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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비공개 입니다
해병의 신화 - 백전노장 故 김연상(金然翔)장군
청룡부대는 1965년 10월 맹호부대 1진과 거의 동시에 월남땅에 첫발을 내디뎠다.
월남전에서 떨친 한국 해병의 용맹성은 새삼 강조할 필요도 없다.
수많은전투에서 `귀신잡는 해병'처럼 적의 간담을 서늘케 했던 일화는 너무도 많다.
金然翔 장군(청룡해병사령관/예비역 해병중장) 월남전에 참전하여
제2대 청룡부대장을 지냈다. 그는 1949년 4월 한국 해병대 창설때 산파역을 했으며
'한번 해병은 영원한 해병이다'는 말을 만들어낸 우리나라 해병역사의 `산증인'으로 꼽힌다
金장군은 월남전때 다른 지휘관들보다 1년이 더많은 2년동안 정글에서 적들과 싸워야 했다.
金장군은 청룡부대장 취임때부터 화제를 뿌렸다.
취임식날 미해병대 장군 한명이 참석했는데 金장군한테 다가오더니 `촌뜨기'라고 놀렸다.
왜냐고 물었더니 그는
"취임식에 철모쓰고 권총찬 모습이 영락없는 촌뜨기"라는 것이다.
그의 말인즉 장군은 전투지역에 나갈 때나 철모를 쓰는 법이지 평소에는
온화한 모습을 장병들에게 보여줘야 한다는 것이었다.
취임식 직후 적에게서 받은 첫 인사도 고약했다.
취임한 지 얼마 안되어 1개 대대본부 병력이 이동중 적의 습격을 받았다.(짜빈박)
적에게 완전히 고립되는 위기일발의 순간을 맞았던 것이다.
이때 金장군은 미해병대 용사들의 육탄전과 무장헬기에서 쏘아대는 기총소사 등의
지원에 힘입어 가까스로 포위된 대대본부 병력을 구출해 냈다.
그런데 여기서 안타깝게도 10여명의 아군이 적의 총탄에 맞아 전사했다.
피가 역류하는 듯한 분노에 치를 떨던 金장군은 비장한 각오로 보복작전을 구상했다.
감히 귀신잡는 해병의 자존심을 건드리다니.가만히 당하고만 있을수는 없었다.
그래서 나온 작전이 `짜빈동 전투'였다.
이 `짜빈동전투'는 세계 전사에도 기록되고 있다.
당시 `짜빈동'은 월남 중북부의 광나이성 추라이인근에 위치해 있었으며
월맹군과 베트콩을 잇는 주요 무기보급로였다.
여기에 청룡부대 1개 중대병력(11중대)이 적들과 대치해 있었다.
金장군은 예하부대를 일일이 돌아다니면서 전투력을 점검했다.
그러는 한편 11중대 병력을 은밀히 철수토록 명령했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연막이었다.
병력을 빼내는 것처럼 위장하면서 실제로는 짜빈동에 화력을 집중할 수 있도록
중화기 등을 비밀리에 증강했다.
金장군은 또 청룡부대에 파견나온 월남장교들에게 11중대의 철수사실을 은근슬쩍
유포하고 이같은 얘기가 적들에게 자연스럽게 흘러가도록 유도했다.
이를 눈치챈 월남군 장교는
"짜빈동에 적이 집결하는 기미가 있는데 왜 병력을 빼돌리느냐"고 의아해 했다.
金장군은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작전이 착착 진행되고 있었다.
金장군은 11중대장 정경진대위를 극비리에 불러 "적이 곧 쳐들어올 테니
기습전을 준비하라"고 단단히 일러놓았다.
그리고 주위 포병부대에도 이같은 사실을 알렸다.
겉으로는 중대병력이 철수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청룡부대의 모든 화력은
`짜빈동'으로 향해 있었다.
1967년 2월14일 밤. 드디어 기다리던 적의 공격이 감행됐다.
아군병력이 일부빠져나간다는 것을 알고는 때를 놓칠세라 대공세를 취해오는 것이었다.
적어도 11중대의 병력보다는 10배정도 강한 전투력이었다.
유인책에 걸려든 이상 작전대로 적을 섬멸하는 것만 남았다.
