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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 일본 불교사
4. 가마쿠라[鎌倉: 1185~1333]시대 불교
12세기 후반인 헤이안 시대 말기에 이르면, 호겐의 난[保元の乱], 헤이지의 난[平治の乱]등 전란으로 정치적, 사회적 변화를 겪게 된다. 이른바 고대왕조가 쇠퇴하고 신흥무사계급이 새로이 등장하여 정권을 수립하고, 천황과 귀족계급과 분리된 봉건정치가 성립된 시대이기도 하다. 이때부터 무사계급이 일본을 통치하게 되었는데, 1180년 가마쿠라[鎌倉]를 시작으로 무로마찌[室町], 에도[江戸] 시대를 지나, 메이지유신[明治維新]에 의해 왕정복고가 이루어지는 1868년까지 이어지게 된다.
일본 중세사는 이들 무사계급의 시대이고, 무사정권이라는 독특한 정치체제를 구축되어, 조정朝廷과 막부幕府가 나란히 정치의 중심이 된 시기이다. 미나모토노 요리토모[원뢰조源頼朝]는 가마쿠라에 막부[鎌倉幕府]를 설치해 이원적 통치 체재를 시작하였는데, 1199년 초대 쇼군[將軍]인 요리토모가 사망하자, 실권은 그의 처가인 호조 씨[북조씨北条氏] 가문으로 넘어가게 된다. 미나모토씨 집안은 3대 만에 끊어지지만, 북조씨北条氏는 130여 년간 유지되며 가마쿠라 시대를 이끈다.
무엇보다도 가마쿠라 시대는 일본 불교의 성격을 결정지은 시대였다. 나라나 헤이안 시대 불교는 한국이나 중국불교를 그대로 받아들였다면, 가마쿠라 불교는 기존의 불교에서 벗어나 일본 불교의 특성화가 이루어진 시기이다. 중국이나 한국의 불교를 배우고 익히던 시대에서 벗어나 일본에 맞는 일본 불교로 탈바꿈한 가마쿠라 신불교는 오늘날 일본 불교의 주류를 형성하게 되었다.
1) 말법사상末法思想
일본은 헤이안 시대 중기, 말기를 거치면서, 호겐, 헤이지의 난 등 큰 전란이 겪었고 지방호족과 무사계급 간의 쟁투가 심심치 않게 벌어진다. 계속된 전란에다 폭풍우나 가뭄 등으로 인해 유래 없는 흉작이 이어지고, 역병 등이 겹쳐 사회 혼란이 극심해진다. 그러나 민중들은 이러한 혼란이 정치체제와 사회기구 때문이 아니고, 다름 아닌 말법末法이 도래했기 때문이라고 믿었다. 그래서 이러한 극심한 비극을 극복하는 방법으로 종교에 매달린다. 그중 아미타불의 이름을 부르기만 하면 정토에 태어난다는 단순한 신앙信仰운동이 대중적 호응을 얻었다.
末法思想, 選擇思想이라고 하는 점은 法然이나 日蓮이나 공통이지만, 전자가 個人의 救濟를 구하여 內省的이 된데 대하여, 후자는 國家主義的이고 政治와 宗敎와의 一致를 주장하고 또한 天災地變 등을 神들의 재앙이라고 하여 샤머니즘에 시종일관한 것이 對照的이다. 그러나 佛敎의 受容方法이라는 점에서 본다면, 모두다 本源的인 것을 구하려고 하지는 않고, 자기가 당면한 요구에 응하는 것만을 취하였고 佛敎의 發展史 전체에 대하여 看破하려고 하지는 않았다. 더구나 이 念佛(아미타 信仰)과 題目(法華信仰)의 두 신앙은 그 이후의 日本佛敎중에서 커다란 비중을 가지고 日本佛敎의 동향을 결정하는데 있어서 지극히 중대한 것이 되었다. (도변조굉渡辺照宏(와다나베 쇼오꼬오) 저著, 이영자李永子 역譯,『일본불교日本佛敎』 pp. 70~71.)
