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증일아함경增壹阿含經 제19권 제27 등취사제품等趣四諦品
一.
이와 같이 들었다.
어느 때 부처님께서 슈라아바스티이의 제타 숲 <외로운 이 돕는 동산>에 계시면서 여러 비구들에게 말씀하셨다.
"비구들이여, 내가 항상 설명하는 법은 이른바 네 가지 진리다.
그러므로 무수한 방편으로 이 법을 관찰하고 그 뜻을 분별하여 사람들을 위해 널리 연설하였다.
어떤 것이 네 가지인가.
이른바 괴로움의 진리니 무수한 방편으로 이 법을 관찰하고 그 뜻을 분별하여 사람들을 위해 널리 설명하였다.
또 무수한 방편으로 그 원인과 사라짐과 사라지는 길의 진리를 설명하고
그 법을 관찰하고 그 뜻을 분별하여 사람들을 위해 널리 연설하였다.
너희 비구들을 샤아리푸트라 비구를 친근하고 받들어 섬기고 공양하라.
그 까닭은 저 샤아리푸트라 비구는 무수한 방편으로 이 네 가지 진리를 설명하고 사람들을 위해 널리 연설하였기 때문이다.
샤아리푸트라 비구가 중생들과 네 가지 무리들을 위해
그 뜻을 분별하고 사람들을 위해 널리 연설할 때에는
셀 수 없는 중생들이 온갖 번뇌가 없어지고 법의 눈이 깨끗하게 되었느니라.
또 너희 비구들은 샤아리푸트라와 모옥갈라아나 비구를 친근하고 받들어 섬기고 공양하라.
왜 그러냐 하면 샤아리푸트라 비구는 중생들의 부모요,
낳은 뒤에 길러서 자라게 하는 것은 모옥갈라아나 비구이기 때문이다.
그 까닭은 샤아리푸트라 비구는 사람들을 위해 법을 설명하여 네 가지 진리를 반드시 성취시키고
모옥갈라아나 비구는 사람들을 위해 설법하여 최상의 진리를 반드시 성취하고 번뇌가 없는 행을 성취시키기 때문이다.
너희들은 샤아리푸트라와 모옥갈라아나 비구를 친근하여야 하느니라."
세존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시고 고요한 방으로 들어가셨다.
세존께서 떠나신 지 오래지 않아 샤아리푸트라는 비구들에게 말하였다.
"만일 네 가지 진리를 깨달으면 그 사람은 좋은 이익을 얻을 것이오. 어떤 것이 네 가지인가.
이른바 괴로움의 진리니 무수한 방편으로 그 뜻을 널리 설명하리라.
어떤 것을 괴로움의 진리라 하는가.
이른바 나는 괴로움, 늙은 괴로움, 앓는 괴로움, 죽는 괴로움,
근심하고 슬퍼하고 번민하는 괴로움, 미워하는 이와 만나는 괴로움, 사랑하는 이와 헤어지는 괴로움,
구하여 얻지 못하는 괴로움 등이니 통틀어 말하면 다섯 가지 쌓임의 괴로움이오.
이것을 괴로움의 진리라 하오.
어떤 것이 괴로움의 원인의 진리인가.
이른바 애욕의 결박이 그것이오.
어떤 것이 괴로움의 사라지는 진리인가.
이른바 사라지는 진리란 애욕의 결박이 아주 없어져 남음이 없는 것이니 이것을 사라짐의 진리라 하오.
어떤 것이 길의 진리인가.
이른바 여덟 가지 거룩한 길이니
즉 바른 소견, 바른 다스림, 바른 말, 바른 방편, 바른 생활, 바른 업, 바른 생각, 바른 선정이다.
이것을 길의 진리라 하오.
중생으로서 좋은 이익을 얻는 것은 이 네 가지 진리를 듣기 때문이오."
존자 샤아리푸트라가 이 법을 말하였을 때에
한량없고 셀 수 없는 중생들은 이 법을 듣고 온갖 번뇌가 없어지고 법의 눈이 깨끗하게 되었다.
그래서
'우리들도 좋은 이익을 얻었나이다.
세존께서 우리를 위해 법을 설명하시어 복 땅에 편히 살게 하였나이다'고 말하였다.
그러므로 네 가지 무리들은 방편을 구해 이 네 가지 진리를 행하도록 하라.
비구들이여, 이와 같이 공부하여야 하느니라."
때에 비구들은 부처님 말씀을 듣고 기뻐하여 받들어 행하였다.
