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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사를 시작하고 나서 달라진것이 있다면 그것은 백제를 다른 시각으로 보게 된것이다.
한성시대부터 웅진시대를 거쳐 사비시대까지 1박2일동안 백제의 700여년의 발자취를 찾아 떠났다.
고구려를 건국한 주몽의 아들 온조와 비류 두 형제는 건국을 위해 몸바쳤던 모든 공을 뒤로하고 남하하여 지금의 서울 북부지역에 이른다. 온조는 한강 북쪽 위례성에 자리 잡고 비류는 미추홀(지금의 인천)에 터전을 잡았다.
그 후 위례성의 백성들이 풍요롭게 살고 있는 것을 본 비류는 부끄러워 탄식하다 죽었는데, 온조가 그 백성을 받아 온조 14년(BC5)에 남쪽 이곳 송파지역으로 천도한 후 고대국가의 기틀을 갖추고 찬란한 문화를 꽃피웠다.
풍납토성
풍납토성은 한강변에 남아 있는 초기 백제시대의 토축성곽으로 위례성으로 추정하고 있다. 주변에 몽촌토성과 석촌동 고분군과 더불어 역사적으로 매우 가치 있는 곳이다.
풍납토성을 보고난 후 우리는 석촌동고분으로 향했다.
석촌동고분은 한성시대의 고분으로, 3호분은 근초고왕의 능으로 추정하고 있으며 고구려무덤 형식인 기단식돌무지무덤(기단식적석총)이다. 무덤은 높은 지형을 평평하게 하고 밑 테두리에는 매우 크고 긴 돌을 두르고 쟈연석으로 층단을 이루면서 쌓아올려 3단으로 되어있다.
옛 고구려 지역인 만주 통구에 있는 장군총보다 큰 것임이 밝혀졌다.
3호고분(근초고왕능)
석촌동고분은 일제강점기때 처음으로 조사가 되었고 1호, 2호 무덤은 주민들이 농사짓는 땅으로 이용해서 내부구조와 유물은 정확히알 수 없다.
한성시대는 473년동안 고대국가로서의 기틀을 갖추고 찬란한 문화를 꽃피운 백제의 전기시대인데 그때의 자료가 남아 있지 않아 충분히 알 수 없는것이 참 안타까운 일이다.
한성에서 웅진으로 천도를 한것은 475년 개로왕의 아들 문주왕이었다.
고구려군에 의해 한성이 포위되기 직전 신라에 원병을 요청 하러간 문주(文周)는 원병 1만명을 얻어 돌아왔으나 이때는 이미 개로왕도 전사하고 한성도 함락된 뒤였다. 이에 문주는 목협만치(木協滿致).조미걸취(粗彌桀取)의 도움을 받아 즉위한 후 웅진으로 천도하여 국가재건에 노력하였다. 그러나 웅진천도 초기의 백제의 정치정세는 매우 불안하였다.
안으로는 한성에서 남하해온 귀족들이 자체분열을 일으켜 국정을 좌우하던 병관좌평 해구(解仇)가 문주왕을 살해하였으며, 그 뒤를 삼근왕도 재위 3년으로 끝나고, 동성왕이 즉위하게 되는 상황이 벌어졌다. 한편 밖으로는 서해의 해상제해권이 고구려에 넘어가고 가야세력이 이탈해나가는 등 백제는 국제적 고립의 위기마저 맞이하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노력한 이가 동성왕이었다.
공산성
공산성은 백제의 수도가 공주였을 때, 공주를 지키던 백제의 산성이다. 금강변 야산의 계곡을 둘러싼 산성으로, 원래는 흙으로 쌓은 토성이었으나 조선시대에 석성으로 고쳤다. 쌓은 연대는 정확하지 않으며, 백제 때에는 웅진성으로, 고려시대에는 공주산성·공산성으로, 조선 인조 이후에는 쌍수산성으로 불렀다. 4방에 문터가 확인되는데, 남문인 진남루와 북문인 공북루가 남아있고 동문과 서문은 터만 남아있었는데, 1993년에 동문터에는 영동루 서문터에는 금서루를 복원하였다.
암문·치성·고대·장대·수구문 등의 방어시설이 남아 있으며, 성 안에는 쌍수정·영은사·연지·임류각지, 그리고 만하루지 등이 있다. 또한 연꽃무늬 와당을 비롯하여 백제 기와·토기 등의 유물들과 고려·조선시대의 유물들이 많이 출토되었다. 백제 멸망 직후에 의자왕이 잠시 머물기도 하였으며, 백제부흥운동의 거점지이기도 하였다. 통일신라시대에는 김헌창의 난(822)이 일어나기도 하였으며, 조선시대 이괄의 난(1623)으로 인조가 피난했던 곳이기도 하다.