가마쿠라 시대는 말법사상末法思想을 배경으로 일어난 정토종淨土宗 등이 민중 속에 뿌리 내리게 된 시대로, 아미타불의 명호를 외우기만 하면 정토왕생淨土往生 한다는 단순한 신앙운동이 급속히 퍼져나간다. 이들은 불교의 본원적인 것을 구하려고 하지 않으면서, 자기가 당면한 요구에 응하는 것만을 찾아 취하였다. 이들은 교세를 넓히다가 기성종파의 반감을 사 박해를 받기도 하였으나, 민중의 마음을 적시는 도도한 물결을 거스를 수는 없었다.
서북인도로 전해진 인도불교는 그리스, 페르시아문화를 수용하며 다신교 성격을 띠게 된다. 그래서 대승불교에는 많은 부처와 보살들이 존재하게 되었다. 예컨대 석가모니 부처 외에도 동서남북 상하 등등을 담당하는 부처들도 따로 있었는데, 각각의 부처에는 거기에 따른 각각의 불국토가 따로 존재하였다. 각각의 불국토는 그들 나름의 특색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상국理想國이라하여 ‘정토淨土’라고 통칭하여 부른다.(도변조굉渡辺照宏(와다나베 쇼오꼬오) 저著, 이영자李永子 역譯,『일본불교日本佛敎』 pp. 184~185.)
그중 석가모니에게 소속한 불국토는 우리가 사는 사바세계娑婆世界이다. 아미타불이 사는 세상은 극락세계極樂世界인데 반해, 석가모니불이 교화하는 불국토이자 정토인 인간세계는 괴로움이 많은 사바세계인 것이다. 아미타불이 사는 아미타 정토는 즐거움만이 가득한 극락정토인데, 우리가 사는 사바세계는 괴로움만 가득하게 된 것이다. 다시 말해, 소위 극락정토라는 것은 대승불교의 산물인 것이다.
2) 신불교의 발흥
불교는 석가모니가 설한 가르침에 근거根據한다. 그러나 헤이안 말기에서 가마쿠라 시대에 이르면 불교의 깨달음을 추구하기보다는 아미타불에 귀의하여 극락왕생하려는 아미타신앙이 주류를 이루며 유행한다. 불교의 본원적인 것을 버리고, 당면한 문제에만 집착하게 된 것이다. 호넨[법연法然, 1133~1212], 신란[친란親鸞, 1173~1262] 그리고 시종時宗의 개조인 잇펜[일편一遍, 1239~1289] 등이 그들로, 일본에 정토종을 뿌리내리게 한다.
이렇게 해서 탄생한 것이 정토교 계통에서 호넨에 의한 정토종, 그 제자 신란에 의한 정토진종(淨土眞宗) 또는 일향종(一向宗), 잇펜(一遍)에 의한 시종(時宗)이었다. 그리고 선종 계통에서는 에사이가 임제종(臨濟宗)을 도겐이 조동종을 각각 중국에서 수입했다. 또 니치렌(日蓮)은 법화종 또는 일련종을 개종하였다. 이들 여섯 가지의 새 종파가 헤이안시대 말에서 가마쿠라시대에 잇달아 생겨난다. (중략) 보통 이들 종파를 가마쿠라 신불교라고 부르며, 일본에서의 종교개혁이라고 할 수 있다. (천기용지川崎庸之·입원일남笠原一男 지음, 계환스님 옮김,『일본불교사』p. 173.)
주목할 것은 이들 신불교 조사들은 모두 한때 비예산比叡山의 학승들이었다는 점이다. 즉, 젊은 시절의 법연法然, 친란親鸞, 도겐[희현도원希玄道元, 1200~1253], 일련日蓮 등이 연력사延歷寺에서 최징의 천태종을 배웠다. 또 명혜는 교토에 있는 진고지[신호사神護寺]에서, 에이존[예존叡尊, 1201~1290] 역시 교토의 다이고지[제호사醍醐寺]에서 공해의 진언종을 공부하였다. 그러나 이들은 거기에 머무르지 않고 새로운 불교 종파로의 활로를 열었다.
한때 천태종에 몸담았던 에이사이[명암영서明菴榮西, 1141~1215]와 도원道元은 선종禪宗을 들여와 임제종臨濟宗과 조동종曹洞宗을 열었고, 법연法然은 정토종을, 친란親鸞은 정토진종淨土眞宗을 세웠으며, 일편一遍은 시중時衆교단을 이끌었다. 말기에는 니치렌[일련日蓮, 1222~1282]이 일련종日蓮宗을 세우는 등, 불교교학이 다양화가 이루어진다. 새로운 교단이 만들어지고 새로운 종파불교를 불교계의 주류를 형성하게 됐다.
