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하순(11수)
하루시조 355
12 21
남이 날 이르기를
무명씨(無名氏) 지음
남이 날 이르기를 정절(貞節) 없다 하건마는
내 탓이 아니라 임자 없는 탓이로다
아무나 내 님 되어서 살아보면 알리라
정절(貞節) 없다 – 이 사람 저 사람 사귄다.
임자 – 부부가 되는 짝.
임자 없는 사람의 하소연이 드러나 있습니다. 시적 화자의 변명읜 즉, 진정으로 사랑하는 님이 없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당신이 나처럼 혼자 살아보쇼. 정절 그 따위가 입에 풀칠해 주는 것 절대로 아닙니다. 이런 항변이 들립니다. 종장 첫구의 아무나 세 글자의 강조가 절대적입니다.
이 작품을 읽노라면, 옛 선인들은 남의 말 남의 시선에 상당히 절절맨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다른 많은 작품들이 타인의 시선으로부터 비롯되는 걱정을 읊고 있습니다.
요즘 세상에서는 괜스레 스스로를 얽매는 듯하여 우매하다는 생각까지 듭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네에 비해서 좀더 ‘타인들처럼’ 살려고 노력했다고 보아,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튀지 않게 나아가 ‘배려’의 마음으로 살아간 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나 몰라라, 너는 너대로 나는 나대로 살아가기엔 감정에 때 묻지 않았던 순수의 시절이었던 것입니다. [최이해 崔伊海 해설]
하루시조 356
12 22
나는 가옵거니와
무명씨(無名氏) 지음
나는 가옵거니와 사랑으란 두고 감세
두고 가거든 날 본 듯 사랑하소
사랑아 부대접(不待接)하거든 괴는 데로 니거라
부대접(不待接) - 정성을 들이지 않고 아무렇게나 하는 대접. 푸대접.
괴는 – 사랑하는
니거라 - 가거라
사랑이라는 관념을 의인화해서 특이합니다. 몇 차례 읽어 보니 대강 뜻은 이렇습니다. 나는 여기 내 사랑을 고스란히 두고 간다. 그러나 그 사랑이 너를 푸대접하거든 네가 생각하되 다른 사랑받을 곳으로 가게나.
그런데 참 어법(語法) 한 번 괴이합니다. 사랑이 어디 아바타인가요? 그 아바타가 내가 했듯이 님을 사랑하고 자시고 할 수 있나요? 말인지 막걸리인지, 이것도 이별가랍시고 적어 남겼나 싶습니다.
작품 속의 ‘사랑’이란 말을 ‘매화분’이라든지 ‘애완견’으로 바꿔서 새기니 훨씬 현실김이 있습니다. 그렇게 하니 종장이 ‘분이나 견이 싫어지거든 딴 사랑을 찾아보게나’로 읽히는군요. 세월 곧 어느 정도의 시간이 흐르면 잊히는 게 사랑이라는 거 아닙니까. [최이해 崔伊海 해설]
하루시조 357
12 23
편지야 너 오느냐
무명씨(無名氏) 지음
편지(便紙)야 너 오느냐 네 임자는 못 오더냐
장안도상(長安道上) 넓은 길에 오고 가기 너 뿐이라
일후(日後)는 너 오지 말고 네 임자만 오거라
임자 - 물건을 소유한 사람.
장안도상(長安道上) - 서울의 길 위.
일후(日後) - 뒷날.
참 쉽네요. 정겹기까지 합니다. 편지를 맞는 기쁨이 언뜻 편지를 사람으로 의인화(擬人化) 하였습니다. 그러다가 돌연 그 편지의 임자가 올 일이거늘 너만 왔느냐 토라져 버렸습니다. 백날 천날 편지만 오고갈 요량이면 당자 얼굴은 언제 볼 것인가요, 작자의 투정에 한 표 던집니다.
요즘 대한민국은 택배 공화국입니다. 장안도상을 비롯하여 전국 방방곡곡이 사람은 아니오고 택배만 옵니다. 손편지가 귀한 선물이 되었으니 이 작품 작자가 오늘을 살면 조금 위로가 될까요. [최이해 崔伊海 해설]
하루시조 358
12 24
천산에 뻗은 칡이
무명씨(無名氏) 지음
천산(千山)에 뻗은 칡이 이 내의 입을 것이
만산(萬山)의 모든 지초(芝草) 이 내의 먹을 것이
입을 것 먹을 것 있으니 분별없어 하노라
천산(千山), 만산(萬山) - 온 산. 이곳저곳에 있는 여러 산.
내의 – 나의.
지초(芝草) - 지칫과의 여러해살이풀.
분별없다 - 세상 물정에 대하여 옳고 그른 것을 판단할 만한 능력이 없다.