연지
공북루
“인조가 이름 붙인 ‘인절미’”인조 2년(1624), 이괄의 난을 피해 피난을 나선 인조가 공주 우성면 목천리 근방을 지날 때 임씨라는 농부가 떡을 만들어 임금에게 바쳤다. 인조는 콩고물을 묻힌 떡을 아주 맛있게 먹고 난 후 처음 먹어보는 떡의 이름이 궁금하여 물었으나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이에 인조는 임씨가 만든 맛있는 떡이라는 뜻으로 ‘임절미’라는 이름을 붙여주었다. ‘임절미’란 떡 이름은 세월이 흐르며 ‘인절미’로 변했다.“정3품 나무 터에 지은 ‘쌍수정’”공산성으로 온 인조는 높은 곳에 있는 두 그루의 커다란 나무 아래에 앉아 반란이 진압되었다는 소식이 오기를 기다렸다.
이괄의 난이 평정된 후 인조는 두 나무에 정삼품인 통훈대부의 벼슬을 내렸고 성의 이름도 ‘상수성’으로 부르도록 명령하였다. 그 후 영조 10년(1734)에 관찰사였던 이수항이 나무가 늙어 없어진 자리에 인조를 기리는 정자를 짓고 ‘삼가정’이라고 불렀는데 이 정자가 지금의 쌍수정이다.
한성시대의 성이 위례성, 고분이 석촌동고분이라면 웅진시대의 성은 공산성, 고분은 송산리고분이다.
백제가 문주왕(475~477), 삼근왕(477~478), 동성왕(479~501), 무령왕(501~523), 성왕(523~554)까지 64년간 도읍지로 삼았던 곳인 웅진(지금의 공주)에 조성된 왕과 왕족의 무덤으로 해발고도 130m의 송산(宋山) 남쪽 경사면에 자리잡고 있다.
송산 서쪽으로 금강이 굽이쳐 흐르고 동쪽으로는 공산성이 보인다. 송산리 고분군에는 벽돌무덤과 할석 ·괴석으로 만든 돌방무덤 2가지 유형이 있다. 지금까지 발굴된 왕릉의 분포를 보면 계곡 서쪽에는 무령왕릉과 5~6호분, 동쪽에는 1~4호분이 있다. 1~5호분은 궁륭으로 된 천장식 돌방무덤인데, 1~4호분은 백제가 공주로 천도한 직후부터 6세기 초반에 출토된 것으로 보인다.
6호분과 무령왕릉은 터널형 천장의 벽돌무덤으로서 백제시대의 벽돌무덤으로는 이 두 개만이 남아 있다. 6호분은 벽 네 면의 일부에 사신도를 그려넣은 벽화고분으로서 긴 배수구가 널길을 향해 밖으로 뻗고 있으며, 벽돌의 무늬와 축조방법상 무령왕릉보다 조금 앞선 6세기 초의 무덤으로 보인다. 6호분의 배수로가 5호분의 널방[玄室] 아랫부분을 지나고, 무령왕릉의 배수로 상면에 5호분의 봉토 일부가 걸리는 점으로 보아 무령왕릉 역시 5호분보다 일찍 축조된 것으로 추측된다.
[무령왕릉]
한국 충청남도 공주시 송산리에 있는 왕릉. 1971년에 발견, 1972년 7월에 발굴. 묘실 선도(羨道)에 놓인 2개의 묘지석(墓誌石)에 의해서, 백제 무령왕(재위 501~523)과 왕비(526 사망)의 합장릉임이 판명되었다. 횡혈식 전축(塼築)묘로 현실은 폭 2.72m, 안길이 4.2m, 높이 2.93m. 안쪽에 관대(
[진묘수]
중국에서 묘(墓) 속에 놓아 두는 신상(神像)으로 주로 짐승형태를 하고 있다. 묘(墓)에 악영향을 미치는 악령을 내쫓을 목적을 지닌 것으로, 전국시대의 초묘(楚墓)에서 다수 출토되었다. 시기마다 형태가 다른데 초楚나라의 진묘수 중에서 초기의 것은 비교적 간단하여 얼굴에 오관(五官)이 없고 중기가 되면 복잡해져서 머리가 둘이 되고 호랑이의 얼굴에 오관을 구비했으며 구불구불한 목과 몸을 가진 것이 나타난다. 후기가 될수록 대체로 얼굴은 비교적 선하고 사람얼굴과 비슷해지기도 하지만, 공통된 특징은 머리에 꽂힌 사슴뿔과 방형(方形)의 대좌 위에 위치한다는 점이다.대부분 진묘수는 채색이나 칠(漆)이 되어있고 문양은 기이해서 신비함을 더한다. 이러한 진묘수는 초나라 신화 중에서 명부군주(冥府君主)인 토백(土伯)과 관련이 있다. 한대(漢代)부터 육조(六朝)시대의 묘에서 출토되는 토용(土俑)의 벽사(辟邪), 당唐나라 묘에서 출토되는 무서운 얼굴을 가진 짐승형 또는 인면수신(人面獸身)의 삼채용 등이 이에 해당하고 백제의 <무령왕릉>에서도 출토되었다.
