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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산내항과 구세관에 얽힌 여러 가지 이야기
1, 우리나라 근대건축물 건축사측면
1, 군산항 변천과정
1, 일본인 거주당시 군산시인구
1, 그 시대 사회상과 숨은 이야기
문화관광 해설사로 2010 5월 이곳에 배치를 받고 근무하기 이전에는 옛 군산 세관에 대한 지식이 충분치 않아 여러 가지 자료를 모아 가면서 이 글을 써본다, 다소 무리가 있으나 기회가 되면 수정하기로 하고, 우선 현재까지 연구한 자료를 올린다
1, 우리나라 근대건축물 건축사측면
옛 군산세관은 1905년 대한제국의 자금으로 시작된 군산항 제1차 축항공사 기간 (1905년~1910년)중인 순종 (2년 6월)인 1908년에 만들어졌다, 당시 세관 앞에 까지는 갯벌과 바닷물이 가까이 있었고, 한적한 해변이었다, 서양 양식 건평은 228,10m (약 69평)이고 독일 사람이 설계하고 벨기에 에서 붉은 벽돌과 건축 자재를 수입하여 건축했다고 한다.
군산은 1903년 6월3일 탁지부가 있었고, 1904년 발발한 러일 전쟁과 일본정치의 통감부 총독부 도 당국이 만들어진 시절이라 군산세관은 탁지부 건축소에서 건축했다는 설로 전해져오는 이야기가 있으나, 세관에서 발표한 자료를 근거로 정 리 한다
외벽은 화강암 기초위에 붉은 벽돌과 화강암으로 쌓인 구조로 내부는 회벽을 이용하여 유럽양식으로 장식되고 이 건물 화강암 공사는 군산항 부두석축 공사에 동원된 중국인 석공들이 다듬은 것으로 보인다.
지붕은 기와 모양의 동판으로 물고기 비늘처럼 올려지고, 고풍스러운 지붕 위에는 3개의 뾰쪽한 철탑이 하늘을 찌르는 듯 솟아 있는 모습이다. 이러한 건축양식은 현재 국내에 서울역 건물과 한국은행 본점 건물을 합하여 우리나라 근대 역사를 간직한 건축 물 중 남아 있는 3개의 건물 중 하나로 건축사 연구 자료로 이 건물이 각광을 받아오는 소중한 자료가 된 다.
이 세관의 본래 사용 용도는 개항장은 군산항에 입출항 하는 외국선박에 관세를 부과하여 대한제국 수입을 증가 시키는 역할을 하였던 것이 이관세가 지세 다음 대한제국 수입에 큰 역할을 하였던 것은 사실이지만 당시 관세수입이 거의 외국 차관에 대한 이 자금 상환에 사용되었기 때문에 나라살림엔 큰 도움을 주지 못했다,
군산항도 1908년 세관과 부두를 일본인들이 점유하여 무역업자나 큰 자본가들은 관세부담을 저희들끼리 눈감아주는 일이 많았고 만면에 우리 영세한 민족자본가에게는 관세가 상품운송의 큰 부담이 되었다 한다, 이 세관을 1993년 군산세관 신청사 완공 후 구 세관이 낡아 철거하려고 토목공사 설계까지 마친 상태의 건물을 역사적 가치를 알아낸 당시 방 길남 세관장의 노력으로
1994년 지방기념물 제87호로 지정되어 보존하였고 현재는 건물내부에 일제 강점기 사진을 전시해, 당시의 역사자료 전시관으로 활용해, 우리 민족의 아픈 상처를 달래는 일제 강점 시 우리지방의 수탈사를 기억케 하는 자료가 공개 되고 있어 이곳을 찾아오는 역사학자들과 건축학 연구가들은 물론 젊은 학생들에게 민족 수탈 사 를 설명해주고 그 역할을 해내는 소중 한 장소로 활용되고 있다,
