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표작>
Queen of Cups 외 2편
양안다
네 꼴을 좀 봐.
지루해질 때마다 손톱과 눈동자가
달의 모양을 모방하고 있다.
춤과 불과 절정에서
아름다워. 우리의 악몽 속에서 발레리나가
발끝을 세우고 있습니다. 종아리 근육을 풀었다가
당겼다가…… 뛰었습니다.
달빛은 우리 표정을 녹아내리게 만들었지요.
너는 조금 웃는다.
나는 조금 울고 있는데.
일회용 화약에
밤하늘이 조각난다.
그날 밤, 갈비뼈 안에 새 한 마리
기르고 싶었고 깃털을 가진 채로 우리는
그림자 위로 오차 없이 추락한다.
우매한 지식인처럼.
자애로운 여왕처럼.
“모두 무엇을 위해 나빠지는 걸까요.”
“그들의 부모요. 자식이자 사랑이요.”
의리만 남은 불한당처럼.
창문 밖에서 달이 타오르는데
거울 안에서 달이 얼어붙는다.
멍청이들을 기념하기 위해 잔을 부딪치자. 컵에는 알코올과 손가락과
빛의 반사만 각인됩니다.
너는 조금 손톱을 뜯는다.
나는 조금 눈동자를 떨고 있는데.
여름이 지나간 숲을 걷던 어느 날이었다.
우리는 숲속 깊은 곳 나무 밑에
우리의 믿음을 매장하려 했다—선한 기억은 선한 마음의
토대가 된다……
꽃삽 들고 흙을 퍼낸 건 나였습니다.
—무슨 벌레가 이렇게 많아?
—빨리 끝내봐. 견딜 수 없을 정도로 습하고 더워.
—여기에도 이렇게 많은 애들이 살려고 기어나오고 있어.
—나는 땀에 절면 죽고 싶단 말야.
믿음은 잠시 뒤로 두고
구름무늬 돗자리를 펼쳤습니다.
그리고 매정하게 사랑을 나누었다.
모순을 좇는 머저리처럼.
맹목인 줄도 모르는 지지자처럼.
밤의 숲에는
밤의 달이 뜨고
밤의 숲에는
밤의 우리가 나빠지고 있었다. 믿음을 잘 버렸네요.
이렇게 가벼운 줄 몰랐어. 부러진 가지를 모아
불을 지폈고 나체로 춤을 추었고
절정이었을까?
아름다워. 숲속의 호수가
달을 비추고 있었습니다. 물결을 풀었다가
당겼다가…… 뛰어들었습니다.
우리 중 누구도 익사하지 않아요.
네 꼴을 좀 봐. 까르르 웃음을 터뜨렸지.
너는 조금 춤을 춘다.
나는 조금 불을 지켜보고 있는데.
우리는 이 세계의 멀리건.
너의 잔에 달이 떠 있어.
나의 잔에도 달이 떠 있구나.
우리는 그것을 들이켰다.
내부에서 울고 있는 새와 함께
도주하는 빛에 대하여 노래하였다.
꿈 일기
끝없는 꽃밭이었다.
나는 어지러운 색채를 사랑했다. 나의 생각은 뒤섞이고 흔들리고 있었다. 두 발은 비틀거렸다. 날이 개었구나.
물웅덩이는 어제의 폭우에 대해 알려주었다.
나의 개야. 이제 그만 좀 뛰거라……
*
밤새 뒤척이다가
꿈을 꾸었었나 생각하다가
노래를 부르다가
노래를 부르다가
당신을 부르다가
내일 만들 이야기를 당신에게 들려주고 싶다.
내일 만들 호두파이를 당신에게 먹이고 싶다.
내일 만들 노랫말을 당신에게 불러주고 싶다.
전날 밤 꿈속에서 당신에게 먼저.
