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11. 24
누구나 완벽한 인생을 산 사람은 없을 것이다. 필자 또한 지난날을 되돌아보면 후회되는 일이 참 많다. 어쩌면 그렇게 어리석은 행동을 했을까 탄식이 절로 나온다. 인생을 다시 살라고 하면 절대로 그런 시행착오는 겪지 않을 것 같은 허점투성이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지금 생각해도 참 지혜롭게 결정하고 실행한 일이 있었다는 점이다. 그것이 바로 젊었을 때 험악한 해외의 오지(奧地) 답사였다. 사찰과 마애불 등은 주로 민가와 떨어진 산속 깊은 오지에 있기 마련이다. 그렇게 힘들고 가파른 곳만 찾아다녔다. 중국 답사 때는 하루종일 버스를 타고 비포장도로를 달린 적도 있었다. 인도와 캄보디아, 미얀마와 태국에서는 땀을 뻘뻘 흘리며 불볕더위 속을 뚫고 다녔다. 해발 4000m가 넘는 티베트 답사 때는 고산증으로 숨쉬기가 힘들어 해외에서 객사를 하나 싶었다. 그러면서도 줄기차게 배낭을 꾸렸던 이유는 단 하나였다. 지금이 아니면 평생 갈 수 없다는 확신 때문이었다. 젊었을 때 가지 못하면 무릎 팍팍해지는 나이에는 더더욱 힘들 것이고 결국 이번 생에서는 그것으로 끝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매번 오지를 향해 대문을 나설 때면 주문을 걸듯 중얼거렸다. “Now or never.”
젊은 나이에 어떻게 그런 기특한 생각을 했을까. 요즘 새삼스럽게 나의 머리를 쓰담쓰담하면서 과거의 나를 칭찬한다. 지금 같으면 죽었다 깨어나도 그런 오지답사는 가지 않을 것이다. 아찔한 여정을 생각만 해도 무릎의 힘이 풀릴 정도다. 대신 국내 답사로 대신한다. 지금까지 필자는 어느 도시를 가든 가능하면 그곳에서 숙박을 하면서 주변 문화재를 관람하는 것을 관례로 삼았다. 그 지역의 사찰에 들러 탑과 불상을 보기도 하고 박물관이나 미술관에 가서 특별전을 감상하기도 한다. 그러다가 지방으로 이사를 오게 되었다. 지금은 집에서 차로 한 시간 거리에 있는 유적지는 전부 다닐 예정으로 주말마다 집을 나선다. 넘어진 김에 쉬어간다는 말도 있지 않던가. 중국 황산처럼 험악하지도 않고, 인도의 바라나시처럼 멀지도 않으니 큰돈이 없어도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떠날 수 있다. 깡촌으로 낙향했다 하여 축 처져 있는 것보다는 이곳에서만 할 수 있는 일을 찾아보는 것이 정신건강에도 좋을 것이다. 이곳에서 언제까지 살지 모르니 지금이 아니면 언제 또 이런 기회가 올 것인가. “Now or never.”
진재(眞宰) 김윤겸(金允謙, 1711~1775)이 그린 ‘묘길상(妙吉祥)’은 금강산을 12폭의 화면에 담은 ‘진재봉래도권(眞宰蓬萊圖卷)’의 한 폭이다. 묘길상은 내금강 만폭동골짜기 묘길상암터의 절벽에 새겨진 마애불이다. 절벽의 높이는 약 40m로 상당히 높은 편이다. 마애불의 길이만 해도 15m가 넘는 거불이다. 아파트 6층에 해당하는 높이다. 마애불은 고려 말기에 나옹(懶翁) 화상이 직접 새겼다고 전해지는데 확실하지는 않다. 김윤겸은 마애불이 새겨진 절벽을 그림 중앙에 배치하고 나무와 계곡을 양쪽에 곁들였다. 나머지 배경은 과감하게 생략해 마애불만이 두드러지게 했다. 마애불앞에는 2층으로 석축을 쌓았고 1층 기단에 석등이 서 있다. 마애불 윗부분의 바위는 각진 형태로 표현했는데 표면에 푸르스름한 색을 연하게 물들여 질감을 드러냈다. 나무의 표현은 가벼운 필치로 간결하게 형태만을 묘사했다. 왼쪽 하단의 나뭇잎은 붉은빛을 물들여 계절이 가을임을 암시하였다. 절제된 묵법, 간소한 형태묘사, 메마른 붓질로 평담하면서도 차분한 분위기가 드러난다. 이런 특징은 김응환이 그린 ‘묘길상’과 비교하면 한층 두드러진다. 두 작가의 작품이 계절적인 차이가 있다는 것을 감안하더라도 김윤겸의 작품이 훨씬 가볍고 산뜻하다.