二.
이와 같이 들었다.
어느 때 부처님께서 슈라아바스티이의 제타 숲 <외로운 이 돕는 동산>에 계셨다.
그때에 많은 비구들은 걸식하러 슈라아바스티이로 들어가다가 이렇게 생각하였다.
'우리가 걸식하기에는 아직 때가 이르다.
우리는 저 외도들의 촌으로 가서 서로 변론하리라.'
많은 비구들은 곧 외도들의 촌으로 가서 서로 문안하고 한쪽에 앉았다.
그때에 외도들은 물었다.
"사문 고오타마는 제자들을 위해 이렇게 설법한다.
즉 '너희 비구들은 모두 이 법을 배워 밝게 알라. 밝게 알고는 받들어 행하라'고.
우리도 제자들을 위해 이렇게 설법한다.
즉 '너희들은 다 이 법을 배워 밝게 알라. 밝게 알고는 받들어 행하라'고.
그렇다면 사문 고오타마와 우리들과는 무엇이 다르며 무슨 낫고 못함이 있는가.
그도 설법하고 우리도 설법하며 그도 훈계하고 우리도 훈계한다."
비구들은 이 말을 듣고 옳다고도 말하지 않고 그르다고도 말하지 않고 곧 자리에서 일어나 떠났다.
비구들은 서로 말하였다.
'우리는 이 이치를 세존께 가서 여쭈어 보자'고.
그들은 슈라아바스티이에 들어가 걸식을 마치고 가사와 바루를 두고 니쉬이다나를 오른 어깨에 걸치고
세존께 나아가 머리를 조아려 그 발에 예배하고 한쪽에 앉아 그 사실을 자세히 세존께 사뢰었다.
그때에 세존께서는 여러 비구들에게 말씀하셨다.
"만일 그 외도들이 이렇게 묻거든 너희들은 이런 말로 그들에게 대답하라.
'구경究竟은 하나인가, 구경은 여럿인가'고.
혹 그 범지들로서 공평하게 말하는 이라면 '구경은 하나요 여럿이 아니다'고 대답할 것이다.
만일 그러거든 '그 구경이란 욕심이 있는 이의 구경인가, 욕심이 없는 이의 구경인가'고 물어보라.
그들은 '그 구경이란 욕심 없는 이의 구경이다'고 대답할 것이다.
다시 '어떠냐 그 구경이란 성내는 이의 구경인가, 성내지 않는 이의 구경인가'고 물으면
그들은 '이른바 그 구경이란 성내지 않는 이의 구경이요. 성내는 이의 구경이 아니다.'
다시 '어떠냐 그것은 어리석은 이의 구경인가, 어리석지 않는 이의 구경인가.
'이른바 그 구경이란 어리석지 않은 이의 구경이다.'
다시 '어떠냐, 그 구경이란 애욕이 있는 이의 구경인가, 애욕이 없는 이의 구경인가.
그들은 '이른바 구경이란 애욕이 없는 이의 구경이다.'
다시 '어떠냐 그 구경이란 집착이 있는 이의 구경인가, 집착이 없는 이의 구경인가'
그들은 '이른바 그 구경이란 집착이 없는 이의 구경이다.'
다시 '어떠냐 그 구경이란 지혜로운 이의 구경인가, 지혜롭지 않은 이의 구경인가.
그들은 '그것은 지혜로운 이의 구경이다.'
다시 '그 구경이란 화내는 이의 구경인가, 화내지 않는 이의 구경인가.
그들은 '이른바 구경이란 화내지 않는 이의 구경이다'고 대답할 것이다.
비구들이여, 이런 두 가지 소견이 있다. 어떤 것이 두 가지인가.
이른바 <있다>는 소견과 <없다>는 소견이다.
모든 사문, 바라문들로서 이 두 가지 소견의 본말을 알지 못하면
그는 곧 욕심이 있고 성냄, 어리석음, 애욕, 집착이 있게 될 것이니 그는 곧 무지한 사람이다.
만일 그에게 화내는 마음이 있어 법다운 행과 서로 맞지 않으면
그는 남, 늙음, 병, 죽음과 근심과 번민을 벗어나지 못하고 모든 것이 고달파 괴로움을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만일 사문이나 바라문으로서 그것을 여실히 알면 그는 곧 어리석고 화내는 마음이 없고
항상 법다운 행과 서로 맞아 남, 늙음, 병, 죽음을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
이제 괴로움의 근본을 이와 같이 설명하였다.