*
화사한 꽃배에는 아름다운 장식품. 꽃 하나인가. 꽃 둘인가. 잘 지내요? 나는 시든 꽃으로 시간을 셈하고 있어요. 오늘도 당신은 나의 꿈에 방문하지 않았습니다. 나는 꽃잎 조금 따서 차를 끓였고, 술을 조금 섞었고, 당신 생각 조금 했고, 오래 침묵했습니다. 꿈 밖에서 비가 그쳤는지 이곳에도비가 오지 않고요. 열기가 식지 않은 총구의 형상에서 태양의 테두리를 발견했을 때. 내가 몽상가가 된 걸까요. 나팔 소리 아름답고 하늘 높고
혼잣말도 노래가 되는 날입니다. 그런데도 당신, 어디 갔어? 다음에 만나면 나의 두 눈에 꽃을 심어주겠다고, 총천연색 가득 섞은 액체를 마시자고 했잖아요. 나의 개가 미친 듯이 찾아 헤매고 있어. 나는 꿈의 다음 장으로 밀려나고 있다. 물웅덩이에는 아름다운 색깔로 기름이 퍼져 있고요. 환각처럼. 당신 그림자를 보다가. 환청처럼. 당신 목소리를 듣다가. 환후처럼. 당신 체취를 맡다가. 환촉처럼. 당신 손등을 만지다가. 나는 나를 뒤흔드는 색채 속에 빠져 죽고 싶었다. 나의 개야. 이제 그만 기다리자꾸나. 좀만 쉬다 산책을 나가자. 나의 개는 눈이 커다랗고 나의 얼굴이 잘 비친다. 나의 눈에는 무엇이 보이니? 환각처럼. 꽃 아니한가. 무지개. 무지개. 무지개……
one
손목은 폭력적이다.
물고기가 유영한다.
너는 눈물과 인공 눈물의 차이를 모르니까.
“한 번에 단 하나의 생각만 하고 싶어.” 너는
광대 분장을 사랑하는데. 유리컵에
금붕어를 키워 볼까. 좋은 부모가 되고 싶어.
웃었습니까? 웃고 있었습니다.
울었습니까? 울고 있었습니다.
양초는 한낮 속에서.
밤에는 암막 커튼을 치고.
필름을 되감아 줄게. 비극적인 장면만 골라 잘라낼게.
입술 찢어져라 웃을 수 있겠지?
너는 허공에 칼날을 던지고 잘도 받는다.
물고기는 폭력적이다. 손목이 유영한다.
사람들은 나에게 그만 잠에 빠지라고 말한다.
의자에 오래 앉은 채로 나는 나와 대화를 나눕니다.
편지를 적으면서. 산책 좀 나갈까?
미쳤어? 아직 폭설이 멈추지 않았어.
맞아. 나는 한겨울에 산책을 나가곤 했다.
나는 기다란 수염을 분장할게. 너의 손목을
핥아줄게. 도대체 어떤 과거를 재생하려고
너는 그렇게도 많은 물고기를 기르니.
나는 너무 많은 마음을 잊었어. 그래. 너는
마음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듯이 행동했지.
창문 밖에서 폭설이 쏟아진다.
겨울잠이 불가피한 생물을 사랑해.
한밤에 네가 슬픔 서커스를 펼칠 때
나는 웃었지. 그래. 너는 나를 위해 웃곤 했다.
눈 감으면 언제든 어둠 속에 머무를 수 있지?
웃거나 울거나.
광대와 고양이.
불안,
그리고 우리에게 허락된 음악은 얼마 남지 않았다.
꿈에서는
눈보라를 맞으며 땀 흘리고.
죽지 마. 여기서 눈 감으면 안 돼. 그러나 너는
머릿속에서 쏟아지는 영상을
감당할 수 없다고 말했다. 손목은 폭력적이잖아.
그래. 너는 물고기가 유영한다고 말했다.
두 눈을 감고.
두 눈을 감고.