‘묘길상’이 들어있는 ‘진재봉래도권’은 완당(阮堂) 김정희(金正喜)가 소장했던 작품으로 화첩의 제목을 그가 달았다. 원래는 12폭이었지만 4폭이 없어지고 현재는 8폭만 남아 있다. 봉래산은 금강산을 계절에 따라 금강(봄), 봉래(여름), 풍악(가을), 개골(겨울)로 달리 부르던 데서 붙여진 이름이다. 그림은 가을풍경이지만 완성은 겨울에 끝난 듯하다. 그림 오른쪽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 있다.
“묘길상(妙吉祥). 진재(眞宰). 무자년(1768) 겨울에 뜻 가는 대로 그렸다(歲戊子冬漫寫). 대옹에게 바치니 예전부터 묵은 약속이 있었기 때문이다(奉岱翁 盖有宿約也). 그림은 모두 12폭이다(畵凡十二幅).”
대옹이 누구인지는 현재 밝혀져 있지 않다. 김윤겸은 대옹에게 오래전부터 금강산을 그려달라는 요청을 받았고 1768년 가을에 금강산 여행을 다녀온 후 그해 겨울에 약속을 지켰다. 묘길상은 여행자들이 둘러보는 필수코스로 인기가 많았던 것 같다.
▲ 김윤겸. ‘진재봉래도권’ 중 ‘묘길상’. 1768년. 종이에 연한 색. 27.4×38.8㎝. / 국립중앙박물관
58세의 화가가 금강산으로 떠난 이유
김윤겸을 제외하고도 김홍도, 김응환, 엄치욱 등 여러 작가들이 동일한 장소를 그린 작품을 남겼다. 그들은 김윤겸과 달리 한결같이 석등 옆에 여행객들을 그려 넣는 것이 특징이다. 김응환의 ‘묘길상’에도 세 명의 인물이 등장한다.
진재 김윤겸은 안동김씨 집안으로 자를 극양(克讓), 호를 진재라 하였고 묵초(墨樵), 산초(山樵) 등의 호를 겸용했다. 그는 청음(淸陰) 김상헌(金尙憲)의 현손이다. 현손은 손자의 손자라는 뜻이다. 김상헌이라고 하면 명문지가의 대명사다. 김상헌은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인조를 남한산성으로 모시고 간 척화대신으로 청의 공격에 끝까지 맞서 싸워야 한다는 주전론(主戰論)을 펼쳤다. 영화 ‘남한산성’에서 ‘인조’(박해일 분) 앞에서 최명길(이병헌 분)과 설전을 벌였던 인물이 김상헌(김윤석 분)이다. 김상헌 이후 안동김씨는 순조 때 김조순이 조선 최대의 세도가문을 세울 때까지 명문가로 이름을 날렸다. 김윤겸은 김상헌의 손자 김수항(金壽恒)의 손자로 아버지는 김창업이다. 김창업은 출사하는 대신 농사짓고 시를 지으며 유유자적한 삶을 살았다. 그림에도 이름을 알린 문인화가였다.
김윤겸은 김창업의 서자로 태어났다. 비록 서자였지만 명문지가의 자손답게 벼슬길에 나아갔다. ‘묘길상’을 그리던 1768년 무렵에는 소촌찰방(召村察訪)을 지냈다. 소촌은 진주, 거제, 진해, 고성, 사천 등 서부 경남의 남쪽지역에 해당한다. 찰방은 종6품으로 공문서나 말을 관리하는 직종이다. 김윤겸은 안동김씨 가문과 인연이 깊었던 겸재 정선(鄭敾)의 영향을 받아 진경산수화를 많이 그렸다. 진경산수화를 그리려면 현장 스케치는 필수다. 이태호의 ‘진재 김윤겸의 소촌찰방 시절 한글편지와 사생행적 재검토’(2018)에 따르면 김윤겸은 조선 후기에 여행 스케치를 가장 많이 남긴 작가로 조사되었다.