金장군은 우선 대기해 있던 주위 포병부대에게 명령,적이 접근하기 쉬운 곳에는
별도 지시가 있을 때까지 무조건 포사격을 가하도록 했다.
예상 침투로에는 아군 병력을 비워둔 상태였다.
이와 동시에 항공부대에 긴급히 연락해 아군진지를 중심으로 사주방어선 밖을
무조건 맹폭케 했다.
일시에 포사격과 전폭기공격을 받은 적들은 당황하기 시작했다.
때를 맞추어 金장군은 무전기를 들고 직접 11중대장을 불러 선전을 독려하면서
"시간을 끌면서 해가 뜨기 전까지 적의 대형을 지리멸렬 시키라"고 명령했다.
기다리던 11중대 병력들은 다단계 매복공격을 가했다.
특히 적들이 나타나기를 기다리던 탄약고 매복조들은 일시에 공격을 감행,
탄약고를 노리던 적들을 순식간에 궤멸시켰다.
주위는 비오듯 쏟아지는 포탄의 섬광과 11중대 병력들의 집중사격으로 대낮같이 밝았다.
덫에 걸려든 적들은 처음에는 완강히 버텼으나 결과는 뻔한것이었다.
참으로 치열한 전투였다.
늦은 저녁부터 시작된 처절한 전투는 날이 샐 무렵이 되자 잠잠해지기 시작했다.
적은 대부분 전사하거나 나머지는 삼십육계 도망을 쳤다.
金장군은 서둘러 헬기를 타고 격전의 현장에 도착했다.
참상이 형언하기 힘들 정도였다.
金장군은 이때 마침 종군기자로는 유일하게 조선일보 '목사균'기자가 따라붙어
독점 취재의 행운을 누렸다고 기억했다.
현장의 참혹한 시체들 곁에서 `억억' 소리내어 통곡하던 목기자의 모습이
인상적이었다고 말했다.
현장은 아직도 연기가 걷히지 않은 채였다.
화약냄새와 피비린내가 어우러져 그야말로 아수라장이었다.
게다가 아침이 되면서 비까지 내려 이 일대는 마치 혈하를 방불케 했다.
아군측 전사자는 모두 15명이었다.부상자들은 헬기로 후송됐다.
그런데 밤새 치열한 전투를 벌인 탓인지 멀쩡한 병사들도 온전치가 않았다.
모두가 얼이 빠졌는지 횡설수설할 뿐이었다.
金장군은 진중에 널려진 적의 시체를 헤아리기 시작했다.
하나 둘 셋....모두 253구였다.대단한 전과였다.
어느 새 미해병대사령관 월트장군도 도착했다.
월트장군은 월남 북위 17도선 비무장지대 책임자였다.
그런데 월트장군은 여러 참모들과 함께 적의 시체를 둘러보면서
`원더풀'소리와 함께 계속 미소띤 모습을 지었다.
이 판국에 무슨 웃음이람.
머뭇거리던 金장군도 월트장군의 웃는 모습을 보고는 덩달아 `원더풀'을 연발했다.
이때 시체옆에서 `억억'거리며 울고 있는 목사균기자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노획품을 점검하는 과정에서 더욱 놀란 것은 적의 화염방사기.
적은 아군의 탄약고를 폭발시키기 위해 화염방사기를 동원했던 것이다.
탄약고 전체가 시커멓게 그을려 있는 것으로 봐서 조금만 더 늦었더라도
탄약고는 대폭발을 일으키고 말았을 것이다.
아군 1개 중대병력이 순식간에 날아갈 뻔했던 위기를 생각하니
등골이 오싹해지는 느낌이었다.
金장군은 중대원들의 노고를 치하하며 지휘본부로 복귀했다.
밤새 잠을 못자 잠시 눈을 붙일 작정이었다.
그런데 외신기자단 수십명과 월남군본부 요원들이 참관차
청룡부대를 방문한다는 전문이 쏟아져 들어왔다.
그러나 金장군은 참모들에게 뒷처리를 맡기고 잠을 청했다.
金장군은 꿈에서 중대장 등 짜빈동전투에서 전과를 올린 장병들이
태극무공훈장을 받는 장면을 목격했다.
지난 67년 2월14일 세계를 깜짝 놀라게 한 월남의 `짜빈동전투'의 한국군 전과는
실로 대단했다. 베트콩을 포함한 월맹군 정규군의 전사자는 모두 253명.