인공 어둠 속에서 말했다
<신작시>
인공정원 외 2편
양안다
너의 방은 레바논에서 자란 나무들의 집합, 헐벗은 조각상의 아라베스크, 눈먼 이의 심장.
너의 개는 몽상처럼 누워 있다.
너는 아름다운 것을 만들었다. 가짜 마음은 거짓말과 다르다.
너의 개는 거울 속에서 반대로 누워 있다. 미치지 않은 풍경이 싹둑싹둑 잘려 나갔다.
분할 화면
기적을 이해하는 표정과 신비의 생성을 구현하는 나무와 그늘, 어두운 살의를 조금씩 삼켜내는 나무의 그늘, 바람과 이파리와 질투와 시기를 무분별하게 섞어 흔드는 나무 그늘, 고개 숙인 채로 종료 없는 체념 중인 그늘 속 나무, 절망 나무와 그늘……
한 그루의 나무와 초원이 잘 어울리고
너는 그늘 속에서 걸음을 멈춘다.
소음에는 무게가 없어 가라앉지 않는다. 바위로 바위를 내려찍으면 바위가 떨어져 나간다. 그늘은 잔디 위에 묫자리를 잡았으나 너는 이제 퇴장할 시간이라는 걸 알게 된다.
환
그렇습니까. 창문이 풍경을 잃으면 벽이 된다고. 너는 너의 결함이 담긴 상자를 찾으려 애쓴다. 태양의 빛이 두꺼비를 삼키는 게 아니라 반대로 그러하듯이. 너는 사람들에게 스스로를 바보처럼 보이길 좋아한다. 나의 경험에 따르면 너는 지혜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불투명한 창문 위로 빛이 번진다. 하나의 빛이 여러 색채를 가진다. 잔을 비우고 취할 때면 눈 닿는 곳마다 무지개가 떠 있다. 너는 그것이 무슨 소리냐고 묻는다. 그것을 잘 볼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시인의 에스프리>
사랑하는 것의 목록
양안다
1
내 이름이 양안다라는 걸 처음 알게 된 분들은 몇 가지 공통된 반응을 보인다. 가장 흔한 반응은 역시 “필명이신가요?”와 같은 물음이다. 그러면 나는 준비라도 한 것처럼 “본명이고, 한글 이름입니다”라고 대답해야 하며, 좀 더 깊게 간다면 “모든 걸 다 알라고 해서 안다입니다”와 같은 대답을 하게 된다.
그렇다고 내가 이름처럼 많은 걸 알고 있는 사람은 아니다. 나는 많은 것을 알고자 하는 의지가 없으며, 지적 호기심이 적은 편이다. 그럼에도 알고자 하는 게 하나 있다면, 그건 내가 앞으로 어떤 시를 쓰게 될지에 대한 것이다. 내가 알고자 하는 대상이 왜 하필이면 시인지는 모르겠다. 나는 취미라고 할 게 크게 없는 편이고, 누군가와 만나는 일을 크게 반기지 않으며(정확히는 조금 불편하며), 그렇게 혼자 집에 있을 때 내가 즐기는 건 시 말고는 없기 때문이다.
나는 무엇을 쓰게 될까? 그것을 모르기 때문에 시가 더 재미있다.
누군가에게 나를 소개해야 할 때면 “안녕하세요. 시인 양안다입니다”로 말문을 열곤 한다. 그러나 ‘시인 양안다’는 나에 대한 단편적인 부분이며, 사실 무엇을 언급하더라도 그것은 나의 일부에 지나지 않겠지만, 스스로에 대해 자세히 소개해야 한다면 사랑하는 것의 목록을 소개하는 게 가장 적절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그러니까 ‘사랑하는 것의 목록’은 나의 일부이자 내 시의 일부일 것이라고 믿는다.