비구들이여, 여기 묘한 법이 있으니 그것을 <평등한 법>이라 한다.
평등한 법을 행하지 않는 이는 곧 다섯 가지 그른 소견에 떨어질 것이다.
나는 지금 네 가지 집착을 설명하리라. 어떤 것이 네 가지 집착인가.
이른바 탐욕에의 집착, 소견에의 집착, 계율에의 집착, <나>에의 집착이니 이것을 네 가지 집착이라 한다.
어떤 사문이나 바라문은 '탐욕에의 집착'이란 이름을 안다.
그러나 그는 탐욕에의 집착이란 이름은 알지마는 그것만으로는 맞지 않다.
비록 그는 모든 집착의 이름을 안다 하지마는 먼저 탐욕에의 집착이란 이름만 알고
소견에의 집착, 계율에의 집착, <나>에의 집착이란 이름은 모르는 것이다.
왜 그러냐 하면 그 사문이나 바라문은 다른 세 가지 집착의 이름을 분별하지 못하기 때문이니라.
그러므로 어떤 사문이나 바라문은 그 모든 집착을 다 분별하지마는
그는 다만 탐욕에의 집착과 소견에의 집착을 분별하고 계율에의 집착과 <나>에의 집착은 분별하지 못한다.
왜 그러냐 하면 그 사문이나 바라문은 다른 두 가지 집착은 분별하지 못하기 때문이니라.
그러므로 또 어떤 사문이나 바라문은 모든 집착을 다 분별한다 하지마는 그래도 갖추지 못하는 것이 있다.
그것은 이른바 네 가지 집착이다.
어떤 뜻이 있고 또 어떻게 분별해야 하는가.
이른바 네 가지 집착은 애욕으로 말미암아 생기는 것이다.
이와 같이 비구들이여, 이 묘한 법을 분별해야 하느니라.
만일 이 모든 집착을 함께 깨닫지 못하면 그것은 평등이라고 부를 수 없다.
왜 그러냐 하면 모든 법의 이치는 깨닫기 어렵고 알기 어렵나니
그런 법답지 않은 이치는 부처님의 말씀이 아니기 때문이니라.
비구들이여, 알아야 한다.
여래는 능히 모든 집착을 다 분별하고 모든 집착을 분별하므로 말미암아 곧 법과 알맞게 된다.
즉 탐욕에의 집착, 소견에의 집착, 계율에의 집착, <나>에의 집착을 다 분별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여래는 모든 집착을 분별하고 법과 서로 알맞아 조금도 어긋남이 없느니라.
이 네 가지 집착은 무엇으로 말미암아 생기는가.
이 네 가지 집착은 애욕으로 말미암아 생기고 애욕으로 말미암아 자라난다.
만일 이 집착을 항복 받으면 곧 다른 모든 집착을 일으킬 수 없을 것이다.
모든 집착을 일으키지 않으면 곧 두려워하지 않을 것이요, 두려워하지 않으면 곧 열반에 들어
나고 죽음은 이미 끝나고 범행은 이미 이루었고 할 일은 이미 마쳐 다시는 후생 몸을 받지 않을 줄을 여실히 알 것이다.
그러므로 비구들이여,
이 묘한 법을 여실히 알면 모든 법다운 행의 근본을 완전히 갖출 것이다.
왜 그러냐 하면 이 법은 극히 미묘하기 때문이요,
모든 부처님의 말씀으로서 모든 행에 있어서 빠짐이 없을 것이다.
비구들이여,
여기 첫째 사문, 둘째 사문, 셋째 사문, 넷째 사문이 있어 그 어떤 사문도 이것보다 훌륭한 것이 없느니라."
부처님은 이와 같이 사자처럼 외치셨다.
비구들은 부처님 말씀을 듣고 기뻐하여 받들어 행하였다.
三.
이와 같이 들었다.
어느 때 부처님께서 슈라아바스티이의 제타 숲 <외로운 이 돕는 동산>에 계셨다.
그때에 아나아타핀디카 장자는 세존에게 나아가 머리를 조아려 그 발에 예배하고 한쪽에 앉았다.
세존께서는 장자에게 물으셨다.
"어떠냐, 장자야. 너는 집에서 늘 보시하느냐."
장자는 사뢰었다.
"저의 집에서는 늘 보시하나이다. 그러하온데 음식이 추해서 보통 때와 다르나이다."
세존께서는 말씀하셨다.
