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모는 아이 / 박복자
1) 동이 틀 무렵 내 키보다 서너 배나 큰 소를 몰고 산으로 향했다. 소가 선잠을 깬 듯 멀뚱멀뚱한 눈 속에 부스스한 내 모습이 있었다. 등을 긁어 주고 쓰다듬어 주었더니, 꼬리를 살래살래 흔들었다. 푸른 논 들 사이로 불어오는 바람이 풀 냄새를 안고 볼을 스치며 지나갔다. 저수지에는 물안개가 피어오르고 수양버들이 춤을 추었다. 새들도 푸드덕 잠을 깨는 새벽, 이랴! 걸음을 재촉했다.
2) 마을 뒷길을 지나 산길로 접어들 때쯤, 초가집 두 집이 개울을 사이에 두고 정답게 눈에 들어왔다. 감나무밭이 있고, 그 옆으로 넓은 잔디밭이 있어 언제 보아도 정겨웠다. 동네 소들이 다 모이면 의논해서 정해진 골짜기에 두었다. 마치 초록색 물감을 풀어 놓은 듯한 산은 소에게 풍요로운 먹이터며 놀이터였다. 소들은 한가롭게 풀을 뜯고, 아이들의 머리 위로 장끼가 날아오르고, 다람쥐가 나무를 타고, 산토끼가 풀숲을 뛰어다녔다.
3] 농업이 주업이던 우리 집은 소를 사람만큼 귀하게 여겼다. 소가 농가의 힘든 일을 도와주었고, 솟값이 비싸서 재산으로도 큰 구실을 했기 때문이었다. 소는 논과 밭을 갈고 땔감을 나르기도 하고 수레를 끌며 사람과 짐을 옮겨 주었다. 송아지를 낳아 재산을 불어나게도 했다. 아버지께서는 바쁜 일손을 틈타 외양간을 치우고 깔짚을 깔아주고 쇠죽을 끓이는 일을 했다. 농촌에서는 어른들은 논밭에서 일하느라 항상 바빴다. 여름에 풀을 뜯기고 꼴을 베어다 저녁 내내 먹거리를 준비하고 가축을 돌보는 일에 나도 손을 보탰다.
4) 소는 봄에 모내기하기 전 무논을 갈고 써레질하면서 아무리 힘들어도 불평하지 않았다. 나도 모내기를 돕느라 논에 들어가서 걸으니 힘겨웠다. 소가 일하는 모습을 보고 내가 하는 일은 소가 일하는 것에 비교하면 아무것도 아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5) 이른 봄 소에게 주려고 쑥 뿌리를 캐다가 힘에 겨워 뒤로 벌렁 넘어진 일이 있었다. 엉덩이가 아파 눈물이 찔끔 났다. 호미로 캔 꼴을 소쿠리에 담아 흐르는 개울 물에 넣어 흙을 씻었다. 손이 빨갛게 되었다. 여름에는 낫을 가지고 망태기를 메고 풀을 베러 갔다. 잘못하여 손가락을 다쳐 피가 났다. 쑥을 돌로 찧어 붙이고 풀로 동여맸다. 다친 손가락을 꼭 쥐고 있는데 뱀이 지나가는 것을 보고 깜짝 놀라 뒤로 넘어질 뻔했다. 가을에는 콩잎을 따고 뽕잎도 따서 겨울 소먹이를 준비했다.
6) 넓은 자갈밭 응달에 돌로 아궁이를 만들었다. 마른 나뭇가지를 주워다 불을 지피고 제각기 가져온 감자와 고구마를 구워 먹고 허기진 배를 채웠다. 풋 밀을 베어다 불에 구워서 손바닥에 놓고 비벼서 먹었다. 발그레한 얼굴을 서로 마주 쳐다보며, 깔깔대는 웃음소리가 넓은 산천으로 퍼져나갔다. 여름이 되면 산에는 여러 가지 먹을거리가 많다. 머루, 다래등 산 열매를 따 먹었다. 그때 생각으로는 산머루가 요즘 포도 같았다. 소나무 가지로 미끄럼도 타고 이 산 저 산을 마치 산 토끼처럼 뛰어다녔다. 소를 몰러 다니면서 단련된 몸은 갱년기 전까지 감기 한번 앓은 적이 없다. 재주가 많은 언니 오빠 친구들도 있었다. 물구나무서기를 잘하는 사람, 몸을 둥글게 웅크리고 데굴데굴 구르고, 다리를 하늘로 향하여 춤을 추는 아이들에게 박수를 보냈다. 소몰이는 아이들의 묘기 대행진이 되기도 했다. 자치기, 공놀이, 구슬치기 고무줄놀이할 때는 나도 동참하여 같이했다. 해가 지고 소가 어디 있는지도 잠깐 잊어 버렸다.
7) 해가 뉘엿뉘엿 서산으로 기울면 영리한 소들은 산에서 내려왔다. 나머지 소들은 풀을 뜯어 먹느라 산에 남아 있는 수도 있었다. 먹이를 찾아 이쪽저쪽으로 다니다가 길을 잃어버려 더 멀리 가 버리는 소도 있었다. 한 마리라도 없어지면 다 같이 소를 찾아 나섰다. 어둠을 뚫고 이리저리 헤맬때 나무가지 사이로 고요히 달빛이 흐르고 있었다. 풀벌레들의 울음소리가 요란하고, 소는 보이지 않았다. 갑자기 무서워지기 시작할 때쯤, 묘 옆에 편안히 누워 있는 소를 발견하면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다.
8) 소가 송아지를 낳는 날이면 가족 모두가 분주했다. 할아버지, 할머니, 부모님, 동생들이 모여들었다. 암송아지일까? 수송아지일까? 긴장한 눈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나는 마음속으로 무사하기를 기도 했다. 분만이 되면 아버지와 어머니께서는 송아지를 면 보자기로 얼굴과 양수를 닦아주었다. 송아지는 태어나자마자 걸을 수 있다. 사람도 태어나면 바로 걸을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해보았다. 사람이 아기를 낳으면 부정을 타지 않도록 사립문에 금줄을 걸었다. 그런 금줄을 송아지가 태어나도 걸었다. 소는 우리 집 식구처럼 사람대접받았다.
9) 소의 성품은 느긋한 데 비해 성질은 온순하고 영리하다. 소는 힘든 일을 진득하게 잘 견디어 낸다. 내가 살면서 어려움에 부닥칠 때마다 소를 생각하며 신중히 일을 처리하는 습관이 생겼다. 옛 선인의 말씀에 “홍수가 나면 소를 타면 살고 말을 타면 죽는다.” 소는 물길에 순응하며 여유롭게 가고 말은 제 성질에 물길을 거슬러 가다 지쳐 빠져 죽는다고 한다.
나는 세상에 순응하며 살아가는 법을 소에게서 배웠다.
10) 문명이 발달하여 농촌에는 경운기와 트랙터. 콤바인이 들어왔다. 나의 어린 시절을 풍족하게 했던 튼튼한 일꾼으로서의 소가 들판에서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소와 함께 영육의 성장을 같이하며 꿈을 키웠던 친구들과 산천을 생각하며 잠시 추억에 잠겨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