칡넝쿨이 입을 것 곧 옷이 되는군요. 목화가 들어오기 전에는 솜옷이 없었다더군요.
옛 사람들의 이런 ‘자연인’ 같은 생각을 요즘 사람들은 싫어할는지 모르겠습니다. 정말로 어린아이 같이 ‘분별이 없다’고 하겠지요. 입을 것과 먹을 것이 겨우 칡뿌리와 지초뿌리라니 성이 찰 리가 없습니다. 잠을 잘 곳 역시 동굴 정도 아닐는지 궁금하고요. 그런데 이런 생각은 문학의 은유와 상징을 전혀 모르는 그야말로 어린아이 같은 생각입니다. 안분지족(安分知足)하며 남에게 기대지 않는 꿋꿋한 생활을 이어 가겠다는 의지로 읽어주시길요. [최이해 崔伊海 해설]
하루시조 359
12 25
만창설월이요
무명씨(無名氏) 지음
만창설월(滿窓雪月)이요 절역풍성(絶域風聲)이라
외로운 촉(燭)불 아래 말없이 홀로 앉아
공연(空然)한 헛생각에 잠 못 일워 하노라
만창설월(滿窓雪月) - 창문 가득 눈밭에 빛나는 달빛이라.
절역풍성(絶域風聲) - 멀리 떨어진 곳으로부터의 바람소리라.
일워 – 이뤄.
지조 높은 선비가 스스로를 가둔 정황이 작품 속에 확연히 드러납니다.
절역(絶域)은 바람소리 들리는 곳이면서 또한 작가의 처소가 타인에게는 느껴지는 외딴 곳이기도 합니다. 때 맞춰 눈이 쌓였고, 달빛만 서쪽으로 기울고, 홀로 타는 촛불이 생각을 얽어맬 뿐입니다. 고고한 처사(處士)에게도 공연한 헛생각이 있나 봅니다.
겨울은 그저 견디는 시간이려니 해야지요. [최이해 崔伊海 해설]
하루시조 360
12 26
하늘에 뉘 다녀온고
무명씨(無名氏) 지음
하늘에 뉘 다녀온고 내 아니 다녀온다
팔만궁녀(八萬宮女)를 다 내어 뵈데마는
아마도 내 님 같은 이는 하늘에도 없더라
내 아니 다녀온다 – 내가 다녀왔지 않은가 (이 사람아).
팔만궁녀(八萬宮女) - 궁 안에 사는 팔만 명의 여자.
초장의 전구는 묻고, 후구는 답한 식입니다.
옆지기 내자(內子)를 치켜세우려거든 이 정도는 돼야지요. 과장법의 유효적절함이 읽는 이를 웃게 합니다. 그렇다고 이런 옆지기님들, 100% 믿어주는 것 또한 아니겠습니다만. [최이해 崔伊海 해설]
하루시조 361
12 27
하늘이 사람 내실 제
무명씨(無名氏) 지음
하늘이 사람 내실 제 오륜(五倫)을 다 주시니
누구는 가지고 누구는 잃단말고
진실(眞實)로 얻으려 하면 어디 가고 없으리
오륜(五倫) - 유학에서, 사람이 지켜야 할 다섯 가지 도리. 부자유친(父子有親), 군신유의(君臣有義), 부부유별(夫婦有別), 장유유서(長幼有序), 붕우유신(朋友有信)을 이른다.
오륜을 오상(五常)이라고도 하여 항상 떳떳해서 변함이 없는 가치라고 새길 만합니다.
존재자인 ‘나’를 중심으로 생기는 모든 인간관계는 이 오륜의 한 바와 같거늘, 아버지와 아들, 임금과 신하, 배우자, 어른과 어린이 그리고 벗, 모두에게 한가지인 양 주어지는데, 어찌타 잘못하여 잃어버렸다 치더라도 진실로 필요해서 찾게 된다면 어디 가버리고 없겠느냐.
‘불변의 세상이치’이니 찾고자 하면 아주 쉽게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종장 끝구를 설의법으로 푸는 반전이 재미있습니다. [최이해 崔伊海 해설]
하루시조 362
12 28
한 자 쓰고 눈물지고
무명씨(無名氏) 지음
한 자 쓰고 눈물지고 두 자 쓰고 한숨 지니
자자행행(字字行行)이 수묵산수(水墨山水) 되거고나
저 님아 울고 쓴 편지(便紙)니 휴지 삼아 보시소
자자행행(字字行行) - 글자와 글자, 행과 행. 글 쓰인 편지 면(面) 전체.
수묵산수(水墨山水) - 엷은 먹으로 그려진 산수화.
되거고나 – 되겠구나. 되었구나.