"보시할 때에는 그것이 좋거나 추하거나 많거나 적거나 간에
만일 거기에 정성을 들이지 않고 원을 세우지 않으며 또 믿는 마음이 없으면
그 행의 갚음으로서 태어나는 곳에서는 좋은 음식을 얻지 못하므로 마음은 즐겁지 않을 것이다.
또 좋은 의복도 즐겁지 않고 좋은 농사도 즐겁지 않으며 다섯 가지 쾌락도 즐겁지 않을 것이요,
비록 하인과 남녀의 종이 있더라도 그들은 명령을 받들지 않을 것이다.
왜 그러냐 하면 그 보시에 정성을 들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런 갚음을 받는 것이니라.
만일 장자가 보시할 때에 그것이 좋거나 추하거나 많거나 적거나 간에
정성껏 마음을 쓰고 차별을 두지 않으며 후세의 다리[橋]가 되겠다고 발원하면
그가 태어나는 곳에는 음식은 저절로 생기고 일곱 가지 보배는 두루 갖추어지며
마음은 다섯 가지 쾌락 속에서 항상 즐거울 것이요,
만일 남녀 종들과 하인이 있으면 그들은 항상 명령을 받을 것이다.
왜 그러냐 하면 그 보시에는 기뻐하는 마음을 내었기 때문이니라.
장자야, 알라. 먼 과거에 빌라아마라는 범지가 있었다.
그는 재물과 보배가 많아 진주, 호박, 자거, 마노, 수정, 유리로써 보시하기를 좋아하였었다.
그는 보시할 때에 八만 四천 은바루에는 가루 금을 가득 담고
八만 四천 금바루에는 가루 은을 가득 담아 보시하였다.
또 八만 四천 금, 은 대야를 보시하고
또 八만 四천 소를 금, 은으로 뿔을 싸서 보시하였다.
또 八만 四천 미녀를 의복으로 덮어 보시하고
털과 비단을 짜고 수를 놓은 천으로 덮은 八만 四천 침구를 보시하고
八만 四천 의상을 보시하고, 다시 금과 은으로 얽어 장식한 八만 四천 큰 코끼리를 보시하고
다시 금과 은으로 된 안장과 굴레를 씌운 八만 四천 말을 보시하고
또 八만 四천 수레를 보시하고 八만 四천 집을 보시하였다.
또 옛 성문에서 보시하되 음식을 요구하면 음식을 주고
의복을 요구하면 의복을 주어 의복, 음식, 평상, 침구, 의약 등을 모두 주었느니라.
장자야, 알라.
그 빌라아마가 비록 그런 보시를 하였지마는 그것은 집 한 칸을 지어 나그네 중에게 보시하는 것만 못하다.
이 복은 헤아릴 수 없느니라.
또 그가 그렇게 보시하고 집을 지어 나그네 중에게 보시하더라도
그것은 부처와 법과 중의 세 분에게 귀의하는 것만 못하다.
이 복은 헤아릴 수 없느니라.
또 비록 그가 그렇게 보시하고 또 집을 지으며
세 분에게 귀의하는 복이 있더라도 그것은 다섯 가지 계율을 받들어 가지는 것만 못하느니라.
비록 그 사람이 그렇게 보시하고 집을 지으며 세 분에게 귀의하고
다섯 가지 계율을 받드는 복이 있더라고 그것은 잠깐 동안이나마 중생을 사랑하고 가엾이 여기는 것만 못하다.
이 복의 공덕은 헤아릴 수 없느니라.
또 비록 그 사람이 그렇게 보시하고 집을 지으며 세 분에게 귀의하고
다섯 가지 계율을 받들어 가지며 잠깐 동안이나마 중생을 사랑하고 가엾이 여기는 복이 있더라도
그것은 잠깐 동안이나마 세상은 즐겨 할 것이 못 된다고 생각하는 것만 못하다.
이 복의 공덕은 헤아릴 수 없느니라.
그리고 그가 지은 공덕을 나는 다 증명한다.
집을 짓는 복도 나는 알고 세 분에게 귀하는 복과 다섯 가지 계율을 받드는 복과 잠깐 동안이나마
중생을 사랑하고 가엾이 여기는 복과 잠깐이나마 세상은 즐겨 할 것이 못된다고 생각하는 복을 나는 다 안다.
그때의 그 바라문으로서 그렇게 큰 보시를 행한 사람을 다른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말라.
왜 그러냐 하면 그 때의 그 시주한 이는 바로 나이기 때문이니라.
