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도의 역사] ■ 위도(蝟島) 섬마을의 구성 섬의 구성은 본섬인 위도를 비롯하여 식도, 거륜도, 정금도, 상왕등도, 하왕등도 등 6개의 유인도와 임수도, 형제도, 큰딴치도, 작은딴치도, 내조도, 중조도, 외조도, 딴달래섬 등 24개의 무인도를 합쳐 30여개의 섬으로 되어 있다. 위도면의 행정구역은 진리, 대리, 치도리, 정금리, 식도리, 거륜리, 상왕등리, 하왕등리인 8리 11분리 26반으로 편성되어 있고 약 1,300명 정도의 인구가 살고 있다. 위도는 위도면의 소재지로 각종 행정기관과 초,중,고등학교가 있으며, 2척의 여객선과 마을버스도 운행한다. 위도에는 파장금, 딴시름, 시름, 진리, 벌금, 정금, 도장금, 치도, 깊은금, 미영금, 논금, 전막, 살막금, 석금, 대리, 소리 마을이 있다. 마을의 이름을 살펴보면 ‘금(金)’이라는 명칭이 붙어 있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서해의 고기떼들이 몰려들어 황금어장을 이루어 파시를 형성하면서 마을 포구마다 돈이 들어온다고 하여 붙여진 것이라 하니 위도의 풍요로운 한 면을 엿볼 수 있다 ◈ 진리 (鎭里) 위도면의 면소재지. 위도에서 가장 먼저 사람이 정착하여 살았다고 전해지나 아직 사실 확인 작업은 이뤄진적 없다. 진리엔 전북 유형문화제 제101호인 "위도 관아"가 있는데 수군 진영이 있다하여 "진말"(진마을)로 불리워 오다가 일제 때 진리라 칭했다고 한다. 현재 진리엔 위도 중학교와 위도 고등학교 및 우체국, 농협등과 같은 행정기관이 자리하고 있다. 또한, 진리엔 한국전쟁당시 자체 방위대를 조직하여 향토방위를 하던중, 투철한 애국애족의 반공정신으로 내고장을 지키겠다는 의지로 고장을 지켰던 故 김길환, 김용만 이들 두분의 넋을 기리는 "반공투사 충혼비"가 세워져 있다. 진리는 보통 섬마을들이 세찬 바람에 비해 온화한 바람과 조용한 파도를 끼고 있는 마을이고 다른 지역에 비해 평야지대를 가지고 있어 논농사도 짓고 있다.
◈ 시름 진리에서 파장금으로 가다보면 파장금 못미쳐 작은마을이 바로 시름이다. 시름이라는 지명은 지형이 떡시루 모양으로 생겼다하여 "시루"로 불리워 오다가 지금은 "시름"이라고 불린다고 전해진다. 시름엔 위도 내연 발전소가 위치하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 벌금 (筏金) 진리에서 서북간 1km지점 떨어진 곳으로, 조선조 말엽 평산 신(申)씨와 창녕 조(曹)씨가 정착하여 마을을 이루었다고 전해오는데 지금은 다수의 성씨가 살고 있다. 이곳은 원래 지대가 낮은 지역으로 소금을 생산할 수 있는 여건이 좋아서 옛부터 소금을 생산하면서 마을이 형성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소금을 생산하는 소금벌이라서 "벌금"이라 칭하게 되었다 하는데 이 마을에는 천혜 자원의 위도 해수욕장을 끼고 있어 위도 관광의 중심지이기도 하다. 또한 이곳의 당집 근처 야산 정상에는 수 백년된 후박나무 숲이 있다. ※참고로 벌금항은 수심이 깊고 식도, 정금, 오잠 등으로 둘려 쌓여 파도와 바람을 다소 막을 수 있어 배를 만들거나, 정박, 대피하는데 적합한 장소로 옛명칭은 선소리(船所里)라 불렀다고 한다. (위도8경의 “선소귀범”/전라도 역사이야기-위도편, 정금도와 선소간은 밀물때 수심이 5장(丈) /약 18m)에 달하며, 썰물때는 육지로 변한다(저자; 무등역사연구회)
◈ 파장금 (波長金) 진리에서 동북간으로 2km 떨어진 곳으로 일제 중엽부터 칠산어장의 중심지로 근래까지 파시가 형성된 위도 제일의 항구이다. 격포에서 여객선이 출발해서 제일먼저 닿는 곳이기도 하다. 파장금 이라는 이름은 칠산어장을 끼고 있어 많은 어선들이 왕래하고 폭풍이 몰아치면 어선들이 대피하는 마을이며 물결이 길면 어선이 모이는 곳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 한다. 이곳은 방파제 시설이나 선착장, 등대 등이 설치되어 있고 지금도 상점과 술집들이 많이 남아있는 곳이다. 그래서인지 대부분의 마을 주민들은 어업과 상업에 종사하고 있다.
