 투우사에게는, 관중의 요구에 따라 나머지 귀와 꼬리까지도 잘라줍나다. 따라서 가장 많은 소의 귀와 꼬리를 가진 투우사가 그 해 ‘최고 투우사’의 영광을 차지합니다. 코리다 데 토로스(Corrida de Toros)라고 하는 이 투우의 근원은 목축과 농업의 풍요를 기원하기 위하여 황소를 신에게 바치는 의식에서 비롯되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단순히 황소를 바치는 것이 아니라 소와 인간의 죽음을 건 의식이라는 점에서 로마시대 원형경기장에서 펼쳐졌던 검투사와 맹수의 싸움을 연상하게 합니다. 영광의 왕좌에서 물러나는 선배는 후배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투우장에 있는 건 관중과 황소와 공포뿐! 공포를 느껴야 최고가 될 수 있다. 관중은 네가 죽음과 어느 만큼 가까워지는 가를 지켜보는 거다. 돈이 아니라 생명을 건 의식이며 예술이다. 관중이 있건 없건 혼자서 반드시 이겨내야 한다. 승자는 빛이요 패자는 실체가 없는 그림자로 남는다. 이것이 곧 투우의 세계이다."
따라서 투우사의 인생에 현실이란 중간층은 없다. 승리 아니면 죽음 즉 ‘빛이 아니면 그림자’ 식의 이원적 구조다. 강렬한 태양이 아니면 짙은 그림자인 것이다.
마찬가지로 이 나라 사회에는 부호 아니면 천민일 뿐 중산층이 없다. 성실하게 일하고 저축하는 것으로는 부호가 될 수는 없기에 노동은 생존을 위한 수단일 뿐 미덕이 아니다.
천민이 부호가 되려면 투우와 같이 생명을 거는 승부에 나서야 한다. 그래서 이 나라 가난한 젊은이들의 꿈은 투우장에 모인다. 스페인을 알려면 투우를 이해해야 한다는 말은 이런 극단적인 이원 구조에서 만들어진 말이다.
복잡한 민족, 언어 (종교)
에스파냐는 한때 세계를 제패했던 나라입니다. 유엔이 에스파냐어를 세계 공용어로 선정할 만큼 북아프리카의 일부와 브라질을 제외한 중남미 19개국 1억 5천만 인구가 이 나라 언어를 국어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 한 가지 사실만으로도 에스파냐는 충분히 자부심을 가질만한 나라입니다. 그러나 실제에 있어서 이 나라 국민들은 ‘에스파냐’ 라는 조국에 대하여 큰 애정을 갖고 있지 않습니다. 그 보다는 언어와 풍습과 문화를 같이 하는 소수민족들이 보다 작은 단위에서 독립적으로 생활하는 형태의 분리주의를 요구하고 있습니다. 세계 각지에 에스파냐어를 공용어로 하는 나라가 많은 만큼 이 나라는 여러 인종이 얽혀서 살며 복잡한 역사를 보여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에스파냐와 포르투갈을 포함한 반도를 이베리아(Iberia)라고 하는데, 고대로부터 이베리아반도는 유럽과 아프리카를 잇는 통로로서 온갖 종족이 거주했습니다. 피레네 산맥의 북방에는 저 유명한 알타미라 동굴의 벽화를 남긴 구석기시대인의 직계인 바스크족이 기원을 알 수 없는 시대부터 시작하여 지금까지도 독립을 요구하며 거주하고 있습니다.
이베리아반도 지중해 연안은 일찍부터 여러 민족과의 교통이 열려 기원전에 이미 페니키아인이 카디스에 상업기지를 건설하고, 그리스인이 발렌시아 주변에 식민시를 건설하였으며 카르타고도 바르셀로나에 정착하였습니다.
