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스 개관
안동에서는 여러 갈래로 길이 뻗어 있다. 북쪽으로는 영주와 봉화, 동북으로는 도산을 거쳐 청량산에 이르고, 서쪽으로는 풍산을 거쳐 예천에 이른다. 남쪽으로는 일직을 거쳐 의성, 동남으로는 길안을 거쳐 청송에 이르며, 동쪽으로는 임동을 거쳐 진보·영양에 이른다. 이렇듯 경북 북부지방의 모든 고장이 안동과 통한다고 할 만큼 안동은 이 지방의 중심지이다.
안동의 옛이름으로 ‘영가’(永嘉)가 있다. 영(永)이 ‘이수’(二水)의 합자로서 두 물이 만난다는 뜻이고 ‘가’(嘉)는 아름답다는 뜻이니, 곧 ‘두 물이 만나는 아름다운 고장’이라는 말이다. 이 말은 낙동강 본류와 반변천이 합류하는 지점에 자리잡은 안동의 지세를 잘 표현해준다. 태백산에서 발원하여 봉화 청량산을 감고 흘러내려온 낙동강이 안동댐에서 일단 발길을 늦춰 숨을 고르고, 영양과 청송에서 모여 내려온 물줄기는 임하댐에 모이는데, 안동 시내에 이르러 이 두 물줄기가 합쳐져서 저 남해까지의 길고 긴 여정을 시작하는 것이다.
낙동강 본류의 출발지로서 안동은 주변에 높은 산이 많지 않다. 옛부터 사람이 살기에 알맞은 지역이어서 청동기시대의 흔적부터 찾아볼 수 있고, 소국이 일찍부터 형성되었던 듯하며, 변진 24국 가운데 기저국 또는 불사국이 이곳에 있었다고 알려져 있다. 삼국시대 때의 고분도 많이 발견된다.
통일신라시대에는 고창군으로 불렸는데, 당시의 불교 유적이 곳곳에 남아 있다. 특히 안동은 다른 고장과는 달리 통일신라시대에 전탑이 많이 세워져서 ‘전탑의 고장’으로 불린다. 법흥사가 있던 법흥동, 법림사가 있던 운흥동 등 시내에 전탑이 비교적 잘 남아 있다. 또 평화동에는 이 일대에서 드문 화강암 삼층석탑도 있다. 이런 불교세는 고려시대에도 지방 불교가 더욱 발전하게 되는 바탕이 되어, 안기동에는 ‘제비원 석불’이라고 불리는 거대한 마애불이 조각되어 안동의 상징이 되어 있다.
안동이 역사 기록에 본격적으로 등장하는 때는 후삼국시대이다. 왕건을 도와 견훤군을 격파하였던 이 지역의 토호 김선평·장정필·권행은 삼태사로 존숭받게 되었고 현재 안동 시내에 태사묘가 있다. 이후 안동은 중앙 권력과 밀착된 지역으로 자리잡았는데, 고려 전기에는 지방 행정의 중심지로서 전국에서도 아주 중요한 곳이 되었으며, 경상도지역에서 일어난 민란을 진압하는 토벌에 적극 참여함으로써 대도호부가 되었다. 고려 말에는 홍건적의 난을 피해 공민왕이 이곳으로 올 만큼 지역의 신뢰도가 높았다. 안동 시청 별관 입구에는 공민왕이 썼다는 친필 현판 ‘安東雄府’가 아직까지 옛 안동의 위용을 뽐내고 있다. 홍건적을 막는 것을 놀이화한 차전놀이와 공민왕의 왕비인 노국공주가 물을 건너지 못하자 부녀자들이 엎드려 건네주었다는 데서 유래한 놋다리밟기 등이 민속놀이로 전승되고 있다.
조선시대에도 지방 행정의 중심지로서 안동부에는 성곽이 있었다. 높이가 약 2.4m가 되는 성곽이 893m에 이르는 길이로 둘러쳐져 있었고 사방에는 대문이 있었다. 그러나 지금 그 성곽들의 흔적은 찾아보기 어렵다. 성곽의 문에서 사방으로 동·서·남·북로가 나 있었고, 서문에서 1㎞ 지점에 안기역이 있어 인근 역들을 총괄하기도 했다.