얼핏 보아도 믿어지지 않을 대단한 전과였다. 아군은 15명이 전사했다.
원래 쌍방간에 맞붙은 전투에서 적보다 51%를 이겼으면 `전승'이라는 말을 하고
60%를 이겼으면 `대승', 그리고 70%이상의 승리를 `대첩'이라는 용어로
전사에 기록된다. 그런데 짜빈동전투는 양쪽 전사자수만 비교하더라도
`15대 253'을 기록했으니 실로 엄청난 `대첩'이 아닐 수 없다.
월남전장에 나와 있던 각군 관계자들이 몰려오고,
외신기자 100여명이 특별 전세기편으로 청룡부대를 찾아와 취재에 열을 올릴 정도였다.
미해병 고위관계자들조차도 혀를 내두르며 신출귀몰한 작전의 결과를 본국에 보고했다.
미국의 존슨대통령은 매우 이례적으로 청룡부대를 `특별표창'했다.
특히 대만 군당국에서는 청룡부대장 金然翔장군에게 초청장을 보내
`짜빈동대첩'에 관해 특별 전술교육을 해달라는 제의까지 해왔다.
또한 외신기자들의 집요한 요청에따라 작전개요를 브리핑했고 기자회견까지
하기에 이르렀다.
그런데 기자회견때 해프닝이 벌어졌다.
기자회견장인 사이공 외신구락부에는 티우대통령까지 참석했다.
물론 한국 월남 미군측 군고위장성들이 모두 나왔다.
기자회견은 청룡부대 작전참모 吳允晋중령(예비역 소장,상명여대교수)이
작전성과에 대한 브리핑이 있고 나서 곧바로 이어졌다.
吳중령이 기자들을 상대로 직접 일문일답을 벌였다.
티우대통령 등 월남군 관계자들은 시종일관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런데 기자들중 한사람이
"백병전에서 어떻게 적을 완전히 물리칠 수 있었느냐"
고 질문했다. 吳중령은 태권도 동작을 보이며 한국군인들은 모두 태권도로
단련이 돼 있다면서 손가락을 `V'자 형태로 하여 적의 눈을 가격하는 시범을
즉석에서 보여줬다.그랬더니 이 동작이 너무 충격적으로 느껴졌던지
일부 기자가
"어떻게 민주군대가 적이라고 해도 그렇게 무자비하게 다룰 수 있느냐"
고 물었다. 분위기가 갑자기 이상한 방향으로 흘렀다.
다른 기자들도 이같은 주장에 동조하는 듯했다. 당황한 주월한국군사령부에서는
기자들을 상대로 일일이 태권도의 특징을 설명하면서 오해의 여지가 없도록
해명하느라 진땀을 뺐다.
이보다 앞서 짜빈동전투가 벌어지기 하루 전날
월남의 사이공에는 丁一權 국무총리 金聖恩국방부장관 姜起千해병대사령관 등
고위인사 수십명이 위문차 도착해 있었다.
이들은 청룡부대가 짜빈동전투에서 대승을 거두었다는 소식을 접하고는
사이공의 모든 일정을 취소한 채 청룡부대 주둔지인 광나이지역으로 달려와
장병들에게 노고를 치하하기도 했다.
丁총리 일행 등이 귀국한 직후 金장군은 朴正熙대통령의 친서를 받았다.
대한 남아의 용맹성을 세계 만방에 떨쳐서 무척 기쁘다는 내용과 함께
공훈을 세운 소대장 申元培소위와 11중대장 정경진대위 등에게 태극무공훈장을
수여 하겠으니 귀국시키라는 내용도 포함돼 있었다.
金장군은 여간 기쁘지 않았다.
朴대통령이 친히 봉투까지 만들어 친서를 보낼 만큼 특별한 관심을 보였다는 것을 알고
더욱 감격했다.金장군은 이러한 내용을 전부대원들에게 알려 사기를 북돋았다.
며칠 뒤였다. 金桂元 육군참모총장이 청룡부대를 방문한다는 연락이 사이공에서 왔다.
예고도 없이 한국군 최고지휘관이 일선을 방문한다는 것은 흔치 않은 일이었다.
金장군은 걱정이 앞섰다.