그러나 이 건물이 언제부터 인가 청사 안에 비가 오면 누수가 생겨 보는 이 들이 무척 안타까워하고 있다, 옛 세관 설비 평면도와 당시 자료들은 군산에서 태어난 일본인들이 거의 보관하고 있고 우리지역에는 별로 확보된 자료가 없으나, 이 고장 출신 사진작가 한분인 채 승훈씨가 수십 년간 정성스럽게 모아온 일제강점기 우리지역에서 일어난 생생한 자료들이 아직 햇빛을 보지 못해 필자는 늘 안타깝게 생각 한다,
최근에 일본구주 대학에 근무하는 한 교수가 보내준 군산세관 설비 평면도가 여러 사람들의 노력으로 우리 지역에 입수되어 그 자료를 보게 되고, 도면에는 당시 항만 주변의 부지와 축항공사 내용이 그려져 있어 당시를 이 도면은 1905년에 제작된 구 세관 인근이 자세히 담겨진 소중한 자료이고, 지금의 영화 동 일대를 말한 도면이다,
이 공사는 개항이후 일본 화물선이 군산항으로 쌀을 실으려고 밀려들자, 군산항 확장 필요성을 절감한 항만운영 주체였던, 각국 거류지회에서 조선 정부에 건의 하여 시작됐고, 1905년경에는 대한제국이 경제파단 상태였기에 외채 상황시기에 맞물린 조선 정부가 도리 없이, 일본과 조선의 중개무역에 목숨을 걸고 있던, 군산거주 일본 상인들을 중심으로 이 사업이 시행되도록 방치했다 한다,
이때 일본 상인들은 라 포 트 라는 프랑스 세관 책임자를 매수하여 당시 8만 6천원을 대한제국 자금을 투자케 해, 세관용지 일부와 강변 매립공사, 부잔교 1기 설치를 철치 하고 육상과 접안이 편리한 석축 접안시설공사로 진행하고 대한제국 자금은 투자되었으나,
공사감독은 일본인들이 하게 되어 자기들이 사용할 항구 시설을 대한제국 자금과 한국인들의 저임금 노동으로 만들어 준공 하는 공사가 되었다, 1905년 러일 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한반도에서 국제적 힘의 우위를 확보하고 대한제국을 영구히 점령하려는 야욕을 드러낸 시기에 만들어졌다,
1, 군산항 변천과정
개항 이전에 군산항의 모습은 개항하기 이전 470여 년 전 에는 군산포영(群山浦營) 세종 5년-서기 1423경 ) 370여 년 전 에는 군산 창 (群山倉, 중종 7년- 1524년경)이 있었던 곳으로 이 조 때 농민들이 지방 토산물을 빈부의 차에 따라 나라에 바치는 貢 物 (공물)과 조세는 국가 재정상 절대적 재원 이었다
이 포구는 작은 어촌으로 30여 호가 돛단배를 이용하거나 돌살매 또는 나무 말 둑 사이로 칡넝쿨로 만든 그물로 고기를 잡던 원시적 어업을 하던 어촌으로 30여 호가 평화롭게 살던 포구였다고 본 다.
일본인이 군산에 거주하기 시작한 시기는 1894년에서 군산이 개항하여 각국조계 지역이 된 1899년까지 5년여 였 다, 이 들은 수덕산 아래에 모여 생활을 하고 군산에 처음 들어온 일본인은 군산, 옥구 쌀을 일본으로 가져가는 미곡상인 사도도미지로(左勝豊次郞)가 구 영 리(舊營里에 작은 판자집을 짓고 생활하였고
개항 이전에 은밀하게 들어온 일본인들은 숫자가 늘어 1899년에는 70여 호 125명에 이른다, 개항 당시 옥구 군 북면에는 2,834명이 거주하고 있었으나 기록에는 150가구 511명이라 했고, 일본인은 가구 수 20가구 77명이라 하나 조계 지역안만 계산된 내력으로 보인다.
이들은 천연 무역항구인 군산을 주목했고 1892년 조선정부의 증기 수송선 경제호가 곡미 수송차 군산항에 입항하였고, 1894년 군산에 처음 도착한 미국 남장로교 소속 선교사들이 제물포에서 군산까지 여객선을 이용한 것을 볼 때 이때 군산에는 정기 여객선까지 다닌 것으로 보였다.
