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참사람 : 예수와 사람의 아들의 수수께끼(월터 윙크)
The Human Being: Jesus and the Enigma of the son of the Man
제6부 결과와 결론들
A. 다시 한 번 더 본다는 것
"만일 참사람이 전에 있던 곳으로 올라가는 것을 보면 어떻게 하겠느냐?"(요한 6:62). 정말 어쩔 것 같은가? 그건 분명히 빈손으로 되돌아가는 여행은 아니다. 여기 내려왔다 올라가는 사명에 뭔가 성취된 것이 있을 것이다. 참사람은 무슨 목적으로 올라가는가? 확실히 보여주기 위해서다. 성서본문들은 반복해서 참사람이 오고 가는 것, 그리고 내려오고 올라가는 것을 "본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마가복음 14:62에서는 예수가 자신을 묘사하면서 "지혜의 자손이 전능하신 분의 오른쪽에 앉아 있는 것을 너희가 볼 것이다"라고 예언한다.1) 우리는 이것을 마치 예수가 태양광선을 타고 하늘에 있는 하느님의 보좌가 있는 방으로 되돌아간 것이라고 문자 그대로 읽을 필요는 없다. 그보다는 이것을 원형적 변종에 대한 정확한 기록이라고 볼 수 있다. 에드워드 에딘저에 의하면, 누군가 일단 무의식 속에서 본 것을 사실 그대로 인정하면, 그것이 다시 무의식을 변화시킬 필요를 만든 것 같다는 것이다. 에스겔과 다니엘 이래로, 수세기 동안 차차 성장되어온 그 무엇이 마침내 제자들의 정신 속에서 탄생된 것이다. 참사람의 신적인 권능과 권위가 예수 안에 성육화한 것을, 그리고 때로는 그들 자신 안에서도 성육하는 것을 그들이 보았는데, 이제는 그것이 인간 변혁의 촉매제로 실재의 중심에 들어온 것이다. 마치 종의 울림이 우리들 존재의 중심에까지 반향하듯, 참사람은 말하자면 우리로 하여금 사람됨의 충만함에 이르도록 하라는 초대장이다. 그리고 그 초대장과 함께 그것을 할 수 있는 능력도 온다.
참사람의 승천은 인간의 변종을 표상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원형 속의 변종을 표상한다. 그것은 어떤 사람들은 새로운 "유전인자"(가령 니체의 "초인" 같은)를 갖게 되고, 다른 사람들은 그렇지 못한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이용할 수 있는 새로운 가능성을 각 사람이 의식적으로 선택하는 문제인 것이다.
따라서 승천이라는 주제는 기적들에 대한 토론에서 찧고 빻아야 할 곡물은 아니다. 그것은 기적적인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보다는 승천이라는 주제는 어떤 사람들이 신적인 거룩함을 경험한 방식이 변화되었다는 것을 기록한 것이다.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예수가 촉발시킨 변혁이 기독교인들에게만 해당되는 배타적인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누구라도 예수의 매력적인 권능에 끌리게 될 수 있다. 마찬가지로, 비유대인들도 유대인 신비주의의 환상적인 광채를 경험할 수 있고, 어떤 기독교인도 영지주의의 깊은 차원들에 뚫고 들어갈 수 있다. 그것은 실재의 중심에는 한 가지 종교적인 길만 있는 것이 아니란 뜻이다. 중심을 향한 여러 길들, 여러 전통들, 여러 가지 진리들이 있다. 예수는 기독교인들에게 속한 것이 아니다. 그는 전 세계의 재산이다. 간디가 기독교 교회에 가입했더라면 그가 어떻게 발전되었을 것인가? 그는 기독교가 예수를 그들 자신들만을 위하여 간직하려고 한다고 유감스럽게 생각했다.2)
예수가 들어온 세상은 인간들의 열망으로 끓어오르고 있었는데, 메시아를 기다리는 꿈들, 천년왕국을 향한 환상들, 필사적인 묵시론, 신비주의적 계시들, 자멸적인 민족주의들, 종교적 비판과 개혁, 반동적인 고집,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그래서 미래가 가까이 왔다는 느낌들, 그리고 실재의 신비가 곧 계시될 것이라는 의식들로 넘쳐났다. 그런 시기에 예수의 진정성은 모든 신화적인 주제들을 그 자신에게로 끌어들인 등대와 같았다. 그 시대의 자궁 속에 품고 있었던 것은, 인간들이 보다 인도적으로 될 수도 있겠다는 하느님의 성급한 도박이었다.
프레데릭 보르쉬는 그의 책 『신화와 역사 속의 사람의 아들』을 끝내면서, 하느님이 예수에게 살아내야 할 신화를 주셨다고 결론지었다.
