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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은 구원의 확신을 갖는 것입니다. / 마 11:1-19
사람들은 어려우면 “죽겠다!”고 합니다. 그러나 믿는 사람은 어려워도 “죽겠다!”는 말 대신에 발음을 조금 변형시켜서 “주께 있다!”는 말을 해야 합니다. 그리고 희망을 포기하지 말고 오히려 절망을 포기하십시오. 인생은 선택입니다. 희망을 포기하기로 선택하면 죽는 길이 열리지만, 절망을 포기하기로 선택하면 반드시 사는 길이 열립니다.
플라시보 효과라는 것이 있습니다. 의사가 효과 없는 가짜 약, 또는 꾸며낸 치료법을 환자에게 제안했는데, 환자의 긍정적인 믿음으로 인해 병세가 호전되는 현상을 말합니다. 어느 실험에서 참가자들에게 약을 주면서, “이 약을 마시면 구역질이 난다”고 말해주었습니다. 그러자 약을 마신 자들이 모두 구토 증세를 보였고, 그중 80%는 실제로 구토를 했습니다. 그래서 다시 “이 약은 구토를 중지 시키는 약이다”고 하면서 약을 주자, 참가자들은 그 약을 먹고 즉시 구토를 멈추었습니다. 두 가지 약 모두 색깔만 다를 뿐이지, 아무런 약 효과가 없는 거였습니다. 플라시보 효과가 어떨 때 더 나타나는가를 실험해 본 결과입니다. 환자가 의사와 병원을 신임하면 신임할수록 효과가 좋았습니다. 한 번 약을 먹어서 그 약의 효과를 본 환자일수록 효과가 좋았습니다. 똑같은 약이라도 가격이 비싸다는 것을 알고 복용하면 효과가 더 컸습니다. 솔직하고 순진한 성격의 사람일수록, 새로운 경험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므로 효과가 더 크게 나타났습니다. 반면에 노시보 효과라는 것이 있습니다. 진짜 약을 처방해도, 그 약이 해롭다고 생각하거나, 효과가 없을 것이라는, 환자의 부정적인 믿음 때문에 약효가 떨어지는 현상을 말합니다. 의사의 처방전을 들고, 약국에 가서 약을 받고는, 자기가 다시 조제를 합니다. “이것 먹어봤자고, 이건 먹으면 속 버리고, 이거 하나 쓸만하네. 그래도 안 먹는 것보다는 나으려나?” 이런 부정적인 믿음으로 먹는데, 약효가 나타나겠습니까?
미국의 어느 철도회사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그 회사에서는 열차가 역에 정차하고 있는 동안에, 한 직원에게 냉동차 안을 청소하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냉동차 안에서 사람이 청소하고 있다는 것을 모르고, 누군가 문을 밖에서 걸어 잠그고 떠나버렸습니다. 안에 갇힌 사람은 냉동차 안에서 탈출하려고, 도움을 요청하기도 하고, 강제로 문을 열려고 노력을 했으나 헛수고였습니다. 결국 그는 냉동차 안에서 정신을 잃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다음날 시체로 발견되었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점이 있었습니다. 당시 냉동차 안의 온도가 14도로 바깥 기온과 별 차이가 없었습니다. 냉동차의 스위치가 꺼져있어서, 냉동시설이 가동되고 있지 않았던 것입니다. 게다가 그 안에서 그가 하룻밤을 보내는데, 아무 문제가 없을 정도로 산소가 충분히 있었습니다. 곧 아무리 냉동차 문이 밖에서 잠겼다고 해도, 그 사람이 죽을 이유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가 죽은 물리적 이유를 찾아낼 수 없었던 사람들은, 이런 결론에 이르렀습니다. ‘그가 스스로의 생각에 의한 쇼크 때문에 사망했다.’
이러한 현상을 심리학에서 자기 확신이라고 합니다. 이는 일정한 생각을 반복하면, 그 생각이 실제로 심리적, 신체적으로 영향을 주는 현상을 말합니다. 냉동차를 청소하다 갇혔던 사람은, ‘여기는 냉동차 안이야, 추위 때문에 나는 결국 얼어 죽고 말거야’ 하는 생각을 반복했기에, 죽고 말았던 것입니다. 이처럼 부정적인 자기 확신은 자기를 죽음으로 몰아갈 수 있습니다. 부정적인 자기 확신의 다른 말이 ‘자기 비하’입니다. ‘자기비하’는 일반적으로 어떤 사람이 스스로의 능력이나 위상을 낮게 평가하고, 스스로를 경멸하는 투로 묘사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자기비하에 상반된 개념으로, 자기효능감이 있는데 스스로의 행동, 활동을 잘 해낼 수 있다는 자신의 능력에 대한 신념체계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잘난 부분과 못난 부분이 있습니다. 그런데 습관적으로 자기비하를 하는 사람은, 자신의 잘난 부분은 잘 보지 못하고, 못난 부분만을 과장하여 반복해서 생각합니다. 반대로 자기효능감이 강한 사람은, 잘난 부분에 구체적 자신감을 가지고 있으며, 이를 토대로 못난 부분이라도 차차 고칠 수 있다며 자기를 긍정적으로 봅니다. 자기효능감을 키우고, 습관적 자기비하로부터 벗어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첫째, 자신이 잘 하는 일을 반복 실행하는 것입니다. 둘째, 삶의 오답노트를 쓰는 것입니다. 셋째, ‘자기 자신에게 친절하기’입니다. 성적이 떨어져 충분히 공부하지 않는 자신에게 실망했다는 학생이 선생님을 찾아왔습니다. 그 학생의 얘기를 듣고 난 선생님이 물었습니다. “만약에 너와 비슷한 상황에 있는 후배가 있다면 너는 그 애한테도 ‘너는 안 돼, 그럴 줄 알았어’라고 말할 거니?” “아니오.” “그럼, 너는 그 후배한테 어떻게 말해줄래?” “뭐, 넌 할 수 있다, 잘 될 거니까 마음 편하게 먹어라, 이렇게 말하겠죠.” “그래? 그런데 가장 소중하고 귀한 너 스스로에게는 왜 그렇게 말하지 못하는데?” 학생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일어나 나갔습니다.
