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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사람 : 예수와 사람의 아들의 수수께끼(월터 윙크)
The Human Being: Jesus and the Enigma of the son of the Man
제5부 유대교 신비주의와 영지주의 속의 참사람
B. 유대교 신비주의 속에서 에녹/메타트론(Metatron) 그리고 참사람
그러나 신비가들은 그들의 추측을 하느님의 인간성에만 국한하지 않는다. 인간 에녹은 하늘로 들려올라가서 메타트론 천사가 되었다. 그는 신비의 여행가들에게 털어놓기를 "나는 세계와 맞먹을 만큼 길이와 폭이 증가하고 확대되었다"고 한다. 그에게는 72개의 날개와 365,000개의 눈들이 주어졌다. "[하느님이] 내 안에 넣어주지 못한 그런 화려함, 광채, 광명, 혹은 세상의 발광체들의 아름다움은 없었다"(3 Enoch 9:2-5).1) 그리하여 메타트론의 차원들은 하는님과 흉내내는 경쟁을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다소 괴상하게도 인간의 미래는 참인간인 한 분 하느님과 함께 하는 미래임을 시사한다. 메타트론은 이미 비교할 수 없는 정도로 우리가 어떻게 될 것인지를 보여준다. 우리는 요한 1서 3:2에서 예수 대신 메타트론을 대체하면서 비교해볼 수밖에 없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제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앞으로 우리가 어떻게 될지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습니다만,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시면, 우리도 그와 같이 될 것임을 압니다. 그 때에 우리가 그를 참모습대로 뵙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메타트론이 마치 하느님처럼 그 몸의 크기가 세계만한 것은 놀라운 일이다. 마치 하느님의 모든 특성이 이 초월적 인물에게 무차별적으로 퍼부어진 것 같아서, 우리는 하느님에게 도대체 무슨 기능이 남아 있을지 의문을 각기 시작한다.2) 우리는 이와 동일한 경향을 다른 곳에서도 발견한다. 나중에 부활한 그리스도로 알려진, 요한계시록 1:9-20속의 "인자(참사람)와 같은 분"이 야훼, 즉 다니엘서 7:9("옷은 눈과 같이 희고, 머리카락은 양 털과 같이 깨끗하였다"), 에스겔 1:7, 27("그들의 다리는 모두 곧고, 그 발바닥은 송아지의 발바닥과 같고, 광낸 놋과 같이 반짝거렸다"), 에스겔 1:26("그 보좌 형상 위에는, 사람의 모습과 비슷한 형상이 있었다")에서 묘사된 야훼의 모습과 기능을 지녔다. 제1세기 유대인의 저작으로서 최소한 한 번 기독교인이 개작을 한 『아브라함의 묵시록(Apocalypse of Abraham)』속에서는, 천사 야오엘(Iaoel)도 다른 곳에서는 하느님에게 돌린 특성을 지니고 있다. 즉 사파이어로 된 그의 몸은 출애굽기 24:10의 사파이어를 깔아놓은 길과 에스겔 1:26의 사파이어 보좌를 생각나게 하고, 다니엘서 7:9의 하느님처럼 그의 머리는 하얗다고 한다. 하느님이 이들 인간/천사 대행자들을 치장하기 위해 하느님의 특성을 아낌없이 나누시고 있는 듯하다. 거룩함을 혼자만 차지하시려 하지 않는다. 하느님은 하느님의 본질을 어렴풋이 지닌 자들이 하느님의 모든 신적인 특성을 갖기를 원하신다-이것은 곧 분명히 참된 인간이 됨을 의미한다.
