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본문 : 에스라8장21~36절
제목 : 하나님의 응낙을 경험한 여행
에스라는 여행을 시작하기에 앞서 아하와 강가에서 금식을 선포하고 평탄한 길을 간구합니다.
예루살렘까지의 길은 머나먼 여정일 뿐만 아니라 도적들이 도사리고 있는 위험한 길입니다.
그러나 에스라는 철저하게 하나님의 도우심만 의지합니다.
에스라와 귀환 공동체는 하나님의 도움으로 약 4개월 동안의 여정을 마친 후, 무사히 예루살렘에 도착합니다.
그리고 보물을 제사장에게 넘기고 무사 귀환을 하나님께 감사하는 번제를 드립니다.
1. 하나님의 도움을 위한 간구(21~23절)
이 단락은 귀환자들의 소집을 마친 에스라가 예루살렘 여행을 준비하는 내용입니다.
1) 에스라는 여행을 시작하기에 앞서 아하와 강가에서 금식을 선포합니다(21절).
“[21] ○그 때에 내가 아하와 강 가에서 금식을 선포하고 우리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 겸비하여 우리와 우리 어린 아이와 모든 소유를 위하여 평탄한 길을 그에게 간구하였으니”
금식을 선포하고. – 구약 성경은 보통 '금식'을 '기도'와 함께 언급합니다(삼상 7:5,6 ; 대하 20:3-13 ; 에 4:16).
이것은 말할 나위도 없이 특별한 문제 혹은 위기의 극복을 위해 시행되곤 하였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 겸비하여. – 이것은 에스라 일행이 하나님께 기도 및 금식을 하면서 가졌던 영적 태도입니다.
한편, '스스로 겸비하여'(레히트아노트)는 '괴로움을 당하다' 혹은 '낮추다' 등의 의미가 있는 동사 '아나'의 재귀적 사역형입니다.
따라서 이것은 자신을 학대하듯이 적극적으로 낮추어서 어떤 인물 혹은 절대자에 대해서 지극히 순종적 자세를 견지하는 것을 가리킵니다(창16:9 ; 왕상 2:26 ; 시 107:17 ; 단 10:12).
평탄한 길(데레크 예솨라). - 문자적으로 '곧은 길'의 의미입니다(사40:3,4).
그러나 이것은 '안전한 길'이라는 의미로 이해되어야 할 것입니다.
고대에는 길을 지키고 있다가 약탈을 일삼는(31절) 무리들이 꽤 많았다고 합니다.
2) 에스라의 이러한 결단은 자신이 전에 아닥사스다 왕에게 했던 말을 입증합니다(22절).
“[22] 이는 우리가 전에 왕에게 아뢰기를 우리 하나님의 손은 자기를 찾는 모든 자에게 선을 베푸시고 자기를 배반하는 모든 자에게는 권능과 진노를 내리신다 하였으므로 길에서 적군을 막고 우리를 도울 보병과 마병을 왕에게 구하기를 부끄러워 하였음이라”
찾는 모든 자에게 선을 베푸시고 자기를 배반하는 모든 자에게는 권능과 진노를. – 이것은 성경의 주된 사상중의 하나입니다(대하 15:2 ; 롬 2:6-10).
길에서 적군을 막고 우리를 도울. – 많은 은금을 소유했고 또한 유약자들을 동반했던 에스라의 일행에게 있어 매복해 있을 도적 떼는 큰 위협일 수밖에 없었음을 잘 보여줍니다(21절).
보병과 마병을 왕에게 구하기를 부끄러워 하였음이라. – 에스라와 그 일행은 하나님께 간구하는 시간을 가지면서 예루살렘 여정을 하나님께 간구하는 시간을 가지면서 예루살렘 여정을 위한 영적 준비를 합니다.
에스라와 그 일행은 출발에 앞서 금식하면서 겸손히 하나님의 은혜(평탄한 길)를 간구합니다.
바벨론에서 예루살렘까지는 먼 여정일 뿐만 아니라 도적들의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길입니다.
그러나 에스라는 안전한 여행을 위해 왕에게 군대를 요청하지 않고 하나님의 도우심만 의지하기로 합니다.
에스라는 자신의 귀환이 전적으로 하나님의 뜻 가운데서 이루어진 것임을 확신하였으므로, 위험한 귀환 여정을 오직 하나님의 도우심만 의지하여 감행하고자 결단했습니다.