BC 3세기에 벌어진 카르타고와 로마간의 포에니 전쟁 이후에는, 패배한 카르타고는 추방되고 로마의 지배가 시작되었습니다. 로마의 지배가 5백 년간 계속되는 사이 라틴어가 보급되었는데, 이때 라틴어가 이 지방 언어인 켈트 어나 이베리아어와 섞이는 정도에 따라 달라지는 양상을 보이면서 커탈루냐어 카스티야어 포르투갈어 등이 성립되었습니다. 이 가운데 카스티야어가 현재 에스파냐어의 기본을 이루게 됩니다.
이와 함께 로마제국의 지배 아래에서 그리스도교가 전파되어 이 민족의 종교가 되었고 점차 국민생활과 정치 등에 깊이 관련하기 시작했습니다.
5세기 게르만인의 침략으로 로마는 쇠퇴했고, 뒤이어 서고트족이 이베리아반도의 대부분을 차지하여 왕국을 건설했습니다. 그러나 8세기 초 아랍인과 무어인에 의해 멸망하자 이 땅은 이슬람 지배하에 들어가게 됩니다.
그리스도교도에 의한 국토회복운동(레큰키스타)이 일어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그리스도교와 이슬람의 싸움은 이슬람의 지배 8백 년 동안 계속되었습니다. 이슬람의 지배는 10세기에 전성기를 구가했던 이슬람 세력은 북부지방까지 미치지 못하고 꺾이기 시작했습니다.
이슬람에 대항하는 국토회복운동은 북부의 아스투리아스와 피레네 지방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이 지방을 근거로 하여 일어난 레온, 카스티야, 나바라 왕국 등이 결국은 이베리아 반도에서 이슬람을 남쪽으로 남쪽으로 몰아냈습니다.
15세기 중엽이 되자 카스티야가 레온을 병합하고 나바라왕국에서는 아라곤 왕국이 분리되었는데, 1469년 카스티야의 이사벨라 여왕과 아라곤왕국의 페르난도 왕이 결혼함으로서 에스파냐는 역사적인 통일 국가를 형성하게 되었습니다. 가톨릭을 신봉하는 이 두 왕 아래 15세기 말 이슬람의 마지막 근거지였던 그라나다가 함락되고 국토회복운동은 완결되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에스파냐는 봉건사회로 이행되었고 포르투갈이 에스파냐로부터 분리되게 됩니다.
에스파냐의 황금시대는 이 때부터 17세기 후반 사이입니다. 에스파냐로부터 독립한 포르투갈이 상업적 이익을 찾아 북아프리카의 세우타를 점령한 뒤 대서양 탐험을 장려하여 카나리아 제도를 비롯, 여러 섬을 발견하고 적도 근처의 아프리카 서안에까지 진출하자, 에스파냐의 이사벨라 여왕은 C.콜럼버스를 지원하여 1492년 서인도제도를 발견하게 했습니다. 이후 신대륙 아메리카에 경쟁적으로 광대한 영토를 획득한 이들은 무역을 왕의 통제 아래 두고 막대한 이익을 챙기기 시작했습니다. 식민지 경영은 정복자에게 전권을 맡기는 봉건적인 것이었는데 원주민인 인디오에 대한 학대와 수탈은 참으로 가혹한 것이었습니다.
세계 최대의 폭포 이구아스의 장엄함 위에서 벌어졌던 원주민 과라니 족의 최후를 그린 영화 <미션(Mission)>에서 당시 스페인과 포르투갈 간에 있었던 영토 싸움의 한 단면과 원주민에 대한 잔인함을 볼 수 있습니다.
근대에 와서는 국제정치의 중심으로부터 동떨어지게 되었습니다. 근대자본주의의 발전이 뒤졌고, 중산계급이 서유럽국가들과 같은 힘을 지니지 못하고 낡은 사회제도를 청산하지 못함으로서 에스퍄냐의 역사는 동요(動搖) 속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상당기간 유럽의 주변에 머물던 에스파냐는 20세기에 와서는 사회적 모순이 내전 형태로 폭발하여 세계의 주목을 끌었습니다.