휴지 삼다. 자신을 한껏 낮추면서도 그리는 정(情)은 맘껏 펼치는 가작(佳作)입니다. 편지가 사라진 요즘, 청춘들과 연인들은 이모티콘이나 그림문자가 이를 대신할 것인 바, 이 작품 속의 수묵산수를 따라갈 수는 없을 것입니다. [최이해 崔伊海 해설]
하루시조 363
12 29
해도 낮이 계면
무명씨(無名氏) 지음
해도 낮이 계면 산하(山河)로 돌아지고
달도 보름 후(後)면 한 가부터 이저온다
세상(世上)에 부귀공명(富貴功名)이 다 이런가 하노라
계면 – 겨우면. 겨웁다 – 겹다. 때가 지나거나 기울어서 늦다.
산하(山河) - 자연(自然).
가 – 변(邊). 가장자리.
이저온다 – 이지러져 온다.
부귀공명(富貴功名) - 재산이 많고 지위가 높으며 공을 세워 이름을 떨침.
일이관지(一以貫之). 하나로 주욱 꿰다.
세상 이치라는 게 다 그렇다. 달이 찼다가 기울 듯이, 비워야 새 물이 차듯이. 산행(山行)도 마찬가지. 오르락내리락. 내리막이라고 쉽다 못 할 것이, 다시 오르막으로 힘이 더 들 것임을 아는 이치입니다. [최이해 崔伊海 해설]
하루시조 364
12 30
해야 가지 마라
무명씨(無名氏) 지음
해야 가지 마라 너와 나와 함께 가자
기나긴 하늘에 어디 가려 수이 가는
동산(東山)에 달이 나거든 보고 가다 어떠리
수이 – 쉽게. 여기서는 서둘러, 빨리의 뜻으로 새깁니다.
가는 – 가는다. 가느냐.
동산(東山) - 동쪽산.
가다 – 간들. 가면.
속절없이, 맞물린 치차처럼 해는 지고 뜨고, 달은 달대로 뜨고 지고. 인간만 달력 만들어 서럽니 안타깝니 어떠니 합니다.
하늘의 해(日)와 달력의 한 해(歲)가 우리말로는 모두 ‘해’라는 점이 새삼 특별한 느낌으로 다가옵니다. 양력으로의 세모(歲暮), 우리말로는 ‘세밑’이 내일입니다.
작품 속에서는 하늘도 기나길고, 세월도 기나길고. 어휘의 동음이의(同音異義)가 겹쳤습니다. [최이해 崔伊海 해설]
하루시조 365
12 31
대한정절 민충공은
무명씨(無名氏) 지음
대한정절(大韓貞節) 민충공(閔忠公)은 충즉진명(忠則盡命)하여 있고
갈충보국(竭忠輔國) 최면암(崔勉菴)은 경사마도(竟死馬島)하였으니
동자(童子)야 죽엽배(竹葉盃)에 술 부어라 대한독립(大韓獨立)
대한정절(大韓貞節) - 대한의 곧은 절개.
민충공(閔忠公) - 민충정공(閔忠正公), 민영환(閔泳煥, 1861~1905).
충즉진명(忠則盡命) - 충성은 곧 목숨을 다함이라. 천자문(千字文)의 한 구절.
갈충보국(竭忠輔國) - 충성을 다하여 나라를 돕다.
최면암(崔勉菴) - 최익현(崔益鉉, 1833~1906).
경사마도(竟死馬島) - 죽음을 무릅쓰고 대마도(對馬島)에 감.
동자(童子)야 – 아해(兒孩)야. 감탄사.
죽엽배(竹葉盃) - 댓닢 술잔.
대한제국(大韓帝國)은 1897년에 선포되었고, 1910년에 일본에게 강제 병합되었습니다. 나라가 망해가도록 군주며 신하들은 뭘 했냐고 울분에 찬 질문을 하곤 합니다. 다행히 민충정공과 최면암의 족적이 드러나 상당한 위안이 됩니다. 스스로 목숨을 끊어 직소(直訴)한 두 충신입니다. 이름을 잃은 무명씨 작품 중에 이 한 편의 시조를 찾아내 기쁩니다. 국가 없는 민중의 서러움, 약소국가의 슬픔 등을 우리는 지구촌에서 진행중인 두 전쟁의 참극을 보며 전율(戰慄)로 배웁니다.
한자어 투성이라 건너뛸까 하다가 내용이 배울 점이 있어 365일 이어온 하루시조 마감감으로 택했습니다.
종장 끝구의 생략은 시조 창법(唱法)에 의한 것으로 ‘하리라’ 또는 ‘만세(萬歲)라‘ 정도가 되겠습니다. [최이해 崔伊海 해설]
첫댓글 하루도 빠지지 않고 무명씨 옛시조를 배달했던 기억이 나를 스스로 괜찮은 녀석으로 치켜세웠습니다. 옛시조 탐색과 배달을 계속해 나가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