묘에[명혜明惠, 1173~1232]나 영서榮西, 도원道元은 석가신앙에 입각했던 선종 계통의 둔세승遁世僧들이었다. 천황이나 국가의 양재기복禳災祈福에 머물러 있던 당시 관승들은 이를 벗어나고자 초기 관승교단에 몸담았다가 재출가再出家한 스님들이 대부분이었다. 이들이 둔세승들로 후에는 수행과 전법을 위해 처음부터 관승에 소속되지 않은 승려도 생기는데, 후기에 등장하는 일편一遍의 경우에는 아예 처음부터 ‘둔세승 교단’으로 출가하였다. 관승은 백의白衣를 입었고, 둔세승들은 흑의黑衣를 입었다.
둔세승의 선구가 된 인물이 법연法然이었다. 법연은 9세 때 아버지가 죽자, 아버지의 유언에 따라 불도로 귀의, 승려였던 외삼촌 밑에서 자라다 15세가 되자 천태종의 총본산인 연력사로 입산하게 된다. 당시 일본 천태종은 중국 천태종에 밀교密敎, 선禪, 계戒 등이 혼합된 종합불교 성격의 사종상승四種相承의 천태밀교로, 후대에는 염불의 정토신앙을 포함하여, 거의 모든 불교를 종합하고자 하였다.
당시 법연은 최징이 세운 천태종 가르침에 만족하지 못하고, 당시 민중에게 적합하고 유효한 하나 만을 선택해 집중적으로 전수專修하고자 하였다. 오직 ‘나무아미타불’을 부르는 전수염불專修念佛이 그것으로, 염불법이 가장 쉬운 길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이로서 그는 중세 신불교, 그 시대의 서막을 열었고 정토종의 개조가 된다.
법연의 제자 친란親鸞은 정토진종을 세우는데, 전국시대에는 자치조직인 잇코 잇키[一向一揆]를 조직 오다 노부나가와 싸우기도 하고, 그때까지 금기시 되었던 육식과 결혼을 허가하기도 하였다. 시종時宗은 일편一遍을 개조로 하는 종파로 춤추면서 염불하기[오도리넨부쓰おどりねんぶつ, 踊り念仏]가 특징이다. 시종(時宗)이라는 종파 이름은 나중에 붙여지는 것이고, 일편 당시에는 시중時衆이라고 불렸다. 비예산에서 배운 료닌[良忍, 1072~1132]을 개조로 하는 융통염불종融通念仏宗은 정토교와 밀교의 특징을 한데 섞은 것 같은 교리가 특징이다.
중세 신불교를 흔히 불법승 삼보의 분화라고 본다. 실제로 종교 의 구성 원리이기도 한 삼보는 어느 한쪽 면만을 강조할 수는 없다. 그렇지만 핵심 되는 입장에서 보면, 신불교의 분화에 대한 설명이 가능하다. 불보는 정토종을 비롯한 신란(親鸞, 1173~1262)의 정토 진종(淨土眞宗), 잇펜(一遍, 1239~1289)의 시종(時宗)이다. 정토계 경전에 의거한 아미타불을 신앙의 대상으로 모시는 종파다. 법보는 니치렌(日蓮, 1222~1282)의 일련종으로 볼 수 있다. 니치렌은 ‘나무 묘법연화경’을 외는 제목(題目), 《법화경》의 적문(迹門)과 본문(本門) 가운데 후자에 기반한 본문 만다라, 그리고 계단(戒壇)을 3대 비법으로 삼았다. 승보는 에사이(榮西, 1141~1215)의 임제종, 도겐 (道元, 1200~1253)의 조동종이다. 이들은 수행 본위의 선종을 확립 함으로써 말법 시대를 극복하고자 했다. 특히 도겐의 지관타좌(只 管打坐)는 오매일여의 수행으로써 목전의 불성 현현을 목표로 삼은 것이다. 철두철미한 본각에 의거한 수행론이다. (원영상, 일본불교, 토착화로 민중 속에 뿌리내리다 / 불교평론 입력 2023.10.31 05:16)