예수는 신비가이었지만, 분명히 메르카바 타입의 신비가는 아니었다. 그의 세례 받는 이야기는 비밀스러운 신비한 기록인데, 하늘로 올라가는 이야기가 아니라, 그가 아직 땅 위에 있었을 때에, 하늘이 그에게 열리고 그의 안에 열린 이야기였다(마가 1:9-11).3) 이 경험은 하느님의 왕국이 그 자체를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나타내기 시작한 것을 암시하였다. 그리하여 거룩한 보좌 전차에 올라감으로 하늘을 발견한 대신에, 예수는 소외된 사람들, 죄인들, 배척된 자들, 적당히 타협한 비겁자들 속에서 하늘을 발견했다. 병자들을 치료하고 귀신을 쫓아내는 능력 속에서, 또한 비유들을 통해서도 하늘을 발견했는데, 예수는 청중들을 곤혹스럽게 만들어 그 비유들이 가리키는 실재와의 근원적인 만남 속으로 청중들을 이끌었다. 메르카바 신비가들은 하늘을 휘저었고, 거기서 그들에게는 권위가 주어졌고, 신비들을 증언하였다. 예수는 십자가에 처형당한 후 하늘로 올려지고 나서, 그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에겐 아무것도 가르쳐주지도 않고, 아무것도 보여주지 않는다. 그는 천사들에게 권위를 행사하지도 않는다. 그는 단지 하느님의 오른편에 앉아 있다. 즉, 계시란 유대교 신비주의에서는 하늘에서 일어나는 것이지만, 기독교 복음서들 속에서는 예수가 죽기 전에 이 땅위에서 일어난다. 내가 뜻하는 바는 예수의 길이 더 낫다는 것이 아니라, 다만 다르다는 것이다. 그의 길은 보다 현세적이며, "땅에서 일어나" 많은 대중들이 걸을 수 있는 길이다. 그러나 그건 진정한 유대교 신비주의에서도 마찬가지다. 어떤 랍비들이 메르카바 신비주의를 거부하는 것도 바로 그 엘리트주의와, 그리고 일반 시민들에게는 해당되지 않는 것 때문이었다.
바울은 확실히 신비가였는데, 아마도 메르카바 타입의 신비가였을 것이다(고후 12:1-10). 그는 삼층천에 들어갔고, 말로 형언할 수 없는 신비를 배웠다. 그러나 예수와 바울 모두 다른 사람들이 그들의 신비 체험을 따라 하기를 요구하지 않았다. 바울의 경우에는, 고린도 사람들이 그에게 극단으로 동의하지 않음으로써 그에게서 신비 체험 이야기를 억지로 끌어낸 것이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바울은 그의 편지에게 그 이야기를 언급하지 않았을 것이다. 심지어 예수의 세례까지도 나중에는 교회에 가입하는 의식이 되고 말았지만, 너무 간결하게 서술되어 마치 이해를 초월하는 신비를 피해갔다. 세례는 물론 개인의 다시 태어남 이상의 의미가 있다. 세례는 개인의 무의식의 물 아래로 내려가는 것, 즉 인간의 중심에서 정신적 용솟음을 가리키는 원초적 원형의 깊이 속으로 내려가는 상징이었던 것처럼 보인다. 예수와 바울은 모두 이사야, 에스겔, 그리고 다니엘의 살아계신 하느님을 경험한 것 같은데, 그 하느님은 그 모습이 보여지고, 그 소리가 들려지고, 알려지기를 원하실 뿐 아니라, 성육신, 즉 우리가 하느님 같은 인간이 되는 비밀을 지닌 참사람으로서 성육신하기를 원하신다.
