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시절 / 안양임
부지깽이로 글자를 썼다
친구에게 물었다
맞는 글자가 딱 한 개 있다고 했다
숫자 '1'이었다
어린 시절 흙바닥에 썼던 것
1 말고도 많은 것을 쓰고 싶었다
쓰고 싶고 알고 싶은 꿈을 오래 간직해 왔다
나는 그 꿈을 지금 이루고 있다
열심히 공부하는 지금이 바로
어린 시절의 내 꿈이다
배추흰나비 / 백복순
눈을 비벼도 보이지 않고
크게 소리질러도 들리지 않고
어깨를 펴도 더욱 오그라들고
그냥 코딱지만 했었다
어찌해 보려고
꿈틀거려 봐도
내 자리는 어느새 구석탱이
그게 내 길이려니
내 인생이려니
눈을 떠도 보지 못한 채
늘 그 자리에 서 있는 전봇대였다
그, 러, 나
칠십 다 된 나이에
들어선 배움의 길
하늘이 파랗다
소리가 우렁차다
펼친 내 어깨에 힘이 솟는다
아직은 날지 못하지만
훨훨 날을 내일을 꿈꾼다
나는
꿈을 꾸는
행복한 배추흰나비
호박시 / 김순이
시라는 게 다 뭐꼬
배추시 아니면 고추시
그럼 아니 호박시
호박시를 한번 심어볼까?
내 평생 시라고는 종자 씨앗으로만 생각했다
호박시를 큰 화분에 심어놓고
매일같이 시가 되어 나오라고 기도를 했다
한 달이 지나도 시는 나오지 않고
싹이 터서 파란 두 잎이 나오더니
줄기가 뻗어나가고 꽃이 피고 호박이 열리더라
아하, 시란 놈은 이렇게 꽃이 피고
열매가 대롱대롱 매달리는 거로구나
응원 / 이분옥
뚝배기 안에서 콩알들이
보글보글 춤춘다
호박 두부 고추들이
어울려서 구수한 된장찌게가
하루의 시작을 연다
찌게를 끓이다 못 가르친
한 품고 간 엄마 생각에
늦은 나이에 공부를 시작했다
책가방에서 공책이 부비부비
필통 안 연필도 달그락그락
찌개를 끓이며 내 삶을 응원한다
이슬비 / 정길임
사그작사그작 소리 없이 내리는 이슬비에
새벽잠 깨어 눈 비비고 일나나
맨발로 앞뜰로 나가보니
구슬마냥 맺힌 물방울방울들...
맑고 시린 방울 속에 이제 딱 시작한
ㄱ, ㄴ, ㄷ.......ㅇ.....ㅎ이 보인다
해가 뜨면 금방 사라질 작은
물방울들의 소리들이 들리는 듯...
열심히 하라고 응원의 박수를 보내는 듯
동글동글 똑똑똑
내가 너의 힘이 되어줄께~~
우야노 우야노 / 오중이
첩첩산중
토끼와 동무하며 사는 동네
재 너머 가다 호랑이 업어간다
학교를 가지 못해 트인 것은
글눈보다 일눈이네
철철이 감자 심고
생강 심고 콩 심는 건
술술 기억도 잘하네
그런데 이놈의 글자는
한 귀로 들어갔다 다시 나오네
우야노 우야노 이 노릇을
내가 제일 무서운 놈 잡았다 / 윤복녀
호랑이보다 더 무서운 놈
귀신보다 더 무서운 놈
항상 주눅들게 하는 놈
나가는 것도 두려워하게 하는 놈
하고 싶은 것도 많은 나
미용도, 양장도 배우면 자신있는데
무서워 속 끓이며 울고 또 울고
누구를 탓하랴 내 마음 달래야지
이제 안 되겠다 싶어 60 중반이 넘어서야
문해교육에 문을 두드려 선생님께
한글이라는 놈 좀 잡아달라고 했다
왜 그렇게도 안 잡히려고 하는지
왼쪽 귀에 넣으면 오른쪽 귀로 도망가고
하지만 나는 그놈을 꼭 붙잡고 안 놓을 것이다
앞으로 나는 시인이 되어 무지개 다리를 건너
초록 잔디 위에 나무의자 하나 놓고 앚아
시를 쓸 것이다
늦은 나이에 길을 나섰습니다 / 노옥연
생활에 얽매여
글씨는 쳐다볼 엄두도 못 내고