적어도 에스라에게 있어서는, 거룩한 목적을 지니고 귀환하면서 이방의 왕에게 의존한다는 것이 수치스럽게 여겨졌을 것입니다.
반면에 느헤미야의 경우는 바사 군대의 호위를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간주하고 기꺼이 수락하였습니다(느 2:7-9).
우리는 이 사실만으로써 에스라의 믿음이 느헤미야의 믿음보다 우월하다고 단정지어서는 안 됩니다.
페르시아 왕의 도움을 어떻게 이해하는가 하는 것은 각자의 관점과 강조점의 차이에서 기인한 것일 뿐입니다.
3) 하나님이 에스라와 백성들의 금식기도에 응답하셨음을 밝힙니다(23절).
“ [23] 그러므로 우리가 이를 위하여 금식하며 우리 하나님께 간구하였더니 그의 응낙하심을 입었느니라”
‘그의 응낙하심을 입었느니라’ 하나님은 자신을 찾고 의지하는 사람을 결코 외면하지 않으십니다.
2. 보물들을 운송하기 위한 준비(24~30절)
“[24] ○그 때에 내가 제사장의 우두머리들 중 열두 명 곧 세레뱌와 하사뱌와 그의 형제 열 명을 따로 세우고 [25] 그들에게 왕과 모사들과 방백들과 또 그 곳에 있는 이스라엘 무리가 우리 하나님의 성전을 위하여 드린 은과 금과 그릇들을 달아서 주었으니 [26] 내가 달아서 그들 손에 준 것은 은이 육백오십 달란트요 은 그릇이 백 달란트요 금이 백 달란트며 [27] 또 금잔이 스무 개라 그 무게는 천 다릭이요 또 아름답고 빛나 금 같이 보배로운 놋 그릇이 두 개라 [28] 내가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여호와께 거룩한 자요 이 그릇들도 거룩하고 그 은과 금은 너희 조상들의 하나님 여호와께 즐거이 드린 예물이니 [29] 너희는 예루살렘 여호와의 성전 골방에 이르러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의 우두머리들과 이스라엘의 족장들 앞에서 이 그릇을 달기까지 삼가 지키라 [30] 이에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이 은과 금과 그릇을 예루살렘 우리 하나님의 성전으로 가져가려 하여 그 무게대로 받으니라”
본절부터 30절까지는 '아하와 강가'를 떠나기 위한 준비 과정이 그려지고 있습니다.
1) 에스라가 열두 명의 지도자들에게 책임을 부과함(24~27절)
(1) 에스라는 이 일을 위해 제사장의 우두머리들 12명, 그리고 세레뱌와 하사뱌와 그의 형제 10명을 세웁니다(24절).
“[24] ○그 때에 내가 제사장의 우두머리들 중 열두 명 곧 세레뱌와 하사뱌와 그의 형제 열 명을 따로 세우고 ”
제사장의 우두머리들 중 열두 명 곧 세레뱌와 하사뱌 – 이것은 '제사장...십 이 인과 세레뱌 및 하사뱌'로 고쳐야 맞습니다.
만일 한글 개역개정을 그대로 따른다면, '세레뱌와 하사뱌'는 제사장이 되는 셈입니다.
그러나 '세레뱌와 하사뱌'는 레위인임이 분명합니다(18절).
따로 세우고(아브딜라). - 이것은 '나누다' 혹은 '구별하다'의 뜻을 갖는 동사 '바달'의 사역형으로서, 본질적 차이가 있으나 합해져 있는 둘을 완전히 가르는 것을 가리킵니다(창 1:14 ; 레 10:10 ; 신 10:8 ; 대상 25:1).
여기서 에스라가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을 함께 구별시킨 이유는 제사장들은 거룩한 물건들을 취급하는 책임자라는 점에서, 한편 레위인들은 그것들을 운반하는 등의 부수적 업무를 담당해야하는 책임자라는 점에서 함께 구별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Brockington, Myers).
적어도 에스라는 율법 학자였기 때문에, 이런 규정들을 익히 알고 있었고 또한 그대로 시행하고 있었습니다(7:10).
(2) 하나님의 성전을 위하여 드린 은과 금과 그릇들을 달아서 주었습니다(25절).