유대교 신비주의에서 승천한 사람들
유대교 전통에서는 몇 사람이 죽어서 하늘로 올라갔다고 한다. 에녹(창 5:24), 엘리야(왕하 2:11), 그리고 후대의 전승에 따르면 레위, 비느하스, 모세도 승천했다고 한다. 후대의 미드라쉬에 의하면, 모세가 토라를 받아가지고 땅으로 돌아오기 위해 하늘에 올라갔다고 한다.4) 분명히 요한복음서는 그 시대에 하늘에 올라감에 대한 민간전승을 발전시키는 사람들과 논쟁을 벌이고 있다. 요한이 "하늘에서 내려온 이 곧 인자 밖에는 하늘로 올라간 이가 없다"(요한 3:13)라고, 또한 "일찍이, 하나님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다"(요한 1:18)라고 단언적으로 주장을 하면서, 그는 즉각 문제를 만든 것이다; 그럼 (1) 구약성서에 유명한 사람들의 승천이 기록된 것과, (2) 대부분의 예언자들인 다른 사람들이 하느님의 환상을 본 것(이사야 6장; 에스겔 1장; 왕상 22:19-23)은 어떻게 하란 말인가? 요한은 예언자들이 본 것은 하느님이 아니라 하느님의 아들이었다고 주장함으로써 후자(2)의 문제를 해결한다. 에스겔이 보좌에 앉은 "영광"을 본 것은 영원 전부터 하느님과 함께 있어온 선재하는 그리스도였다. 이리하여 요한계시록은 에스겔 1장과 다니엘 7장에서 하느님을 묘사한 것을 사용하여, "사람과 같은 분"(부활한 그리스도로서의 예수)을 그려낼 수 있었다.
앞에서 나온 승천(1)에 대해 어찌할 것인가는 별도의 다른 해결을 필요로 했다. 결국 엘리야와 에녹의 승천은 성서 속에서 특별히 원형적인 의미가 부여되지 않았던 것이다. 엘리야는 마지막 날에 다시 돌아올 것으로 기대되었고(말 4:5-6), 그리고 에녹의 비유들로 시작해서 에녹은 신적인 특성들을 부여받았지만, 그러나 이런 개인들은 인간들이 하느님을 보는 관점을 변화시키지는 못했다. 승천은 위로였고(에녹의 경우), 해원이었다(엘리야의 경우). 하늘로 올라가는 것은 하늘에 새로운 변화를 아무것도 주지 못했고, 단지 땅에서의 일생을 마감하는 것이었다.
예수는 승천에서는 상황이 달랐다. 여기에 한 인물이 있었으니 그는 자기를 추종하는 사람들이 하느님을 알았던 방식을 바꾸어버렸고, 그들은 그 하느님을 알게 되었다. 예수는 신적인 원형에 들어가서 하느님의 이미지를 변경하였기에 그를 둘러싸고 새로운 형이상학이 이루어졌다. 즉, 철학자 화이트헤드가 말하기를 플라톤 철학을 발전시킨 유일한 형이상학적 이론이라는 거룩한 삼위일체 교리가 이루어졌다.
기독교인들은 예수의 승천을 독특한 것으로 취급했다. 그들은 유대교에서도, 기독교와는 독립적으로, 비슷한 견해를 발전시켰다는 것을 거의 알지 못하는 것 같다. 즉. "사람의 아들"인 에녹이 승천하여 하늘의 천사 메타트론과 융합된 것(1 Enoch 70-71) 말이다. 이 두 가지 발전은 모두 인간의 집단 무의식이 참사람의 계시를 향해 움직여 건 것을 입증한다.
기원후 처음 수세기 동안, 메르카바 신비가들은 하늘에서 신비스러운 "젊은이"의 출현을 기록했는데, 그의 "광채는 그의 임금의 광채와 같고, 그의 영광은 그의 창조주의 영광과 같다." 이것이 바로 메타트론이었다. 그는 너무도 깊은 인상을 주었기에, 방문자들은 그를 신으로 여기지 않도록 주의해햐 한다고 본문을 말한다. 이에 충분히 주의하지 않으면서 결국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를 설명하는 것이 바로 기독교의 삼위일체론이라고 유대인이라면 주장할 것이다.
