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회 사이펀 하빈기 신인상 당선|석상진
흰빛 외 7편
배경을 남겨 두면 흰빛이 되는 걸까
몸 위를 기어 다니는 무음들
가렵지는 않고 어딘가 자꾸만 미끄러지는
없어야 할 것이 있는 것보다
있어야 할 것이 없는 상태가 더 위험천만하다고 말했다
반전의 반전은 전쟁이 아니다
그는 가끔은 자신의 몸에서 떨어져 나와
자기를 내려다본다고 고백했다
‘즐겁게 춤을 추다가 그대로 멈춰라!’
아이들과 함께 춤을 추던 선생님들은
그것이 무서운 주문인 것을 알았을까
경험은 찢기고 나뉘고 분류되고 배분된다
그래서 나는 이상하다는 말이 줄곧 이상하지가 않았다
처음 본 네가 나의 꿈이 뭐냐고 물었을 때도
그런 종류의 순수한 의심이 부러웠다
그가 갑자기 말을 멈추었는데
내가 몰래 녹음 버튼을 누르고 있단 걸 몰라서 다행이었다
‘당신은 너무 양가적인 것으로 보입니다’
그가 내가 한 말을 그대로 흉내 내었다
이번에는 내 차례였다
두통 때문에 오늘은 일찍 잠에 든다
난 너의 몇 번째 사람이었니
사람들이 사랑하는 건 알코올 도수일까 희석된 투명함일까
슬쩍 끼워 넣은 중간광고 때문에 빼앗긴 채널
난 꿈을 꿀 때도
눈을 깜빡거린다
--------------------------------------
그만이라고 할 때까지
나는 장작이 더렵혀질까 봐
그게 더 싫었다
풍등은 저절로 불이 꺼지거나
어느 집 지붕에 옮겨붙어 불태우거나
사람들은 가끔은 오래전 헤어진 이의 통장 잔고를 궁금해한다
난 오히려 부드러운 안심을 씹을 때마다 턱이 시큰해졌어
혀가 없다 생각하고 약을 꿀.꺽. 삼켜 봐
젊은 엄마가 아이에게 약 먹는 걸 가르친다
아이는 입 안에서 알약 하나가 사라지지 않는 게 신기할 뿐이다
갈색, 갈변현상, 갈색 변 그리고……
당신에게 필요한 건 신선한 후각입니다
생각보다 더럽진 않아요
하지만 대체로 가만히가 필요합니다
색깔을 상상해보세요
내 얼굴이 사다리꼴 모양으로 마주한 표정과
겹치는 걸 안 순간 비로소 안심을 한다
먹을 수가 없기 때문에,
그래서 그들에게는 도무지 꽃이 안 팔리는 이유
불씨가 소수이고 소인수이고 최소공배수이고 교집합이야
아이 엄마는 진짜 철학자였다
당신도 장작더미를 미리 또는 이미 벌써
쌓아 말려두어야 한다는 걸 모르지는 않았을 테지
당신이 숨긴 벽난로 속 그을음이 바로 그 증거야
아차! 했다
사람들은 기차가 오기 전 서둘러
자신들의 미필적 고의에 불을 당겼다
그래요, 여기까지만 할게요
------------------------------------------
월요일 같은 금요일
유난히 눈썹이 잘 그려지지 않는 날이 있다고 말했다
방금 전까지 당신의 옆모습이 세로로 앉아 있었다
어젯밤에 본 영화의 주제곡이 흐르고
당신은 지우개로 거울을 문지른다
꼭짓점보다는 모서리가 먼저이지 않을까?