◈ 정금 (井金) 진리에서 동북쪽으로 1km떨어진 곳으로 최초의 인동 장(張)씨가 들어와 살기 시작하여 마을을 이루었다고 한다. 원래 지형상으로 볼 때 형체가 솥뚜껑과 같다하여 솥 정(鼎)자를 붙이고 이곳에 금이 나왔다 하여 금자를 붙여 정금이라 칭하였다고 하나 시간이 흐르면서 이 마을에 물이 많다는 이유를 들어 우물 정(井)자로 바뀌었다. 만조시에는 위도와 떨어진 섬마을이지만 간조시에는 걸어서 섬을 내왕할 수 있다. 그 옛날 이 정금 마을에 살던 장씨는 한때 엄청난 부를 이룬적이 있는데, 엽전으로 본 섬과의 다리를 가설하려고 하였다는 이야기가 전해온다.
◈ 치도 (雉島) 면 소재지인 진리에서 남쪽으로 1km떨어진 곳으로 고려조이래 사람이 살기 시작하여 오늘에 이른다고 한다. 마을의 이름을 치도라 부르는 것은 마을 형태가 마치 꿩모양 같다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전해온다. 현재 치도리엔 여러 성씨가 함께 살고 있으나 특히, 송씨와 서씨가 많이 거주하고 있다. 원래 치도리의 생업은 농업 위주였으나 일제시대 어업이 발달하기 시작하여 칠산어장의 중심지로 파시가 형성되었던 곳이다. 이곳에는 초등학교가 있으며 마을에서 바다를 거쳐 1km 떨어진 곳에 딴치도가 있다. 이 딴치도엔 지난 1931년 한 해동안 3번의 강한 태풍으로 인해 칠산어장에서 조업중이던 500여척의 배가 참화를 입어 6백명의 목숨을 앗아간 대참사가 있었다고 전해오는데, 딴치도엔 그들의 넋을 기리기 위해 "조령 기념비"가 세워져있다.
◈ 딴치도 치도리 마을 맞은편에 있는 섬으로 좌측이 큰딴치도, 우측이 작은딴치도다. 썰물이 되면 바닷길이 열려 갯벌체험 장소로 각광 받고 있다.(현대판 모세의 바닷길) ‘딴’이란 순수우리말로 ‘조금 떨어진’이란 뜻이다.
◈ 깊은금 (심구미 마을) 치도리에서 서쪽으로 1.5km떨어진 곳에 위치하며 깊을 심을 쓴 것처럼 마을이 매우 깊은 지형에 위치해 있다. 이곳엔 내원암 이라는 작은 암자가 있는데 이는 고창의 선운사(숙종때 자장율사가 창건)의 말사로 그 역사는 꽤 오래됐고 현재 내원암에 수백년의 역사를 간직하고 있는 탱화가 전해 온다. 창건 당시에는 큰 종이 있어 저녁에 울려 퍼지는 은은한 종소리가 10km 떨어진 멀리 식도까지 들렸다고 전해 온다.
◈ 대리 (大里) 진리에서 치도를 거쳐 서쪽으로 약 6km지점에 위치한 마을이다. 마을 형태가 큰 돼지의 목 형국이라 해서 "대저항"이라고 불리어 왔는데, 그후 대저항이 "대장"이라고 불려오다 큰 대(大)자에 마을 리(里)를 붙여 "대리"라 불렀다 한다. 대리는 일찍이 풍부한 어족 자원의 형성으로 많은 어선들이 어장을 형성하면서 큰 마을로 형성되어 왔다. 이곳은 대리 초등학교가 있었으나 폐교가 되었는데, 이 대리마을이 바로 중요무형문화재 제82-다호인 “위도 띠뱃놀이”가 전해오는 마을이다.
◈ 소리 (小里) 치도에서 대리를 넘어가기 전에 작은 마을이 있는데 이 작은 마을이 바로 소리다. 대리를 큰돼지 목이라 불렀던 것에 비해 소리는 소돌목으로 작은 돼지목이란 지명의 유래를 가지고 있다.