1절 ‘예수께서 열두 제자에게 명하기를 마치시고, 이에 그들의 여러 동네에서 가르치시며 전도하시려고 거기를 떠나 가시니라.’
제자들이 전도훈련을 한 후 실습까지 마쳤습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을 데리고, 여러 동네로 다니셨습니다. 이유는 가르치고 전도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훈련시킨 후 실습하고, 실습 후 사역하고 해서, 제자다운 제자로 만들어가셨습니다. 언제 어디서 누구를 만나도, 가르치고 전파하고 치유할 수 있는 제자로 세워가셨습니다. 예수님의 관심은 오직 그거였습니다. 무리들을 만나서, 그들의 필요를 채워주실 때도 있었습니다. 각색 병든 자들을 고쳐주셨습니다. 귀신 들린 자들을 치유해주셨습니다. 그럼에도 주님의 깊은 관심은, 자신들의 필요를 위해 따라다니는 무리들이 아닌, 열두 제자에게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목회는 제자훈련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를 세우는 목회에, 지극 정성을 기울이셨습니다. 예수님이 가시면 교회가 남겨질 텐데, 이 교회를 제자들이 세워가야 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머물러 있을 때도, 가르치고 전파하고 치유하는 사역을 하셨고, 제자들과 함께 떠날 때도, 가르치고 전파하고 치유하는 사역을 행하셨습니다. 지역만 달라지고 대상만 바뀌었지, 매일 하는 일은 같았습니다.
사실 우리 삶도 그렇지 않습니까? 매일 매일이 별다른 삶이 아닙니다. 삶은 이벤트가 아닌 일상의 반복이기 때문입니다. 반복되는 일상에 의미 부여를 잘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사람들이 어쩌다 한 번씩 하는 말이 있습니다. “이날 평생 죽어라 일만하고.” 건강한데 할 일 없어보세요. 쉬는 것도 며칠입니다. 여행하는 것도 며칠입니다. 성지순례나 해외관광을 1달씩 가보세요. 처음 1주는 견딜만하지만, 그 다음부터는 집 생각이 간절하게 나게 되어 있습니다. 성경은 노동을 축복이라고 합니다. 수도원에서 기도가 노동이고 노동이 기도라고 했습니다. 내가 속해 있는 교회가 있고, 그 안에서 내가 할 사역이 있다는 게 감사할 일입니다. 그게 주의 일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감당하기 바랍니다.
2절 ‘요한이 옥에서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을 듣고 제자들을 보내어’
세례 요한이 예수님한테 자기 제자들을 보내왔습니다. 당시 요한은 옥에 갇혀 있었습니다. 무슨 잘못을 해서라기보다 통치자한테 밉보여서입니다. 예나 오늘이나 최고 통치자한테 밉보이면, 어려움이 따릅니다. 그걸 감수하고도 자신의 믿는 바를 지키며 사는 사람은 존경받아야 합니다. 당시 통치자가 헤롯입니다. 그런데 그가 자기 동생 빌립의 아내를 빼앗았습니다. 헤로디아가 예뻤던 모양입니다. 자기 아내도 예쁠텐데 만족하지 못하고, 다른 사람도 아닌 자기 동생 아내를 취한 것입니다. 백성들의 시선도 곱지 않았습니다. 종교지도자들은 비판적인 관점을 가졌습니다. 신하들도 대놓고 말은 못해도 입을 삐죽거렸습니다. 그러나 헤롯 면전에서는 다들 침묵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성질이 더러웠기 때문입니다. 그때 세례 요한이 헤롯 앞에 나섰습니다. “그건 부당한 일이오.” 그러자 그의 입을 틀어막기 위해 붙잡아다 옥에 가뒀습니다. 요세푸스에 따르면, 헤롯은 세례 요한을 사방이 절벽으로 둘러싸인 천연의 요새인, 사해 동쪽의 마카이루스 성에 감금해 두었다고 합니다. 탈출은 애초에 꿈도 꿀 수 없는, 갇히면 모든 희망을 버려야 하는 감옥인 것입니다. 세례 요한은 접견을 오는 제자들을 통해서, 어쩌다 바깥소식을 듣곤 했습니다. 세례 요한의 최고 관심은 예수님이었습니다. 자신을 주의 길을 예비하는 자로 여겼고, 예수님은 흥해야 하겠고 자신은 쇠해야 한다고 했던 그였습니다. 자기 제자들이 전해주는 말을 듣자니, 예수님의 일이 자기 기대에 미치지 못한 거 같았습니다. 그래서 확신이 조금 흔들렸습니다. 그 안에 갇혀 있으면 생각이 단순해집니다. 어떤 한 가지 생각에 골몰하게 됩니다. 그는 하나님께 묻기도 수차례 했을 것입니다. 그래도 고민이 시원스레 풀리지 않았습니다. 더 이상 고민하다가는 병들 거 같아 직접 물어보려고, 자기 제자들을 예수님께 보내기로 했습니다. 세례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님께 물었습니다.
3절 ‘예수께 여짜오되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
여기서 “오실 그이”는 메시야 곧 그리스도를 말합니다. “우리 스승님이 안부 전해달래요. 예수님, 너무 수고가 많으시네요.” 이런 거 생략하고 “당신이 그리스도가 맞아요? 아니면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려야 합니까?” 단도직입적으로 물었습니다.