“[25] 그들에게 왕과 모사들과 방백들과 또 그 곳에 있는 이스라엘 무리가 우리 하나님의 성전을 위하여 드린 은과 금과 그릇들을 달아서 주었으니”
여기서 언급되는 은금에는 바벧론 사람들로부터 얻은 것도 포함되어 있을 것입니다(7:16).
그 곳에 있는 이스라엘 무리. – 에스라와 함께 팔레스틴으로 돌아오지 아니한 유대인들을 가리킵니다.
그때에 상당수의 유대인들이 바벨론 및 페르시아 땅에 남아 있었습니다(에9:30).
드린(테루마트). - 높은 곳에 물건을 올려놓는 것이나 높은 사람에게 예물을 바치는 행위를 표현하는 단어입니다(레 2:9 ; 민 18:30, 32 ; 대하35:8).
(3) 그들 손에 준 것은 은이 650달란트요 은 그릇이 100달란트요 금이 100달란트였습니다(26절).
“[26] 내가 달아서 그들 손에 준 것은 은이 육백오십 달란트요 은 그릇이 백 달란트요 금이 백 달란트며 ”
은이 육백 오십 달란트. – 마이어스(Myers)는 이것을 약 8.5톤으로 봅니다.
은 그릇이 백 달란트. – 이것은 3.75톤으로 봅니다.
환산의 비율이 확실하지 않아 오늘날의 추정 기준으로 정확히 말할 수는 없지만 대단히 많은 양이었음에는 분명합니다.
(4) 금잔이 20개와 놋 그릇이 2개입니다(27절)
“[27] 또 금잔이 스무 개라 그 무게는 천 다릭이요 또 아름답고 빛나 금 같이 보배로운 놋 그릇이 두 개라 ”
금잔...이십 개...일천 다릭. – 그 무게 '천 다릭'은 영화(英貨) 약 11,000파운드 정도에 해당합니다(2:69).
아름답고 빛나 금같이 보배로운 놋그릇. – 이것이 무엇을 가리키는 지는 분명치 않습니다.
그러나 학자들은 이것을 구리와 아연의 합금인 황동으로 만들어진 그릇으로 생각합니다(Driver).
2) 지도자들에게 한 에스라의 명령(28~30절).
(1) 에스라는 기물들의 운반 책임자들에게 그 일의 중요성을 알립니다(28절).
“[28] 내가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여호와께 거룩한 자요 이 그릇들도 거룩하고 그 은과 금은 너희 조상들의 하나님 여호와께 즐거이 드린 예물이니”
여호와께 거룩한 자. – 이것은 제사장 및 레위인들이 특별히 일반 백성들과 구별되었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 바쳐진 신분임을 가리키는 말입니다(출 29:1 ; 39:30 ; 레21:6 ; 민 3:12, 13).
여기의 '거룩한'(코데쉬)은 '봉헌하다' 혹은 '구별하다' 등의 뜻을 갖는 동사 '카다쉬'에서 온 형용사로서, 하나님께 특별히 바쳐짐으로써 인간들에 의해 함부로 다뤄질 수 없게끔 된 상태를 표현하는 말입니다(McComiskey).
은과 금은 너희 조상들의 하나님 여호와께 즐거이 드린 예물이니. – 이것도 '은과 금'이 거룩히 구별되었음을 말해주는 한 표현입니다.
이런 '거룩성'은 거룩히 구별된 제사장 및 레위인만이 그것들을 다뤄야하는 분명한 이유입니다.
(2) 에스라는 그들이 예루살렘에 도착한 즉시 족장들이 보는 앞에서 기물들의 무게를 달도록 명령합니다(29절).
“[29] 너희는 예루살렘 여호와의 성전 골방에 이르러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의 우두머리들과 이스라엘의 족장들 앞에서 이 그릇을 달기까지 삼가 지키라”
여호와의 성전 골방 – 이것은 성전의 건물 양편에 위치한 방들로서 한 쪽에는 제사장들이 쓰는 방이, 그 반대편에는 창고가 있었습니다(왕상6:15;느 13:5).
이스라엘 족장. - '우두머리'라는 뜻으로는 '로쉬'가 더 정확합니다.
삼가 지키라. – 이것은 문자적으로 '깨어라 그리고 지키라'의 의미입니다.