가마쿠라 불교의 최후를 장식한 것은 니치렌종[日蓮宗]이었다. 매우 투쟁적인 승려니치렌은 처음 진언밀교眞言密敎를 배우고 이어 천태天台를 배운 뒤『법화경』의 진리를 깨닫고 일련종日蓮宗을 개창하였다. 일련은 어부의 아들로 태어나 열두 살 무렵 고향의 세이쵸지[淸澄寺]로 출가하였다. 일련도 가마쿠라, 교토, 비예산 등에서 수학하여, 밀교, 천태종, 선종, 염불종 등 다양한 종파를 연구하였고, 깨달음을 통해 분파된 불교 종파들을 하나로 통합할 수 있는 궁극적인 가르침을 얻고자 노력하였다. 오랜 수행 끝에 그는『법화경』이전에 설해진 모든 경전은 석가모니의 깨달음을 전하지 못한다고 부정하면서, “남묘호렌겟쿄[남무묘법연화경南無妙法蓮華經]”을 부르는 것만으로도 성불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마츠오 겐지松尾剛次 지음, 김호성金浩星 옮김,『인물로 보는 일본 불교사』 p. 111.)
가마쿠라 시대 후기 당시 일본은 내란과 더불어 몽고 내습, 기아와 역병 등 다양한 위협에 민중들은 도탄에 빠져 있었다. 이에 승려 일련은『입정안국론立正安国論』을 지어 막부의 실권자 호조 도키요리[北条時頼]에게 보내는데, 내용이 문제였다. 그는 다른 종파들을 없애고 자신의 교리를 국교로 받아들일 것을 일방적으로 주장한 것이었다. 이는 기성 불교계를 자극하는 일이었고, 한편으로는 막부의 정책에 대한 반기를 드는 일이었다. 이를 기화로 막부는 1272년 9월 일련을 체포하여, 사형 선고를 내리고, 참수하기 위해 가마쿠라 타츠노구치[龍ノ口]로 끌고 간다.
일설에 의하면 일련을 감옥에서 끌고 나와 참수하려는 순간, 에노시마 섬 쪽에서 보름달 같은 빛이 날아와 망나니의 눈이 멀고, 공포에 질려 쓰러지면서, 참수형이 중단되었다고 한다. 기록에는 실재로 1271년 니치렌은 체포되어 사형 선고를 받았으나, 마지막 순간 감형되어 사도 섬에 유배된 걸로 되어 있다. 믿기 어려운 부분도 있지만 어쨌든 그 형장刑場 터에 세워진 절이 바로 가마쿠라 류코지[용구사龍口寺]다. 절에는 일련이 잡혀와 갇혀 있었다는 지하 감옥이 아직 남아있다. (문명기행, 가마쿠라 에노시마 [江の島] & 류코지 [용구사龍口寺] 편 참조)
그의 독특한 주장과 타협할 줄 모르는 성격으로 인해 한때 막부幕府의 박해를 받아 유배를 당하기도 하였으나, 간결한 교의와 일본의 신神들을 불교의 수호신으로 존중하는 등, 민족주의적인 색채로 인해 가장 일본적인 불교종파로 발전하였다. 소카갓카이[창가학회創價學會] 등 전후 일본에 출현한 신흥 종교들은 대부분 일련종 내지 법화신앙 계통에서 파생한 것들이다. 결론적으로 일본의 불교의 특징은 모두 가마쿠라 시대 이후 출현한 신불교 교단에서 유래되었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이 시기에 가장 주목할 것은 선불교가 중국으로부터 유입되어 새로운 바람을 일으킨다는 것이다. 일본 중세에는 선불교와 함께 다도茶道, 서도書道, 하이쿠[배구俳句] 등이 유행하였는데, 선불교는 일본 문화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며 가마쿠라와 무로마치 시대를 통하여 급성장하였다. 정토교의 성행과 더불어 선종 또한 번창하여 일본 불교의 주류를 차지하는데, 이들이 가마쿠라 신불교의 성립을 가져온다. 오늘날에도 천태종과 진언종을 누르고 일본 불교의 대종을 이루고 있다. 선종에 대해서는 다음 <일본 선종사>에서 자세히 다루려고 한다.