군산의 각국 조계지역이 만들어 지는데 그 조계지란 거류지를 개항장과 주거지로 분리하고 치외법권 지역으로 만들어, 전관 조계지와 각국 조계지로 구분하여 살았는데 군산에는 한성에서 박 재순 과 체결된 일본, 프랑스, 영국, 러시아, 독일, 각국 사 신간에, 조계장전이 체결된 지역으로.
그 면적은 17만 3 천 평 이고, 이때 조계지안 조선인들은 조계지 밖으로 이주당하고 분묘까지 이장해 새로운 도시를 건설하였다. 1904년 일본육군 3000명이 군산에 상륙하여 긴장을 고조 시켰다, 평지는 일본인에게, 산비탈은 조선인이 토막이라는 움막형태 흙집을 짖고, 남자는 부둣가에서 막 노동을 하고, 여자는 일본인집 식모살이 와 미 선공을 하며 주로 생활하였던 당시의 가난한 삶의 모습을 추측해본다
1, 일본인 거주당시 군산시인구
1920년대 군산 시 총 인구가 14,138명인데 그중에 한국인은 8,243명이고, 일본인은 5659명으로 60%: 40% 근소한 차이 였 다. 군산의 이 사청은 1905년 11월 을사조약 이후 노랑색 2층 양옥으로 만들어지고 군산일본 영사관이 있던 그 자리에 1908년 시멘트 마감으로 연한 아이보리 색 페인트칠을 한 건물이 조선시대 해군기지 군산 진영 터 였 던 곳에 그들이 자리를 잡아 경찰, 행정, 감옥사무를 병행하여 3권을 장악 막강한 권력을 지닌다.
1910년대 수덕산 넘어 북쪽바닷가 등대와 부 청 사 사이에서 오포라 하는 대포를 정오에 한방을 쏘아 시간을 알려주었다, 당시 시계가 없어 그 시대 사람들에게 시간을 알려주는 수단이 되었다지만, 영국이 자국의 식민도시에 숨겨진 진실은 대포를 쏘아 올려 피지배 민족에게 지배자의 힘을 인식케 했다,
군산 부 청사는 1928년 11월에 준공하여 1995년까지 사용하였다 나가사끼 장기 18은행은 1870년 일본 나가사끼 지방 에 있던, 대규모 상인을 중심으로 출발한 은행이다, 1878년 나가사끼 무역항의 기능을 잃자, 조선에 진출 인천에는 1890년에 문을 열었고, 군산에는 1907년 설립 조선에서 일곱 번째 지점이다, < 자료출처: 군산역사이야기 김 중규지음- 도서출판 안과 밖>
1, 그 시대 사회상과 숨은 이야기
나름대로 자료를 찾아서 정리하다 보니 세밀한 자료가 마 탕 히 없어, 숨은 야화를 찾아보려고 우리나라 세관 120년 야사를 뒤져가면서 살펴보았다, 이 책을 읽다보니, 우리나라 세관의 초창기 이야기에 흥미가 있어 그 내용을 정리하고 군산세관의 소개를 역사를 정리하는데 중요한 시점이 되는 날 이라서 여기에 더 정리해본다
세관업무는 그냥보기 쉽게 물품을 통관이나 하는 곳으로 세율을 미리 정해놓고 물량에 따라서 세금은 내는 곳 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지만 내가 알고 보니 때로는 목숨을 걸고, 밀수범들과 대결을 하거나 날씨와 해상조건이 사나 울적엔, 밀수선을 소탕하기 위해서 일본 대마도에까지 가서. 밀수근절을 위해서 고생을 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한 가지 사례를 들어보면 독꼬오타이<특공대 밀수>를 잡는 일명 <이즈하라 독꼬오타이>를 포박 하려고 쓰시마 해역을 목표로 우리 세관원이 잠복하다가, 세관 원이 탄 선박이 기관 고장으로 망망한 대해에서 몇 일간 사투를 벌이고, 오우꾸지 해안선에서 일본해안 보안청 배에 이끌리어 영해 침범의 올가미로 이즈하라 구치소 수감 45일간 감옥생활을 하다가 강제로 추방된 일이 있다는 자료도 보았다,
우리나라 관세청은 1883년 3월 봉천 여 조선변민 교역장정 24개조와 항일통상장정 및 해관 세칙이 1883년 7월25일 저녁 6시에 체결하여 당시 청 국 상인들은 엉성한 항만관리 약점을 이용하여 밀수를 자행하면서 단속하는 인천해관의 습격은 물론 통상외교, 통화산업으로 다방면 활약으로 1883년 5월 해관이 창설하고,
한국 관세 수입담보 및 탁지부 고문 총세무사 해관에 일본인 1인과 고문관 파견을 하기로 하고 고종 황제는 1882년 11월 뭴렌 도르프(mollendoff) 독일 영사관 부영사 출신을 임명한다, 1885년 6월에 청국이 한, 청전선 조약체결하고 인천의 화전국의 시공을 러시아 기술로 맡게 된다.