그러나 예수는 신화에 대해 설교하는 것만으로는 만족하지 않았다. 그는 그 신화가 어떻게 그의 삶과 그의 제자들의 삶 속에서 실제적인 것들과 관계되는가를 발견해야만 했다. 매일의 삶의 정황과 그의 전체 목회 속에서, 그는 그 신화가 삶의 어려운 현실들을 직면하게 하는 과정, 그리고 그 신화가 어떤 진리들을 현실적이며 생명력 있게 만드는 과정에 참여하고 있었다...그 신화가 없었다면 예수는 십자가를 받아들일 수 없었을 것이다. 십자가 없이는 얼마나 많은 진리가 심지어 그 신화의 계시적인 능력을 넘어서까지도 존재하는가를 우리들이 결코 알지 못했을 것이다.3)
이런 노력과 투쟁 속에서, 예수는 고난을 받는 것과 멸시를 당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지를 알았던 에스겔의 경험에 마음이 끌렸을 것이다.4) 그러나 에스겔은 죽임을 당하지 않았다. 그 지점에서 사건들이 예수의 이해를 넘어 압도했고, 그의 개인적인 신화가 예수보다 더 큰 바위에 부딪쳐서 산산이 깨어져 버렸다. 그 출처가 어디였든, 십자가 위에서 버림받음에 대하여 외쳤던 소리는 측량할 길 없는 어둠 속으로 예수가 진입한 것이었다. 그 외침 속에서 우리는 아무 의미도 효력도 없이 그들의 생명이 유린된 사람들의 합창소리를 듣는다. 그 순간 두 가지 경향이 나타났다. 한 가지 경향은 세계의 신화들과 그의 추종자들의 투사를 예수에게 붙이는 것이었다. 그 결과는 하느님-사람이었고, 그의 능력과 권위와 지배를 요한계시록에서 가장 풍성하게 축하한다. 또 다른 경향은 아직 충분히 드러나지 않았는데, 베르자예프의 말을 따라서, 나는 그것을 인간 변혁의 계시라고 불러왔다. 그것은 인간 예수의 신화인데, 그는 죽은 자들 가운데서, 참사람의 원형에로 일어선 것이다. 우리가 만일 주장하기를, 예수는 진정성을 갖고 살았었고, 그는 모범적이며, 그는 하느님의 인간적인 얼굴이며, 그의 안에서 우리가 사람의 아들을 보며, 그리고 그는 수많은 자매형제들의 처음 난 자요, 그는 모든 점에서 우리와 같았고, 그래서 불완전하고, 상처받았고, 죄를 짓는 인간이라고 하면, 역사 기록은 이 가운데 어느 것도 증명해주지 못한다. 인간 예수의 신화가 단지 그런 것들을 요구할 뿐이다.
B. 실제적인 참사람이 일어설 것인가?
어떤 학자들은 "사람의 아들"은 하층계급의 사람, 즉 "아무것도 아닌 존재(nobody)"를 지칭하는 것으로 결론짓는 것에 버케트는 주목한다.5) 다른 학자들은 사람의 아들이라는 표현이 예수가 일종의 "보통 사람(Every-man)"으로서 모든 사람들과 연대하는 표현으로 본다. 혹은, 예수는 모범적인 인간, 인류의 이상적이고 원형적인 인물일 수도 있을 것이다. 이런 진술들에는 모두 종말론적인 차원이 빠져있다. 버케트는 계속하여 지적하기를, 그런 결핍은 사람의 아들을 인간 역사의 목표로 보는 관점들에 의해 다소간 시정되었다고 한다.
우리는 또한 예수가 "사람의 아들"을 메시아 대망의 신앙들을 비판하고, 비아냥거리고, 혹은 부정하기 위해 사용했을 가능성도 생각해야 할 것이다. 캐틀린 피터슨 니콜이 지적했듯이, 교회는 사람의 아들 기독론을 만들어내지 않았으니, 왜냐하면 그렇게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 칭호를 사용하는 것이 예수가 모든 칭호들을 회피하는 방식이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윌리엄 돌스 주니어는 지적하기를, "ho huios tou anthropou(그 사람의 그 아들)는 교회가 애당초부터 예수에 대한 묘사로서 정의할 수 없었던, 그래서 소유할 수 없었던 것이라고 한다. 그래서 그것은 성스러운 요소를 지닐 수 있었다. 그것이 증언하는 바는, 예수 안에 육화된 신비스러운 하느님의 변혁적인 힘이요, 또한 우리들 각자 안에 태어나기를 갈망하는 힘이다"라고 한다.
사람의 아들에 대한 원형적인 해석으로 내가 선택한 것은, 사람들이 의심하듯이, 현대주의가 아니다. 플라톤과 필로는 1세기 사람들이 얼마나 원형적인 사고에 정통했는가를 보여준다. 플라톤의 사상들의 문화적 중요성을 알기 위해, 아무도 플라톤을 읽을 필요가 없었던 것처럼, 오늘날에도 그럴 필요는 없다. 무엇보다도 그의 사상들을 유대교와 기독교 신학에서 중심적 역할을 했던 성서의 알레고리적 해석의 토대가 되었다.
그러나 그런 원형적 해석이 오직 예수에게만 초점을 맞추어선 안 된다. 시편 80면, 다니엘서 7장에서부터, 복음서들, 그리고 기독교 이후 에녹의 비유와 에스라 4서 13:52에 이르기까지, 우리가 게을리 하여 큰 손해를 본 집합적 차원이 있다. 만일 예수만이 지혜의 자녀라면, 만일 그만이 원형적인 차원을 지녔다면, 만일 그만이 실재의 중심이라면, 그럼 기독교만이 정말로 진리를 독점하고 있다고 하겠다. 그러나 만일 예수가 대가족의 장남이라면(롬 8:29), 우리는 예수의 승천을 온전함의 원형안에서 일어난 변종이라고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참사람은 인간들로 하여금 인도적이게 만들 능력을 지니고 있다. 설사 그들의 종교가 무엇이든, 혹은 종교를 갖지 않았어도 말이다.6)
"사람의 아들"이 단지 일종의 자기호칭일 뿐 신학적인 내용을 지니지 않았다고 믿는 어원학자들에게는 무어라고 응답할 것인가? 게자 버미스는 아람어에서 "나(I)"를 에둘러 표현하는 말로 hahu gabra처럼 bar enasha가 사용될 수도 있다고 말한다. 이런 경우들이 생겨나는 것은 (a) 말하는 사람이 자기를 두고 지나치게 건방진 강조를 피하려고 했을 때, 혹은 (b) 말하는 사람이 그 자신에 어울리지 않는 뭔가를 공개적으로 주장하는 것을 싫어하거나 두려워할 때다. 아람어 학자들은 대체로 버미스가 말한 실례들은 bar enasha라고 에둘러 말한 표현을 보여주는 것은 아니라는 점에서 의견이 일치한다. 그 대신 그들은 총칭적 용법("인간" 일반을 뜻함)이나 혹은 불명확한 막연한 용법("어떤 사람" 혹은 "어느 누구"란 뜻)을 생각하는데, 이는 한 사람이 곧 다른 사람들과 함께 그이/그녀 자신을 포함할 수도 있다. 아래에 "사람의 아들"에 대한 총칭적인 설명들에서 그 특성을 설명한 것을 보자.