세례 요한에게 이보다 중요한 게 없기 때문입니다. 감옥에 갇혀 내일을 알 수 없는 날을 보내고 있는 그에게 무슨 소망이 있겠습니까? 헤롯이 정권에 부담이 되는 세례 요한을, 쉽게 내보내줄 리는 없습니다. 그럼 세례 요한은 살 소망은 일찌감치 접었을 수 있습니다. 그의 소망은 예수가 그리스도냐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그리스도가 맞다면, 자신은 사명 감당한 것입니다. 만약에 아니라면 그거야말로 인생 최대의 낭패가 아닐 수 없습니다.
4-5절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가서 듣고 보는 것을 요한에게 알리되, 맹인이 보며 못 걷는 사람이 걸으며, 나병환자가 깨끗함을 받으며, 못 듣는 자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
어쩌면 기분 나쁜 질문을 받았다고 볼 수 있는데, 예수님은 태연하게 반응하셨습니다. 세례 요한은 예수님이 타작 마당에서 손에 키를 들고 쭉정이를 날려보내고, 도끼를 들어 나쁜 나무는 찍어 불에 던지는 심판자이기를 기대했을지 모릅니다. 그런데 주님은 이사야 35장, 61장에 나오는, 자신의 구원자 사역을 알리게 했습니다. 구원자 사역을 여섯 가지로 소개했습니다. “맹인이 보며, 못 걷는 사람이 걸으며, 나병환자가 깨끗함을 받으며, 못 듣는 자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그 중 다섯 가지는 육체의 치유와 회복입니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구원은, 육체의 치유와 회복을 겸합니다. 육체를 무시하고 영혼 구원만을 말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복음을 전파하는 중에 다섯 가지 사역을 자연스럽게 행하셨습니다. 그렇지만 그것들이 복음 전파사역에 비해 열등한 사역이 아닙니다. 육체의 치유와 회복이 복음의 본질은 아닐지 몰라도, 복음의 현상인 것만은 분명합니다. 이게 복음을 전하는 자나 받는 자에게, 강력한 동기 부여가 됩니다. 오늘날 교회 안에서 예수님이 말씀하신 복음의 현상이 뜸합니다. 복음을 전파하는 게 시들해져서 그럴 것입니다. 복음의 현상은 복음을 전파할 때 나타나고, 나타나는 복음의 현상을 통해 복음이 더 힘 있게 전파되는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이 이어졌습니다.
6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하시니라.’
확신하는 것이 복 있다는 말입니다. 지금 예수님 앞에 있는 사람들은 세례요한의 제자들입니다. 그들을 예수님께로 보낸 스승 세례요한이 확신이 흔들리고 있습니다. 자신이 생각해 온 메시야, 자신이 꿈꿔 온 그리스도와 거리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마음 같아서는 자기가 직접 예수님을 만나서 확인해 보고 싶었지만, 맘과 달리 몸이 갇혀 있는 상태입니다. 자기는 내일을 장담할 수 없는 처지입니다. 언제 자기 목이 날아갈지 모르는 상황입니다. 그래서 고민하다 제자들을 확인 차 보낸 것입니다. 제자들이 확실한 답을 가져오면, 조금이라도 확신이 흔들렸던 자신이 부끄러워집니다. 그래도 상관이 없을 것 같습니다. 예수님이 그리스도가 확실하다면 그것으로 만족합니다. 그래서 세례요한은 제자들이 오기만을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런 요한에 대해 알고 있는 예수님은, 그의 제자들에게 들으라는듯이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그러나 실은 제자들이 아닌 세례요한 들으라고 한 말씀 같습니다. 어차피 제자들이 가서 스승인 세례요한한테 전해줄 것 아닙니까? 주님의 말씀을 다시 생각해 보면 주님한테 실족할 수도 있다는 말이 됩니다. 목회하면서 가장 조심스러운 것은 나 때문에 신앙에 실족하는 것입니다. 가집사 꼴보기 싫으면 다른 교회 가면 됩니다. 나권사, 다장로 맘에 들지 않으면 다른 교회로 옮기면 됩니다. 그런데 목회자에게 시험 들면 예수님을 떠날 수 있습니다.
후배 목사가 자기가 겪은 일을 이야기해 준 적이 있습니다. 신대원 다닐 때 음식점에서 배달하는 아르바이트를 했다고 합니다. 그때 사장님 내외는 신자가 아니었습니다. 그런데도 후배한테 참 잘해줬다고 합니다. 몇 달이 지난 후 사장이 사실 고백을 하더랍니다. 자신들도 전에 교회를 다닌 적이 있었다고. 후배가 짐짓 놀라며 “아니, 그런데 왜 지금은 교회를 안 나가세요?” 물었더니 웃으면서 이렇게 말하더랍니다. “어느 날 사택에 갈 일이 있어서 갔는데, 사택에서 시끄러운 소리가 났고, 처음엔 잘못 들었는가 했는데, 목사님과 사모님이 대판 싸우더랍니다.” 당시 자기들은 목사님은 화장실도 안 가는 분인 줄 알았는데, 그날 너무 충격을 받아서, 그 뒤로는 교회를 가지 않고 있다고 했습니다. 그 목사님은 그 부부가 왜 교회를 떠났는지 아직도 모르고 있다고 합니다.