그는 금강산과 관동, 영남, 경기, 강원, 황해, 도성 내외의 명승지를 찾아 현장 사생을 남겼다. 그는 근무지에서 시간을 내어 틈틈이 여행을 다니며 현장을 스케치했다. 특히 소촌찰방 시절에 그린 것으로 추정되는 ‘영남기행화첩’은 부산의 몰운대와 태종대, 합천의 해인사와 홍류동, 함양의 극락암과 하룡유담 등 지금도 그 현장을 확인할 수 있는 실경들이 여러 점 포함되어 있다. 특히 함양의 극락암은 탁월한 구도감각과 빼어난 시적 표현으로 그림을 보는 것만으로도 당장 현장에 달려가고 싶은 충동을 불러일으키는 작품이다. 이 또한 그가 어느 곳을 가든 그 기회를 현장 답사하고 그림을 그릴 수 있는 기회로 여겼기 때문에 탄생한 작품들이다.
▲ 김응환. ‘해악전도첩’ 중 ‘묘길상’. 종이에 연한 색. 20×23.6㎝. / 성균관대학교박물관
시간을 초월한 가르침
‘묘길상’을 그린 1768년은 김윤겸이 58세 때의 겨울이었다. 58세라는 나이는 당시로서는 노인에 속했다. 조선시대 문집을 읽어보면 나이가 50세만 넘으면 스스로를 ‘노옹(老翁)’이라고 부르는 것이 다반사였다. 그런데 김윤겸은 나이가 많다는 것과 오지에 근무한다는 핸디캡을 오히려 특혜로 만들어버렸다. 그 나이에 다시 금강산 스케치 여행을 떠났으니 김윤겸이야말로 스스로의 머리를 쓰담쓰담할 자격이 있는 사람이다. 그는 자신의 삶에 충실했을 뿐 아니라 개성이 강한 독특한 작품을 남김으로써 250년 뒤의 필자에게도 큰 가르침을 주었다. 필자 또한 김윤겸처럼 새롭게 이사한 집 주변을 답사하러 다닐 결심을 하게 해 주었으니 말이다.
지난 일요일에는 안성 석남사를 다녀왔다. 원래는 청룡사 대웅전 기둥을 보기 위해 나선 길이었는데 근처에 큰절이 있다 하여 덤으로 보게 된 곳이다. 그런데 석남사 일주문 앞에 서자 완전히 보물을 주운 기분이었다. 가파른 경사를 이용해 대웅전까지 일직선으로 올라가게 만든 계단은 물론이거니와 대웅전 앞에서 바라본 건너편 산의 풍경도 절경이었다. 무엇보다도 놀라웠던 것은 석남사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위치한 마애여래입상이었다.
마애여래입상은 그 길이가 7m로 정도로 상당히 컸다. 고려시대의 작품으로 추정되지만 통일신라 양식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었다. 두툼하고 넉넉해 보이는 얼굴과 당당한 풍채는 통일신라불상의 특징이다. 마애여래입상은 전체 바위를 배경 삼아 머리에 두른 두광(頭光)과 몸에 두른 신광(身光) 그리고 10개의 발가락 아래 연화대좌까지 뚜렷하게 조각되어 있었다. 비록 세월에 의해 일부 표면이 닳아지고 깨어진 부분도 있었지만 천 년이 넘는 세월을 감안하면 처음 완성되었을 때의 위용이 대단했을 것 같았다. 참배객의 마음을 저절로 숙연하게 만들고 압도하는 듯한 중량감에 감탄사가 절로 나왔다. 7m 높이의 마애여래입상이 이 정도인데 15m가 넘는 묘길상의 마애불은 얼마나 웅장할까 짐작되었다. 석남사의 마애여래입상을 보니 그동안 웬만한 유적지는 거의 다 가봤다고 생각했는데 아직도 실견하지 못한 마애불과 민불이 상당수 남아 있을 것 같다. 앞으로 주말이면 기회가 될 때마다 무조건 길을 나서야겠다. 캄보디아의 앙코르와트도 좋고 중국의 용문석굴도 멋지지만 집 가까이 있는 유적지도 그에 못지않은 매력이 있을 것 같다. 세월이 지난 다음 이 시간을 돌아보면 이 또한 현명한 결정이었다고 스스로를 칭찬하지 않을까. 이런 소소한 추억이 삶을 풍요롭게 채워줄 것이다.
조정육 / 미술평론가
출처 : 주간조선(http://weekly.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