Casey: "한 사람(a man)"이라고 총칭적으로, 말하는 자신도 가리킴
Lindars: "나의 위치에 있는 사람(a man)
Bauckham: "한 사람(a man)" 혹은 "어느 누구(someone)"란 말로
의도적으로 애매하게 자신을 가리킴
이 각각의 경우에, 말하는 사람을 이해하는 사람들은 그녀가 자기 자신을 두고 하는 말인 것을 알아차린다.
버케트의 비판은 설득력이 있다. 첫째, 그는 지적하기를, 그런 언어 사용법은 지시 대명사나 혹은 자기 자신을 가리키는 제스처를 필요로 한다. 그에 더하여, 그는 관찰하기를, 아람어 bar enasha는 "한 사람(a man)"이라고 번역될 수 있지만, 그리스어 ho huios tou anthropou는 그렇게 번역될 수 없다고 한다. 첫 번째 관사(ho)가 개인화냐 혹은 총칭적이냐에 따라서, 그 그리스어 표현은 "그 사람의 그 아들"이라고 한 개인을 말하거나, 혹은 "사람"이라고 ("man"을 총칭적으로) 번역될 수는 있어도, "한 사람(a man)"이라고 번역될 수는 없다. 그래서 버케트는 말하기를, 이들 학자들이 그들의 이론을 그리스어가 표현할 수 있는 bar enasha의 두 가지 의미의 어느 것에도 근거하지 않고, 그리스어로는 표현할 수 없는 한 가지 의미에 근거했다고 한다. 결국 그들은 그 아람어가 잘못 번역되었다고 생각한 것 같다. 그럴 가능성이 있기는 하지만, 그보다는 번역자들이 그들이 하는 일이 무엇인지를 잘 알면서도 원래의 아람어를 가장 잘 나타내는 말로 ho huios tou anthropou를 선택한 것 같다.
우리는 이제 왜 "사람의 아들"이란 표현이 어떤 사람들에겐 내용이 없는 말로 들릴 수 있는지를 알게 되었다. 이유는 그 사람들이 그 표현을 예수가 한 말이나 행동한 모든 것들로부터 동떨어진 것으로 보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일 "사람의 아들"이 예수가 그의 삶, 그의 일, 그리고 그의 존재 속에 성육시킨 그 동터오는 실재에 부여한 이름이라면, 복음서 전체가 사람의 아들의 내용이다. 오스카 쿨만은 "사람의 아들이란 개념은...예수의 전 사역을 포용하는 것인데, 이는 다른 어떤 개념으로도 못하는 것이다"라고 말한다. 참사람이란 예수가 무엇이었으며, 그가 어떠했으며, 그리고 그의 개성화(자기실현) 과정이 무엇이었는지를 의미한다.
만일 교회가 예수를 "사람의 아들"이라고 칭호의 의미로 부르기를 원했다면, 보통은 그렇게 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면 예수는 자기 자신에 대해서는 통상적인 "나"라고 말했으리라. 혹은 예수로 하여금 자기 자신을 "사람의 아들"이라고 불렀다고 하기보다는, 복음서 기자들이 제3인칭으로 "사람의 아들"에 대해서 말했으리라.
경우야 어찌되었든, 복음서 기자들은 이처럼 자기 자신을 부르는 색다른 말을 예수의 입술에만 올리기를 반복했다. 이것은 교회가 그런 모든 경우를 만들어냈다고 볼 수는 없다는 뜻이다. 그보다는 예수의 독특한 어법 때문에 교회가 첨가한 표현들을 그의 독특한 자기호칭에 맞도록 제한했다고 본다. 요한복음서나 혹은 공관복음서들의 묵시론적 시나리오에서처럼, 심지어 교회가 사람의 아들이라는 용어를 만들어냈다고 할지라도, 교회는 예수 자신의 언어 습관에 일치하도록 하였을 것이다.7)
랜달 부트가 주목한 것은, 갈릴리(아람어, 히브리어, 그리고 그리스어의 순서로 통용)나 유대 마을들(사람들은 히브리어와 아람어를 알았고)에서는 두 가지 혹은 세 가지 언어들이 널리 통용되었다는 점이다. 상층계급은 그리스어, 아람어, 히브리어 순서로, 그리고 하층계급은 아람어, 히브리어, 그리스어 순서로 언어들을 알았다. 유대인들의 구약성서 그리스어 번역본들 가운데 많은 번역본은, 기독교인들처럼 "주님(the Lord)"이란 말을 사용하지 않았고, 그 대신 신의 이름의 히브리어 문자들(YHWH)을 보전했다. 마찬가지로, 어떤 쿰란 두루마리들은 아람어 문서들 속에서도 신의 이름은 옛 히브리 문자로 썼다. 부트는 계속하여 말하기를, 그러니 만일 예수가 다니엘의 "사람의 아들 같은 분(One like a son of man)"이라는 같은 계통의 전통 안에 있음을 그의 청중들에게 알려주기를 원했다면, 그 아람어 구절 bar enasha를 히브리어 문장 한 가운데에 살려두는 것보다 더 좋은 방법이 었었겠는가? "그 짧은 언어 바꿈이 청중들로 하여금 그 기본적인 의미보다는 좀 다른 뜻이 있음을 알아차리도록 했을 것이다. 이는 마치 그 구절을 인용부호 안에 넣는 것이나 마찬가지 효과를 냈을 것이다." 그 표현을 그리스어로 번역하였을 때, 아람어도 히브리어도 사용될 수 없었으니, 정관사들을 사용하여 동일한 효과를 얻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 결과는 세련되지 않은 동시에 신비한 그리스어가 나타나서, 독자들로 하여금 뭔가 특별한 것이 여기 있다는 신선한 느낌을 갖게 만들었다. 이것이야말로 또한 복음서 기자들이 이중의 정관사를 사용하기로 거의 동의한 점들을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시리아어 역본들과 복음서들의 인용문들을 비교해보면, 이런 짐작이 맞는다고 뒷받침할 것이다. 그 복음서 용어를 나타내기 위해, 시리아 역본들은 때로는 "그 복음서 용어를 표현하는 것 이외에는 보통 시리아에선 그런 식으로는 표현하지 않는" 바로 그런 형식에 의존하였다. 이것은 바로 그 칭호가 시리아 번역자들에게는 당황스러웠거나, 아니면 그들이 그 비밀스러운 의미를 완벽하게 이해하고 있었다는 뜻이다.