이게 꼭 남의 얘기일까요? 나 때문에 실족하여 예수님을 떠난 사람들이 없다고 보지 않습니다. 나중에라도 다시 교회를 나가 예수님께로 돌아오면 좋겠고 천국에서 다시 만나면 좋겠습니다. 실족하려고 하면 별 것 아닌 것으로 실족할 수 있습니다. 정상적인 설교를 듣고도 얼마든지 실족할 수 있습니다. 그런 부분들이 참 어려운 것 같습니다. 그래서 늘 분별력과 통찰력과 창의력과 선견력을 구하고, 나 때문에 실족하는 사람들이 없기를 기도하기도 합니다. 하긴 예수님 때문에 실족하는 사람이 있었다면 말 다했습니다. 심령이 가난한 사람은 실족하는 일이 없습니다. 마음이 온유한 사람 역시 실족하는 일이 없습니다. 그럼 어떤 사람이 실족했습니까? 종교지도자 같은 사람들입니다. 자기 의가 강한 사람들입니다. 자기 생각이 확고한 사람들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예수님 때문에 실족하곤 했습니다. 자기들이 맞다고 생각하니 예수님이 틀린 것입니다. 삐딱한 시선으로 보니 예수님이 삐딱하게 보입니다. 거꾸로 된 시선으로 보니 예수님이 거꾸로 보입니다. 그리고는 예수님더러 왜 삐딱하냐고, 왜 거꾸로냐고 합니다. 너무 자기를 포장하려고 하지 마십시오. 그러다가 포장지가 찢어지면 여러 사람 실족시킬 수 있습니다. 가능한 본 모습을 보이려고 해야 합니다. 그리고 더러우면 씻고, 부족하면 채우려고 해야 합니다. 완벽하기를 포기하십시오. 그러면 실족하는 사람이 거의 없을 것입니다.
사람은 확신의 대상이 될 수 없습니다. 누군가 나에 대해 확신을 가질 거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나에 대해 확신을 갖지 않는다고 서운해 할 필요도 없습니다. 사람을 확신하면 반드시 후회하는 날이 옵니다. 확신의 대상은 오직 예수 뿐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오직 그분만 확신할 수 있습니다. 교회 다닌다고 확신하는 것은 아닙니다. 교회 안에 있다고 확신하는 것은 아닙니다. 세례 요한은 예수님을 직접 본 사람입니다. 심지어 예수님한테 세례를 주기까지 한 사람입니다. 그런데도 확신이 흔들린 것 아닙니까? 삶이 너무 팍팍하니까, 환경이 너무 암울하니까, 확신에 거하는 것이 생각처럼 쉽지 않습니다. 어쩌면 확신하는 것이 신기한 것인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본 적도 없습니다. 예수님 시대와는 2천년의 간격이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확신합니다. 그럼 그건 기적이라고밖에 말할 수 없습니다. 최고의 기적은 내가 예수 믿는 것입니다. 우리 인생 최고의 날은 예수 믿은 그날부터 매일 매일입니다.
7-9절 ‘그들이 떠나매 예수께서 무리에게 요한에 대하여 말씀하시되,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광야에 나갔더냐?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냐? 그러면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나갔더냐? 부드러운 옷 입은 사람이냐? 부드러운 옷을 입은 사람들은 왕궁에 있느니라. 그러면 너희가 어찌하여 나갔더냐? 선지자를 보기 위함이었더냐? 옳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선지자보다 더 나은 자니라.’
세례 요한의 제자들이 떠나는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시던 예수님이 무리에게 입을 여셨습니다. 얘기 내용은 세례 요한에 대해서입니다. 예수님이 세례 요한의 제자들의 질문에 답하는 과정에서, 본의 아니게 세례 요한의 권위가 좀 깎였습니다. 그게 마음에 좀 걸렸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래서 세례 요한의 권위를 회복시켜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걸 위해 세례 요한의 사명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세례 요한은 평범한 사람이 아닙니다. 아무나 흉내 낼 수 없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는 제사장의 아들로 태어났지만 성전이 아닌 광야에서 사역했습니다. 사람을 상대하는 일이라면 뭘 해도 목이 중요한데 세례 요한은 거친 땅 광야에서 사역을 했습니다. 그런데도 허다한 무리가 그에게 나아왔습니다. 마 3:5절 ‘이때에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요단강 사방에서 다 그에게 나아와’ 주위 사람들만 나아온 게 아닙니다. 예루살렘에서도 왔습니다. 민중들만 나아온 게 아닙니다. 종교지도자들, 종교엘리트들도 왔습니다. 마 3:7절상 ‘요한이 많은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이 세례 베푸는 데로 오는 것을 보고’ 지금 예수님을 둘러싸고 있는 무리들도, 다수는 광야의 요한에게 갔던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이 그들을 향해 물으신 것입니다.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광야에 나갔더냐?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냐? 그러면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나갔더냐? 부드러운 옷 입은 사람이냐? 부드러운 옷을 입은 사람들은 왕궁에 있느니라. 그러면 너희가 어찌하여 나갔더냐? 선지자를 보기 위함이었더냐?” 예수님은 무리에게 질문을 연달아 한 후에, 잠시 기다리셨습니다. “옳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선지자보다 더 나은 자니라.” 무리들이 광야를 찾았던 것은 선지자보다 나은 자를 만나기 위해서였습니다. 선지자를 만나기 위해서라면 굳이 광야까지 갈 필요가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무리들이 세례 요한은 메시야도 몰라보고 의심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할까봐 경계하며 세례 요한을 선지자보다 더 나은 자로 높여주셨습니다. 그냥 립서비스한 것이 아닙니다.
10절 ‘기록된 바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네 앞에 보내노니 그가 네 길을 네 앞에 준비하리라 하신 것이 이 사람에 대한 말씀이니라.’
성경 아래에 표기되어 있듯이, 말라기 3:1의 말씀을 인용하시며, 말라기 선지자가 예언한 그 사람이 바로 세례 요한이라고 하셨습니다. 여기 세례 요한의 사명이 나옵니다. “내가 내 사자를 네 앞에 보내노니 그가 네 길을 네 앞에 준비하리라.” 세례 요한은 메시야보다 앞선 사자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메시야의 길을 준비하는 일을 감당한다는 것입니다. 세례 요한은 그 사명을 감당했습니다. 예수님보다 6개월 앞서 태어났고 사역도 그렇게 했습니다. 그는 자기가 주연이 아니고 자기 뒤에 오실 분이 주연임을 전했습니다. 마 3:11절 ‘나는 너희로 회개하게 하기 위하여 물로 세례를 베풀거니와, 내 뒤에 오시는 이는 나보다 능력이 많으시니, 나는 그의 신을 들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베푸실 것이요.’