1887년 서울지방에는 일본인 점포가 45곳이 생겼다, 그는 1894년 7월 청일전쟁 임오군란이 끝난 후 초대총무 세무사로 고 종 임금 접견 시 뭴렌도르프는 청나라인 리 홍장 소개로 고종 임금을 접견하는데. 그가 고종 임금 접견 시 조선왕을 뵐 때는 조선식으로 큰절을 세 번 하고. 안경 벗는 일을 잊지 말아야한다는 리 홍장의 조언을 그대로 받아들여
그간 고 종 황제는 안경을 끼고 왕을 접견하는 외국 사신들을 못마땅하게 생각하던 관행을 통과한다. 그 후에 조선인 하인을 고용하고 내외 고관을 초대하는 가든파티까지 참석하고 초헌(종2품 이상의 고관이타는 끄는 수레를 타고 다녔다한다 어느 시대나 반대하는 사람은 있는 법이고, 여기 왕실에도 있지만 내일을 크게 침해할 만큼 크지 못했다
1894년 청일 전쟁시 인천에 일본인 5000명이 있었는데 한성 인구는 30 만명이었다. 일본인들로 구성된 왜상들이 노출병과 방탕 성으로 조선사람 들이 왜상을 기피해서 장사가 안 되었기 격자문유리를 달아 밖을 내다보고 점포앞에는 조선 사람을 내세워 장사했다한다
1896년 8월 김 구 선생님의 민비 왕후 시해 일본인 범인을 잡아 죽인 죄로 인천 감옥에 사형수로 있었는데, 사형집행 직전 감형 전화를 고종 황제가 감 일등급을 시킬 때 전화를 활용 하고 했다고 한다. 1898년 3월 영국함대 8척이 인천항에 입항 해병대가 입경하고, 우리나라 최초 전화개통과 러시아 화전국원 밀수가 성행했다 한다
1904년 러일 전쟁이 발발하고. 1906년 1월 통감부 정치로 한국해관의 운영권이 일본정부에 귀속되어. 1906년 일본 통감정치 시작으로 관세를 거머쥐면서 경의선 철도업무 시작과 당초 인천, 부산, 원산, 진남포 가 해관과 조선육접 국경관세령으로 세관업무가 시작 된다
1913년 월드물류 32로, 1904년 만주철도 운영과 만주국이 탄생되고< 통감부, 총독부, 도 당국이 만들어 진다. 이때 조선은행, 식산은행, 금융조합의 자금 원조로 고리대금으로 교묘히 농민의 농지와 임야매수. 갈취, 일본인 지주행세는 물론 지방유지로 일본인들은 행세하면서
당시에 한국인들은 자본도 미약 하거니와 상술에도 일본인 적수가 될 수 가 없었다. 1930년대 호남선 철도에는 쌀부대가 초만원을 이뤘고. 8.15 해방 전까지 군산항에서 일본으로 쌀 반출이 되었고 그 수만 해도 30여만 가마니에 이른다
해방이 되었음에도 일본인들은 군산에 1945년 9월8일까지 일본직원 잔무정리를 기화로 야간에 기밀문서 소각하기도 했고 당시에 우리고장 출신 징용대상자였던 한분은 군산에서 일제징용으로 증발된 사람들이 대기하고 출발하려고 하는데 전쟁이 끝나서 일본에 안가도 된다 해서 허탈한 몇 날을 보낸 사실이 구전으로 알려졌다
이 당시는 조국 재건의 의욕이 우리 민족에게는 일사불란하게 불탔고, 1946년 여름 중국과 남방에서 군산항으로 귀환하는 선편에서 콜레라가 전염 인천 부산은 물론 전국에 크게 번져 1 만 여명 환자가 발생하고, 수천 명이 사망하였다.
