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착한 사람’의 상징적인 존재로 등장하는 사마리아인이 있다. 그런데 이거 엄청 잘못됐다.
아시다시피 사마리아인들은 혈통적, 종교적으로 잡티가 섞였다고 같은 동족인 유대인들로부터 무시당하면서 살아왔다. 예수가 하필이면 사마리아 사람의 예를 들어 이야기를 한 것은 분명히 사마리아인에 대한 차별을 비판하려는 의도였다. 유대인들이 가지고 있는 ‘이웃’이라는 이데올로기를 깨버리는 것이다.
즉, “당신들은 사마리아인들이 이웃이 아니라고 철저히 배제하고 있지만 상처 입고 죽어가는 나그네에게 자진해서 ‘이웃’이 된 사람은 바로 사마리아 사람이다. 당신들이 존경하는 사제계급이 아니다.”라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착한 행위’가 문제가 아니고 ‘이웃’에 대한 정의가 문제인 것이다. 그러므로 이 비유의 제목은 ‘선한 사마리아 사람‘이 아니고 “이웃이란 누구인가?”이어야만 한다.
누군가를 소개할 때 “그 사람 착해.”라고 이야기 할 때가 많다. 그럴 때 나는 꼭 이렇게 토를 단다. “건드리지 않으면 누구나 착해.”라고. 사실이 그렇다. 미친 년 놈이 아니고서는 건드리지도 않는데 공연히 성질부리는 인간은 없다. 그러나 세상은 서로 건드리면서 살게 되어 있다. 이런 세상에서 착하게 사는 것은 어떻게 사는 것일까? 착하기 위해서는 먼저 갖추어야 할 전제 조건이 있다. 바로 자기중심적이지 않을 것이다. 타인을 배려할 수 없는 마음은 착한 마음이 아니다. 배려를 위해서는 민감해야 한다. 즉, 타인의 감정을 느낄 수 있는 감수성을 갖추어야 한다.
흔히들 착한 인간이 성공하기 어렵다고 하지만 착함 그 자체가 이미 성공이다. 착한 사람은 ‘정의로운 사람’에 ‘남을 배려하는 사람’의 개념이 겹친 것이다.
세상에서 제일 착한 할머니였던 오마니(마더) 테레사는 절대로 물렁물렁하고 양보만 아는 사람이 아니었다고 한다. 그녀의 선행사업에 위기를 겪은 적도 있고, 자신의 선행에 방해가 될 수도 있는 세력의 음해와도 맞부딪친 적이 있다고 한다. 그러나 마더 테레사는 높은 수준의 경영능력으로 난국을 타개한 적도 있고 날카로운 식견과 협상능력으로 많은 부조리한 압박에 맞서 싸우기도 했다.
행동을 착하게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근본에는 양심과 정의가 살아 있어야 한다. 다시 말해, ‘행동의 선량함’ 앞서서 ‘양심의 선량함’ 존재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양심이 선량한데도 위협 앞에서 수그러들어 행동을 선량하게 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그 사람의 용기 없는 기질의 문제일 뿐이다. 착하다는 것은 타인의 감정을 느낄 수 있는 민감함과 동시에 자신의 주장을 내세울 수 있는 분명한 의사표현능력을 갖출 때 유효한 것이다. 착하기만 하고 자기의 주장을 펴지 못한다면 생물학적으로 바보과에 속할 뿐이다. 의식이 착해야지 성질만 순한 것은 자칫하면 바보가 되기 딱 알맞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