11절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세례 요한보다 큰 이가 일어남이 없도다. 그러나 천국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그보다 크니라.’
예수님은 그런 세례 요한을 높이 평가하셨습니다.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세례 요한보다 큰 이가 일어남이 없도다.’ 예수님께로부터 최고의 찬사를 받은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사명을 감당하는 사람이 큰 사람입니다. 우리는 사명을 받은 자들입니다. 교회적으로 말씀과 성령의 능력으로 제자가 되어 도시복음화, 민족복음화를 이루는 예수 생명의 공동체가 되는 것입니다. 또한 각자에게 고유한 사명이 있습니다. 그 사명을 감당할 때 주님이 큰 사람으로 인정해 주십니다. 다른 욕심은 몰라도 그런 욕심은 좀 내기 바랍니다.
12-14절 ‘세례 요한의 때부터 지금까지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침노하는 자는 빼앗느니라. 모든 선지자와 율법이 예언한 것은 요한까지니, 만일 너희가 즐겨 받을진대 오리라 한 엘리야가 곧 이 사람이니라.’
“침노”는 “폭력”이 아니라 “적극적이며 역동적인 열심”으로 번역해야 합니다. 따라서 오늘 본문을 원어에 맞게 번역하면, “세례 요한의 때부터 지금까지 하늘나라는 힘차게 전진하고 있다. 그리고 그 나라는 적극적이며 역동적인 힘을 쓰는 사람들이 차지한다.”입니다. 천국은 침노하는 자의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천국은 용기있는 자의 것입니다. 누가 천국 갑니까? 용기 있는 자가 갑니다. 하나님께서 죄인에게 은혜를 베푸셨습니다.그 은혜를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하나님이 아무리 은혜를 베풀어도, 너무 소심하여 “나 같은 죄인은 그걸 받아들일 자격이 없습니다” 하며, 끝내 받아들이지 않으면, 하나님도 어쩔 수 없습니다. 아직 천국문은 열려 있습니다. 그러나 언제까지 열려 있는 것은 아닙니다. 모든 사람이 다 들어올 때까지 열려 있는 것은 아닙니다. 너무나 소심하여 하나님의 은혜를 끝내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에게까지 열려 있는 것은 아닙니다. 천국문이 닫힐 날이 온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끝까지 견뎌야 할 이유입니다. 우리가 너무 느긋하게 전도해서는 안 되는 이유입니다.
15-17절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 이 세대를 무엇으로 비유할까? 비유하건대 아이들이 장터에 앉아 제 동무를 불러, 이르되 우리가 너희를 향하여 피리를 불어도 너희가 춤추지 않고, 우리가 슬피 울어도 너희가 가슴을 치지 아니하였다 함과 같도다.’
갈수록 자기밖에 모르는 시대입니다. 피리를 불면 ‘부나 보다’ 합니다. 슬피 울면 ‘슬픈 일이 있나 보다’ 합니다. 바로 옆집에서 사람이 죽어나가도 관심없습니다. 이사를 와도 ‘오는가 보다’, 가면 ‘가는가 보다’가 끝입니다. 공동체로 살아야 할 사람이 개인으로 삽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공동체로 공동체 안에서 살도록 하셨습니다. 그런데 기껏 자기 가족밖에 모릅니다. 다른 사람한테 신경 쓰는 것 귀찮다는 것입니다. 남한테 간섭받기도 싫고 나도 간섭받기 싫다는 것입니다. 그건 자기 성을 쌓아올리는 것입니다. 그러다 자기가 쌓은 성에 자기가 갇히고 마는 날이 옵니다. 그래서 일인가족시대를 마냥 반길 수 없습니다.
18-19절 ‘요한이 와서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아니하매, 그들이 말하기를 귀신이 들렸다 하더니, 인자는 와서 먹고 마시매, 말하기를 보라,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요, 세리와 죄인의 친구로다 하니, 지혜는 그 행한 일로 인하여 옳다 함을 얻느니라.’
세례 요한과 예수님은 삶의 방식이 확연히 달랐습니다. 요한은 금식과 절제의 삶을 추구했습니다. 그러자 별 관심없던 사람들이 말했습니다. “귀신이 들렸다.” 예수님은 잘 먹고 즐기는 삶을 추구했습니다. 그러자 남의 말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이 말했습니다.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요 세리와 죄인의 친구로다.” 남에게 무관심해도 안 되지만, 남의 말에 지나치게 민감해도 문제입니다. 그런 사람이 꼭 들어야 할 말은 안 듣고, 들으면 안 되는 말을 듣습니다. 확신이 없어서 그렇습니다. 그래서 확신에 거하는 것이 복입니다. 예수님을 나의 구원자로 내 인생의 주인으로 확신합니까? 남은 삶을 그 확신에 거하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서양인들의 묘지는 저 멀리 산에 있는 것이 아니라, 주로 동네 가운데 또는 교회당 안에 있거나 뜰에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거기 가지런히 줄을 지어 서 있는 묘비에는, 주로 앞서 간 이에 대한 추모의 글이나 아쉬움의 인사가 새겨져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묘지를 돌며 묘비들을 읽고 다니다 어떤 묘지 앞에 발길을 멈추게 되었습니다. 그 묘비의 글이 상당히 흥미로웠기 때문입니다. 글은 단 세 줄이었는데 첫재줄에는 ‘나도 전에는 당신처럼 그 자리에 그렇게 서 있었소.’ 순간 웃음이 터져 나왔습니다. 두 번째 줄이 이어졌습니다. ‘나도 전에는 당신처럼 그곳에 서서 그렇게 웃고 있었소.’ 이 글을 읽자 그는 이게 그냥 재미로 쓴 게 아니구나 싶었습니다. 그래서 자세를 가다듬고 긴장된 마음으로 세 번째 줄을 읽었습니다. ‘이제 당신도 나처럼 죽을 준비를 하시오.’ 죽음에 대한 준비만큼 엄숙한 것은 없습니다. 그런데 그 준비는 지금 살아 있는 동안에 해야 합니다. 그 준비는 바로 오늘을 결코 헛되이 보내지 않는데 있습니다. 그 준비는 내가 몸담고 있는 교회에서 신령한 터전을 잡기 위하여 어떻게 침노를 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시간은 마냥 나의 편이 아니고 영원히 영원히 기다려 주지를 않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이 시간 나의 신앙의 결심이 어떠합니까? 얼마나 나의 시간을 잘 관리하고 있으며 얼마나 잘 활용하였습니까? 엡 5:15-16절 ‘그런즉 너희가 어떻게 행할 것을 자세히 주의하여, 지혜 없는 자같이 말고 오직 지혜 있는 자같이 하여,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 링컨은 ‘사람은 자기가 결심하는 만큼 행복해질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결심을 하는 만큼 행복해 진다고 하였는데 나의 신앙의 앞날을 위하여, 하나님께 온전히 쓰임을 받기 위하여, 교회와 동행하며 말씀과 동행하며, 믿음으로 살아가는 성도가 되기를 바랍니다.