뭐니뭐니 해도 안동은 공자와 맹자의 고향이라는 추로지향(鄒魯之鄕) 곧 ‘양반의 고장’으로 불린다. 그것은 조선시대에 들어와서 안동이 사림의 고장으로 자리잡았고, 그 전통이 아직도 면면히 이어져오고 있기 때문이다. 고려시대 이래 안동은 살기 좋은 곳으로 여겨져 중소 지주층이 이주해오는 수가 많았는데, 그들을 비롯해서 향리로 자리잡았던 이들이 신흥사대부로 성장하면서 안동의 중심 사족을 형성했다. 이런 사족들의 바탕이 된 것이 조선 중기 이래 형성된 동족마을이다. 안동의 대표적인 동족마을인 하회마을도 그런 내력을 지니고 있다. 임진왜란 때 영의정으로 널리 알려진 서애 류성룡을 배출한 풍산의 하회는 깊은 내력과 함께 마을의 풍광도 잘 보존되어 있어 민속마을로 지정되었다. 그 옆의 수려한 강과 산에 둘러싸인 병산서원은 많은 영남 선비들을 길러냈다.
사상과 학문의 고장이니만큼 시대 조류에 민감한 모습도 있었다. 1923년에는 권오설, 이용만, 이회승 등이 중심이 되어 소작인의 권익옹호를 목적으로 안동 풍산소작인회를 결성하였다. 특히 권오설은 안동의 명문인 안동 권씨로서 이 소작인회는 소작인뿐 아니라 지식인, 자작농, 중소 지주까지 참여한 폭넓은 것이었다. 소작인회의 주요 목표가 소작료의 감하와 소작권 안정이지만, 한편으로는 여전히 지배적인 봉건적 신분질서를 혁파하려는 향촌사회 변혁운동이기도 했다. 이는 봉건질서가 굳건한 곳이기에 일어날 만한 일이기도 하지만, 또한 안동 지식인과 일반 민중들이 전통적인 질서에 매몰되지 않고 새로운 사회 건설에 앞장섰던 측면이기도 하다.
이런 안동이기에 안동사람들은 문화적 자부심이 대단하다. 그 자부심은 ‘안동은 경주보다 지정된 문화재가 넷 더 많다’는 말에서도 드러난다. 그러나 한편으로 현대에 와서도 전통문화가 고스란히 이어져 내려왔다는 것은 그만큼 변화에 대해 보수적으로 대처했다는 뜻이기도 하다.
전통을 간직함은 양반문화뿐 아니라 민속문화 분야에서도 이루어졌다. 하회마을에서는 고려 때부터 전해 내려온 하회탈춤이 어렵게나마 전승되고 있다. 양반 사대부가뿐 아니라 평민들의 초가도 내력이 오랜 것이 많은데, 그중 몇이 안동댐 건설로 수몰 위기에 놓이자 안동댐 기슭으로 옮겨져 보존되고 있다. 이 집들이 모여 있는 ‘민속경관지’에서는 전통적인 안동 음식들도 맛볼 수 있으니 전통공간의 체험과 식문화의 체험을 동시에 누릴 수 있다. 또 근처에 안동민속박물관이 있어 안동의 민속문화를 한눈에 살펴보기에도 좋다.
하회와 안동 시내 지도 경북 북부의 중심도시인 안동은 교통이 매우 발달되어 있다. 대구에서 안동까지는 중앙고속도로가 나 있으며 예천 방면에서 이어지는 34번 국도는 안동 시내를 지나 영덕으로 뻗어 있다. 봉화에서 내려온 5번 국도 역시 안동 시내를 지나 의성·대구로 연결되며 영천 방면에서 올라온 35번 국도 또한 안동 시내를 관통해 봉화·태백으로 이어진다. 그밖에 여러 지방도로와 시도로가 영주·예천·의성·청송·영양·봉화 등으로 나 있어 경북 북부의 교통 요충지임에 손색이 없다. 안동으로는 서울을 비롯하여 부산·대전·태백·울산·대구·김천·봉화·영덕·영양·영주·예천·영천·청송·포항 등지에서 고속버스와 직행버스가 다니며, 영주에서 영천으로 이어지는 중앙선 열차도 안동을 지나간다. 안동 시내와 풍산 그리고 하회마을 주변에는 숙식할 곳이 많이 있으나 그밖의 지역은 드문 편이다. 이 책에서는 예천 방면에서 34번 국도를 따라 하회와 풍산 지역을 돌아본 후 안동 시내에 있는 문화유적을 살펴보는 동선으로 꾸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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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조어
- 하회마을, 병산서원, 삼구정, 예안 이씨 종택, 옥동 삼층석탑, 제비원 석불, 태사묘, 동부동 오층전탑과 운흥동 당간지주, 신세동 칠층전탑, 임청각, 안동민속촌과 민속박물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