노먼 페린은 사람의 아들에 관한 모든 말씀들은 교회가 만들어낸 것이라고 본다. 그는 기독교인들의 이런 해석학적 활동에 두 단계가 있었다고 본다. 첫째로, 기독교인들은 다니엘 7:13과 시편 110:1에 근거해서, 예수가 하느님에게 올라갔다고 생각했다. 둘째로, 그들은 예수가 이 땅에 다시 돌아올 것을 믿었다("재림"). 페린의 이런 주장은 부활절 이후의 사람의 아들 말씀들을 설명한다. 그러나 그것은 부활절 이전에 있었던 사람의 아들 말씀들의 출처를 적절히 설명하지 못한다. 믿는 사람들이 일단 예수를 이 세계의 초월적인 심판자요 하늘에 있는 구원자로서, 하느님의 권능의 오른편에 앉아 있다고 그의 정체성을 알았다면, 내가 부활절 이전의 말씀들이라고 밝힌 그런 말씀들을 굳이 만들어낼 강력한 이유는 없었을 것이다.
바울은 복음서들이 써지기 전에 이미 하느님의 아들 기독론을 전수받아서 발전시켰다. 복음서 기자들이 사람의 아들이라는 또 다른 기독론을 만들어내기 위해서 그렇게 발전된 기독론을 포기할 인센티브는 없었을 것이다. 또한 페린의 이론은 도대체 왜 사람의 아들이란 말이 예수의 입술에만 올려졌는지를 설명하지 못한다. "아들" 혹은 "하느님의 아들"이란 말도 예수의 입술에 나타남을 버케트는 지적한다. 그러나 그런 말들은 다른 사람의 입술에서도 기독론적 고백으로 나오지만, "사람의 아들"은 안 나온다. 분명히 복음서 기자들 가운데 적어도 하나는 헬레니즘 세계에서 사람의 아들은 미래가 없다고 본 것 같다고 버케트는 말한다. 그리고 나서, 바울이 그랬듯이, 그들 복음서 기자들은 이미 잘 확립되었으며 친숙한 "하느님의 아들 기독론"을 위해서 "사람의 아들 기독론"을 포기했을 것이다. 나중에 신약성서 기록들, 계속되는 신학 문서들, 전례문들, 그리고 신조들이 "아들"과 "하느님의 아들"을 더 발전시켰다. 그러나 사람의 아들은 기독교 토론에서 사실상 사라져버렸다.8) 물론 예수가 이 예외적인 표현의 출처가 아니었다면, 번역자들은 그 말을 여러 다른 방법으로 표현했을 것이다.
예수는 "사람의 아들"이란 말 속의 "사람"을 인간("참사람[Man]")보다는 하느님(God)을 지칭하는 말로 사용했을 수도 있다. 영지주의자들은 에스겔이 그런 표현을 사용한 것을 토대로 하여, 확실히 그렇게 이해했다. 그러나 그 표현은 아직도 시편 8편 속의 용법에로 되돌아가서, 인간의 비천함과 거기에서부터 높여짐을 강조한다. 이런 빛에 비추어볼 때, 하느님의 아들은 더 높은 경칭이 아니다. 그건 아마 틀림없이 인간의 변화 가능성이 승천한 원형으로서 "사람의 아들"이 무엇을 뜻하는지에 대해 알기 쉽게 설명한 주석일 것인데, 그 승천한 원형은 하느님 우편에 앉게 된 참사람 같은 한 분이다(누가 22:69). 그리고 만일 "사람의 아들"이 하느님을 그의 아버지로 갖는다면, 추론에 의해 예수는 하느님의 아들이다. 기독론적 발전의 계보는 다음과 같이 이루어졌을 것이다.
참사람 같은 한 분(the Human One)으로서의 하느님
그 참사람 같은 한 분의 아들인 에스겔
그 참사람 같은 한 분의 아들인 예수
그래서 예수는 참사람 같은 한 분인 하느님의 아들
그렇다면 예수는 생전에 자기를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부르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예수가 사용한 자기호칭인 "사람의 아들"에서 자연히 흘러내려 파생된 것이 "하느님의 아들"일 것이다. 예수가 생전에 그런 조처를 취했을 수도 있었을까? 만일 그가 "아들"이라는 말을 신성에 대해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과의 관계성에 대한 의미로 사용했다면, 아마도 그랬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복음이 이방인들의 환경 속으로 전파되면서, 그들 이방인들은 "하느님의 아들"을 신적인 존재로 여겨 다르게 (본래의 관계적 의미와는 달리 존재론적/생물학적 아들의 의미로) 알아들었다.