< 기 도 >
하나님 아버지, 오늘 우리는 우리의 신앙이 마땅히 바라보아야 할 신령한 것을 바라보게 하옵소서. 이제부터 적당히, 미적미적, 주시면 좋고 안 주셔도 그만이고, 차지하면 좋고 못해도 그만인 모습이 우리의 삶에서 사라지게 하옵소서. 뜨거운 열심을 가지고, 적극적으로, 전투하듯이, 그렇게 하나님 앞에서 열심을 가진 자들로 살아가게 하옵소서. 천국은, 하나님이 주시는 각양 은사와 선물들은, 그리고 우리가 이 땅에서 얻으려는 것들은 침노해야 차지할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침노하는 자들에게 먼저 주신다는 것을 기억하면서, “침노하는 열심”으로 남은 때를 살아가는 성도들이 되게 하옵소서. 저희에게 주님을 따르는 길에서 인내를 배워, 인내로 승리의 삶을 살 수 있도록 힘을 더하여 주옵소서. 우리의 마음을 붙들어 주셔서 어지럽고 혼란한 세상 속에서 진리에서 탈선하지 않는, 건강하고 풍요로운 삶을 살 수 있도록 큰 능력을 더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회개와 평안과 그리고 안식 / 마 11:20-30
변이된 오미크론의 확산이 갈수록 심해지고 있습니다. 토요일 오전 10시 발표를 보면 전북 543명, 전국 17,526명이, 일요일 오전 10시 발표를 보면 전북 437명, 전국 17,532명이, 감염되었습니다. 설 명절을 지나면 더 심해질 것이라고 합니다. 각자가 방역수칙을 철저히 지키며 조심해야 할 것입니다.
지미 핸드릭스라는 록 음악의 기타 연주자가 있었습니다. 그는 마약 중독자가 되어 무대 위에서나 밖에서 난폭하게 행동하며 문란한 삶을 살았습니다. 1970년 어느 공연의 마지막에 가서 그는 자기의 기타를 부숴버렸습니다. 지미 핸드릭스의 공연이 마치자 관중들은 소리치며 박수를 보냈습니다. 그러다가 순간적으로 열광하던 박수갈채가 갑자기 그쳤습니다. 지미 핸드릭스가 무릎을 꿇은 자세로 움직이지 않은 채 그대로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윽고 고요한 정적을 깨며 그는 관중들을 향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기에 누구 참된 평안을 아는 사람이 있으면 무대 뒤에서 만나고 싶습니다.” 그러나 아무도 이 갑작스런 초청에 응한 사람이 없었습니다. 며칠 후, 그는 약물과용으로 죽었습니다.
영국의 종교개혁자 리들리는 메리여왕 1세의 즉위와 함께 화체론적 성찬을 부정했다는 혐의로 체포되어, 런던탑에 투옥되었다가 뒤에 옥스퍼드에서 화형되었는데, 그 전날 밤의 일입니다. 그의 동생은 찾아와서 그 밤 동안 위로하며 같이 지내자고 했습니다. 그때 리들리는 그것을 거절하면서 말했습니다. “나는 오늘 밤 평안히 자고 내일 순교하겠다.” 지미 핸드릭스와 리들리, 두 사람 다 죽었습니다. 그런데 확연히 다른 점이 있었습니다. 지미 핸드릭스는 죽는 순간까지 평안을 찾다가 찾지 못하고 약물을 의지하다가 약물과다복용으로 죽었습니다. 리들리는 죽는 순간까지도 평안을 유지했습니다. 무슨 차이였습니까? 평안은 관계에서 옵니다. 수 천만 원짜리 침대에 누워도 잠을 못자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땀 내음이 나는 엄마 등 뒤에서도 평안히 잠든 아이가 있습니다. 평안과 환경이 전혀 별개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꼭 비례하지는 않습니다. 환경을 뛰어넘어 평안을 누리는 사람들이, 얼마든지 있기 때문입니다. 평안은 서두름과 관련이 깊습니다. 조급증은 평안의 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조급한 사람에게서 평안을 찾기 힘듭니다.
몇 년 전 한국에 거주하는 외국인을 대상으로, ‘한국인 빨리빨리 베스트 10’을 뽑은 적이 있습니다. 이 결과를 살펴보면, 우리는 일상적으로 하는 일이, 외국인의 눈에 얼마나 경이롭게 보이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1. 커피 자판기에서 커피가 나오고 있는데 손을 집어넣어 컵 잡고 기다리기.
2. 버스 정류장에서 버스가 출발하면 뒤따라 뛰어가면서 추격전 벌이기.