이같이 해야 할 이유는 행로 중에 도적을 맞거나 혹은 탐심에 사로잡힌 유대인들이 야심한 틈을 타 훔쳐가는 것을 막아야 할 필요성 때문이었습니다.
이 예물들은 귀환 여행의 마감 시점에 이르러 재차 점검되고 계수되었습니다(34절).
이것은 그들이 맡은 일의 투명성을 높이기 위한 조치로 에스라의 준비성을 잘 보여줍니다.
(3) 에스라의 명령에 지도자들은 순종으로 반응합니다(30절).
“[30] 이에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이 은과 금과 그릇을 예루살렘 우리 하나님의 성전으로 가져가려 하여 그 무게대로 받으니라”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이 하나님께 바쳐진 물건들을 예루살렘으로 옮기는 일에 대한 책임을 떠맡는 등 에스라의 명령에 순종하고 있음을 의도적으로 보여줍니다.
한편 운반에 관한 총체적 책임은 제사장들에게 있지만, 이 일은 실제적으로 레위인들에 의해 담당되었습니다(24절).
3. 무사 귀환과 감사의 제사(31~36절)
“[31] ○첫째 달 십이 일에 우리가 아하와 강을 떠나 예루살렘으로 갈새 우리 하나님의 손이 우리를 도우사 대적과 길에 매복한 자의 손에서 건지신지라 [32] 이에 예루살렘에 이르러 거기서 삼 일 간 머물고 [33] 제사일에 우리 하나님의 성전에서 은과 금과 그릇을 달아서 제사장 우리아의 아들 므레못의 손에 넘기니 비느하스의 아들 엘르아살과 레위 사람 예수아의 아들 요사밧과 빈누이의 아들 노아댜가 함께 있어 [34] 모든 것을 다 세고 달아 보고 그 무게의 총량을 그 때에 기록하였느니라 [35] ○사로잡혔던 자의 자손 곧 이방에서 돌아온 자들이 이스라엘의 하나님께 번제를 드렸는데 이스라엘 전체를 위한 수송아지가 열두 마리요 또 숫양이 아흔여섯 마리요 어린 양이 일흔일곱 마리요 또 속죄제의 숫염소가 열두 마리니 모두 여호와께 드린 번제물이라 [36] 무리가 또 왕의 조서를 왕의 총독들과 유브라데 강 건너편 총독들에게 넘겨 주매 그들이 백성과 하나님의 성전을 도왔느니라”
1) 아하와 강가를 떠나 예루살렘에 도착함(31~34절)
(1) 에스라와 그 일행은 첫째 달 12일에 하하와 강을 출발하여 예루살렘으로 향합니다(31절).
“[31] ○첫째 달 십이 일에 우리가 아하와 강을 떠나 예루살렘으로 갈새 우리 하나님의 손이 우리를 도우사 대적과 길에 매복한 자의 손에서 건지신지라”
첫째 달 십이 일에 우리가 아하와 강을 떠나. – 유대인들은 그때 '아하와 강가'를 집결지로 삼아 정월 초하루에 거기에 모였었습니다(7:9).
그들은 거기서 3일간 인원을 파악하던 중 레위인들이 한 사람도 없음이 밝혀지자 그들을 불러오는 등의 일에 9일을 소비하고 12일에 그 강가에서 출발할 수 있었습니다(Keil, Fensham).
건지신지라(야칠레누). - '구하다' 혹은 '찾다' 등의 뜻을 갖는 동사 '나찰'의 사역형으로서, 악인들의 무리에게 사로잡혀 있는 상태에서 구출하거나 위기일발의 위급한 재앙의 상태에서 벗어나게 해주는 적극적 행위를 가리킵니다(창 32:11 ; 삼상 12:10 ; 시 25:20 ; 렘 22:3).
예루살렘까지 긴 여행기간 동안 그들은 전혀 군사적인 지원을 받지 않았기에 많은 어려움을 겪었을 것입니다.
저자는 예루살렘으로 여행한 과정에 대해 특별한 언급을 하지 않고 단지 ‘하나님의 손이 귀환하는 백성들을 도우셨다’고만 밝힙니다.
하나님이 여행기간 내내 ‘대적들과길에 매복한 자들’의 위험으로부터 백성들을 지키신 것입니다.
