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목 이 시인을 만나다 김상미 |시집 속 대표시
밖에는 비가 내리고 외 4편
밖에는 비가 내리고
우리는 아직도 침대에 있다
끝도 없이 계속되는 애무
사랑의 이름으로 우리가 할 수 있는
유일한 명분
창문을 두드리며 우리를 염탐하는 빗방울들
벗어놓은 옷과 양말들
들끓는 책과 화분들
벽에 걸린 채로도 잘도 익어가는 저 먼 정글의
향기로운 과일들
밖에는 비가 내리고
우리는 아직도 침대에 있다
얼마나 놀라운가
두려움 없는 사랑은 부재를 모른다
그래도 잠시, 호흡을 조절하자
한 번도 제자리를 떠난 적 없는 사랑은
우리의 욕망이 아무리 흘러넘쳐도
모든 걸 다시 제자리로 갖다 놓는다
그동안 우리는 몇 번을 더 사랑할 수 있다
외로운 한 존재가 다른 외로운 한 존재를 열망하는
가슴 뭉클한 허기를 한순간도 놓치지 말자
밖에는 비가 내리고
우리는 아직도 침대에 있다
무엇이 두려운가
장미꽃이 활짝 피려면 한참을 더 기다려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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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커 치는 개들
남자다운 척, 남자다운 척, 남자다운 척 있는 대로 폼잡다 어른이 된 남자와 여자다운 척, 여자다운 척, 여자다운 척 있는 대로 내숭떨다 어른이 된 여자가, 결혼한 지 15년 만에 큰 집을 장만했다며 우리를 초대했다. 근사한 정원인 척하는 잔디밭과 몇 그루 꽃나무를 지나 실내로 들어서니, 우아하고 세련된 척하는 가구들과 전문가 뺨치는 오디오 시설에 영상기기들까지 척, 척, 척 설치해놓고, 자랑스레 우리를 반기며 아주 행복한 척, 에로틱한 척 은밀한 침실까지 슬쩍 보여주었다. 우리는 부러운 척, 탐나는 척 어머, 어머, 감탄사를 남발하며 아주 모던하고 담백한 척 건강미를 뽐내는 식탁에 둘러앉아 맛있는 척, 즐거운 척, 황송한 척 밥을 먹고 차를 마시고, 제각기 준비해간 선물 보따리를 풀며 마치 그들의 행복이 곧 우리의 행복인 척 환하게, 환하게 웃다가, 거실 한가운데 떡 하니 걸려 있는 C. M. 쿨리지의 그림 「포커 치는 개들」과 눈이 딱 마주쳤다. 어머머, 저 개들 좀 봐. 개들인 주제에 인간인 척 열심히 포커 게임 중이네. 기분 묘하게도 우리처럼 딱 일곱 마리네. 하기는 요즘엔 인간이나 개나 크게 다를 바 없는 세상이니 개가 인간인 척한다고 놀랄 일도 아니지. 우리도 저들처럼 신나게 포커나 한 판 칠까? 그러자 쪼르르 카드를 가지러 가는 주인 부부. 하긴 오늘 우리가 척, 척, 척하며 그들에게 흔들어댄 꼬리만 해도 얼마냐. 졸지에 인간 아닌 척 신나게 포커 치는 개가 된다 한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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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울, 버섯요리를 하며
춥다. 한겨울 날씨는 살을 엔다. 이런 날은 버섯요리를 하자. 어제 읽은 책*에 적힌 그대로 큰갓버섯 요리를 하자. 젊음을 모르는 큰갓버섯. 하얀 털모자를 쓰고 땅에서 올라오지만, 땅속에서 이미 늙어버려 땅 위에선 노파로 살아야 하는, 큰갓버섯을 다듬으며 나는 내가 아는 버섯 이름들을 생각나는 대로 소환해 본다.
거친껄껄이그물버섯, 구릿빛무당버섯, 구름버섯, 꾀꼬리버섯, 노루궁뎅이버섯, 어린말불버섯, 깔때기무당버섯, 웃음버섯, 주사위환각버섯, 냄새무당버섯, 구멍장이버섯, 알광대버섯, 독우산광대버섯…
하나같이 이름들이 희한하게 재미있고 자연 친화적이다. 그중 광대버섯, 독버섯 중에서도 가장 독종인 광대버섯을 맛나게 요리해 먹는 여자 둘을 만났다. 어제 읽은 책에서. 죽음의 모자, 파괴의 천사라 불리는 그 독버섯을 먹고도 죽지 않는 여자들. 그들은 마녀일까? 성녀일까? 그들과 사귀고 싶다! 나는 나도 모르게 열에 들떠 책을 끌어안았다. 치명적 독을 능가하는 여자들. 한겨울 날씨처럼 아름다운 여자들. 순수한 독. 그 순수한 어둠과 빛을 온몸으로 다 소화해내는 여자들. 에밀리 디킨슨의 시 같은 여자들. 갈수록 자연이 되어가는 여자들. 나는 그 가까이에도 못 가봤지만, 그래도 정말 그들과 사귀고 싶다! 눈 덮인 한겨울, 깊고 깊은 산 적막 같은 여자들. 그들처럼 나도 독버섯을 먹고 그들 곁에 나란히 누워 꿈꾸듯 밤하늘의 별들을 헤아리다 잠들고 싶다.