이 이야기의 좀 더 긴 판본이 존재한다. 그 본문은 권면하기를, "만일 한 젊은이가 영광의 보좌 뒤에서 나와서 당신을 영접하거든, 그에게 절하지 말라. 왜냐하면, 그의 면류관은 임금의 면류관과 같고, 그의 발에 신은 샌달은 임금의 샌달과 같고, 그의 옷은 임금의 옷과 같고....그의 눈들은 불꽃처럼 빛나고, 그의 눈동자들은 등불처럼 타오르고 있고, 그의 광채는 임금의 광채와 같고, 그의 영광은 그의 창조주의 영광과 같으니, 그의 이름은 제호바디야(Zehobadyah)다."-이 이름은 분명 메타트론(Metatron)과 같은 것이다. 유대인들은 야훼 이외에는 어떤 하늘의 권력자에게도 경배하지 않는다는 점을 제외하고는, 이것은 기독교에서 하늘의 그리스도를 묘사한 것과 놀라울 만큼 비슷하다.
물론 승천한 그리스도와 승천한 에녹 사이에는 차이들이 있다. 에녹은 메시아와 동일시 된 적이 없다(비록 메타트론은 메시아와 동일시되었지만). 그러나 메타트론은 단지 천사였을 뿐 결코 하느님이 되지는 않는다. 메타트론이 하느님의 통치를 이룩하기 위해서 땅으로 되돌아올 것은 기대되지 않으며, 마지막 심판에서 인간들을 심판할 준비로 하늘에 남아 있다. 간단히 말해서, 비록 메타트론이 흔히 하늘에서 수석 천사이긴 하지만, 그는 단지 하나의 기능직일 뿐이다. "거룩하신 분이, 님은 찬양받으시길, 명령하시고 메타트론은 집행한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유대인 신비가들 자신들은, 하늘이 내린 땅의 인간에 대한 기독교식 경배와는 거리를 두면서도, 메타트론/에녹의 높여진 역할을 유지할 수 있었다는 뜻이다.5)
인간이 하늘에 속한 신분으로 높여지는 이런 현상은 에녹 문서들에만 국한된 것은 아니다. 사해 두루마리들에 따르면, 하늘에 올라간 인간 사제 멜기세덱은 모든 천사들 위에 높여지고, 하늘의 모든 회의를 주관하며, 처벌을 집행한다(11QMelch). 여기서 다시 우리는 이전에는 엄격히 하느님에게만 속했던 많은 기능들을 담당하는 거룩한 "보좌관"이라는 유대인의 사고가 독립적으로 발전된 것을 볼 수 있다.
그와 거의 같은 시대에, 혹은 약간 뒤늦게, 필로(Philo, 기원전 20년-기원후 50년) 역시 비슷한 하느님의 보좌관을 과장되게 묘사하고 있는데, 그는 그를 불러, 로고스(Logos), 하느님의 사람, 하느님의 첫 출생, 천사들의 장로이며 지도자, 거룩한 탄생의 자손, 한 처음 시작(혹은 제1 원리), 원형적인 이데아, 만물의 선재하는 측정자, 하느님의 이름, 하느님의 이미지를 따른 사람, "보는 그 분", 하느님의 환상, 그 아들, 하느님의 아들, 제2의 하느님, 그리고 심지어 때로는 하느님이라고 불렀다. 이토록 방종한 언어는 한 분 하느님을 믿는 상황에서는 놀랍기만 하다.
왜 유대인 신비가들은 하늘에 있는 "두 번째 권력자"에 대한 기독교인들의 경배를 그렇게 의도적으로 근접하여 비켜가는가? 만일 이들 거룩한 보좌 전차를 추적하는 자들이 천사숭배를 막으려고 그토록 열심이었다면, 도대체 왜 메타트론이 결국 야훼의 옷들을 입게 되며, 또한 그 광채들과 눈과 이름을 지닌 "젊은이"로 소개했는가? 예를 들면, 왜 거룩한 한 분이 거룩한 보좌 전차에 새겨진 70개의 이름들을-그 "70개의 이름들은 천사들이 하늘의 왕 중의 왕을 부르는 칭호인데"-택해서 그것들을 메타트론에게 부여하는가(에녹 3서 48D:5)? 이런 칭호들을 언급한 것은 얼마나 혼란스러운가? 그들에게 이런 엄청난 위험을 무릎쓰도록 강요한 압도적인 필요성이 있었음에 틀림없다.