(2) 드디어 예루살렘에 도착하였고, 처음 3일 간은 쉬는 시간을 갖습니다(32절).
“[32] 이에 예루살렘에 이르러 거기서 삼 일 간 머물고”
삼 일 간 머물고. - 에스라 일행이 먼길의 여행 후 몸과 마음의 휴식 기간을 가진 것으로 이해됩니다(Fensham).
(3) 3일간 휴식 이후 에스라는 산적한 일들을 처리하기 시작합니다(33~34절).
①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의 책임이 완수되었는지를 확인한 후 제사장 므레못에게 넘겨줍니다(33절)
“[33] 제사일에 우리 하나님의 성전에서 은과 금과 그릇을 달아서 제사장 우리아의 아들 므레못의 손에 넘기니 비느하스의 아들 엘르아살과 레위 사람 예수아의 아들 요사밧과 빈누이의 아들 노아댜가 함께 있어”
제사장 우리아의 아들 므레못. – 느 3:4, 21에서는 '학고스의 손자 우리아의 아들므레못'으로 나옵니다.
그런데 2:61에 따르면 '학고스 자손'들은 자신들의 혈통을 증명치 못함으로 해서 제사장 직분의 수행이 유보(留保)되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반면에 여기서는 그 후손들이 제사장의 직분을 수행하고 있음을 볼 때, 그들이 자신들이 제사장의 후예임을 증명하는 데에 마침내 성공했다는 결론에 도달합니다.
손에 넘기니. – 문자적으로는 다만 '손 안으로'의 의미로서 넘겨주는 행위를 가리킵니다.
비느하스의 아들 엘르아살. – 이 문구 바로 앞에는 '그와 함께'의 의미인 '이모'가 있는데, 이는 '엘르아살'도 므레못처럼 제사장이었음을 말해줍니다(10:18; 느 12:41, 42).
예수아의 아들 요사밧. – 이 사람은 본서와 느헤미야서에서
- 율법책의 뜻을 해석하여 백성을 깨닫게 하는 역할의 담당자(느 8:7),
- 이방 여인을 취하여 율법을 범한 자(10:23),
- 하나님의 전 바깥일을 받은 자(느 11:16) 등으로 묘사된다. '요사밧'이라는 이름의 뜻은 '여호와께서 주신다'입니다.
함께 있어 – 물품 인수의 실질 책임자는 '므레못'이었고 다른 사람들은 다만 입회인이었음을 암시해줍니다(Fensham).
② 제사장 엘르아살과 레위 사람 요사밧과 노아댜가 다시 한 번 확인한 후 목록들을 장부에 기록합니다(34절)
“[34] 모든 것을 다 세고 달아 보고 그 무게의 총량을 그 때에 기록하였느니라”
본절은 내부 및 외부의 도적을 만나지 않음으로써(29절), 일체의 물품 손실이 없었음을 보여줍니다.
이것은 그야말로 '하나님의 손'이 에스라의 일행에게 함께했다는 사실(31절)에 대한 간접적인, 그러나 강력한 시사임이 분명합니다(Kidner).
그 때에 기록하였느니라. – 이 같은 행위는 성전 재산의 도난 및 횡령 방지를 목적으로 한 것입니다(Rawlinson).
에스라는 어쩌면 그 물품 목록을 아닥사스다 왕에게 보내서 모든 물품들이 제대로 인계되었음을 증명하였을 수도 있습니다.
2) 예루살렘에서 제사를 드림(35~36절)
(1) 사로 잡혔던 자의 자손들이 첫 번째 일은 하나님게 제사를 드리는 것이었습니다(35절).
“[35] ○사로잡혔던 자의 자손 곧 이방에서 돌아온 자들이 이스라엘의 하나님께 번제를 드렸는데 이스라엘 전체를 위한 수송아지가 열두 마리요 또 숫양이 아흔여섯 마리요 어린 양이 일흔일곱 마리요 또 속죄제의 숫염소가 열두 마리니 모두 여호와께 드린 번제물이라”
사로잡혔던 자(하골라) - '제거하다' 혹은 '이동하다'를 뜻하는 동사 '갈라'에서 파생된 명사로서 '해외로의 추방' 사실 자체 및 '그렇게 된 자'를 가리킨다.