짐승처럼밥해 먹고 일만 하다가
서울로 와 보니 무시하는 눈초리가
사방에서 왔다 갔다 했지요
요즘은 배우고 싶은 꿈만 있다면
희망의 빛이 손짓하는 세상이 좋아
깜빡깜박 그 별빛 하나 보고
늦은 나이에 길을 나섰지요
곧 닿겠지 생각했는데
가도 가도 첩첩산중 기억마저 흐려지는데
별은 여전히 저 멀리서만 깜박이네요
그래도 걸어가려고요
해 속에 나 있는 길,
그 깊은 뚯과 선생님 수고와 힘은
큰 배를 움직이는 물의 힘보다 강하다는 생각
마음에 깊이 간직한 체로
오늘도 깜빡이는 별빛을 향해 걸어가고 있지요
행님과 아우 / 서무자
행님~
우찌 그리 잘 하능교
나는
암만 해도 달 안 되는데
아우야~
열심히 해봐라
니도
내만큼 될 끼라
행님~
공부가 재미있능교
하모
진작에 했어야 하는데
아우야~
뭐가 그리 걱정이고
지금
해도 하나도 안 늦다
진짜요?
인자 해도 될까요?
하모
시작이 반이라 안 카나
할 수 있겠제~
포기하지 말그라
힘내라이~
희망 / 이효령
식탁 위에 놓인
숫가락은 '9' 요
젓가락은 '11'이다
동그란 국그릇은 ㅇ이고
네모난 접시는 ㅁ이다
ㄱ,ㄴ,ㄷ,ㄹ을 외우며 밥상을 차리고
ㅏ,ㅑ,ㅓ,ㅕ를 외우며 설걷이를 한다
좀 늦으면 어떻고
더디 가면 어떠니
칠순에 시작한 한글공부, 숫자 공부
이만하면 훌륭하지
울퉁불퉁 삐둘삐뚤 그래도 나는
신난다
시작이 반이라 하지만
나의 시작은 반이 아닌 희망이야
무서운 손자 / 강춘자
어릴 저
할머니 다리에 누워
옛날 얘기를 들으며
잠이 들곤 했었는데
우리 손주는
책을 가져와
읽어달라고 하니
무서워 죽겠다
말로 하는 이야기라면
손으로 하는 음식이라면
손주놈이 해달라는 대로
해줄 수 있으련만
달려가 보듬어 안고파도
손주놈 손에 들린
동책이 무서워
부엌에서 나가질 못한다
나의 보물, 동백나무 한 그루 / 조매현
우리 집 앞마당에 동백나무 한 그루
남편이 시장에서 사오신 동백나무
심은 지 2년이 되던 해 먼 세상으로 가버렸다
그 동맥나무는 무럭무럭 잘 자랐고
그 이듬해부터 해마다 꽃이
탐스럽게 피어 내가 아침마다
쓰다듬으며 칭찬도 했다
지난 겨울이 얼마나 추웠는지
잎이 얼어버렸다
그것을 본 내 마음은
남편을 두 번 잃은 것 같았다
다음해 끝순에서 새싹이 돋아나
얼마나 반가웠는지 눈물이 났다
남편이 선물한 나무 한 그루가
나에게는 아주 소중한 보물이다
소리꽃 피다 / 장금례
산골짝 작은 동네에 꽃이 피었어요
매화꽃도 아니어요
동백꽃도 아니어요
자전거 타고 따릉 따릉
유모차 밀고 드륵 드륵
지팡이 짚고 기뚱 기뚱
네가 일등이냐
내가 일등이나
씽씽 쌩쌩 마음만 달려간다
박수치며 가나다라
흔들흔들 거너더러
시끌벅쩍 웃음꽃, 소리꽃이 만발이다
카페 게시글
우리들의 이야기
엄마의 꽃시 - 100명의 어머니가 쓰고 김용택이 엮다
붉은 동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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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3.07 17: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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