2
예전만큼은 아니지만, 꾸준히 즐기는 취미를 ‘굳이’ 뽑자면 나는 영화에 대해 말하곤 한다. 스스로를 시네필이라던가 영화광이라고 여기지 않지만, 나는 내가 사랑하는 영화를 보고 또 보는 것을 즐긴다. 내가 사랑하는 영화는 대개 파편적인 방식으로 편집을 했다거나 다중 플롯으로 진행된다거나, 혹은 사랑을 표현하기 위해 사랑에 대해 언급하지 않는 영화가 그렇다.
영화에 대해 말할 때 나는 캐릭터를 생각하지 않는다. 창작물에 등장하는 캐릭터에 감정이입을 하는 편은 아니기 때문이다. 내가 영화를 즐기는 포인트는 카메라가 비추고 있는 배우(혹은 캐릭터)가 아니라 그것을 찍고 있는 감독이다. 나는 감독이 왜 이런 방식으로 화면을 전환하는지, 어떤 생각으로 편집을 했는지에 대해 관심이 많고 그것에 대해 생각하길 즐긴다.
내가 자주 언급하는 감독은 폴 토마스 앤더슨(Paul Thomas Anderson)이다. 줄여서 PTA라고 불리는 이 감독의 모든 작품을 사랑하지만, 특히 <매그놀리아>를 스무 번도 더 봤다. 그는 파편적인 방식으로 편집하길 즐기고, 플롯을 비트는 걸 좋아하고, 사랑을 표현하기 위해 사랑에 대한 언급을 피한다. 어쩌면 PTA의 작품이 내가 영화를 즐기는 방식을 정해버린 것 같다는 생각도 든다. ‘PTA는 무슨 생각으로 이렇게 장면을 편집했지?’ ‘왜 PTA는 선형적인 각본을 이런 방식으로 완성하길 원했을까?’
물론 시를 쓰는 입장에서 생각해보면…… 아마 영화 속 대부분의 장면들은 ‘그냥’ 찍었을 가능성이 클 것이다. 나는 시를 계산하고 쓰지 않는다. ‘그냥’ 쓴다. 누군가는 치밀한 계산 하에 시를 쓸 수도 있겠지만, 적어도 나는 그런 종류의 사람은 아니다. 그렇다고 생각 없이 시를 쓴다는 건 아니다. 나는 적어도 시를 창작하는 그 순간만큼은 어떤 브레이크나 잠금장치가 없길 바라는 편이라 평소에 시에 대한 생각을 자주 한다. 그 생각이 체화될 때까지 계속해서 생각을 반복한다. 그런데 뭐…… 모두 그렇지 않나? 사실 다른 시인들이 시를 어떻게 쓰는지 모르니까……
PTA의 영화 <매그놀리아>는 내가 가장 많이 감상한 영화이지만, 동시에 내가 PTA를 알게 된 첫 작품이기도 하다. 에이미 만(Aimee Mann)은 <매그놀리아>의 OST에 참여했는데, 그 곡에는 ‘one by one’이라는 가사가 있다.
한 번에 하나씩.
나는 대체로 한 번에 하나씩 생각하기 때문에 그 이후를 상상하지 않는다. 지금 현재에 대한 일도 상상하지 않는다. 그저 한 번에 하나씩 떠오르는 걸 상상한다. 내가 누군가에게 위로, 조언, 혹은 고민을 상담해줄 때 나의 대답은 언제나 “한 번에 하나씩”이었다.
3
악인을 싫어하는 만큼 나는 나 자신이 싫어질 때가 있다. 누구나 그렇듯이.
누구나 그런 건가?
나는 술을 즐겨 마시는데, 사실 남들과 술을 마시는 건 썩 좋아하지 않는다. 나는 남들과 술을 마실 때 그 사람이 싫어질 때가 있어서 그렇다. 그러나 대체로 남을 싫어하는 마음을 잘 감추고 사는 편이며, 물론 그게 뜻대로 되지 않을 때도 있고, 그렇기 때문에 나는 나 자신이 무척 싫어질 때가 생기는데, 그런데 그것도 ‘나’이지 않나? 나는 나를 너무 사랑하지만, 나는 내가 증오하는 나를 알고 있다.