그런데 이 단어는 구약 성경 중 왕하 24:15에서부터 나오기 시작하여 모두 약 41회 나오는데 거의 대부분이 바벨론에 의해 유대인들이 포로로 끌려간 사건과 직접 관련되어 사용된다.
따라서 이것은 포로가 된 유대인 및 그 사건을 지칭하는 고유 명사로 이해된다.
이방에서 돌아온 자 - 문자적으로 '포로 생활로부터 돌아온 자'이다.
이들은 곧 에스라의 일행들이다.
번제를 드렸는데 - 이같은 제사는
(1) 하나님께서 여행을 안전하게 마칠 수 있도록 해주신 데 대한 감사,
(2) 여행 직전에 있었을 수도 있는 서원의 이행(Williamson),
(3) 새로운 출발을 다짐하는 헌신 등과 밀접한 관계가 있을 것이다.
이스라엘 전체를 위한 - 에스라와 함께 온 새로운 귀환자들이 금번 제사의 주관자들이 되었음을 말해준다.
최초의 귀환자들도 바벨론에서 귀환한 직후 이 같은 제사를 드렸었다(3:3 ; 6:17).
수송아지가 열 둘 - 여기의 '수송아지'(파르)는 차라리 '황소'로 봄이더 타당하다(창 32:15 ; 렘 50-27).
한편 '열 둘'은 이스라엘의 열 두 지파를 상징하는 숫자이다(6:17).
수양이 아흔 여섯 - '아흔 여섯'은 매 지파당 여섯 마리씩에 해당되는 수효이다.
어린 양이 일흔 일곱 - 혹자는 여기의 '일흔 일곱'이 열 둘로 나누어지지 않는다는 점 때문에 '일흔 둘'의 사본상 오류라고 말한다(에스드라상 8:66 ; Josephus, Myers).
그러나 여기 맛소라 사본의 '일흔 일곱'은
(1) 많은 구약 사본들의 지지를 받으며,
(2) 고대 중근동의 우가릿 문서등에서는 '일흔 일곱'이라는 수가 수량의 많음을 강조하기 위한 숫자적 표현으로 사용된다는 사실에서 볼 때 이는 그대로 취해져도 무난하리라 본다(Fensham).
속죄제 - 포로지에서의 신실하지 못했던 삶을 회개하며, 또 그 죄악들을사함받기위해 드려졌을 것이다.
모두...번제물이라 - 이것은 실제적으로는 '속죄제'의 제물까지를 포함한다. 그런데도 '번제물'이라고 한 까닭은, 하나님께 바친 제물의 대부분이 번제의 제물이기 때문이었다(Fensham).
(2) 에스라가 끝으로 왕에게서 받은 조서를 총독들에게 넘겨줍니다(36절).
“[36] 무리가 또 왕의 조서를 왕의 총독들과 유브라데 강 건너편 총독들에게 넘겨 주매 그들이 백성과 하나님의 성전을 도왔느니라”
왕의 조서 – 에스라와 그 일행을 도우라는 명령(7:20-26)을 가리킵니다.
왕의 총독. -상당히 광활한 정복 지역을 왕을 대신하여 다스리는 관리를 가리킵니다(본 단락 주제 강해, '페르시아의 지방 조직' 참조).
그런데 여기서 문제는 이 말이 히브리 원문상 복수로 사용되고 있다는 점입니다. 이것은 유프라테스 강 서편에는 단한 명의 총독 밖에 없었다는 역사적 사실에서 볼 때 문제시 됩니다.
이런 문제의 해결책은, 여기의 '총독들'이 유프라테스 강 서편의 총독 한사람과 애굽을 다스리던 총독 등 두 명을 가리킨다고 보는 데서 해결 가능합니다.
실제적으로도 애굽은 팔레스틴과 지역적으로 매우 가깝다는 점에서 이 가능성은 충분합니다.
총독들(파하우오트) - 이들은 적은 지역을 다스리던 지방 관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6:6).
그들이 백성과 하나님의 성전을 도왔느니라. – 왕의 명령(7:20-26)이 그대로 이행되었음을 시사합니다.
'도왔느니라'(니스우)는 '높이다' 혹온 '주다'의 뜻을 갖는 동사 '나사'의 강조형으로서, 여기서는 어떤 물질 등을 제공함으로써 성전 예배가 권위를 회복하고 원활히 지속될 수 있도록 하는 것을 가리킵니다(Williamson).