3. 화장실 들어가기 전부터 지퍼 미리 내리기.
4. 삼겹살이 다 익기도 전에 먹기.
5. 엘리베이터에서 몇 초도 못 참고 ‘닫힘’ 버튼 누르기.
6. 3분 기다려야 하는 컵라면 3분도 되기 전에 뚜껑 열기.
7. 영화관에서 엔딩 자막이 끝나기도 전에 일어나 나가기.
8. 화장실에서 볼일 보면서 양치질하기.
9. 웹 페이지가 3초 안에 안 열리면 닫아버리기.
10. 편의점에서 음료수를 구매한 뒤 먼저 마시고 계산하기.
여기에 해당되는 게 없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도 없다면 한국인인지 검증이 필요할 수도 있습니다. 나 역시 뼛속까지 한국인인지라 해당되는 게 있습니다. 우리는 평안을 구하면서도, 조급증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모순을 범합니다. 그러면 평안과의 간격을 영원히 줄일 수 없습니다.
이런 글을 본 적이 있습니다. 이탈리아 성악계에 새로운 태양처럼 떠오르는 한국 여성이 한 명 있습니다. 푸치니가 작곡한 나비부인의 주인공인데, 처음부터 주인공으로 발탁이 되었습니다. 한 극장에서 주연으로 발탁된다고 하는 것은 참 어려운 일입니다. 이분이 이탈리아로 유학을 가서 수년 동안 성악을 공부했습니다. 그리고 ‘내가 아직 빛을 못 보는 것은 내 눈 때문이구나! 쌍꺼풀 수술을 해야겠다’ 하고 마음을 먹었습니다. 그리고 서울에 있는 어머니에게 전화를 해서 제일 좋은 병원에 예약해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익히 아는대로 쌍꺼풀 수술 세계적인 권위자는 다 한국 사람입니다. 그래서 서울에서 유명하다는 모 성형외과에 어머니가 예약을 했습니다. 보통 예약을 하면 1년 뒤에나 할 수 있는데 어머니가 빽을 써서 날짜를 받았습니다. 그 여성은 수술 날짜가 결정 났다는 이야기를 듣고 굉장히 기뻤습니다. 그 주일날 로마 한인교회에 예배드리러 갔습니다. 목사님 설교 내용이 “왜 주어진 것을 감사하지 않느냐? 왜 여자들 쌍꺼풀 수술하느냐? 쌍꺼풀 수술했다가 나중에 죽어서 하늘나라에 갔는데 하나님께서 ‘네가 누구냐? 나는 너한테 쌍꺼풀 안 주었는데, 네가 누구냐?’ 그러면 어떻게 하느냐?”고 했습니다. 그 여성은 설교를 들으면서, ‘이것은 내 문제구나! 나를 향하신 주님의 말씀이구나!’ 하고 적용했습니다. 그리고 예배를 마치고 서울에 전화를 했습니다. “어머니, 나 쌍꺼풀 수술 안 하겠습니다.” 이 얘기를 듣고, 어머니가 화를 내면서 “어렵게 받은 날짜니까 꼭 받아야 돼”라고 했습니다. 그래도 안 받겠다고 하고, 수술하기로 한 날에 열린 콩쿠르에 참석했는데, 거기서 대상을 받은 것입니다. 그 콩쿠르 현장에 독일의 유명한 극장의 극장장이 앉아 있었습니다. 그 자리에서 나비부인으로 발탁이 된 것입니다. 조연도 해 본 경험이 없는 사람이, 주연을 하려니까 처음엔 얼마나 실수가 많겠습니까? 그래서 극장장에게 어느 날 물었습니다. “나를 왜 처음부터 주연으로 뽑았습니까?” 그 극장장 대답이 압권이었습니다. “네 눈 때문이다.” 본래 나비부인은 일본 여인이지만, 일본 여인들의 가창력은 한국 여성보다 떨어진다고 합니다. 그래서 유럽에서 인정을 못 받는다고 합니다. 그뿐만 아니라 일본 여성은 전부 쌍꺼풀 수술을 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일본 여성을 무대 위에 올려놓으면, 유럽 관객이 볼 때 일본 여성으로 보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만한 가창력을 가진 사람으로서, 쌍꺼풀 없는 동양 여성은 처음 봤다는 것입니다.
무엇인가를 탓하는 사람은 평안과 거리가 멉니다. 환경탓, 외모탓, 남탓, 부모탓입니다. 잘 되면 내 탓, 잘못 되면 조상탓이란 말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은 평안과 점점 거리가 멀어지게 됩니다. 평안은 관계에서 옵니다. 참된 평안은 위에서 내려옵니다. 진정한 평안은 위에 계신 주님과의 관계에서 옵니다. ‘평화 평화로다. 하늘 위에서 내려오네’(412) 평안이 하늘에서 내려올 때 문제가 하나 있습니다. 평안을 담을 그릇이 준비돼 있냐는 것입니다. 평안은 내적인 문제입니다. 평안은 속사람의 문제입니다. 속사람이 깨끗해야 평안을 담을 수 있습니다. 속사람을 깨끗하게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회개입니다. 주님이 그 점을 지적하셨습니다.