최고지휘관이 비공식방문으로 일선을 찾는 경우는 대개 일선 지휘관이
지휘상에 문제가 있을 때 그것을 확인하기 위한 최종단계,
즉 문책직전에나 있는 일이었다.
金장군은 혹시 자신이 잘못한게 있나 싶어 내심 불안했다.
갑작스런 육참총장의 방문이 꺼림칙했다.
드디어 金총장이 청룡부대 주둔지에 도착했다.
金장군은 金총장을 자신의 집무실로 안내했다. 金총장은 의자에 앉자마자
"노고가 많소.그런데 도대체 그 비결이 뭐요?"
하고 대뜸 물었다. 金장군은 비결이 무슨 뜻이냐고 반문했다.
金총장이 묻는 내용은 다름 아닌 짜빈동전투에서의 승리비결이었다.
그러면서 평소 부대운용을 어떻게 하느냐고 자세히 물었다.
그리고 金총장이 직접 청룡부대를 방문하게 된 배경도 설명했다.
丁총리 일행이 귀국한 후 丁총리가 朴대통령한테 현지에서 직접 확인한
짜빈동전투의 결과보고를 자세히 했다. 그러자 朴대통령은 매우 기뻐하면서
그날 저녁 각군 지휘관들을 청와대로 불러 거나한 술파티를 벌였다고 한다.
이 자리에서 朴대통령은 金총장에게
"내일 당장 월남땅으로 가서 청룡부대 장병들을 격려하고 승리의 원인을
잘 분석해 보라"고 즉석에서 명령했다는것이다.
그제서야 모든 궁금증이 풀린 金장군은 불안했던 마음을 가라앉히며
金총장의 물음에 자세히 대답했다. 金장군은 우선 짜빈동전투의 결과를 브리핑했다.
그는 또 과거 자신의 전투 경험을 회고하면서 우선 하사관의 역량을 최대한
발휘할 수 있도록 유도해야 전투에서 승리할 수 있다는 점을 강조했다.
하사관은 장교와 사병사이의 교량역할은 물론 부대 인화단결을 위해서도
중요한 위치에 있으므로 되도록 재량권을 많이 주는 것이 유사시
전투력을 배가시킬 수 있다고 설명했다.
부대방문을 마친 金총장은 귀국하자마자 곧바로 청룡부대의 사기와 부대운용
상황 등을 朴대통령에게 자세히 보고했다.
朴대통령은 이 자리에서 하사관의 중요성을 새삼 실감했던지 육군에도
특별히 하사관의 위상을 재고토록 지침을 하달하기도 했다.
金장군은 당시 짜빈동전투를 떠올리면서 "당시 작전참모 吳중령이 고비때마다
뛰어난 지략을 발휘해 대승을 거둘 수 있었다"고 말했다.
吳장군은 "당시 지휘관과 작전참모가 호흡이 잘 맞았다"면서 "짜빈동전투야말로
전중대원이 일계급 특진할 정도로 해병 전사에 길이 빛나는 전투"라고 강조했다.
吳장군은 또 당시 적을 궤멸시킬 수 있었던 요인은 크게
* 평소 부대훈련이 잘 됐고
* 진지편성을 효과적으로 운용한데다
* 백병전에서 적을 완전히 제압할 수 있었기 때문이라고 요약했다.
吳장군은 특히 전투가 끝난 직후 적의 시체들을 아군진지밖에 진열해 놓아
찾아가도록 유도했었다고 말했다. 그러나 끝내 찾아가지 않은 시체 수십구는
하는 수 없이 아군측에서 매장하고 장례를 치러주었다고 전했다.
그러나 전장에서의 피의 보복은 어쩌면 당연한 일.
적은 `완전 참패'라는 선물을 안겨준 청룡부대를 가만 놔둘 리가 없었다.
지휘관들은 어떻게 해서든 보복을 해야 직성이 풀리는 법.
원래 짜빈동지역은 월맹군 장성급이 지휘할 만큼 전략적으로 매우 중요한 요충지였다.
그러니 월맹군 장성으로서는 분통이 터지지 않을 수 없었다.
짜빈동전투가 벌어진 지 약 두달뒤
북위 17도선상의 공해상에 정체불명의 철선 하나가 아군측 레이더에 잡혔다.
이 철선은 남항하던 중 곧 각도를 꺾어 청룡부대 주둔지로 이어지는
"바탄칸"반도까지 접근해 들어왔다.