빛나는 한 점 유리알 같은
고민에 빠져들 무렵
저 멀리 수평선이 지금은 도태되고 없는 기적을 반추하듯
세상을 가로 긋는다
영화 속 남자 주인공의 뒷그림자가
이른 아침의 해시계 바늘처럼
마지막 장면으로 그의 틈새가 넘어지고 말았다*
당신의 립스틱 색깔같이 새빨갛게 번지다가
페이드아웃 되었다
나도 바다에 가본 지 한참이 지났다
나는 면봉을 사다가 놓아본 적 없는데
당신의 화장대 위에는 치우지 않는 여백이 늘 자리하고 있다
당신은 왜 다들 눈썹 문신을 새기는지 알겠다는
새하얀 혼잣말을 한다
짧은 내 코를 비틀어 움켜쥐고 제자리 돌기를 해본 지도 이미 오래되었다
궤도를 뛰쳐나온 소행성 하나가 소스라치게 스쳐지나갈 때
멸종에 뒤이은 멸망의 확률을 읽고 난 뒤부터였다
그 순간 나의 편리한 건망증이 잉태되었다
방 안에는 걸린 달력이 없다
당신이 잠시 비워진 사이
그 페이지를 갈무리하는 책갈피처럼
내 얼굴의 미간과 양쪽 끝을 거울에 비춰보았다
(*영화 ‘노킹 온 헤븐스 도어’(Knockin' On Heaven's Door, 1997)에서)
-------------------------------------------------
일지
오늘은 자갈 하나를 그 아래로 떨어뜨려 보았다 툭 하고 새가 뭉툭해졌다 다음번엔 노끈에 질끈 매달아서 던져보아야겠다
뭉툭해진 새에겐 미안한 일이지만 새의 부리로 작살을 만들었다 벼리지 않아도 구름을 두 조각으로 갈라놓았다 아직은 잔챙이였다 아, 아닌가 한 입에 쏙 들어가고도 남을 허기의 중심을 꿰뚫은 난 타고난 사냥꾼인가
도대체가 엉망이다 빙하는 벌써 녹았고 샘물은 쉬어버렸고 난쟁이나무들은 찔려서 따갑도록 옆으로만 무성했다 동굴 입구에 걸려 있는 오래된 유골의 그림자가 되살아나 마치 나인 것처럼 내게 말을 걸었다 한참 동안 그의 이야기를 들어주느라 시달렸다 이젠 그곳에 가지 말아야지
불을 피울 때마다 물구나무서지 않아도 된다 그건 다행이었다 아직 헬멧을 벗어본 적은 없다 암모니아가 충분치 않았다면 아마도 난 매일 잠에서 깨어나지 못했을 것이다 잠잘 때는 땅 속 검은 흙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쓴다 빌어먹을 지독한 재채기에 나의 두 발은 증발되었다가 다음날 재생된다 뿌리의 냉기가 식혀주었다
오늘은 배터리를 고치는 데 시간을 보냈다 닳을 염려는 없지만 가끔은 먹통이 된다 무익했지만 내가 살던 곳에서는 헛된 일일수록 높은 보수를 받았다 그것만큼은 난 권위자였다
구원받기까지 이곳의 유일한 낙은 난파된 빈 유리병을 찾을 때이다 딱 그만큼만 이처럼 나의 날숨을 내뿜는 것이 허락된다 불만이었지만 그 또한 나와 함께 선고되었다 뚜껑을 닫지 않아도 누설될 염려는 없다 그 끝이 뭉툭해지도록 잘 묶었다
--------------------------------------------------------
실루엣
나의 혀 위에 네가 피었다 둥글고도 기다랗게 내 옆에 네가 누워 있다 얇다, 그러나 껍질이 아니다 내가 껍질이고만 싶다 네가 껍질이길 원치 않는다 숨소리에 복숭아뼈가 없다 이건 무릇 네 언어다
구름이 쉬어가는 언덕에 내가 있다 눈을 감아도 아무것도 휩쓸리지 않았다 휩쓸리지 않아 광활하였다 연못이 있었고 흐르지가 않았다 흐르지 않았으나 불쑥 솟아난 연못이었다 그 안에 초원이 담겨 있다 초원이 담겨 있어 연못은 멈추어 있지 않았다 지금 이 순간 나를 스쳐간 구름이 바로 그곳에서 일었다 그리하여 아래에서 위로 흘러가는 초원에서는 뒤돌아보지 않아도 쉽게 넘어지지 않았다 그 발걸음이 모여서 저 멀리 녹지 않는 눈 쌓인 산이 되었다
네 살갗은 청각이다 네 숨을 기어이 확인하고 싶었다 그래야만 오직 내 숨이 살아서 숨 쉴 것 같았다
새 지저귐 소리는 도끼 소리였다 나는 그 소리로 집을 지었다 네 의자를 만들었다 그 옆에 내가 누웠다 네 의자의 삐걱거리는 소리가 나에게 닿았고 나는 창문이 엎질러질까 어루만져 주었다 너는 바람에 네 머릿결을 빗었다 나는 간지러웠지만 뒤돌아 눕지 않았다 나는 잊지 않을 것이다
나는 새벽안개를 걷어내고 싶지 않다 여느 아침보다 연하다, 그리고 진하다 이것이 곧 짙은 것이다 빈틈을 가진 온갖 닫힌 것들은 늘 열려 있다 그것이 내가 나를 열게 만들었다 나는 나를 걸치듯 너를 입는다
--------------------------------------------------------