장자야, 알라.
나는 먼 과거로부터 공덕을 지을 때에는 믿는 마음을 끊지 않았고 애착하는 생각을 일으키지 않았다.
그러므로 장자야,
만일 보시하려 할 때에는 그것이 많거나 적거나 좋거나 추하거나 간에
즐거이 보시하여 애착하는 마음을 내지 말고 손수 보시하여 남을 시키지 말며
원을 세워 갚음을 구하고 그 뒤에 복 받기를 구하면 장자는 반드시 무궁한 복을 받을 것이다.
장자야, 이와 같이 공부하여야 하느니라."
그때에 장자는 부처님 말씀을 듣고 기뻐하여 받들어 행하였다.
四.
이와 같이 들었다.
어느 때 부처님께서 슈라아바스티이의 제타 숲 <외로운 이 돕는 동산>에 계시면서 여러 비구들에게 말씀하셨다.
"해가 처음 뜰 때에는 사람들은 모두 나가 농사를 짓고 온갖 새는 슬피 울며 애들은 가엾이 부르짖는다.
비구들이여, 알라. 이것은 비유이다. 그 뜻을 이해하여야 하느니라.
그 뜻을 어떻게 풀 것인가.
해가 처음 뜨는 때란 여래께서 세상에 나오심을 비유한 것이요,
사람들이 모두 나가 농사를 짓는다는 것은 시주가 때를 따라 의복, 음식, 평상, 침구, 의약 등을 이바지하는 것이며
온갖 새가 슬피 운다는 것은 덕망이 높은 법사의 비유로서 네 가지 무리들을 위해 미묘한 법을 연설하는 것이요,
어린애가 가엾이 부르짖는다는 것은 악마 파아피이야스의 비유이니라.
그러므로 비구들이여, 해가 처음 뜨는 것처럼 여래께서 세상에 나오시면 어두움을 없애어 비추지 않는 곳이 없다.
그러므로 비구들이여, 이와 같이 알아야 하느니라."
그때에 비구들은 부처님 말씀을 듣고 기뻐하여 받들어 행하였다.
五.
이와 같이 들었다.
어느 때 부처님께서 슈라아바스티이의 제타 숲 <외로운 이 돕는 동산>에 계셨다.
그때에 미륵보살은 세존께 나아가 그 발에 예배하고 한쪽에 앉아 세존께 사뢰었다.
"보살 마하살은 몇 가지 법을 성취하여야 보시 바라밀을 행하고
여섯 바라밀을 두루 갖추어 위없는 바른 도를 빨리 성취하게 되나이까."
부처님께서는 말씀하셨다.
"보살 마하살이 네 가지 법의 근본을 성취하면 여섯 바라밀을 두루 갖추어 위없는 다 옳은 깨달음을 이룰 것이다.
어떤 것이 네 가지인가.
보살이 보시할 때에는 벽지불과 밑으로 범인에 이르기까지 모두 평등이 보아 사람을 가리지 않고 항상 이렇게 생각하라.
'모든 중생은 먹음으로 살고 먹지 않으면 죽는다'고.
이것이 이른바 보살이 이 첫째 법을 성취하여 여섯 바라밀을 두루 갖춘다는 것이니라.
다시 보살이 보시할 때에는
머리나 눈, 골수, 뇌수, 나라, 재물, 아내, 자식 등을 즐겁게 보시하여 애착하는 생각을 내지 말라.
마치 죽어 가던 사람이 갑자기 살아나면 기뻐 뛰면서 어쩔 줄을 모르는 것처럼
보살이 마음을 내어 기뻐하는 것도 그와 같아서 보시의 서원에 애착하는 생각을 내지 않느니라.
다시 미륵이여,
보살이 보시할 때에는 그 공덕을 일체에 미치게 하고 자기만의 위없는 바른 깨달음을 위한 것이 아니어야 한다.
이것이 이른바 '셋째 법을 성취하여 여섯 바라밀을 두루 갖춘다'는 것이니라.
다시 미륵이여, 보살 마하살이 보시할 때에는 이렇게 생각하라.
'모든 중생 무리 중에서 보살이 가장 우두머리가 된다.
그는 여섯 바라밀을 두루 갖추고 모든 법의 근본을 안다.
왜 그러냐 하면 그는 밥을 먹고는 모든 감관이 고요하여 계율을 생각하여
성내지 않고 사랑하는 마음을 닦으며 용맹하게 정진하여 선법은 자라게 하고 악법은 없애며
항상 마음이 한결 같아서 뜻이 어지럽지 않으며 변재를 두루 갖추어 설법에는 마침내 차례를 넘지 않기 때문이다.