공주에서 국립공주박물관을 견학하고 부여로 고고~~ 국립부여박물관을 견학한후 숙소로 갔다,
왁자지껄..시끌시끌 저녁을 먹고 궁남지를 보기 위해 노을빛이 예쁜 늦은 저녁에 숙소를 출발하였다.
밤이어서 예쁜 사진을 못찍어서 아쉽기는 했지만, 늦여름의 시원함과 상쾌함...
궁남지는 사적 제135호. 충남 부여군 부여읍 동남리(東南里) 소재. ‘마래방죽’이라고도 한다. 부여읍에서 남쪽으로 약 1km 지점에 있으며, 동쪽에는 초석(礎石)이 남아 있고, 주변에 옛 기와가 많이 산재하여 있다. 또 부근에는 대리석을 3단으로 쌓아올린 팔각형의 우물이 있는데, 지금도 음료수로 사용되고 있다. 이 궁남지는 백제 무왕(武王)의 출생설화와도 관계가 있다. 무왕의 부왕인 법왕(法王)의 시녀였던 여인이 못가에서 홀로 살다 용신(龍神)과 통하여 아들을 얻었는데, 그 아이가 신라 진평왕(眞平王)의 셋째딸인 선화공주(善花公主)와 결혼한 서동(薯童)이며, 아들이 없던 법왕의 뒤를 이은 무왕이 바로 이 서동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설화는 이곳이 별궁터였고 궁남지가 백제 왕과 깊은 관계가 있는 별궁의 연못이었음을 추측하게 한다. 백제의 정원(庭園)을 연구하는 데 중요한 자료가 된다. 한편, 《일본서기(日本書紀)》에는 궁남지의 조경(造景) 기술이 일본에 건너가 일본 조경의 원류(源流)가 되었다고 전하고 있다.
궁남지에서는 6월 30일부터 9월 22일까지 달빛 별빛과 함께하는 열린문화공연을 하고 있다. 내가 간날은 백제가야금 연주단의 공연이 있는 날이었는데, 시간이 맞지를 않아서 리허설장면만 보고 왔는데,
별과, 달과 그리고 반딪불이...그리고 가야금의 아름다운 선율...
이 어찌 멋지지 않을 수 있을까?? 상쾌한 저녁시간을 궁남지에서 보내고 숙소로 돌아와 내일의 사비시대의 답사를 위하여 잠자리에 들었다.
아침을 먹고 첫번째로 향한곳은 부소산성이다.
부소산성
부소산성의 높이는 106m이다. 백마강(白馬江:錦江) 기슭에 있다. 이 산은 평지에 두드러진 잔구(殘丘)로, 예로부터 고도(古都) 부여의 진산(鎭山)이 되어 왔다. 산이라기보다는 언덕이라고 할 만큼 낮은 산이다. 산꼭대기를 중심으로 부소산성터·군창지(軍倉址)·영일대(迎日臺) 터·송월대(送月臺) 터 등 백제 때의 유적이 남아 있고, 조선 후기에 건립한 사비루(泗沘樓)·영일루(迎日樓)·반월루(半月樓)·백화정(百花亭) 등이 있다. 백화정 바로 밑에 삼천 궁녀가 푸른 강물에 몸을 날린 낙화암(落花岩)이 있고, 강기슭 가까이에 고란초로 이름난 고란사(皐蘭寺)가 있다. 그 밖에 부소산 남록 입구에 성충(成忠)·흥수(興首)·계백(階伯)의 3충신을 모시는 삼충사(三忠祠)가 있다.
[낙화암]
1984년 5월 17일 충청남도문화재자료 제110호로 지정되었다. 서기 660년(백제 의자왕 20) 백제가 나당연합군(羅唐聯合軍)의 침공으로 함락되자 궁녀 3,000여 명이 백마강(白馬江) 바위 위에서 투신하여 죽었다고 한다. 그 바위를 사람들이 낙화암이라고 불렀는데, 이 암석 위에 1929년 다시 그곳 군수 홍한표(洪漢杓)가 백화정(百花亭)을 지었고, 절벽 아래에는 ‘낙화암(落花岩)’이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다.