이 책의 연구에서 내리는 판단은 예수가 복음서 속의 부활절 이전의 사람의 아들 말씀들 가운데 몇 가지를 정말로 말했다는 것, 그가 자신의 처형을 예상했다는 것, 예수가 참사람으로서 본을 보이고 또 가능하게 만든 보다 충만한 인간됨에로 인간들의 변혁을 전망했다는 점이다. 교회가 추가적으로 말씀들을 발전시켰으리라는 것은 물론 예상된다. 그들이 항상 그의 참된 뜻을 제대로 구현한 것은 아니라는 점은 더 말할 것도 없다. 그러나 본질적으로 그처럼 원형적인 이미지들에 대해 학자들이 오직 합리적인 개념들만을 적용한 것은 잘못한 것이다. 이들 이미지들은 무의식으로부터 나와 우연히 응결된 것으로, 정신의 깊은 곳에서부터 예수의 삶의 중요성에 대해 표시한 것들이다. 그 이미지들의 진리는 역사성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의 승천 후, 즉 예수가 참사람의 원형에 들어간 뒤에, 믿는 자들 속에서 일어난 정신내적 변혁을 신실하게 표현하는 데 있다. 이것이 부활절의 진짜 기적이다.
달리 말해보자. 참사람의 원형을 지닌 사람으로서 예수는 성스러운 능력을 활성화해서, 그 능력에 자신들을 내어맡기는 사람들에게 치유, 변혁, 그리고 새로운 태어남을 가능하게 한다. 그러하기에 예수는 자기 자신이 자기보다 더 큰 능력에 사로잡혔음을 알았다. 그러나 바로 여기에서 문제가 발생하는데, 예수가 인간됨의 원형을 지닌 유일한 사람으로 경배될 때, 그는 초자연적인 존재로 둔갑한다. 그러자 그는 인간이 되려는 투쟁과 노력에 연결됨을 상실하고, 그가 담지한 실재보다는 오히려 그의 인격에 초점을 맞춘 종교 속에서 숭배의 대상이 된다.
"언어는 내면을 보는 것이다"라고 시인 루미는 썼다. 참사람 전통의 시원에 있는 에스겔의 환상은 내면을 보는 언어다. 에스겔의 언어는 너무나 압도적인 봄의 충격으로 인해 깨어지고 기운이 빠져버렸다. 내면을 보는 것으로 언어가 추구하는 것은 진짜 환상, 진리, 그리고 소통이다. 보는 것과 동떨어진 언어는 공허하고, 김빠지고, 자기주장만 고집한다. 언어의 쇄신은 실제로 보고, 그 보는 것이 그들을 축복할 때까지 언어와 씨름하는 사람들로부터 이루어진다. 교회가 하느님이 계시한 것을 표현하고, 직접 경험을 통하여 혹은 사도들과 예언자들과 전통들, 그리고 마지막으로 복음서들을 통하여, 그런 계시를 계속해 가려고 노력하였을 때, 교회는 때때로 "내면을 보는 것"을 "외부를 보는 것"으로, "환상"을 단지 "견해"로 바꾸어버렸다. 그 결과는 심판하고 파괴하기 위해서 하늘의 구름을 타고 내려오는 사람의 아들이다. 그 이후로는, 교회의 박해자들뿐만 아니라, 교회 지도자들과 교인들도 너무나 자주 진지한 기독교가 분출하지 못하도록 노력했다.
우리는 그 과정을 거꾸로 하여, 현재의 원형적 실재로서 지금도 미래의 인간성을 창조하고 있는 지혜의 자녀의 환상, 소리, 통지를 상상의 영역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우리는 하느님의 최후 승리를 포기하지 않지만, 그러나 이 승리는 그것이 역사 속에 나타나기 오래 전부터 비국소적 실재 속에 준비되어 있었음을 우리는 인정한다. 시인 릴케가 말했듯이, "미래는 실제로 일어나기 오래 전에 이미 이런 식으로 우리 안으로 들어오는데, 우리들 속에서 변화하기 위해서라네."
C. 참사람
보라, 내가 신비를 말해주마.
하느님은 참사람이다.
그리고 우리는
하느님처럼 될 수 있다.
우리의 돌고 도는 여정은 마침내 니콜라스 베르자예프에게로 돌아오게 되는데, 그는 20세기의 진짜 예언자요, 인간학적 계시의 선구자다. 그는 "큰 권능과 영광을 지니고"(마가 13:26) 장차 오실 그 참사람은 인간의 그리스도론적 성격을 드러낼 것이라고 믿었다. "오실 그리스도는 기독론적 자기 계시를 용감하게 성취하는 인간성, 즉 그 자신의 품성 안에서 신적인 권능과 영광을 계시하는 그런 인간성에게만 올 것이다." 사람들의 창조적인 능력을 고갈시키고 그들을 단지 복종하게만 만드는 상당수 기독교의 거짓된 겸손과 수동성에 대하여 베르자예프는 슬퍼했다. 그는 말하기를, 그리스도는 창조적으로 적극 활동하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권능과 영광으로 오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창조적인 행동이야말로 인간의 본성이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기독교는 자주 창조적인 영을 분쇄해버렸다. 믿는 자들은 자신들이 너무 높이 올라가려 하고 너무 모험을 감행한다고 자신들의 지나친 오만에 대해 죄의식을 느끼도록 되었다. 종교 당국자들은 사람들의 실패를 처벌해서, 그들로 하여금 자신들이 너무 높아지지 않도록 방어하는 것을 배우도록 만든다. 이런 경향에 반대하여, 베르자예프는 요한복음이 이미 선언했던 "인간 변혁의 계시"를 알린다; "나를 믿는 사람은 내가 하는 일을 그도 할 것이요, 그보다 더 큰 일도 할 것이다. 그것은 내가 아버지께로 가기 때문이다"(요한 14:12). 이와 똑같은 말씀이 참사람에 관한 경외서의 말씀에도 나타나 있다; "너희 둘을 하나로 만들면, 너희는 참으로 참사람들['사람의 아들들(sons of men)']이 될 것이며, 너희가 말하기를 '산아, 저리로 움직여라' 하면 산이 움직일 것이다"(도마복음 106).