金장군은 이날따라 저녁식사를 마친 뒤 모처럼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가
상황장교의 긴급보고를 받았다. 적의 철선으로 간주되는 배 한척이
바탄칸해안을 통해 광나이지역으로 연결되는 강하구로 접근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金장군은 또 그 배의 항로 경유에 대해서도 보고받았다.
金장군은 틀림없는 적 철선임을 예감했다.
아군측의 배라면 사전에 통보해 주는 것이 뻔한 일이었다. 특히 레이더 추적 결과
그 배의 항로가 월맹쪽에서 출발했다는 것은 결정적인 단서나 마찬가지였다.
金장군은 해안에 주둔해 있는 해병부대원들에게 적철선의 움직임을
예의주시하라는 일단계의 명령을 내렸다.
전투에서 감으로 적을 때려잡을 때처럼 기분좋은 일은 없다.
金장군은 왠지 기분이 썩 좋았다.
그런데 문제는 깜깜한 밤이라는 점이었다.
미군측은 밤중에는 비행기를 지원해 주는 일이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고심하던 金장군은 조니워커 양주 한병을 단숨에 비웠다
(그는 술이 세다.지금도 양주 3병정도는 마셔야 약간 취기가 오른다고 한다).
평소 金장군은 결단을 내리면 적을 단숨에 제압해야 한다는 전투철학을 가지고 있었다.
金장군은 속으로 `저들이 분명 짜빈동전투의 패배를 앙갚음하려고
야음을 틈타 공격하려는 게 틀림없다'고 생각하면서
또 한번 한국해병의 따끔한 맛을 보여줘야겠다고 다짐했다.
金장군은 옆에 주둔해 있는 미육군 사단본부에 가서 적의 동태가 수상하니
정찰용 헬기 한대만 지원해 달라고 했다.
미군관계자는 아닌 밤중에 홍두깨격으로 술냄새를 풍기며 찾아온
金장군의 요청을 거절했다.
그러자 金장군은 소리를 버럭지르며
"이봐 전투에 주야가 어딨어.
해병장군인 내가 직접 정찰할 것이니 무조건 내놓으라"고 했다.
金장군의 기세에 눌렸던지 헬기 한대를 순순히 내주었다.
金장군은 해병포병들에게 포격지점을 알려주면서 사격준비를 명령했다.
金장군은 수명의 무장병력과 함께 헬기에 올랐다.
그러나 야간에 정찰한다는 것은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다.
시계가 어두워 저공비행을 하다가 공격을 받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다행히 적철선의 위치를 확인하는데는 별 어려움이 없었다.
金장군은 무전으로 예상지점에다 포사격을 명령했다. 포사격은 밤새 이루어졌다.
金장군은 초조하게 날이 새기를 기다렸다.
이윽고 희미하게 아침이 밝아오기 시작했다.
金장군은 미리 대기시켜 놓은 수색중대를 출동시켰다.
작전참모 吳중령이 일개 소대병력을 이끌고 헬기로 적철선 상공을 맴돌았다.
적철선은 광나이로 이르는 강입구까지 들어와 멈춘 상태에서
자욱한 연기속에 싸여 있었다.
아군측이 쏜 포탄에 맞았다는 것을 직감했다.
저공비행으로확인해 보니 조타실이 명중됐다.
吳중령은 수색중대원들에게 신속히 승선해서 샅샅이 뒤지라고 명령했다.
수색대원들은 상륙용 고무보트를 타고 조심스럽게 배안으로 들어갔다.
적의 공격은 없었다.
죽은 시체 몇구가 널려 있을 뿐 나머지는 모두 도망하고 없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일까.
수색중대원들의 보고가 놀랄 만한 것이었다.
배안에는 탄약이 가득 실려있고 수천정의 중국제 무기가 있다는 것이었다.
金장군은 웬떡이냐 싶어 자세히 조사시켜 보니 그 배안에는 소총 등
중국제 신식무기 3천여정과 탄약 등이 가득 실려 있었다.
수색대원들이 헬기지원을 받아 배안의 무기들을 아군진지로 신속히 운반하고
배는 별도로 예인했다.
아군측 사상자는 하나도 없이 그야말로 `꿩먹고 알먹는' 대전과를 거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