내가 믿기로 그 필요성은 자기실현의 명령, 즉 집단 무의식으로부터 풀려나와 표면화하는 개성화의 명령이었다고 본다. 명백히, 신비가들의 많은 친구 랍비들은 이미 그들을 의혹의 눈초리로 지켜보았다. 이런 "젊은이"를 소개해서 잃을 것은 많으나 얻을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이런 개성화의 명령은 설명을 요청한다. 그런 모험에 대해서는 압도적으로 강력한 이유가 있어야만 설명된다. 즉 인간을 변종시키는 원형과 그 현실화를 위한 요청이 강력했다. 상징적 언어로서 "젊은이"는 뭔가 새로운 것, 발생하는 것, 각성을 촉구하는 것이다. 이런 발생은 이 책 전체를 통하여 우리가 참인간의 자녀라고 부른 것과 근본적으로 동일한 현상이다. 이 "젊은이"는 유대교 신비주의에서 변혁의 원형인데, 열렬한 신자가 비국소적 실재, 영원한 지금속으로 돌파해 들어감을 나타내며, 거기서 사람들은 하느님을 중재자 없이 직접 경험하게 된다.
어떤 메르카바 신비가들은 하느님보다도 이 "젊은이"(메타트론/에녹)에 더욱 매혹되는 것 같다는 것이 의미 깊은 일이다. 하느님의 이름들과 그 몸의 측정 이외에는 이런 "계시들"로부터 우리는 하느님에 대해 별로 배울 것이 없다. 이런 신비적인 여행은 거의 하느님에 대한 환상으로부터 벗어나서 이런 "보다 작은 야훼"의 활동에 경도했던 것처럼 보인다. 이런 저작들에서 계시란 것은 인간적으로 시작되지만 하느님의 환상과 천상의 영역이 신적으로 주어진다. 댄 머커가 지적하듯이, 계시가 자기에 대한 지식이 되어버렸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그 말을 개인주의적인 언어로 듣는다면, 머커가 의도하는 것을 오해하는 것이다. 이런 유대인들의 저작들은 인간 변혁의 계시를 나타낸다. 즉, 인간성의 기독론, 인간들 속에 나타난 참인간의 출현이다. 신의 영역에 대한 인간의 침범이 당시에는 모든 종류의 전통 속의 사람들을 사로잡았다. 에스겔의 환상이 뒤늦게 열매를 맺고 있었다. 결국 그 "젊은이"-참사람의 자녀 이외에 무엇이 또 있으랴?-는 기독교인들만의 전유물이 아니었다. 그 계시는 온 사방에서 솟아올라오고 있었다.
유대인 민담 속에서, 의식으로 나아가도록 강요했던 동일한 원형적인 동력이, 승천한 예수에 대한 기독교적인 이해도 채색하고 있었다. 당시의 깊은 영혼들은 하느님의 인간화를 향한 새로운 충동을 감지했다. 이런 계시는 에스겔의 시대 이래로 꾸준히 그 자신을 주장하여, 이제는 그 경로에 있는 모든 것들에 영향을 주고 있었다. 그것은 기독교와 유대교 신학 그리고 신비주의적인 실천을 지배했을 뿐만 아니라, 영지주의와 이슬람의 가슴 속에서 수피즘에도 새로운 방식으로 나타났다.