칙령을 받은 페르시아 관리들은 곧바로 유다 백성과 하나님의 성전 일을 돕습니다.
지금까지 부정적이었던 페르시아 관리들이 유다 백성에게 우호적으로 바뀌게 된 것입니다.
말씀을 맺겠습니다.
21~36절에는 7장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제2의 출애굽 모티브가 나옵니다.
에스라가 여행 전 하나님께 “평탄한 길”을 간구한 것은 이사야 40:3의 예언을 상기시킵니다.
제 2의 출애굽 모티브는 백성들이 예루살렘에 도착해서 드리는 제물들의 양에도 나타납니다(수소12마리, 숫염소 12마리, 숫양96[12x8]마리, 어린 양 72[12x6]마리).
반복되는 12이라는 숫자는 회복된 이스라엘을 상징합니다.
에스라서에 의하면, 회복된 이스라엘은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온 사람들(사로잡혔던 자의 자손들)을 중심으로 이루어 집니다.
에스라는 왕에게 호위 군대를 요청하지 않고 하나님께 금식하여 보호를 간구합니다. 우리도 하나님 만을 의지 합시다.
성전 기명을 맡은 스물네 명이 그릇 하나도 착복하지 않고 잘 운반하여 하나님 전에 드렸듯이, 주께서 셈하시는 날 주의 것을 주의 원하시는 대로 쓰고 왔다고 고백하는 청지기가 되어야 합니다.
에스라의 믿음의 기도와 하나님의 명예를 위해 위험을 자청한 헌신에 안전한 여정으로 화답하셨습니다.
지도자는 하나님의 도우심을 믿고 기도하는 자입니다.
하나님은 어떤 분입니까?
1) 귀환공동체를 안전하게 인도하십니다(22,21절).
목자가 양을 보호하듯 공동체를 대적의 길과 강도의 손에서 구원하십니다.
성도의 삶도 광야 길 같아서 늘 유혹하고 매복하는 대적들이 있습니다.
주님이 인도하시는 길이 가장 순탄하고, 주님의 손에 붙들린 삶이 가장 안전하다는 사실을 기억합시다.
나(우리)에게 주시는 교훈은 무엇입니까?
1) 에스라는 왕의 도움을 거절하고 하나님의 도움을 구합니다(21~23절).
많은 재물을 운반하는 먼 여행을 안전하게 마치려면 군대의 호위가 절대로 필요했지만, 하나님이 보호하실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평소 왕에게 말했던 그의 여호와 신앙의 참된 것임을 입증하는 기회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에스라는 개인적인 확신만으로 귀환 공동체의생사가 달린 문제를 밀어붙이지 않았습니다.
그는 공동체가 금식하며 하나님의 뜻을 구하도록 했고, 결국 하나님의 응낙을 얻었습니다.
나는 사람의 도움에 익숙해져서 하나님이 개입할 여지가 없는 일상을 살고 있지 않습니까?
사람을 의지하기 전에, 먼저 하나님의 도우심을 간절히 구합시다.
2) 에스라는 성전에 드릴 보물을 운반하는 일을 치밀하게 계획합니다(24~30절).
약탈자의 손에서 보호할 뿐 아니라, 내부의 유혹까지 차단하는 장치를 마련합니다.
선한 목적을 이루기 위해 작은 죄도 틈타지 못하도록 최선을 다하는 모습입니다.
우리 공동체도 주님이 기뻐하실 헌물이 주님의 진노를 가져오는 재앙이 되지 않도록 치밀하게 계획하고 철저하게 관리합시다.
3) 출발 전 드렸던 기도가 모두 응답된 순간, 귀환 공동체는 하나님께 감사의 제사를 드립니다(35,36절).
출발 전에 금식하며 간절히 기도했기에, 모든 일에 하나님의 도움이 있었음을 실감할 수 있었습니다.
기도가 간절했던 만큼, 응답하신 은혜에 대한 감사도 더욱 넘쳤습니다.
나는 일을 행하기에 앞서 주님의 도움을 구하는 기도를 드립니까?
또 그 기도가 응답되었을 때, 잊지 않고 감사의 기도와 찬송을 올려드립니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