베르자예프는 인간의 종교 의식의 과제가 그 기독론적인 의식을 밝혀내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모든 시간과 계절을 초월하는 신비가들만이 인간성의 기독론을 눈치챈다. 그리스도의 인간학의 반대편인 인간성의 기독론만이 기독교인들의 인간성 안에서 하느님의 진정한 이미지와 유사성을 계시할 것이다. 만일 문자 그대로 다루면 천박한 통찰에 불과하지만, 피오레의 요아킴의 위대한 통찰은, 성부와 성자의 시대는 곧 성령의 시대를 열어간다는 것이었다. 이것이 오늘날 우리들에게 의미하는 바는, 어떤 경우들에는 성서나 전통으로부터 명확한 안내를 받을 수 없다는 말이다. 현대과학, 정치, 공학기술, 유전공학, 낙태, 성적 지향을 다룰 때, 심지어 성서의 훈계가 너무도 확실한 경우에도, 우리는 예수가 한 말씀, 즉 "어찌하여 너희는 옳은 일을 스스로 판단하지 못하느냐?"(누가 12:57)를 따라야 한다. (그리고 우리는 심지어 그 말씀조차 옳은 것인지를 스스로 결정해야 한다. 분명히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은 그 말씀이 옳지 않다고 결정한 것 같은데, 왜냐하면 그들은 그렇게 살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가 성서본문을 찾아서 안내를 받으려고 하는 것은 절망 가까이 있는 종교적 불안에서 태어난 것이다. 우리의 목적은 더 이상 위에서 내려온 계시로 될 수 없다. 안식일에 곡식 이삭을 잘라먹은 이야기 속의 예수의 제자들처럼, 우리도 외부의 권위가 없이 내부에서 그 권위를 찾아야 된다. 명령하는 하느님은 뒤로 물러선다. 위에서 내려오는 도움이 없게 된 것은 하느님의 위대한 지혜를 보여준다. 우리의 목표를 율법에 복종하는 것으로 제한하는 것은 창조성을 복종으로 만드는 것이고, 이는 창조성이 없다고 말하는 것이다. 참사람에 접속된 인간들만이 우리들에게 절실히 필요한 대담성의 진리를 계시할 수 있다. 베르자예프는 이런 비결에 대한 신적인 계시는 있을 수 없다고 주장한다. 하느님은 인간 변혁의 계시가 무엇인지에 대해 알고 싶어 하지도 않을 것이니, 그러면 하느님이 우리들에게 준 자유를 모독하는 것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더욱 근본적으로는, 하느님이 알 수도 없는 것이, 왜냐하면 우리의 창조적인 응답들은 원칙상, 설사 하느님에 의해서도, 미리 알려질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인간은 창조성을 통해 지금껏 알려지지 않았던 새로운 세계를 창조하도록 요청받는다. 이런 인간성의 기독론의 정신적 담지자가 참사람, 곧 사람의 아들이다. 지난 2천 년 동안 이 강력한 이미지는, 비록 일부 개인들이나 운동들에서 이런 원형을 상당히 생생하게 지켜오긴 했지만, 대체로 무기력한 상태로, 사용되지 않았고, 무시되어 왔다. 많은 사람들이 믿을 수 없는 곤란을 무릎쓰고 모험을 감행했는데, 이는 그들 속에서 뭔가가 작용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즉, 사람의 아들이라는 이미지를 탄생시킨 것과 동일한 원형이 작용했다는 말이다. 우리들 속에서 하느님이 인간이 되기를 갈망해서, 우리로 하여금 인간이 되라고 독려하는 것일까? 신학자들은 참사람을 무시하면서도, 그 밖에 생각될 수 있는 모든 칭호를 예수에게 다 붙이려고 해보았다. 나는 인간학적 계시의 때가 왔으며, 건축자들이 버린 돌이 모퉁이 돌이 될 것이라 믿는다.
예수에 초점을 둔 기독론적 계시는 하느님이 인간 속에 성육하기를 원했다는 것이다. 이런 인간학적 계시는, 아직 완성되지는 않았지만, 하느님이 인간을 목표로 하여 혹은 하느님이 참사람이니까 최소한 그 계시를 인간이 되는 것이라고 불렀다. 우리는 신성을 다시 정의할 수 있는데, 신성은 초인도 아니고, 인간 이후의 차후 인간도 아니고, 혹은 신과 같은 인간도 아니라, 이미 우리가 인간들이 된 것에서 더욱 충만하게 되는 것이다. 앞에서 말한 대로, 우리는 우리가 아닌 그 무엇-신적인 것-이 되도록 요청받는 것이 아니라, 우리들인 것, 곧 인간이 되라고 요청받는다. 이런 과제들을 성취하는 것, 즉 인간들 속에 하느님이 성육하고, 인간들이 하느님을 성육하는 것은 대단한 성숙, 심지어 영웅적인 용기를 필요로 한다. 어떤 사람들, 가령 포이어바흐 같은 이들은, 우리가 상상 속에서 하느님을 경험하기보다는, 오히려 우리가 상상의 힘으로 하느님을 창조한다고 결정할 것이다. 하느님 원형이 우리와 상호작용을 통해서 발전하는 것도 맞지만,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하느님 원형은 살아계신 하느님을 만난 모든 사람들이 증언하듯이, 초월적이고 타자이다.