D. 결론
신비가들은 자기들이 경험한 것과 똑같은 마로 표현할 수 없는 실재를 다른 사람들도 경험하도록 다리를 놓기 위해서 그 형언할 수 없는 분에 대한 은유를 만들어낸다. 나중에 그런 실재를 경험해보지 못하고, 그 은유를 창백한 사색, 혹은 교리로 만들어 버리는 사람들이 생겨난다. 은유를 문자화해버린 뒤에, 종교 옹호자들은 그들을 다른 사람들과 차별화하는 것을 강조한다. 그러나 신비가들은 하느님의 실재에 대한 일차적인 경험을 살아 내려는 사람들로서, 서로 다른 그 차이들을 통해 하나로 회귀하는 실재를 본다. 우리가 여전히 특수한 종교 전통의 바탕에 서 있다 하더라도, 하느님을 안다는 것은 모든 이론들, 신조들, 교리들, 예식들과 실천들을 상대적인 것들로 만든다. 따라서 기독교와 유대교가 그들의 공통성을 확인하기보다는 서로의 차이점들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 얼마나 비극적인 일인가! 다른 말로 해서, 더 많은 기독교인들과 유대인들이 하느님의 실재에 대한 일차적인 경험을 살아내려고 하지 않는 것이 얼마나 비극적인가! 우리 인간들이란 오랜 진화의 척도로 보면 단지 한 순간의 깜빡거림에 불과하다. 우리는 "아직 젊은" 메타트론과 같다. 즉 뒤늦게 등장한 자들이며, 이제 겨우 시작되었으며, 거의 순전한 가능성 정도다. 아마도 자기실현(개성화)을 향한 책임과 명령을 이해하는 한 가지 길은 "젊음" 혹은 "아이"라는 원형 속에 있다. 메타트론이 하느님을 향하여 무한정 확대하는 것은 이런 인간의 잠재능력을 강조하는 어느 것보다도 좋은 방법이다. 그 잠재능력을 비유적으로 묘사한 것이 바로 하느님을 참사람의 이미지로 묘사한 것이다.
만일 참사람이 한 원형이라면, 그것은 보편적인 자기 속에 참여한다. 그러므로 예수는 참사람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다 보여주지는 않는다. 초기의 표현에 의하면, 그리스도는 totus Deus sed non totum Dei, 즉 온전히 하느님이면서 동시에 하느님 전체는 아니다(wholly God yet not the whole God). 이 책의 용어로는, 예수는 참사람이지만 그러나 유일한 참사람은 아니다. 우리들의 아버지/어머니 집에는 방들이 많아서, 모세, 엘리야, 에녹, 메타트론, 멜기세덱, 그리고-천기누설을 하자면-역사가 시작된 이래로 참사람의 자녀를 계시하도록 봉사한 모든 사람들을 위한 방들이 있다. 어떤 전통들이라도 이런 인간 변혁의 원형을 양육할 수 있다. 그 원형은 다양한 어버이들을 포용할 수 있다. 우리들 속에 태어나고, 양육되고, 성숙되기를 원하는 것은 종교, 교리 혹은 확실성이 아니라, 참사림인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에게 예수는 인간됨의 필요불가결한 축도로 남아 있다. 그는 모든 인류를 위한 보물이라고 나는 믿는다. 그는 온 세상의 재산이다. 그는 유대인이지 기독교인이 아니었으며, 기독교인들이 그를 소유한 것은 아니다. 예수로부터 각 사람들이 배울 수 있는 것은 권세들의 착취하는 이빨들 속에서 신실하게 살아간다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가 하는 것이다. 예수를 얻기 위해서는 사람들이 우선 먼저 클럽에 가입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예수가 신이라고 믿을 필요는 없다. 사전에 요구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만일 우리의 과제가 사람답게 사는 것을 배우는 것이라면, 유대인인 예수가 우리를 가르쳐 줄 수 있다. 우리는 예수를 경배하거나 신이라고 여기지 않고서도, 그 가르침에 대하여 그를 사랑하고, 존경하고, 감사하게 여길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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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다른 문헌에서는 "그 젊은이(Metatron)가 영광의 보좌 아래로 들어가자, 하느님이 빛나는 얼굴로 그를 포옹한다...그 젊은이의 키는 전 세계를 가득 채우고, 하느님은 그를 '젊은이(Youth)'라고 부른다"라고 한다. 나중에, 동일한 문헌에서, 하느님과 "젊은이"는 "허리 아래로는 서로 닮았고, 허리 위로는 서로 닮지 않았다"라고 한다. 분명히 Hekhalot 저자는 에스겔 1:27에서 하느님을 사람과 같은 존재로-혹은 이 더 적은 신의 모습인 "젊은이"로- 묘사한 분이 하느님의 보좌에 앉았는지에 대하여 확신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그 본문이 다소간 둘다에게 적용될 수 있는지에 대하여 암시나 혹은 애매하게 말한다.