어네스트 헤밍웨이의 걸작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는 스페인 내전을 그린 작품입니다. 헤밍웨이는 정부군 편이었는데 내전 결과는 프랑코 장군이 이끄는 반란군이 승리하여 파시즘형태의 일당독재국가가 성립되었다가 75년 프랑코의 죽음으로 40년간 지속된 독재정치 체계가 붕괴되자, 76년 이후 언론 결사의 자유가 인정되는 민주주의 체제를 비로소 갖추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에스파냐 근대사에 있어서의 두드러진 특징은 아직도 계속되고 있는 지방분리주의입니다. 민중들이 에스파냐보다 갈리시아나 아라곤 등 옛 이름의 소 조국에 더 강한 애착을 보이고 있기 때문입니다.
분리주의가 카탈루냐와 바스크 등 다른 언어를 쓰는 지방에서는 反카스티야적인 감정, 나아가서는 反중앙집권주의로 나타나 소 조국 독립운동으로 연결되고 있는 것입니다.
지리 및 기후
스페인은 유럽대륙 남서부에 위치한 이베리아 반도의 약 5분의 4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북으로는 피레네 산맥을 경계로 프랑스 안도라 등과 접하고 남서쪽으로는 포르투갈과 길게 붙어 있으며 지중해의 발레아레스제도(Islas Baleares), 대서양 상의 카나리아 제도(Islas Canarias), 지브롤터 해협에 면한 아프리카 최북단의 세우타(Ceuta)까지가 스페인 영토입니다. 면적은 50만 5천 평방미터로 유럽에서는 프랑스 다음으로 넓은 영토를 가졌습니다. 남한면적의 약 10배가 되는 땅인데 인구는 4천만 명을 약간 웃도는 정도로 남한인구와 비슷하며 인구의 도시집중 현상은 최근에 와서 나타나고 있습니다.
특징은 전국토의 3분의 2가 메세타(탁자모양의 땅)라고 불리는 광활한 고원지대에 있다는 것입니다. 평균 해발고도는 600-750m이며 전체적으로는 약간 서남서의 포르투갈 쪽으로 기울어져 있는 형태인데 주위에 오목한 요지를 끼고 2천~3천 미터를 넘는 산맥 산계가 둘러싸고 있어 반도로서는 매우 대륙적인 지세를 나타내고 있습니다.
이러한 지리 환경에서 스페인은 크게 3지방으로 구별됩니다. 북대서양에 면한 북부지방은 서안해양성기후로 1년 내내 비가 내리고 따뜻한 겨울, 시원한 여름을 보입니다. 중앙의 고원 지대는 매우 추운 겨울과 건조한 여름의 대륙성 기후입니다. 건조한 계절에는 불모지였다가 비만 오면 푸른 들판이 되는 스텝(Steppe)이나, 민둥산과 다갈색토양의 독특한 풍광을 이곳에서 볼 수 있습니다.
또 하나, 지중해안에서 카탈루냐에 걸친 남부지역은 온난하고 습기가 많은 겨울과 건조한 여름의 지중해성 기후인데, 사하라에서 발생하는 고기압의 영향으로 남쪽으로 갈수록 더 덥고 건조한 날씨를 보여줍니다.
교육제도
의무교육은 6세에서 15세까지이며 무상입니다. 의무교육 후 3년제 일반 중등학교나 2년제 실업학교로 진학합니다. 그 다음 1년제 대학 예비학교를 거쳐 5년제 대학에 진학합니다. 33개의 대학이 있는데 이중 22개교가 국립대학입니다. 발렌시아 살라망카 세비야의 대학은 13세기에 창설되었습니다. 또 16세기에도 많은 대학이 문을 열어 오랜 역사를 지닌 대학이 의외로 많습니다.
스페인(에스파냐)을 빛낸 사람들
에스파냐를 가장 빛낸 사람은 누구일까. 이 나라에서는 선뜻 한 사람을 지명하기가 어렵습니다. 이슬람을 물리쳤을 때인 16세기에 에스파냐 미술은 가톨릭을 중심으로 크게 발전하였습니다. 16세기의 엘 그레코, 18세기의 고야, 19세기의 미로, 그리고 20세기의 거장 피카소가 배출되었습니다.