남십자성과 기울어진 국자, 전갈과 도마뱀, 거꾸로 선 게와 사냥개, 안드로메다와 카시오페이아, 물고기와 처녀, 페가수스와 작은 곰, 오리온과 엎질러진 물병, … 그리고 멀리서 들려오는 파도 소리, 파도 소리.
*올가 토카르추크, 『낮의 집, 밤의 집』, 이오진 옮김, 민음사,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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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의 통장
엄마의 통장을 어떻게 하나?
내 통장 상자에 아직도 들어 있는 엄마의 통장
이제는 쓸 수 없으니 버려야 하는데
객지에 사는 딸이 매달 부쳐주는 용돈을
딸이 보내는 반가운 편지인 듯 차곡차곡 모아두었다가
돌아가시면서 건네주시던 그 통장
그 통장의 돈을 형제들과 똑같이 나누면서 펑펑 울었던
아, 우리 엄마의 통장
그 내리사랑을 어떻게 하나?
이제는 훨훨 태워 자유롭게 보내드려야 하는데
아끼고 아껴서 자식에게 되돌려줄 기쁨에
불어나는 통장 액수만큼 몇 배로 검소하셨을 우리 엄마
그 착한 통장을 어떻게 버리나?
일거리가 없는 달엔 하루 한 끼만 먹고도 한 번도 거르지 않았던 엄마의 용돈
그 용돈 보내는 재미로 힘내며 힘차게 살았는데
이제는 그 재미 사라진 지도 어느덧 십여 년
은행에 가기 위해 통장을 꺼내는데
그 아래에서 삐죽 고개 내밀며 활짝 웃는 엄마의 통장
나도 모르게 엄마, 은행 다녀올게!
꾸벅 인사하는 나
아직도 엄마의 손길, 엄마 냄새 가득한
착하디착한 그 통장을 어떻게 버리나?
창밖엔 엄마가 그리도 좋아하던 수국이 한창인데
나는 그 수국조차 엄마가 남긴 그리운 유품 같아
눈시울이 자꾸만 붉어지고 붉어지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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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이라는 팔자
어느 날, 아르튀르 랭보는 자신의 분신과도 같은 시를 자신에게서 산 채로 잘라내 버렸다. 로베르트 발저는 스스로 헤리자우의 정신병원으로 걸어 들어가 27년간 아무것도 쓰지 않고, 죽을 때까지 종이봉투만 접었다. 실비아 플라스는 꼼짝없이 사로잡힌 시라는 괴물에게서 벗어나지 못해 가스오븐에 자신의 머리를 처박아 넣었다. 아틸라 요제프는 먹고살기가 너무 막막해 달려오는 화물열차에 몸을 던졌다. 조국 광복을 눈앞에 둔 28세의 윤동주는 일본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일본인들에 의해 생체실험을 당했다. 산도르 마라이는 조국을 등지고 오랜 망명 생활 끝에 “세상에 아첨하느니 사색하는 인간으로 사멸하겠다”며 권총 자살을 했다. 하트 크레인은 사랑이라는 환상을 쫓고, 좇다 무너진 탑이 되어 푸른 카리브해 깊숙이 가라앉았다. 프리모 레비는 그 지독한 아우슈비츠에서도 살아남았으나, ‘살아남은 자의 아픔’을 견디지 못하고 투신자살했다.
그들은 모두 내가 사랑한 문학, 잉크보다 피에 더 가까운 문학, 세사르 바예호의 시구처럼 ‘神이 아픈 날 태어난’ 팔자들이다.
나는 내가 나 같지 않고, 삶이 삶 같지 않고, 문학이 문학 같지 않고, 친구나 동료가 친구나 동료 같지 않고, 내가 알던 정의신념가치사랑 같은 숭고한 단어들이 내가 모르는 비릿한 단어들로 변해 세간에 마구 유통될 때, 내 존재가 한없이 작아지고 초라해져 온몸과 온 마음에 비통과 회한뿐일 때, 이 여덟 명의 작가들을 만나러 간다. 그들의 팔자를. 문학에 있어서나 삶에 있어서나 더럽게 불운하고, 더럽게 치열하고, 더럽게 품격 있고, 더럽게 자존이 강했던 그들의 팔자. 나 자신이 위로받으러 갔는데, 오히려 내가 감화되어 울고 나오게 되는 그들의 팔자. 그런 팔자임에도 그 지독한 불운과 죽음을 훌쩍 뛰어넘어 지금도 반짝반짝 빛이 나는 그들의 문학. 그 시퍼런 도끼날에 세례를 받고 오면, 내 팔자 또한 더럽게 춥고, 어둡고, 외롭고, 고달파도, 그들과 함께 계속 문학 속에서 살아갈 수 있다는 희망에 뜨거운 피가 솟구친다. 그 어떤 곳보다도 팔자 사나운, 문학이라는 한 장소에서, 동시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