이 책에서 주장한 요점은 간단히 말해, 예수는 사람의 아들로서 충분하다는 점이다. 메마르고 야윈 기독교가 세상에 줄 수 있는 것은 교리들, 신조들, 이론들, 예배의식들, 영적인 기도문들이 아니다. 비록 이런 전통들이 아직도 많은 사람들에게 큰 영향력을 지니고는 있지만 말이다. 기독교가 세상에 줄 것은 단순히 예수다. 또한 기독교가 주는 예수는 신인양성론, 혹은 삼위일체론의 제2위, 혹은 성부와 동일본질의 예수가 아니다. 비록 어떤 신앙 전통에 속한 사람들은 이런 모든 개념들을 소중히 여기고 있지만 말이다. 만일 참사람 원형이 그 변혁적인 과제를 수행하려면, 우리는 사람들로 하여금 그 성스러운 것에 접촉하도록 도와줄 수 있는 새로운 신학들, 예배의식들, 기도 형식들, 그리고 영적 기도문들을 발전시킬 필요가 있다. 그러나 나는 예수를 하느님으로 예배하고 싶은 것이 아니라, 예수가 예배했던 하느님을 예배하고 싶다.
기독교가 줄 수 있는 것, 그리고 기독교가 줄 필요가 있는 것은 인간 예수의 신화다. 그것은 유대인 예수, 한 인간, 성육한 사람의 아들의 이야기다; 불완전하지만, 그래도 여전히 모범적이고, 권력자들에게 희생되었으나 여전히 승리자이며, 부숴졌지만 다시 일어나는 자, 힘 있는 자들의 군홧발에 짓밟혀 땅에 먼지처럼 가루가 되는 사람들과 연대하는 자, 죽음의 세력 아래 있는 자들을 치유하고, 배척받아 변두리 인생들이 된 모든 자들을 사랑하고, 용서하는 자, 해방시키는 자, "문명"이라고 부르는 지배 세력의 암적인 존재들을 폭로하는 자, 그 예수는 권세들이 죽였지만, 죽음이 그를 없애버리지 못하는 자다. 하느님이라는 실재와 다가오는 하느님의 새로운 세계 위에 그의 헌신의 마지막 한 방울까지 다 던진 한 사람에 대한 간단한 이야기가 바로 예수다.
그 과정에서 그는 그의 육신과 피로써 살아냈다. 사람의 아들이라는 원형, 참사람 같은 한 분의 자녀, 지혜의 자녀, 새로운 존재, 자매자손으로서-당신이 무엇이라고 부르든- 그 새로운 인간성이 수반하는 것을 살아냈다. 그렇게 하는 가운데서, 그는 하느님을 성육시켰을 뿐 아니라, 사람들이 하느님을 경험하는 방식을 변경시켰다. 간단히 말해서, 힌두교인 간디가 그토록 명료하게 본 것처럼, 기독교가 세계에 주는 선물은 기독교가 아니라 우리의 참된 인간성의 계시자이며 촉매자인 예수(Jesus, revealer and catalyst of our true humanity)다.(참조, 예수의 존재론적 질문에 대하여, 발람의 나귀).
....
1) 누가는 재림을 빠뜨림으로써, 혹은 다른 특수 자료(누가 22:67-68에 반영한 듯)를 사용함으로써, 마가 14:62을 바꾸어 버렸다. 어쨌든 움직임의 방향은 땅을 향한 것이 아니라 하늘을 향한 것이다. 누가는 환상을 보는 능력을 예수를 반대한 권력자들에게 돌리고 싶지 않았기에, 사람의 아들을 "보는" 것에 대한 언급을 생략했다.
2) "그리고 예수의 생애는 내가 언급했던 의미와 투명성을 지니고 있으므로, 나는 그가 기독교만이 아니라 전 세계에 속한다고 믿는다".
3) 나는 참사람에 대한 보편적인 신화가 예수에게 전해졌다는 그의 확신에만은 동의하지 않는다. 앞에서 우리가 본대로, 그런 신화는 없었다. 그러나 역사의 자궁 속에서 태동하던 원형의 움직임은 있었다.
4) Regna Lwivestad는 예수가 자신을 에스겔의 재현으로 생각했을 것이라고 제안했는데, 별로 놀랍지 않은 가능성인 것이, 예수 당시에는 이스라엘의 예언자들이 다시 돌아온다는 의견들이 존재했었기 때문이다.
5) "Nobody"에 대해서는 렘 49:18, 32; 50:40; 51:12를 보라. 시편 49:2(히 49:3)과 4:3에 의하면, bene ish는 지위와 명성이 있는 사람들의 자식이고, bene 'adam은 보통 사람들의 아들이라서, 별로 특별할 것도 없다. 또한 시편 62:9(히 62:10), 잠언 8:4; 이사야 2:9; 5:15도 마찬가지다. E.A. Abbott는 마가 2:10을 "보통 사람, 혹은 비천한 출생의 사람이 땅에서 죄를 용서하는 권세를 가지고 있음을 너희에게 알려주겠다..."라고 읽기를 제안했다.
