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방에서 목회를 할 때 대학을 못가고 별로 할 일도 없이 시간을 보내고 있는 청년들이 있었다. 나는 그들에게 할 일 없는 지방에서 시간을 보내지 말고 도시로 나가서 무슨 일이든지 하라고 권했다. 그럴 때 마다 교회의 장로, 권사들은
“청년들을 다 쫒아내면 주일학교, 성가대는 누가 하냐?”고 나를 말렸다. 그러면 난 “교회가 청년들 인생을 책임져 줄 수 없지 않습니까?”하고 설득을 했다.
신자들이 목사의 생일이라고 잔치를 벌이려고 할 때 현금으로 달라고 해서 교회에서 가장 가난한 이들을 도운 적이 있었다. 그럴 수 있었던 것은 내가 책임을 지고 목회를 하는 내 교회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지금 생각해 보면 그 마저도 교인들이 명분을 내걸고 함께 먹고 마시는 즐거움을 외면한 너무 파격적인 행동이 아니었던가 싶다. 아마도 젊었기 때문에 할 수 있었던 무모한 행동이었던 것 같다.
성경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말이다.
“도둑은 다만 양을 훔쳐다가 죽여서 없애려고 오지만 나는 양들이 생명을 얻고 더 얻어 풍성하게 하려고 왔다(요10:10)”
양을 가지고 희생 제사를 드리는 것이 아니고 포동포동 살이 쪄서 잘 살게 하기 위함이라는 뜻이다.
계란은 닭에서 나오고 햄은 돼지에게서 나온다.
그러나 닭은 생산적인 활동으로 계란을 낳지만 돼지는 죽음으로 햄을 만든다.
참여와 희생의 차이이다. 종교는 자칫 잘못하면 참여를 넘어 희생을 부른다.
기복신앙의 단계에서는 희생을 강조한다. 흔히 교회를 건축하는 과정에서 어떤 가난한 신자의 눈물겨운 헌신 이야기가 많다. 나는 부자의 참여가 아니라 가난한 사람의 희생 이야기를 들을 때 마다 마음이 편치 않다.
모든 이야기에는 반드시 말하는 자와 듣는 자 사이에는 함께 공감할 수 있는 전제 즉, 꺼리가 있는 법이다.
예수는 당시의 유대교를 전제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예수는 종교의 이름으로 인간을 억압하고 있는 유대교에 대해서 ‘내가 이 세상에 온 것은 사람이 생명력 있게 살기 위한 것이지 종교자체를 살찌우기 위한 것이 아니다.’라는 뜻의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하나님은 하늘에나 교회에 있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밥 먹고 똥 누는 사람 안에 계신다.
종교는 권력과 달리 무거울수록 가볍게 보이고 가벼울수록 무겁게 보이는 법이다.
황금빛 번쩍이는 거대한 부처상이나 장엄한 교황의 행차에서는 장난감 같은 가벼움을 느낄 수 있지만 고행으로 비쩍 마른 부처상이나 장애인이나 가난한 이들과 함께한 교황이 사진을 보면 저절로 경건해지는 것이 그런 현상이다.
나는 Spirituality는 종교적인 상징이나 언어 보다는 삶의 현장에서 찾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내가 이런 생각을 갖게 된 것에는 계기가 있었다.
30 여 전 어느 날 진눈깨비가 내리는 날이었다. 부천 역 앞의 재래시장에 갔다가 하반신이 없는 장애자가 두꺼운 고무로 배를 대고서 장갑을 낀 두 손으로 수레를 밀면서 사람들 사이를 헤치며 질척질척한 시장 바닥을 기어 다니면서 노점상을 대상으로 자질구레한 물건들을 파는 것을 보았다.
그 순간 나는 "세상에 저 것 보다 더 거룩한 몸짓이 어디 있겠는가?"하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영화나 드라마로 볼 때 내가 겪어서 잘 알고 있는 내용이 나올 때는 특별히 관심을 가지고 보게 된다. 그런데 영화를 찍는 데는 여러 가지 한계가 있는 것을 알면서도 내가 아는 사실과 너무 다를 때는 실망감을 느끼게 된다.
영화가 Real 할수록 부딪혀 오는 느낌이 강해지는 법이다. 그래서 영화를 만드는 사람들은 될 수 있으면 Real하게 표현하기 위해서 온갖 노력을 기울인다.
신도 인간이 픽션을 꾸미는 것 보다는 논픽션으로 행동하는 것을 좋아할 것이다.
그래서 나는 종교적인 문화나 예식에서 신을 찾기 보다는 삶의 현실에서 신을 찾고자 한다.
나는 신의 입장에서 본다면 최악의 조건 속에서 살기 위해서 몸부림치는 것 보다 더 거룩함은 없다고 생각한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바티칸의 베드로 대성전에서 수만 명이 모여서 경건, 엄숙, 장엄하게 드리는 미사는 고상한 장난같이 느껴지고 아프리카 수단의 처참한 난민캠프의 현장에서 생존을 위한 사투를 하는 난민들을 보면 저절로 경건해 질수 밖에 없다.
언젠가 이런 말을 했더니 어떤 이가 반론을 폈다. 그는 무언가 자기보다 더 큰 것과 연결되는 느낌, 그리고 그것이 자신의 삶과 인생의 나침판으로 역할을 하는 것에서 spirituality를 느낀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앞에서 말한 장애자는 자신의 삶이 spirituality가 될 수가 없다는 것이었다. 즉 본인이 자기가 하는 행위에서 자기보다 더 큰 존재와 연결을 하고 방향감을 찾을 수 있을 때만 spirituality라고 볼 수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내가 그 장면에서 무엇인가를 보고 방향감을 찾았다면 그것은 나의 spirituality이고 내 말에 동감이 생기는 사람들에게는 spirituality가 될 수 있지만 당사자에게는 아닐 것이라는 주장이다.
일면 크게 타당성이 있는 주장이다.
그러나 나는 본회퍼가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 없는 것 같이'라고 말한 상황을 표현 하고 싶은 것이었다. 무신론적인 세상에서 신적인 것을 발견하는 자세 말이다. 본회퍼는 조화롭고 평안한 상태에서가 아니라 참혹한 상황 속에서 신을 발견했었다.
나는 반론을 편 사람의 주장과 같이 나 보다 더 큰 존재에는 별로 관심이 가지 않는다. 왜냐하면 내 삶은 내가 궁극적인 책임을 지고 살 뿐이라고 생각되는 실존적인 입장이기 때문이다.
허영에는 물질적 하영 못지 않은 영적 허영도 있다. 영적 허영은 아무 것도 책임질 일이 없다. 그저 자기가 제일 잘 믿고 있다고 생각하고 남을 판단하면 그만이기 때문이다.
본인들은 신앙으로 버틴다고 표현 하지만 사실은 신앙이란 독선으로 자신을 가리는 사람들도 있다. 폴 틸리히는 ‘존재에의 용기(COURAGE TO BE)’에서 실존세계에서 지나치게 지식적, 도덕적, 권력적, 정신적으로 고상한 척하는 교만한 인간의 비겁성을 다루었다. 이 세상의 '실존적 곤경'을 거부하는 무지하고 교만하고 위선적인 인간의 비겁성은 역설적이게도 지적, 도덕적, 권력적, 영적 교만으로 나타난다는 지적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