[낙화암 전설]
백제 31대 의자왕은 해동증자라고 불릴 정도로 효심이 깊고 착했습니다.
나라도 잘 다스렸으며 전쟁도 하는 족족 이겼습니다. 하지만 전쟁 할 때마다 이기자 의자왕은 자신을 이 세상에서 제일 잘났다고 하기 시작합니다. 의자왕은 충신들의 말은 듣지 않고 어여쁜 궁녀들을 데리고 노는 데만 바쁩니다.
충신이란 충신은 다 죽이고 자신은 간신들과 궁녀들이랑만 지냅니다.
결국 백제는 점점 약해지고 그 동안 당나라와의 관계를 튼튼히 하고 국력도 튼튼히 길러온 신라는 당나라와 연합하여 백제를 침공합니다.
백제는 속수무책으로 당했고 결국 궁은 함락되었습니다.
그리고 의자왕이 거느렸던 삼천궁녀는 적들을 피해 도망가다가 막다른 길에 이릅니다. 그리고 저들에게 잡힐 바에는 차라리 죽겠다면서 자살을 결심합니다.
그리고는 은장도로 자신의 몸을 찔러 죽었습니다. 그리고 은장도로 자신을 찌를 자신이 나지 않은 궁녀들은 치마를 덮어쓰고 절벽 밑으로 몸을 날려 떨어져 죽었습니다.
멀리서 보았을때 그 떨어지는 모습이 마치 꽃이 떨어지는 것 같다 하여 그 절벽 이름을 낙화암이라고 지었습니다.
[고란사]
1984년 5월 17일 충청남도문화재자료 제98호로 지정되었다. 대한불교조계종 제6교구 본사인 마곡사(麻谷寺)의 말사이다.
백제 말기에 창건된 것으로 추정할 뿐, 자세한 기록은 전하지 않는다. 절 뒤 바위 틈에 고란정(皐蘭井)이 있으며, 그 위쪽 바위틈에 고란초(皐蘭草)가 나 있다. 일설에 의하면 이 절은 원래 백제의 왕들을 위한 정자였다고 하며, 또 궁중의 내불전(內佛殿)이었다고도 전한다.
백제가 멸망할 때 낙화암(落花岩)에서 사라져간 삼천궁녀의 넋을 위로하기 위하여 1028년(고려 현종 19)에 지은 사찰이라고도 한다.
[삼충사]
삼충사는 백제의 충신이었던 성충, 흥수, 계백을 기리기 위해 지은 "사당(조상의 신주를 모셔 놓은 집)"이다. * 신주: 죽은 사람의 위패
[삼충사에 얽힌 이야기]
성충은 백제 의자왕 때 충신으로 좌평에 있으면서, 의자왕이 음란과 향락에 빠지자 이를 적극적으로 만류하다가 오히려 옥에 갇혀 옥에서 사망 하였다.
흥수는 성충, 계백과 함께 백제 말기의 충신으로, 백제 의자왕 20년(660년)에 나당 연합군이 공격을 해오자, 당나라 군대가 "백강"을 건너지 못하게 하고, 신라 군대가 "탄현"을 통과 하지 못하게 지키다가, 대신들의 반대와 대신들은 "흥수가 오랫동안 유배 중에 있었던 관계로, 왕을 원망하고 나라를 사랑하지 않을 것이므로 이 말을 따를 수가 없다"고 하면서 "당나라 군사를 백강으로, 신라의 군사를 탄현으로 오게 하여 치면 된다."고 왕에게 고하여, 왕이 대신들의 말을 따름으로, 결국은 패하여 당나라와 신라의 군대가 "백강"과 "탄현"을 거쳐 진격해 온다는 소식을 듣고, 뒤늦게 계백으로 하여금 결사대 5,000명을 이끌고 황산에서 신라 군사와 싸우게 하였으나 패하였으며, 결국은 백제가 망하게 된다.
계백은 나당 연합군이 공격을 해오자, 결사대 5,000명을 이끌고 지금의 "연산"인 "황산"에서 싸우다 전사 하였다.
삼충사는 충남 부여군 부여읍 쌍북리에 있으며, 1984년 5월 17일 문화제자료 제 115호(부여군)으로 지정 되어, 해마다 10월 백제 문화재때 "삼충제"를 지내고 있다.
부소산성에서 삼충사, 낙화암 그리고 고란사를 답사한후 고란사에서 구드래나루터까지 배를 타고 나왔다.