문학 역시 16세기가 황금기로서 라만차지방을 무대로 한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도 이때 발표되었습니다. 19세기 자연주의 흐름을 거쳐 20세기에 와서는 로르카가 우뚝 섰습니다. 1922년 J 베나벤테가 처음 노벨문학상을 받은 이후 56년에는 J R 히메네스가, 77년에는 V 알레익산드레가, 89년에는 C J 셀라가 각각 노벨문학상을 수상했습니다.
이외에도 음악과 연극 영화 건축 등 문화 예술분야에서 에스파냐를 빛낸 위인들은 너무나 많습니다. 그러나 1936년에 일어난 에스파냐 내전과 이에 이은 프랑코 체제는 많은 유능한 예술인들을 망명의 길로 내몰아 국내 예술계는 장기간의 침체기에 빠져드는 불운을 겪었습니다.
예를 들어 바스크 지방의 고도 게르니카에서 비극이 일어난 것은 1937년, 에스파냐 내전 때였습니다. 국민전선파의 비행기가 인민전선파의 퇴각로인 게르니카에 무차별 폭격과 기총소사를 가하여 주민 5천 명 중 1654명을 죽이고 889명의 부상자를 냈던 것입니다. 이 무자비한 양민학살 폭격에 항의하기 위하여 당시 파리에 있던 피카소는 <게르니카>를 그렸습니다. 그리고 이 대작을 파리 만국박람회 에스파냐 공화국관에 전시했습니다.
이 작품은 조형상의 대담한과 실험적 예술성으로 화제를 모았지만, 스페인 국내에서는 국민전선파의 승리로 정권을 잡은 독재자 프랑코 총통의 분노를 샀습니다. 피카소는 이 <게르니카>로 인해 프랑코 총통이 집권하는 동안 고국에 돌아가지 못했고 게르니카도 북유럽과 영국의 각 도시에서 전시를 한 후 뉴욕의 근대미술관에 보내져 보관되었습니다. 그 후 프랑코 총통이 죽자 피카소의 유언에 따라 스페인의 프라도 미술관으로 되돌려졌고 1981년 10월 피카소 탄생 1백 주년을 기념하여 국민들에게 공개되었습니다.
대항해시대에는 신대륙을 발견한 C 콜럼버스가 에스파냐 최고의 영웅이었습니다. 경쟁적으로 식민지를 확대해 가던 시절에는 소수의 병력으로 잉카를 점령한 F 피사로가 최고의 자리에 올라앉았습니다. 지금은 누구일까요? 1995년에는 마스터즈를 제패한 호세마리아 올라자발이 그 자리에 올랐었습니다.
탕아의 대명사로 뭇 남성의 흠모를 받았던 돈 후안의 근거지도 에스파냐의 세비야입니다. 세비야는 대항해시대에 아메리카 신대륙에서 가져온 금은보화로 번성한 도시입니다. 경제적으로 풍요로웠기에 미인도 많이 모여들었습니다. 술과 여자와 돈이 넘쳐났던 세비야에 돈 후안이 등장한 것은 조금도 어색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17세기 초 몰리나의 희곡 <세비아의 탕아와 돌(石)의 손님>에 등장하는 이 ‘돈 후안’ 또한 ‘돈키호테’ 못지않게 이 나라를 빛낸(?) 인물이라 해도 괜찮을 것입니다.
여행정보
유럽 패키지 투어 중에 에스파냐를 들리면 수도 마드리드와 92년 올림픽의 도시 바르셀로나는 꼭 들립니다. 이베리아반도 한가운데 위치한 마드리드는 해발 646m의 높은 지대에 있으며 1581년 도읍으로 지정된 이래 4백년 이상 이 나라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지가 되어온 도시입니다. 따라서 고색창연한 건축물과 미술관 박물관 유적 등이 많고, 옛날 모습을 그대로 간직한 거리도 곳곳에 남아 있어 여행의 기분을 고조시킵니다.