2) "신명기 전승이나 히브리성서의 많은 부분에서 특징을 이룬 하늘과 땅 사이의 날카로운 구별이 헬레니즘의 시기에, 심지어 사해문서로 대표되는 히브리어와 아람어를 사용한 유대교 속에서도, 강력하게 유지되지 않았다."(John J. Collins)
3) 계시의 상징으로서 하늘들의 "갈라져 열림"이란 표현은 유대교 신비주의에서 표준적인 것이다. "시나이 산에서 하느님은 나를 위하여 일곱 궁창을 열어....거기에서 하느님은 나에게 메르카바의 각방들을 보여주었다". "에스겔이 거룩한 분을 응시하고 있는 동안에 일곱 궁창들이 그를 위해서 갈라져 열렸고, 그는 영광을 보았다". "그리고 하늘이 열리고 나는 하느님의 모습을 보았다".
요한계시록 4:1-2는 이런 광범위한 유대교 신비주의의 흐름에 속한다. 누가 10:22// 마태 11:27도 역시 예수가 성령을 통하여 받은 계시의 경험을 언급하고 있다;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맡겨 주셨습니다. 아버지 밖에는 아들이 누구인지 아는 사람이 없습니다. 또 아들 밖에는, 그리고 아버지를 계시하여 주려고 아들이 택한 사람 밖에는, 아버지가 누구인지 아는 사람이 없습니다."
4) 모세는 파라오에게 신(god)으로 보였다(출 7:1). 타르굼은 이를 "as God"(elohim, not YHWH)으로 변경하였다. 아담은 신적인 이미지를 상실했으나 모세는 그의 이미지를 지켰다. 시나이 산에서 모세는 천사의 신분을 얻었고, 아담이 상실한 영광을 회복하였다. Meeks는 논평하기를, "모세는 하느님의 이름과 하느님의 이미지로 면류관을 썼고, 제2의 아담, 즉 새로운 인간의 원형이 되었다." 레위는 또한 아직 살아 있었을 때에 하늘의 성전에 올라갔고, 거기에서 하느님이 그에게 사제직을 수여했다. 쿰란문서의 단편들 속에는, 한 사람이 "신들의 회중 가운데서 위대한 보좌에 앉는 것이 허용된 것," 그리고 "신들 가운데 하나로 여겨진 적이 있음을" 자랑스럽게 말한다. Himmelfarb는 이에 대한 논평에서 "이 놀라운 단락이 어떤 초대 기독교인들이 예수를 두고 한 주장에 상관이 있음은 명백하다"고 한다.
5) 그러나 그 때에도 이들 불안한 신비가들은 만족하지 않았다. Saul Lieberman은 모세는 hemitheos 즉, 반신(半神), Semi-god으로서, 상반신은 신이고 하반신은 인간이었다고 주장한 랍비를 언급한다. 다른 랍비들에 의하면, 모세는 때로는 신으로 때로는 인간으로 행동했다고 한다. Metaron은 또한 작은 신으로 불렸다. Lieberman이 지적하였듯이, 이방지역의 다신교 신앙에서는 하늘로 올라간 사람은 신이라고 호칭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유대교의 유일신 신앙에서 이런 일이 어떻게 일어날 수 있었던가? 왜냐하면 하늘에 있는 메타트론, 모세 그리고 다른 유명 인사들은 여전히 유한한 생명들이라고-여전히 하느님의 종들이요, 시중드는 자들이며 그리고 예배드리는 자들이었음이 항상 분명하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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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보충했습니다.
잘 봤습니다
예수와 기독교는...
관계 낫씽입니다 ㅎㅎ
@하리미 그렇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