이 보시로 하여금 여섯 바라밀을 두루 갖추고 보시 바라밀을 이루게 하여지이다'고.
만일 보살 마라살이 이 네 가지 법을 행하면 위없는 다 옳은 깨달음을 성취하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미륵이여, 원을 세워 모든 행을 두루 갖추도록 하라.
미륵이여, 이와 같이 공부하여야 하느니라."
그때에 미륵은 부처님 말씀을 듣고 기뻐하여 받들어 행하였다.
六.
이와 같이 들었다.
어느 때 부처님께서 슈라아바스티이의 제타 숲 <외로운 이 돕는 동산>에 계시면서 여러 비구들에게 말씀하셨다.
"여래는 세상에 나와 네 가지 두려움이 없다.
여래는 이 네 가지 두려움이 없게 되어 세상에 대한 집착이 없고 대중 가운데서 사자처럼 외쳐 법 바퀴를 굴리느니라.
어떤 것이 네 가지인가.
나는 이미 이 법을 성취하였다.
그러므로 만일 저 사문이나 바라문, 악마, 악마 하늘이나 날짐승, 길짐승들이 대중 가운데서
'여래는 이 법을 성취하지 못하였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옳지 않다.
거기서 두려움이 없으니 이것이 이른바 첫째의 두려움이 없는 것이니라.
나는 이제 모든 번뇌가 다해 다시는 중생의 태胎를 받지 않을 것이다.
만일 어떤 사문이나 바라문의 중생들이 대중 가운데서 '여래는 번뇌가 다하지 않았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옳지 않다.
이것이 이른바 둘째의 두려움이 없는 것이니라.
나는 이제 이미 어리석고 어두운 법을 떠났다.
어리석고 어두운 법으로 돌리려 하여도 그것은 될 수 없는 일이다.
그런데 만일 사문이나 바라문, 악마, 악마 하늘의 중생들이 대중 가운데서
'여래는 어리석고 어두운 법으로 돌아갈 것이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옳지 않다.
이것이 이른바 여래의 셋째의 두려움이 없는 것이니라.
번뇌를 벗어나는 성현의 법은 괴로움을 완전히 벗어나게 한다.
아무리 벗어나지 못하게 하려 하여도 마침내 그리 될 수 없다.
그런데 만일 어떤 사문이나 바라문, 악마, 악마 하늘의 중생 무리들이 대중 가운데서
'여래는 괴로움을 벗어나지 못하였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옳지 않다.
이것이 이른바 여래의 넷째의 두려움이 없는 것이니라.
비구들이여,
이와 같이 여래는 네 가지 두려움이 없어 대중 가운데서 사자처럼 외쳐 법 바퀴를 굴리는 것이다.
그러므로 비구들이여, 방편을 구해 네 가지 두려움이 없도록 하라.
비구들이여, 이와 같이 공부하여야 하느니라."
그때에 비구들은 부처님 말씀을 듣고 기뻐하여 받들어 행하였다.
七.
이와 같이 들었다.
어느 때 부처님께서 슈라아바스티이의 제타 숲 <외로운 이 돕는 동산>에 계시면서 여러 비구들에게 말씀하셨다.
"여기 네 사람이 있어 총명하고 용맹스러우며 과거에 통하고 현재에 밝아 법과 법을 성취하였다.
어떤 것이 네 사람인가.
비구는 많이 들어 과거에 통하고 현재에 밝아 대중 가운데서 가장 제일이다.
비구니는 많이 들어 과거에 통하고 현재에 밝아 대중 가운데서 가장 제일이다.
우바새는 많이 들어 과거에 통하고 현재에 밝아 대중 가운데서 가장 제일이다.
우바이는 많이 들어 과거에 통하고 현재에 밝아 대중 가운데서 가장 제일이다.
비구들이여,
이것이 이른바 네 가지 사람은 대중 가운데서 가장 제일이라는 것이니라."
그때에 세존께서는 곧 다음 게송으로 말하였다.
용맹스러워 두려움 없고 많이 들어 설법 잘하며
대중 가운데서 사자師子가 되어 겁내고 약한 법을 없애느니라.
비구는 계율을 성취하였고 비구니들은 많이 들었고
우바새는 믿음 있나니 우바이도 그러하니라.