핑크 솔트
1
우리가 나누었던 최초의 대화를 기억하는지 썰물처럼 빠져나간 늦여름의 바닷가와 그 시간의 골목길을 좋아한다 우리는 누군가에게 등을 기대고 싶을 때 앉을 곳을 찾아 두리번거리는 것이 아닌지 모든 정지한 것조차도 그것을 향해 방아쇠를 당기는 것은 이미 늦다 지구는 늘 자전 중이니까 서로에게 흔쾌히 용서가 될 만큼의 뻔뻔함에 대해 우린 자주 묻곤 했었지 다리를 몇 개쯤 잃어도 사막의 풍뎅이는 서쪽을 향해 날개를 펼쳤어
2
사막 한가운데서 우연히 옛 바다가 가졌던 바닥의 흔적을 찾았을 때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까 상사화가 질 때 비가 내리면 그곳은 온통 분홍빛으로 번지겠네 그 천을 떼어다가 멀리 지나치는 항해선을 향해 흔들 깃발 같은 손수건을 만들어 뒷주머니에 항상 넣어 다녀야지 차르르 차가운 바닥으로 쏟아져 내렸지만 끊어진 건 결정이 아니었네 다만 긁히거나 부서질 뿐 가끔은 태워지기도 해 지금에 와서 깨닫지만 그 꽃은 꼭 너를 향한 전부가 아니었던 것 같아
3
넌 그을려 건강해진 모습으로 날 찾아와 나의 새하얀 컵받침을 향해 웃었지 오직 비웃음인 것만은 아니란 걸 알기에 또한 믿기에 내가 보았던 너의 첫 눈짓이 그제야 기억이 났다 정제되지 않을수록 커다란 결정이었지 저 멀리 망원경으로 발견한 우주를 공전하는 한 행성의 전부가 하나의 다이아몬드이었다는 말이 언젠가는 증명되길 빌어줄래 그것이 오늘을 사는 나를 위해 오래전부터 준비해둔 네 눈물방울이기를
4
혀 위에 올려놓아 그 색깔로 나를 물들일 수 있다면
------------------------------------------------
배경
한겨울 당신은 선풍기를 꺼낸다 이유를 묻는 나에게 난 이제 여행을 가는 거야라고 대답한다 선풍기가 여행인 거야? 나는 웃으며 농담했다 액자를 떼어내는 게 여행이야 쌓인 먼지를 털어내고 거기에 더 오래된 먼지를 담는 거야 그리고 다시 액자를 제자리에 붙여 그럴 거면 왜 떠나는데 떠나려고 떠나는 거야 떠날 수 있는지를 보려고 그녀는 아직 웃지 않고 있었다 그럼 역시 먼지 때문인 거니 나는 지지 않으려 했다 꿈 때문인 거지 낯선 꿈을 꾸려고 꿈은 날마다 낯설어 그건 다른 얘기지 창문이 똑같잖아 난 낯선 창문을 말하는 거야 나는 초조해졌다 그럼 낯선 나를 보려는 거니 그제야 나를 슬쩍 쳐다보았다 틀린 말은 아니지만 전부는 아니야 낯설다가 도저히 낯설어지지 않는 나를 보고 안심하고 싶은 거지 나는 터널 속 희망을 보았다 아직 아물지 않은 먼지가 문제였구나 이번에는 조금 더 오래 내게 머물렀다 그건 액자 때문이야 사람들은 벽을 보는 게 아니라 액자부터 보거든 그래서 낯선 창문이 필요했구나 그러자 나를 바라보지 않고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 끄덕임이 나를 향한 것이 아님을 알았다 바보, 떠날 수 있는지를 알면 떠날 필요가 없지 드디어 그녀가 웃었다 어쨌든 그녀가 웃었다 소리 나지 않게 꿀꺽 마른침을 삼키며 안심했다 나는 그녀의 손에서 물걸레를 얼른 뺏어 들었다
--------------------------------------------------
손
그 언제부터 나뭇가지가 혀가 되었을까
순서는 상관이 없어
난 유리창과 각막에 대해 얘기하고 있는 거니까
처음엔 꼭 한 걸음 물러서야 해요
먹이 냄새보다 당신의 그림자가 덮칠까 봐
자신의 탯줄 크기를 가늠하는 중이니까
아마 그때부터 시작이었을 거야
최초의 기억이 채집되기 시작한 것은
이번에도 먹이하고는 아무 상관이 없었어
흐릿하지만 아주 흐린 날은 아니었어
그건 내가 아닌 순간의 기억이기도 했어
이상하지
그러다가 아주 가버리면 섭섭할 것 같아
미안해
하지만 그걸 말할 수 있는 단어는
이 세상에는 없는 거야
아기 고양이가 너무 세게 깨물면
엄마 고양이가 똑같은 방법으로
미리 슬픔과 고독의 차이를 가르쳐 준대
배꼽을 자기 혀로 핥을 수 있게
난 고양이가 아니거든요,
라는 말로 대답할 수밖에 없었어
그러니까 난 지금
앞발과 손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 거야
왜, 그럴까
한 손엔 먹이를 쥐고는
항상 반대편 손에 먼저 내 앞발을 얹어 달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