일본의 임제선은 이입된 당초부터, 송의 간화선의 계통을 이었기 때문에, 그 문화성이 대단히 높아, 가마쿠라나 무로마치의 무사계급에 크게 환영받았다. 그와 동시에, 원구(元寇)의 일본 침략이라는 국난에 직면해있던 가마쿠라막부의 쇼군들은, 엄격한 좌선수행에 의해 담력을 단련하고, 깨달음에 의해 망상을 불식하며, 무심(無心)하며 자유로운 삶의 방식을 취함으로써 ‘임제 쇼군’이라고 평가되는 강한 임제선을 스스로 실천했던 것이다. (니시무라 에신(西村惠信), 일본 하나조노대학 명예교수, 선문화연구소소장「일본 간화선의 전통과 변용(日本看話禪伝統と変容)」)
혼란에 빠진 민중을 구하고자 선택한 것이 정토종의 염불수행, 선종의 선 등이었지만, 문제는 염불 하나만을 선택하면 다른 모든 수행법은 배제되어 버린다는 점이다. 수행자의 입장에서는 염불 수행이 참선을 도울 수도 있고, 참선이 염불을 도울 수도 있는데, 그 선택권이 사라져 버린다는 것이다. 이는 필연적으로 종합불교에서 종파불교의 방향으로 나아가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본의 아니게 통불교로 불리는 한국불교처럼 필요에 따른 다이내믹한 융합적融合的 겸수兼修 수행이 어려워진다는 것이다. 더욱이 각기 종파들은 자기종파 절대주의에 빠져, 새로운 미래를 개척해 나가기 위해 필요한 융합, 퓨전을 할 수 없게 되었다. 종파의 순수성을 지킬 수는 있었지만, 관습에 젖어 새로운 길을 찾는데 소홀할 수밖에 없는 구조로 고착화 된다.
중세만 하더라도 종파와 종파는 서로 넘나들며 하나의 불교적 회통성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본말사제도는 일차적으로 종파성을 분명하게 하지 않으면 안 되는 구조다. 덕분에 근세에 각 종단은 종학을 구현하는 데에 힘을 얻게 되었다. 그러나 이 이면에는 본사 중심의 운영을 통한 정치경제적 차원의 규제 기능이 숨어 있었다. 1632년 막부에 의한 본말장(本末帳)이 작성되었으며, 이에 기반한 막부 차원의 종무행정을 위해 1635년에는 종교행정을 위한 기관인 사사부교(寺社奉行)를 설치했다. 이로써 종교에 대한 국가의 관리 가 일차적으로 확립되었다. 국가는 결국 종교를 자신의 계급 아래 둠으로써 민심을 통제, 이용하는 데에 효과를 거두기도 한다. 동서고금에서 이러한 예는 수없이 발견된다. 종교법인을 통해 국가가 종교를 승인하는 현대사회에서도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다. 결국 국가의 전횡에 대한 비판적 시각은 거세된다. (원영상, 일본불교, 토착화로 민중 속에 뿌리내리다 / 불교평론 입력 2023.10.31 05:16)
3) 가마쿠라鎌倉
가마쿠라는 일본 혼슈[本州] 가나가와 현[神奈川縣]에 있는 도시다. 원래 조그만 어촌 마을이었으나, 1180년 미나모토 씨[源氏]의 근거지가 되면서 발전하기 시작하였다. 가마쿠라 막부가 설치되어 300여 년 동안 일본 제2의 수도라는 정치적 지위를 누렸다. 끊임없는 내전, 해일, 화재 등으로 인해 쇠퇴하기도 하였지만 에도 막부시대 궁궐과 절, 귀족저택들이 건설되면서 관광 중심지가 되었다.
유적으로는 청동제의 국보인 가마쿠라 대불[鎌倉大佛]을 비롯해 겐초지[建長寺], 엔가쿠지[円覺寺], 등 수많은 절이 있다. 가마쿠라 쓰루가오카하치만궁은 11세기에 건립된 신사이며, 1828년에 전통적인 에도 건축 양식으로 재건되었다. 유이가하마와 시치리가하마 해변도 관광지로 알려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