대중 가운데서 제일이 되어 능히 대중에 화하고 순하며
이러한 이치를 알려고 하는 이 그는 처음 뜨는 해와 같아라.
"그러므로 비구들이여, 마땅히 과거에 통하고 현재에 밝아 법과 법을 성취하도록 하라.
비구들이여, 이와 같이 공부하여야 하느니라."
그때에 비구들은 부처님 말씀을 듣고 기뻐하여 받들어 행하였다.
八.
이와 같이 들었다.
어느 때 부처님께서 슈라아바스티이의 제타 숲 <외로운 이 돕는 동산>에 계시면서 여러 비구들에게 말씀하셨다.
"네 종류의 금시조金翅鳥가 있다. 어떤 것이 네 종류인가.
알 나기 금시조, 태나기 금시조, 누기나기 금시조, 바꿔나기 금시조가 있다.
이것이 네 종류의 금시조이니라.
비구들이여, 이와 같이 네 종류의 용이 있다. 어떤 것이 네 종류인가.
알 나기 용, 태나기 용, 누기나기 용, 바꿔나기 용이 있다.
이것이 네 종류의 용이니라.
비구들이여, 알라.
저 알 나기 금시조가 용을 잡아먹으려 할 때에는 쇠꼬치나무 위에 올라가 제 몸을 바다에 던진다.
그 바다는 세로와 넓이가 28만 리요.
바다 밑에는 네 가지 용궁이 있어서 알 나기 용, 태나기 용, 누기나기 용, 바꿔나기 용이 있다.
그때에 알 나기 금시조는 큰 날개로 물을 쳐서 두 쪽으로 갈라 알 나기 용을 잡아먹는다.
만일 어쩌다 태나기 용을 치면 금시조는 곧 죽고 만다.
금시조는 물을 쳐 용을 잡아먹고는 물이 아직 합하기 전에 쇠꼬치나무 위로 도로 올라가느니라.
비구들이여, 알라. 태나기 금시조가 용을 잡아먹으려 할 때에는 쇠꼬치나무 위에 올라가 제 몸을 바다에 던진다.
그런데 그 바닷물은 세로와 넓이가 28만 리다.
물을 가르고 내려가면 태나기 용이나 알 나기 용을 만나면 곧 잡아 물고 바다 위로 나오지마는
만일 누기나기 용을 만나면 새 자신이 곧 죽고 마느니라.
비구들이여, 알라.
만일 누기나기 금시조가 용을 잡아먹으려 할 때에는 쇠꼬치나무 위에 올라가 제 몸을 바다에 던진다.
그가 만일 알 나기 용, 태나기 용, 누기나기 용을 만나면 모두 잡아먹을 수 있지마는
만일 바꿔나기 용을 만나면 새 자신이 곧 죽고 마느니라.
비구들이여,
바꿔나기 금시조가 용을 잡아먹으려 할 때에는 쇠꼬치나무 위에 올라가 제 몸을 바다에 던진다.
그런데 그 바닷물은 세로와 넓이가 28만 리다.
물을 가르고 내려가 알 나기 용, 태나기 용, 누기나기 용, 바꿔나기 용을 만나면
그것을 다 잡아먹고 바닷물이 합하기 전에 쇠꼬치나무 위로 도로 올라오느니라.
비구들이여, 알라. 만일 그 용왕으로 하여금 부처님을 섬기게 하면 금시조는 그것을 잡아먹지 못한다.
왜 그러냐 하면 여래는 항상 네 가지 평등한 마음을 쓰기 때문에 그 새는 용을 잡아먹지 못한다.
어떤 것이 네 가지 평등한 마음인가.
여래는 항상 사랑하는 마음을 쓰고, 가엾이 여기는 마음, 기뻐하는 마음, 보호하는 마음을 쓴다.
비구들이여, 이것이 이른바 여래가 항상 쓰는 네 가지 평등한 마음이다.
그것은 큰 힘이 있고 큰 용맹이 있어서 막거나 무너뜨릴 수 없다.
그래서 금시조는 용을 잡아먹지 못한다.
그러므로 비구들이여, 평등한 마음을 쓰도록 하라.
비구들이여, 이와 같이 공부하여야 하느니라."
그때에 비구들은 부처님 말씀을 듣고 기뻐하여 받들어 행하였다.
九.
이와 같이 들었다.
어느 때 부처님께서 슈라아바스티이의 제타 숲 <외로운 이 돕는 동산>에 계시면서 여러 비구들에게 말씀하셨다.