보통 나는 ‘나’라는 사람의 항상성을 유지하려 애쓰기 때문에 에너지가 많이 소모되는 것을 경험한다. ‘이곳’에서의 나와 ‘저곳’에서의 나의 모습이 너무 다르기 때문에, 나는 종종 어느 쪽이 진짜 나의 모습인지 헷갈리곤 한다.
나는 스스로를 바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바보 중에서 똑똑한 편이라 사람들은 내가 바보인 줄 잘 모르는 것 같다. 나는 그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더 바보다.
아마 진짜 나와 가장 가까운 모습은 친구들과 함께 있을 때라고 생각한다. 나의 친구들은 내가 얼마나 바보인지 알고 있으며, 동시에 ‘시인 양안다’에 대해서는 모르는 친구들이다. 어쩌면 ‘시인 양안다’를 모르기 때문에 나에 대해 잘 알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친구들의 눈에는 나에게 시인이라는 색안경이 하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의도한 건 아니지만…… 돌이켜보니 시집에 수록한 시인의 말 대부분이 친구들을 향한 말이었다. 어쩌면 무의식중에 그들을 향해 고마움을 표현하고 싶었을까? 나의 친구들은 내 시를 하나도 이해하지 못해서 시인의 말만 읽는다.
병원에 다녀오면 친구에게 전화를 건다. 잘 지내냐고 묻고 잘 지낸다고 대답한다. 친구들은 종종 아프고 나는 종종 아픈 척을 한다. 그때 나의 항상성이 깨진다.
늦은 밤이면 한 친구는 술에 취한 채로 나에게 통화를 건다. 잘 지내? 응. 잘 지내. 그러면 됐지. 잘 자. 그래. 잘 자. 대부분의 통화가 이런 식이다. 친구는 이 행간 사이에 어떤 메시지를 전달한 걸까? 나는 없는 메시지를 혼자 읽었는지도 모른다. 친구의 말을 시처럼 듣는다.
나는 언제나 도움이 필요로 한 사람이다. 너무 많은 사람에게 도움을 받았다. 너무 많은 친구에게 도움을 받고 있다.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그 도움을 시로 되갚아주고 싶진 않다. 그들은 나의 시를 모르니까. 무엇이 될지 몰라도 더 좋은 것을 들고 찾아가고 싶다. 누군가가 이 산문을 읽는다면 양안다는 도움이 필요로 한 사람이라는 걸 알았으면 좋겠다. 이기적이게도 그렇다.
4
올해로 등단한 지 10년이 되었다. 지금의 내가 “너는 2024년에도 시를 쓰고 있을 거야”라는 말을 10년 전의 나에게 들려준다면 믿을 수 있을까? 나는 2034년에도 시를 쓰고 있을까? 그럴 에너지가 나에게 있을까? 10년 뒤의 나는 무슨 시를 쓰고 있을까? 그걸 모르기 때문에 시가 재미있다. 가끔은 PTA나 찰리 카우프먼 같은 감독들이 나의 귀에 대고 시 그렇게 쓰는 거 아니라고 소리치는 장면을 상상한다.
나는 그동안 영화와 친구들로 인해 많은 시를 쓸 수 있었다. 이제 나는 영화와 친구들에게서 멀어질 것이다. 그러나 알고 있다. 언젠가 다시 돌아가게 될 거라는 사실을. 그때 이 산문을 다시 읽어보고 싶다. 이 산문에 내가 쓰게 될 미래의 시의 원형이 있을 것이라고 믿는다.
양안다
1992년 충남 천안 출생.
2014년 현대문학으로 등단. 시집 몽상과 거울 외.
창작 동인 ‘뿔’로 활동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