6) 융은 "역사적 사람의 아들과 anthropos로서 그[Jesus]는 각개 내적 인간의 표준이며, 동시에 경험적 인간의 최고점이요 목표요 전부다"라고 말한다.
7) 한 편지 속에서 Burkett는, "초기에 (이젠 사도행전 7:56에 보여지는데) 예수가 아니라 교회가 예수에 대하여 사람의 아들이라고 말했다. 이 시점에서는 예수에 대하여 사람의 아들이란 3인칭으로 말하는 것이 자연스러웠으리라"고 말한다. 예를 들면, 예수에 대한 초기 기독교의 말씀에서 "사람의 아들이 길 잃은 자들을 찾아 구원하러 왔다"고 말하는 것을 상상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그러나 복음서들은 그렇게 말하지 않았다. 그런 설명은 예수에 대하여 만들어진 것이지, 예수에 의해 만들어진 것은 아니며, 그리고 당황스러운 것은 후자의 경우다.
8) 정경화된 이후의 히브리성서에선, 오직 한 군데, 쿰란문서에서 "사람의 아들"이란 말이 나온다. 거기에 h는 서기관에 의해 첨가된 것으로 글줄위에 써졌다. "여인에게서 태어난"과 동의적인 평행구로서 "사람의 아들"은 여기에서 단지 "사람"을 의미할 뿐이다. "이리하여, 그 구절이 예수에게 적용될 경우엔 언제나, 거의 일관되게 신약성서는 달리 예가 없는 형태를 고수한다." 예수가 사용하는 사람의 아들에서 실제상 전례가 없는 정관사의 사용은 다른 사람들이 만들어낸 칭호하기보다는 예수 자신의 사명과 목표의 결과라고 해야 더 잘 설명될 것이다.
.....
[에필로그]
이상으로 월터 윙크 교수의 "참사람;예수와 사람의 아들 수수께끼(The Human Being : Jesus and the Enigma of the Son of the Man)"의 연재를 마칩니다.
연재중에 발생한 "세월호 대학살"(박근혜 정권하에서 2014. 4. 16일에 발생한 '세월호 침몰사건'은, 정부당국의 신속한 대처와 구조활동을 통하여 단순한 사건사고로 끝날 수도 있었던 것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사고 초기 대응에서부터 무능한 정권의 실상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며 침몰하는 세월호 속에서 단 한 명의 생존자도 구해내지 못한, 그리하여 희생자의 유가족들은 물론이거니와 온 국민이 지켜보는 눈앞에서 수백명의 학생과 승객들이 죽임을 당한, 우리나라 역사상 최악의 "대학살"입니다.발람의 나귀)은 과연 사람(인간)이란 무엇인지, 즉 예수가 그토록 추구하였던 "참사람(사람의 아들)"이 무엇인지, 그리고 이 불의와 불법의 지배체제 안에서 "참사람"을 추구하는 우리의 역할은 어떻해야 하는 지, 내가 그동안 역사적 예수, "사람의 아들"로서의 예수, "하느님의 아들"로서의 예수에 대해 가졌던 이해는 옳은 것이었는지를 끊임없이 상고하고 씨름하도록 나 자신에게 질문을 던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제 나름대로의 결론은 2014. 4. 16일 세월호 대학살 이후 이 땅 대한민국의 박근혜 정권하에서는 딱 두 부류의 사람들로 나뉘어 졌으니, 사람의 탈을 쓴 짐승들과 그 짐승들의 조롱거리가 된 불쌍한 사람들입니다(참조, 2014, 침몰하는 한국호(동승한 사람과 짐승들)).
하여 이제 연재를 마치면서 그 동안 각 장이 끝날 때마다 제 자신에게 던졌던 몇 가지 질문을 여러분에게 똑같이 드립니다.
인류의 생존마저 위협당하는 현실에서 기독교가 무기력한 이유는 무엇인가?
원수사랑을 가르친 기독교가 왜 인류 역사상 가장 잔인한 종교가 되었는가?
19세기 이후 역사적 예수 연구는 왜 인간과 사회 변혁 운동에 실패했는가?
예수는 성육신한 하느님으로 예배되기 전에 어떻게 하느님을 성육신했는가?
예수를 구원자로 믿기 이전에 예수가 가르친 믿음의 본질은 무엇이었는가?
예수는 왜 자신을 메시아와 동일시하지 않고, 사람의 아들이라고 말했는가?
예수가 가난한 이들과 병자를 대하면서 가장 심혈을 기울인 것은 무엇인가?
예수는 왜 하느님 이미지에서 분노, 질투, 복수, 심판과 폭력을 제거했는가?
"끝없는 용서"를 가르친 예수를 "최후 심판자"로 둔갑시킨 결과는 무엇인가?
성직자들과 정치권력은 무슨 이유로 "심판과 복수의 하느님"을 선호하는가?
저의 연재글을 통하여 월터 윙크 교수의 전하고자 하는 뜻이 조금이라도 훼손되지 않았길 바라며, 그동안 함께 해주신 모든 분들께 하느님의 사랑을 전합니다.
"Open up your heart and let God's love come in."
하느님 감사합니다.
월터 윙크 교수님 고맙습니다.
The End
2014. 5.18 광주민중항쟁 34주년의 날에 발람의 나귀
|
첫댓글 '기독교가 예수를 그들 자신들만을 위하여 간직하려고 한다고 유감스럽게 생각했다.2) '
작금의 교회와 하나님과의
관계 역시 낫씽입니다 ㅎㅎ
그들의 필요에 의해 예수나 하나님의 이미지를 끊임없이 만든 게지요
수고하셨습니다 나귀님~^^(토닥토닥)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