마드리드의 관문 바리하스국제공항과 파리에서 오는 국제열차 도착역인 차마르틴 역에 관광안내소가 있습니다. 시내에도 두세 곳 있지만 기왕이면 이곳에서 마드리드 시내지도와 "Monumental Tor Madrid"라는 소책자를 얻어두면 무척 편리합니다. 마드리드에서 꼭 볼 것은 프라도미술관과 투우 관람, 왕궁 등이며 저녁에는 거리의 밤 풍경을 즐긴 뒤 타블라오에 가서 풀라멩고 쇼를 구경하면 훌륭합니다. 프라도 미술관은 파리의 루브르 박물관, 런던의 대영박물관과 더불어 세계적으로 유명한 미술관입니다.
바르셀로나는 에스파냐 제2의 도시이자 카탈루나 지방의 중심으로 도시의 역사가 2천 년에 이릅니다. 75년 민주화와 함께 가장 먼저 자치권을 얻었고 카탈루나어를 이 고장 공용어로 지정하여 표준어와 함께 자랑스럽게 사용하고 있는데서 뿌리 깊은 독립정신을 엿보게 합니다.
5백 년 전 콜럼버스가 신대륙에서 수많은 재화를 가지고 왔던 도시. 거장 피카소를 키워내고 천재 건축가 가우디가 활동한 바르셀로나는 88년 서울올림픽의 바턴을 이어받아 92년 올림픽을 성대하게 치룬 도시이기도 합니다. 피카소미술관 미로미술관이 있으며 콜럼버스 탑 옆의 선착장에서는 30분마다 떠나는 유람선이 있고 콜럼버스 탑과 인접한 평화의 광장 서쪽에 해양박물관이 있습니다.
에스파냐 제3의 도시 발렌시아도 빼놓을 수 없는 곳입니다. 40대라면 우리나라에도 60년대에 소개된 영화 <엘 시드>를 기억할 것입니다. 엘 시드가 1109년 이슬람으로부터 발렌시아 지배권을 탈환하는 이곳의 이야기입니다. 15~17세기에는 지중해 무역의 중계도시로서 번영했고, 1936년 내전 때는 인민전선의 행정수도가 임시나마 여기에 있었습니다.
그리고 권할 곳은 안달루시아지방의 코르도바와 세비야, 그리고 그라나다입니다. 코르도바는 이 땅이 이슬람 지배하에 있던 전성기 때 수도였습니다. 이슬람 문화 절정기였던 10세기 유적이 도처에 남아있습니다. 당시 유럽 최고의 대학이 있었고, 수백 개의 이슬람사원, 호화로운 궁전 등이 있던 흔적이 있습니다.
공원에 높이 솟은 종려나무가 남국적인 인상을 물씬 풍기는 세비야는 안달루시아를 대표하는 도시이며 에스파냐 네 번째 도시입니다. 이슬람교도와 그리스도교도 간 공방전이 치열하게 벌어졌던 곳으로 역사적인 전설이 많은 도시이다. 근세에 와서는 비제의 <카르멘>, 모차르트의 <돈 후안>, 롯시니의 <세비야의 이발사> 등의 무대가 되었습니다. 이 지방 아가씨들이 유난히 정열적이고 아름다운 것과 연결지어보면 닭이 먼저인가 달걀이 먼저인가를 생각하게 합니다. 플라멩고의 본고장도 여기 세비야입니다.
그라나다는 이슬람교 왕국이 이베리아 반도 지배의 최후 거점으로 가장 오랫동안 번영을 누린 도시입니다. 아라비아 왕이 세운 알람브라 궁전을 비롯하여 대사원 등 이슬람교와 기독교의 유적들이 원형 그대로 남아있어 관광객이 발길을 멈추고 넋을 빼앗기는 곳입니다.