"만일 선지식으로 보시할 때에는 네 가지 공덕이 있다. 어떤 것이 네 가지인가.
때를 알아서 보시하고 때를 모르는 것이 아니요, 제 손으로 보시하고 남을 시키지 않으며
항상 정결한 것을 보시하고 정결하지 않은 것이 아니요, 미묘한 것을 보시해 더럽지 않은 것이다.
선지식으로서 보시할 때에는 이런 네 가지 공덕이 있다.
그러므로 선남자, 선녀인도 보시할 때에는 이 네 가지 공덕을 갖추어야 한다.
이 공덕을 갖추면 큰 복업을 얻고 단 이슬의 열반을 얻을 것이다.
그리고 그 복덕은 헤아릴 수 없어 얼마 마한 복업이 있다고 말 할 수 없고 허공도 받아들일 수 없을 것이다.
그것은 마치 바닷물은 헤아릴 수가 없어 한 섬이니 반 섬이니 한 홉이니 반 홉이니 하고
숫자의 이름으로 셀 수 없는 것처럼 그 복업은 낱낱이 말할 수 없느니라.
이와 같이 선남자, 선녀인이 지은 공덕은 헤아릴 수 없는 큰 복업을 얻고
단 이슬의 열반을 얻어 얼마 마한 복덕이라고 말할 수 없느니라.
그러므로 비구들이여, 선남자 선녀인은 이 네 가지 공덕을 갖추도록 하라.
비구들이여, 이와 같이 공부하여야 하느니라."
그때에 비구들은 부처님 말씀을 듣고 기뻐하여 받들어 행하였다.
十.
이와 같이 들었다.
어느 때 부처님께서 슈라아바스티이의 제타 숲 <외로운 이 돕는 동산>에 계시면서 여러 비구들에게 말씀하셨다.
네 종류의 사람이 있다.
그들은 공경할 만하고 높일 만하며 세상의 복 밭이 된다.
어떤 것이 네 사람인가.
이른바 믿음을 가지는 사람, 법을 받드는 사람, 몸으로 증득한 사람, 지혜가 밝은 사람이다.
어떤 이가 믿음을 가진 사람인가.
어떤 사람은 사람의 교훈을 받으면 독실히 믿는 마음이 있어 의심하지 않고
여래, 아라한, 다 옳게 깨달은 이, 지혜와 행을 갖춘 이, 세상 아는 이, 잘 간 이, 위없는 선비, 도법으로 어거하는 이,
천상과 인간의 스승, 부처 세존에 대해 믿음이 있다.
또 여래의 말을 믿고 범지의 말을 믿으며 남의 말을 믿어 자기 지혜에 맡기지 않는다.
이것을 믿음을 가지는 사람이라 하느니라.
어떤 이가 법을 받드는 사람인가.
어떤 사람은 법을 분별해 남을 믿지 않고 법을 관찰한다. '있는가 없는가. 진실한가 허망한가'고.
그는 생각한다. '이것은 여래의 말이요, 이것은 범지의 말이다'고.
그래서 여래의 법인 줄을 알면 곧 받들어 가지고 외도의 말이면 멀리 떠난다.
이것을 법을 받드는 사람이라 하느니라.
어떤 이가 몸으로 증득한 사람인가.
어떤 이는 자기 몸으로 증득하여 남을 믿지 않고 여래의 말도 믿지 않으며
모든 존자의 가르침도 믿지 않고 자기 성품에 맡겨 즐겁게 논다.
이것을 몸으로 증득한 사람이라 하느니라.
어떤 이가 지혜가 밝은 사람인가.
어떤 사람은 세 가지 결박을 끊고 수다원의 물러나지 않는 법을 이룬다.
그에게는 이런 소견이 있다.
'보시하는 이도 있고 받는 이도 있으며 선악의 갚음도 있고 이승 저승도 있으며
아버지도 있고 어머니도 있으며 아라한 등의 가르침을 받는 이도 있다'고.
그래서 몸으로 믿고 증득하여 스스로 놀면서 교화한다.
이것을 지혜가 밝은 사람이라 하느니라.
비구들이여,
이것이 이른바 네 종류의 사람이 있다는 것이니 다른 세 사람은 버리고 몸으로 증득하는 법을 닦기를 생각하라.
비구들이여, 이와 같이 공부하여야 하느니라."
그때에 비구들은 부처님 말씀을 듣고 기뻐하여 받들어 행하였다.
출처 : NIRVAN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