◈ 전막리 (前幕里) 대리에서 서쪽으로 약 0.5km떨어진 마을로 본래는 행정구역상 대리에 속해 있었다. 처음에는 농업을 생업 수단으로 했으나 점차 어업으로 생계를 이어가게 되었는데, 당시의 원시적인 방법으로 마을 앞 해역 갯벌에 대를 쪼개어 발을 엮어서 살을 만들어 바다에 말둑을 박아 살을 쳐놓고 밀물때 물을 따라 들어왔던 고기들이 썰물때 나가다 이 살에 걸리게 되어 많은 고기를 잡았다고 한다. 그래서 이곳을 살을쳐서 고기를 잡는다하여 "살막금"이라 부르게 되었는데, 일제 강점기에 살 전(前)자에 막 막(幕)을 써서 전막리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 논금 전막리에서 서쪽으로 도로를 따라 가다보면 나오는 곳으로 본 마을에서 유일하게 벼를 경작한다 하여 논금이라 하였다. 논금은 몇 가구 되지 않지만 조약돌 해변이 넓게 펼쳐져 있어 많은 관광객들이 몰려오는 곳이기도 하다. 원래는 대리에서 논금으로 직접 넘어가는 산길이 있었으나 지금은 전막리를 거쳐 논금으로 가는 순환도로가 넓게 나있다.
◈ 미영금 전막리에서 서쪽 해안가로 난 해안도로를 따라가다 보면 논금을 지나 넓은 모래사장과 조약돌 해변이 있는 조용한 미영금 해변이 보인다. 멋들어진 해안 절벽과 바위사이에 조심스럽게 들어앉아 있는 이곳은 섬의 정취를 느끼며 조용히 휴가를 즐기고자 하는 이들에게는 안성맞춤인 장소이다. 미영금 해변 뒤로난 해안도로를 따라 드라이브를 하거나 조용히 해수욕을 즐겨도 좋고 낚시를 즐길 수 있다.
◈ 거륜도 (車輪島) 대리마을에서 논금으로 약 1km쯤 넘어가다보면 서남방에 위치한 작은 섬마을을 볼 수 있다. 이곳이 바로 거륜도인데, 조선 초기부터 정씨, 서씨가 들어와 지금은 여러 성씨가 살고 있다. 이곳은 지형이 수레바퀴 같다하여 거륜도 또는 차륜도라고 칭하였다. 이곳에는 주위에 내조도, 중조도, 외조도, 퇴깽이섬(토끼섬) 등 기암이 장관을 이루고 특히, 낚시터로 유명한 곳이다. 그리고 섬에는 지네가 많은 것이 특징이라고 알려져 있다.
◈ 식도 (食島) 위도에서 동쪽으로 1km 지점에 위치한 섬으로 최초 여산 송씨가 정착하였던 곳이다. 식도라는 이름은 위도섬이 고슴도치형의 모습을 띠는데 이곳이 바로 고슴도치 머리(아가미)앞에 놓여 있어 고슴도치의 밥이라 불리어 오다가 일제때 식도라 부르게 되었다 한다. 이곳에는 옛부터 이곳에 물이 많이 나면 물밥을 먹게 된다는 전설이 있는데 따라서 식도에는 지하수가 없다. 촌로들의 이야기를 들으면 마을에서 우물을 파서 물이 나오면 마을이 흉한 일이 일어난다고 한다.
◈ 왕등도 (旺嶝島) 위도 본섬에서 서북방으로 약 20km 지점에 위치한 섬마을로 연대는 알 수 없으나 조정 관리들이 유배되어 살기 시작하면서부터 마을이 형성되었다 한다. 처음 입도한 사람은 노(盧)씨, 남(南)씨였다고 한다. 이곳은 이규보와 조선말엽의 거대한 유학자 간제 전우 선생의 유배지 이기도 하다. 원래는 섬의 명칭은 왕등(王登)이라 칭하였는데, 전간제선생이 입도하여 지명이 너무 높다하여 왕등도(旺嶝島)로 개명했다고 전해진다. 격포항에서 출발한 배가 위도를 거쳐 항해를 하다보면 서쪽 멀리 물안개 위로 봉우리 두 개가 솟아오른다. 모시적삼 속에 감춘 여인네의 젖무덤처럼 생긴 쌍둥이섬, 상왕등도와 하왕등도다. 이중 하왕등도는 성큼 발길이 닿지 않는 곳이긴 하지만 섬사람들의 인심과 삶의 모습에서 가슴 찡한 것을 느낄 만큼 추억을 주는 섬이다. 왕등도에는 우암 송시열의 유배지이기도 했으며 우암송시열의 자손들이 지금도 진리에 살고 있다 ※출처 : 한국문화유산정책연구소, 황평우 |
첫댓글 신만균 부회장님!
"위도(蝟島) 섬마을의 구성" 잘 접했습니다.
실증적인 역사자료 찾기가 무척 어려움을 느끼던 중입니다.
앞으로도 좋은 자료 부탁합니다.
위도를더알수있는자료고생했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