1947년 8월25일 군정 법령 제 149호 대외무역 규칙으로, 서울 인천, 군산 목포, 제주 부산, 묵호 7개 세관이 만들어지면서, 세관원들의 제복은 미군고문관 주선으로 미군 군복과. 내 의가 지급되고 염색된 관복으로 개조해 입었다, “한국 사람들은 쌀만 먹어서 쌀 기근이 생긴 다” 고기도 먹어라 미군정 장관 러 취 장군 성명에서 웃음거리가 된 일도 그때 있었다
미국식 일방적인 당시 행정을 증명 유명한 이 이야기는 미군들이 우리나라 사정을 잘 모른 체 미 군정청 인수한 내용이다, 군산세관 3대 엄 승환 세관장 (1947년 ~ 1949년)은 본부 4과장 (감정과장)으로 임명되어 군산을 떠난후, 그는 관세 세율 표 작성, 세율안 배정의 1949년 2월9일 법률 19호 세관관서 설치법 시행 등 괄목할만한 관세 행정에 큰 역할을 한 다
인천, 부산, 서울, 군산, 목포, 여수, 마산, 제주, 묵호 등 9개 세관이 열리고 대란민국 초기에 시계를 찬 사람은 사치품으로 보아 지금의 자동차 고급차를 처음으로 산 사람의 구분 되는 격으로, 당시 국회의원인 장택상 의원이 국회에서 일어서면서 양복 조끼에서 금제 회중시계를 꺼내들고 나는 평생시계를 안차고는 사치품이라고 보는 것은 무리고 야 이것을 사치품이라고 보는 것은 재무당국자가 무식한소치야 적어도 50% 인하해야 해요 하면서 관세법을 세율을 인하케 했다 한 다
군산 세관에는 1947년 12월 중순 상해 방면에서 중국무역선< 장크선> 5척이 면포, 비단, 설탕, 염료, 사카린, 등 실고 군산항에 입항, 군산시장 박모,비롯해서 무역협회 간부인 조모, 권모, 정모, 등이 주동 무역선단을 위해 환영연 베풀어 주는 등 야단 법석를 떨었다 한다,
지방 유지들은 시장과 일부 권력 기관를 동원“ 군산항의 발전을 위해 세관에 대해 관세를 잘봐 달라고 압력을 행사해 결국 군정 법령에서 종가 10%로 되어있었다 ”만 받고 적당히 통관시켜줄 것을 부탁해왔다, <120년 세관야사 1945-1969쪽 인용>,무역 선단을 위해 당시 기관장들까지 동원됐던 야사기 당시 이야기 로 유명하다
필자가 만난 1993년도에 부임한 방 길남 전)세관장은 항망청 부잔교 철거가 가슴 아팟고 부잔교 목제로 위로 솟앗 던 자료 사진을 구하고 있고 옥탑 전망대 철거는 참 잘못된 근대 역사로서 소중한 자료였다고 술회했다, 그는 새 건물 터파기 행사 계약을 변경케 해, 옛 청사의 철거중단을 시켰고.
해방 후 에도 미곡이 부족한 일본에서는 미곡 밀수입 하면서 년 간 8만석, 해태, 수산물, 마른 새우를 가져갔고, 우리나라는 화장품, 학용품, 양품, 옷감, 기계부품, 북한에서는 전기 공급 댓가로 남측에서는 광목, 약품, 전선, 기계부품을 보냈고 북한에서는 카바이트, 비누, 청어, 명태를 가져갔다한다.