이제는 정림사지다.
정림사지는 백제가 부여로 도읍을 옮긴 시기(538-660)의 중심 사찰이 있던 자리다. 발굴조사 때 강당터에서 나온 기와에서 ‘태평 8년 무진 정림사 대장당초(太平八年 戊辰 定林寺 大藏唐草)’라는 글이 발견되어, 고려 현종 19년(1028) 당시 정림사로 불렀음을 알 수 있다. 즉 고려시대에 백제사찰의 강당위에 다시 건물을 짓고 대장전이라 했던 것으로 보인다. 정림사의 주요 건물 배치는 중문, 오층석탑, 금당, 강당에 이르는 중심축선이 남북으로 일직선상에 놓이고, 건물을 복도로 감싸고 있는 배치를 하고 있다. 그러나 특이하게 가람 중심부를 둘러싼 복도의 형태가 정사각형이 아닌, 북쪽의 간격이 넓은 사다리꼴 평면으로 되어있다. 발굴조사에서 드러난 중문 앞의 연못이 정비되어 있고, 석불좌상을 보호하기 위한 건물은 1993년에 지어졌다. 백제 때에 세워진 5층석탑(국보 제9호)과 고려시대에 만들어진 석불좌상(보물 제108호)이 남아 있다. 출토유물로는 백제와 고려시대의 장식기와를 비롯하여 백제 벼루, 토기와 흙으로 빚은 불상들이 있다.
정림사지오층석탑
인간성에 1000점을 주어도 아깝지 않을 백제인의 숨결과, 백제인의 성품이 느껴지는 정림사지오층석탑은 기존의 목조가 가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석재로 만들어졌다. 세련되고 정돈된 형식미, 좁고 낮은 단층기단과 각 층 우주에 보이는 배흘림 모양을 하고 있고, 지붕돌인 옥개석은 부드럽고 완만하다.
익산 미륵사지석탑과 함께 백제시대 석탑의 모양을 잘 보여주고 있기도 하다. 1층 몸체돌(탑신)에는 당나라 장수 소정방이 백제를 멸망시킨 다음 그 공적을 새긴 글이 남아있다. 이것은 당시의 상황을 말해주는 귀중한 역사적인 자료라 하겠다
일제강점기에 일본으로 가져갈뻔도 했다는 우리의 유산 정림사지오층석탑...내가 앞으로 마구마구 사랑해 주리라.
석불좌상(보물제108호)
1박2일동안 백제를 숨가쁘게 달렸다. 한성시대의 성과 고분, 웅진시대의 성과 고분, 사비시대의 성을 봤으니 이제는 고분을 마지막으로 답사를 끝내려한다.
사비시대의 고분은 능산리고분이다.
능산리고분
의자왕의 가묘
조선시대 공주의 옛읍지에 따르면 부여현의 관아에서 동쪽으로 십리 떨어진 곳에 백제시대 왕릉이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능뫼 또는 능산리라는 지명으로 왕릉의 존재가 널리 알려져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본격적인 발굴조사는 일제 강점기인 1915년, 1917년, 1936년 세 차례에 걸쳐 이루어졌고, 1966년 추가로 고분 1기를 더 발견하였다.
능산리에 있는 고분의 총 갯수는 16개이고, 능산리의 고분들은 중앙 및 좌, 우의 세 무리 고분군으로 나눌 수 있다. 중앙의 고분은 121미터의 능산의 남쪽 경사면에 주치한다. 7기의 무덤이 복원되어 있는데, 앞줄에 3기, 뒷줄에 3기 그리고 뒷줄 뒤 가장 높은 곳에 1기가 있다.
앞줄 가운데에 있는 중하총은 널방 천장이 터널형으로 축조되어 무령왕릉과 송산리 6호분과 유사하다. 축조한 재료는 다르지만 형식적인 유사성이 발견되어 왕릉으로 추정하는데, 사비로 천도한 성왕의 묘일 가능성이 있다. 벽그림이 있는 동하총은 성왕의 아들인 위덕왕의 무덤일 가능성이 있다.
1993년 나성과 고분군 사이에서 능사터가 발굴되었는데, 이 절터에서 백제 금동대향로가 출토되었다. 1995년에는 창왕 즉 위덕왕의 명복을 비는 사리감이 나왔다.
열심히 보고 배운다고는 하였지만 700여년의 긴 역사를 1박2일동안 안다는 것은 분명 무리가 있지만, 그래도 많은것을 보고 느꼈다.
앞으로도 공주, 부여에 갈 기회가 많이 있겠지만, 그때마다 백제인의 숨결을 느끼기 위해 노력해야 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