스페인 가는 길
스페인과는 비자면제협정이 체결되어 있어 2개월 이내 체류는 비자가 필요 없습니다. 그러나 입국 스탬프는 반드시 찍어야 합니다.
우리나라와는 8시간 차이지만 여름에는 썸머타임 적용으로 7시간 늦습니다. 스페인으로 가는 데는 항공 외에 철도 버스 등이 있습니다. 항공은 봄베이 카이로를 경유하야 마드리드까지 가는데 20시간 45분 정도 걸립니다. 그 외의 항공을 이용한다면 런던이나 암스테르담에서 갈아타는 것이 제일 빠르고, 프랑크푸르트나 취리히에서 갈아타는 방법도 있습니다.
기차는 프랑스 파리와 스위스 제네바에서 마드리드와 바르셀로나를 연결하는 특급열차가 있습니다. 1일 1편 내지 2편 운행됩니다. 남프랑스와 바르셀로나를 연결하는 국제 정기 버스 편도 계절에 관계없이 매일 운행되고 있습니다.
영국의 최남단 항구 플리머스에서 스페인 북부 산탄테르까지 영국의 페리가 여름에는 주2회, 겨울에는 주1회 운항합니다. 이탈리아의 제노바에서도 바르셀로나까지 여름에 한해 주3회 여객선이 왕래하고 있습니다.
국내 교통
국내 웬만한 곳이면 모두 항공편이 있고 1시간 이내에 갈 수 있습니다. 주요 공항은 마드리드 바르셀로나 말라가 마요르카 등인데 특히 마드리드와 바르셀로나 사이는 편수가 많고 1시간마다 Puente Aereo라는 셔틀편이 있습니다. 이 편은 여러 가지 할인 혜택이 있고 예약이 필요 없습니다.
철도는 국철인 렌페(RENFE)와 갈라시아 지방, 바스크 지방 등을 연결하는 지방철도가 있습니다. 철도 여행에서 알아두어야 할 것은 기차가 연착을 많이 하지만 시발역에서부터 출발이 늦는 경우는 없다는 것입니다. 유레일패스가 아닌 국내철도를 반복 이용할 경우면 체케트렌이라는 할인제도를 이용하면 좋습니다. 역의 관광안내소에서 친절하게 정보를 줍니다. 스페인 국내관광은 철도보다 버스가 싸고 편리합니다. 기차역은 대개 교외에 있지만 버스터미널은 도시 중심에 있어 시간도 절약됩니다.
통화 단위는 페세타와 두로
스페인 통화는 페세타(Peseta)이며 pts로 표시한다. 100pts는 760원 정도이며 물가는 대체로 우리나라 비슷합니다. 음식 값은 싸지만 가전제품 류는 품목별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가끔 페세타 대신 ‘두로’ 라는 호칭을 듣게 되는데 1두로는 5pts를 일컫는 말입니다. 10두로 라면 50페세타, 20두로 하면 100페세타입니다. 비자나 아멕스 다이너스 마스터 등 크레디트 사용은 어디서나 가능합니다.
숙박과 식사
스페인의 숙박시설은 유럽의 여러 나라들과 마찬가지로 다양하고 양적으로 부족하지 않아 이용에 불편이 없습니다. 고성이나 수도원을 개조한 국영 파라도르가 80여 곳 있고 도시에는 호텔, 오스탈, 펜시온, 폰다 등 여러 등급의 숙박시설이 있습니다. 물론 호텔이 가장 고급이고 그 다음이 오스탈, 펜시온 순인데. 펜시온의 숙박요금을 우리나라 장급 여관에 비교하면 적당합니다.
스페인 사람들은 먹는 일에 많은 시간과 의미를 부여합니다. 특히 점심의 식도락을 즐깁니다. 이곳의 표준 식사시간은 아침이 8시부터, 점심은 오후 1시부터, 저녁은 8시부터입니다. 여기 덧붙여 여행자가 꼭 알아야 할 그들의 낮잠 자는 습관입니다. 보통 점심 후 오후 4시까지 낮잠을 잡니다. 이를 시에스타라고 하는데 이탈리아에서와 같은 풍습입니다.