자료출처; 120년 세관에 얽힌 야화
작업장에서 슈퍼주인 할아버지께 아주 생생한 이야기를 듣게 되었습니다
전북지역은 물론이고 충남 보령,서천지역의 쌀 까지도 이곳에서 반출되었답니다
그 당시 이곳은(조선은행 부근) 지나가는 개도 돈을 물고 다닌다는 말이 있을정도로
엄청 번화가 였다는 군요
지금은 적막감마저 드는 쓸쓸한 옛 도시로 변해 버렸지만...
오늘은 비가와서 쉬는 김에 군산의 문화유적을 찾아 하루종일 돌아다녔습니다
덕분에 이곳 군산의 문화관광해설사의 설명도 듣을수 있었답니다
일제식민지 정책의 총 본산이었던 조선은행 군산지점 (1923년건립)
얼마전까지 주점및 노래방이었으나 군산시에서 매입, 복원예정이라
합니다. 함석지붕이 금방이라도 무너져 내릴것 같은...
조선은행 뒷편에 있는 철길
이 철길로 쌀 등 많은 물자가 수탈되었다는군요
현재 기차는 달리지 않고 있으나 철거는 안한다고 합니다
아직도 시내곳곳에 철길이 그대로 남아있습니다
위 철길 바로 앞에 있는 군산항 (지금은 썰물중)
그 당시에는 일본의 2,3만톤급배도 상당히 많이 다녔다고 합니다
일본 뿐 아니라 영국,러시아,프랑스 배도 다녔다는 해설사님 말씀.
조선은행 옆에는 도정공장도 있었다는데
우리 작업차 건너 쭉 늘어저 있는 건물이 바로 도정공장 이었다 합니다.
일본인을 상대로 금융을 해 주었던 나가사키 18은행
대출받은 돈으로 일본인들이 조선인들의 땅을 담보로 고리대금업을
하면서 농토갈취가 많았다고 합니다
조선은행 군산지점 왼편에 있습니다
구 군산세관
벨기에에서 수입한 붉은 벽돌로 지어졌는데 한국은행 본점,서울역과
함께 현존하는 서양고전주의 3대 건축물이라 합니다
구 군산세관(현재는 세관박물관으로 이용)에는 문화관광해설사가
4분이 계시는데 오늘 당번이신 고하영 선생님
46년생으로 공직에서 정년퇴임하신 후 2년전부터 하셨다 합니다.
현재 군산에는 총 50여명의 해설사가 계시는데 앞으로 새만금방조제가
완성되면 찾아오는 관광객을 이쪽 문화유산해설로 군산에 오래 머울수
있도록 많은 해설사를 대학과 연계해서 준비중이라 합니다
서울오시면 내가 해설해주기로 했는데 ㅋㅋㅋ
인근 월명공원에 있는 백릉 채만식선생 문학비. 군산에 생가 및 묘소가 있고
대표소설 탁류에 이곳 군산이 등장하여 군산인들의 사랑을 한몸에
받고 있으며 채만식문학관답사코스를 별도로 운영하고 있을정도 입니다
그 당시 제일 부유했던 일본인 히로쓰 가옥
다른 일본인들이 금융 및 지주로 돈을 벌었던데 비해서 포목점을 운영
하면서 많은 부를 축적하였다 합니다
영화 장군의 아들, 타짜 등 많은 한국영화와 드라마가 이 주택에서
촬영되었다고 하는데 현재 군산시에서 매입하여 내부공사를 거쳐
개방한다 합니다.
고하영 선생님께선 나중에 이곳에서 해설을 하고 싶다 하셨습니다
아직도 남아있는 옛 일제시대 건물
군산시청 제3청사로 이용하고 있더군요
신흥동 일대에는 옜날 일본인 부호들이 살았던 동네답게 옛 일식집들이
많이 남아 있었습니다
군산에서 제일 유명하다는 중국집 쌍용반점
짬뽕이 유명하다 해서 먹었는데...
글쎄요 그렇게 맛있는지는 모르겠던데
KBS바로 옆에 있는,군산에서 제일 높다는 우성26센터빌딩
지상20층,지하6층이라해서 26층이라 하던데
지하도 층수에 들어가나요?
아뭏튼 건립당시에는 전북에서 가장 높았다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