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우집 신문기록(1801.3.28) 나이 40세, 인정신문 내용]
『(중략) 유관검은 매양 저를 만나면, 번번히 사학을 힘써 배우도록 권면하였고, 또한 베낀 책자를 자주 토론했습니다. 정사(1797)년 동짓달에 마침 유관검의 집에 갔는데, 그가 외진 곳에 새로이 사랑채를 만들어 오직 천주학을 같이하는사람을 여기에서 영접한다고 했습니다. 저와 그 조카 두 사람이 함께 그 곳에 앉아 있었는데, 제가 유관검에게 묻기를 “우리들이 배운 바는 학문이 좋기는 하나, 죽음을 두려워할 만하다”고 했습니다. 유관검이 말하기를, “우리 같은 사람들은 비록 형벌을 당하고 화를 입어도, 그대같은 초학자들이 어찌 죽을 리가 있겠는가? 하물며 이 천주학이 오래지 않아 세상에 반드시 크게 행해질 것이니, 우리에게도 좋은 일이 자동적으로 있게 될 것이다”라고 했습니다.』그래서 까닭을 묻자, 서양에서 큰 배가 오게 되는데 그 배에는 혈총(穴銃, 대포)이 있어 발사하면 두려워 굴복하지 않을 사람이 없을 것이고, 만일 우리나라가 천주교를 순순히 받아 들이지 않으면 기필코 한바탕 결판하여 요절을 낼 것이라 하였다. 그리고 천주당을 마땅히 윤지충의 무덤 위에 세울 것이라고 말하였다.
(사학징의.1 83쪽. 2001. 조광역주)
-심지어 1801년 3월 과거보러 가는 길에 유관검을 만났을 때는 서울에 탄압이 시작되어 옥사가 벌어지고 있다고 말하면서 주문모 신부를 피신시켜야 하겠는데 영광 교우 중 신분은 고하간에 믿을 만한 사람이 있으면 추천해 달라고 하였다.
-이우집의 심문으로 유관검과 윤지헌에게 듣지 못한 엄청난 사실이 밝혀진 것이다. 그 내용대로라면 천주교 신도는 반윤리, 반사회 사범이 아니라 사실상 반국가 사범인 것이 분명하였다. 이우집의 심문이 있은 후 유관검과 대질심문이 있었고, 유관검과 윤지헌이 30대의 매를 맞아가며 다시 조사를 받았다. 유관검은 이우집과 대질심문에서 대부분의 내용을 부인하였다. 그도 그럴 것이 역적의 죄명으로 죽을 것이 분명한데 순순히 인정할 리 만무 하였다. 그러나 유관검이 실토함으로써 ‘대박청래운동’전모가 확연하게 드러났고, 거기에 연루된 사람들이 모두 밝혀졌다. 그래서 이미 천주교를 떠났건 천주교를 간접적으로 지원하였건 친천주교의 입장에 섰던 인물들을 숙청하는데 충분하였다.
유관검은 이미 죽은 윤지충, 권상연, 윤유일, 지황, 최창현, 이가환, 이승훈, 홍낙민 등과의 관계를 털어놓았다. 그 저의(底意)에는 그들의 역할과 자기의 활동을 비교할 때 자기가 한 행위는 별것이 아닌 것으로 낮추려는 의도가 엿보인다. 심문을 마친 전라감사 김달순은 4월 20일 장계(狀啓: 감사 등이 임금에게 올리는 서면 보고)를 올렸다.
전주(全州)에서는 3월(음) 부터 박해가 시작되었는데 유항검(柳恒儉), 유관검(柳觀儉) 형제를 비롯하여 일가족이 많이 체포되었다. 유관검이 고문에 못 이겨 많은 교우들의 이름을 대니, 불과 몇 일만에 200여명이 옥에 갇히었는데, 대부분은 배교하여 석방되었다.
이들에 대한 문초가 계속되는 동안, 소위`양박청래'(洋舶請來) 계획이 탄로되어 이와 연관된 이우집(李宇集), 윤지헌(尹持憲), 황심(黃沁), 김유산(金有山) 등이 잡히게 되고, 이 연줄로 옥천희(玉千禧) 등이 잡히게 되었다. `양박청래' 관련된 이들은 한양으로 압송되어 곧 사형을 언도받아 다시 전주로 이송되어, 9월 17일(음) 유항검, 유관검, 윤지헌은 모역동참죄(謀逆同參罪)와 불고지죄로 능지처참형을, 이우집과 김유산은 참수형을 받았다.
대박청래 사건이란 이우집이 전주 감영에서 진술하고 서울로 압송되어 포도청, 형조, 추국청에서 개별신문이나 유항검과의 대질 신문 과정에서 진술한 내용으로 유관검이 중국인 주문모 신부를 편히 모실 사람과 숨길 장소를 찾았다는 사실과 유항검, 유관검, 윤지헌 등 교회지도자들이 주신부와 함께 서양의 대선이 들어오게 하여 무력으로 조선에 신앙의 자유를 가져오게 할 것이라는 사실과 이 일이 이루어지지 않는 것이 괴이하다는 진술 등이 나옴으로써 조정을 경악하게 한 사건이다. 양박청래(洋舶請來) 계획이라고도 하는데 “이우집은 1797년에 양박청래 계획을 세우고 있음은 물론, ‘한바탕 결판을 낼 것(一場)’이라는 말을 하였고, 1800년에는 <정감록 鄭鑑錄>을 이용하여 ‘예수 그리스도가 경신년에 태어났으므로 경신년(1800) 밤에 천 척의 서양선박이 인천과 부평 사이에 정박할 것’이라는 말에 자신이 속아 넘어갔다고 표현하였다. 이후 조정에서는 대박청래(大舶請來)와 일장판결(一場判決)을 8자 흉언이라 비판하며 천주교 신자들을 반역의 무리로 이해하게 되었다.
--(중략)---그러나 구베아 주교가 1797년 주문모 신부와 조선신자들의 서한을 받고 기록한 내용을 살펴 보면, 그들은 무력 개교를 요청하지 않았음이 분명하다. 오히려 그들은 서양과 우호조약을 체결하므로써 신앙의 자유를 얻을 수 있게 되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었다.”
“신유박해는 1801년 1월 10일(양2월 22일), 어린 순조를 대신하여 수렴청정을 하고 있던 대왕대비 김씨 즉 영조의 계비(순조의 증조모)인 정순왕후(貞純王后)의 이름으로 척사윤음(斥邪綸音)이 공식박해령으로 작용하면서 전국의 신자들을 대상으로 약 1년간 지속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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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01년 신유박해 영광 순교자 고찰 학술회의, ‘신유박해와 영광순교자’ 옥현진 주교 pp 12-13)
(추안급국안 25권, 사학죄인 유항검 등 추안, ‘이우집 신문기록(1801년 9월 11일),
(사학징의1), (전라감사 김달순의 비밀 보고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