요리는 지방에 따라 특질이 다른데, 세고비아 지방의 새끼돼지 통구이와 갈리시아 지방의 낙지 숯불구이가 특히 인기 있습니다. 이들 요리에는 마늘과 올리브유가 많이 들어가는데 주문할 때 부탁하면 조절해 줍니다. 레스토랑은 입구에 그려진 포크 수에 따라 5등급으로 나뉜니다. 포크 5개 있는 곳이 가장 고급 식당이고 포크 수가 많을수록 음식 값이 비쌉니다.
기타
제반 경제여건이 우리보다 조금 낫다고 할까, 비슷한 정도여서 생활요령도 비슷합니다.
주의할 것은 물입니다. 스페인의 물도 유럽 다른 나라의 물처럼 그냥 마셔서는 안 됩니다. 특히 바르셀로나 부근에선 꼭 미네랄워터를 사서 마셔야 합니다. 다만 마드리드에는 그냥 마셔도 되는 물이 있습니다. 예외가 있다면 그라나다의 물입니다. 이 지방의 물은 옛날부터 전 유럽에 소문난 청정 자연수입니다.
축제와 연예 오락
가톨릭이 국교인 만큼 이 나라의 축제는 가톨릭과 관계가 깊습니다. 부활절과 성령강림일, 성모승천일 성모수태일 크리스마스 등 행사가 그것입니다.
투우 시즌은 봄부터 가을이며 큰 도시에서는 일요일마다 투우가 있는데 세비야의 봄 축제(4월 하순)와 마드리드의 산 이시드로 축제(5월 6일-14일), 팜플로나의 산 페르민 축제(7월 6일-14일) 때는 1주일 내내 투우가 행해집니다. 관광의 적기는 9월입니다.
국민성, 특징
스페인은 피레네산맥을 경계로 프랑스와 마주보고 있는 관계로 모든 것을 프랑스와 비교하길 즐깁니다. 더욱이 한 때 유럽에서는 ‘피레네산맥 이남은 유럽이 아니다.’ 라는 설이 돌았었습니다. 기후 풍토상 아프리카에 속한다는 것입니다. 스페인은 물론 이베리아반도 사람들이 이에 알레르기 반응(?)을 보였을 것은 자명하지 않을까요? 그래서 더욱 프랑스와 비교하는 것을 즐깁니다.
스페인 사람(Spanish)과 프랑스 사람(French)은 사뭇 다릅니다. 스페인이 낳은 세계적인 비평가 겸 소설가 마다리아가(Madariaga y Rojo 1886-1978)는 그의 저서 「에스파냐의 국민성」에서 이렇게 비교하고 있습니다.
…스페인은 남성적이고 모험을 즐기며 낭만적인 반면에 프랑스는 여성적이고 안정을 원하며 무엇인가에 집착하는 성벽이 있다. 스페니쉬의 삶은 그들의 자연처럼 분방한데 반해 프렌치들의 일생은 그들의 예술처럼 섬세한 것이다. 프랑스는 유럽의 다른 나라들과 같이 형식을 존중하지만 스페인은 동양에서와 같이 내용을 중히 여긴다는 점도 유념해 둘 필요가 있다. 스페인의 사회구성은 중간층이 육성되지 못하여 빈부격차가 크다. 농촌을 지배하는 대지주와 양모길드의 지도자, 도시를 지배하는 고급관료와 귀족 등이 강고한 상층계급을 이루고 있다. 가톨릭교회도 대지주로서 상층계급과 결부되어 있으며 정치적으로는 우파를 구성하고 있다. 하층의 노동자나 농민은 대체로 근면한 편에 속하는데, 차츰 인구의 도시집중 현상이 심해 여러 가지 문제를 낳고 있다.…
스페인에서의 레저는 가족중심이며 취미 스포츠 또한 영화감상이나 회식, 축구, 투우 등 도시형 오락이 크게 각광받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