20절 ‘예수께서 권능을 가장 많이 행하신 고을들이 회개하지 아니하므로 그 때에 책망하시되’
예수님은 모든 고을에서 권능을 똑같이 행하시지 않았습니다. 권능을 많이 행하신 고을이 있었고, 적게 행하신 고을이 있었습니다. 고향 고을에서 권능을 적게 행하신 것은 확실합니다. 그리고 그 이유도 확실합니다. 마 13:57-58절 ‘예수를 배척한지라.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시되, 선지자가 자기 고향과 자기 집 외에서는 존경을 받지 않음이 없느니라 하시고, 그들이 믿지 않음으로 말미암아 거기서 많은 능력을 행하지 아니하시니라.’ 믿지 않음으로 말이암아서입니다. 고향이라고 일부러 덜 행하셨던 게 아니고, 믿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밝혔습니다. 예수님이 감당이 안 되는 사람이 있습니다. 믿음 없는 사람입니다. 믿음이 없으면 예수님이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습니다. 예수님이 역사하시는 통로가 믿음인데, 믿음이 없다면 그 통로가 막혀 있다는 거 아닙니까? 권능이 많이 행해진 고을의 문제가, 믿음의 문제는 아님을 확인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권능을 행하실 수 있도록 믿음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회개는 하지 않았습니다. 20절 말씀을 다시 보겠습니다. ‘예수께서 권능을 가장 많이 행하신 고을들이 회개하지 아니하므로 그 때에 책망하시되’ 예수님이 권능을 행하신 이유가 나옵니다. 그 고을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했는지는 모르겠고 그건 중요한 관심사도 아닙니다. 예수님이 권능을 행하시고 무엇을 기대하셨는지가 중요합니다. 말씀에 나오는 대로 회개를 기대하셨습니다. 그러나 그 고을은 회개하지 않음으로 주님의 기대를 저버렸습니다. 그러자 주님은 그들을 책망하셨습니다. 권능이 많이 나타난다고 거룩한 교회가 아니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권능이 많이 나타남에도 회개하지 않으면 주님께 책망받는 교회가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어떻게 해야 회개에 이를 수가 있겠습니까? 그러기 위해서는 회개에 대해서 깊이 깨달아 알아야 합니다. 회개의 첫째 단계는 자각하는 것입니다. 자기의 죄를 깨닫고 느끼고 발견해야 합니다. 둘째 단계는 시인하는 것입니다. 자기가 지은 죄와 가지고 있는 잘못을 그대로 인정해야 합니다. 변명하거나 핑계를 대면 안 됩니다. 셋째 단계는 고백하는 것입니다. 죄도 자기 입으로 고백해야 하고 믿음도 자기 입으로 고백해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주여 나는 죄인입니다”라고 고백해야 합니다. 그리고 낱낱이 마치 자술서를 쓰는 것처럼 내가 지은 죄를 숨김없이 고백해야 합니다. 넷째 단계는 용서를 구하는 것입니다. 고백만으로 끝나 버리면 안 됩니다. 하나님의 자비와 사랑으로 내가 고백한 죄를 용서해달라고 구해야 합니다. 다섯째 단계는 사죄를 믿어야 합니다. 내가 내 죄를 고백하면 그리고 용서를 구하면 용서하신다는 사실을 믿어야 합니다. 성경은 하나님이 우리의 죄를 용서하신다고 약속하고 있습니다. 눈보다 더 희게 양털보다 더 희게 용서하신다고 약속하셨고, 우리의 죄를 도말하신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동이 서에서 먼 것같이 우리의 죄를 멀리 옮기시겠다고 했습니다. 여섯째 단계는 돌아서는 것입니다. 참 회개는 거기서 돌아서야 합니다. 거기서 발을 빼고 손을 씻고 그 현장을 떠나야 합니다. 죄에 대해 미련을 버려야 합니다. 참된 회개는 방향을 바꾸는 것입니다. 일곱째 단계는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가던 길을 멈추고 방향을 돌이켰으면 즉시 하나님께로 돌아와야 합니다. 그것이 진정한 회개입니다. 딴 데로 가면 안 됩니다. 여덟 번째 단계는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야 합니다. 인간에게는 되돌이 근성이 있습니다. 회개했노라고 하지만 옛날 그때 거기로 되돌아 갈 가능성이 많습니다. 그러나 내가 성령을 충만히 받고 성령의 지시하심을 따른다면 죄의 길로 되돌아 갈 수가 없는 것입니다. 내가 성령 하나님의 능력에 사로잡히면 성령님이 인도하시는 대로 따라 살게 되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말하면 회개는 돌이킴입니다. 예수님에게로 돌이킴, 곧 예수님을 나의 구세주로 믿어 거듭난 백성이 되고 하나님의 자녀로서 자녀답게 살아가는 것이 바로 회개란 말입니다. 그러니까 바른 길을 가는 겁니다. 어떤 큰 역사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믿음의 역사, 우리가 예수님을 나의 구세주로 믿는 것이 사실은 제일 큰 권능이라고 하는 사실을 우리가 깨달아 오직 말씀을 따라 믿음으로 승리하는 하나님의 사람들 다 되기를 바랍니다.
21-24절 ‘화 있을진저, 고라신아. 화 있을진저, 벳새다야. 너희에게 행한 모든 권능을 두로와 시돈에서 행하였더라면, 그들이 벌써 베옷을 입고 재에 앉아 회개하였으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심판 날에 두로와 시돈이 너희보다 견디기 쉬우리라. 가버나움아, 네가 하늘에까지 높아지겠느냐? 음부에까지 낮아지리라. 네게 행한 모든 권능을 소돔에서 행하였더라면, 그 성이 오늘까지 있었으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심판 날에 소돔 땅이 너보다 견디기 쉬우리라 하시니라.’
주님은 고을의 실명을 거론하셨습니다. 고라신, 벳새다, 가버나움입니다. 주님이 특별히 그 고을들이 미워서가 아닙니다. 그 고을들에 무슨 억한 심정이 있어서 그러신 게 아닙니다. 회개를 촉구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렇게 많은 권능을 경험하고도 회개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동네에 들어와 권능을 행하실 때 너도 나도 몰려갔습니다. 예수님이 사역을 끝내고 떠나면 그것으로 끝입니다. 예수님과 관계를 맺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여전히 옛 생활을 이어갑니다. 예수님이 권능을 행하시기 이전의 삶을 살아갑니다. 회개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회개를 촉구하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평안을 위해서입니다. 그들에게 평안을 주고 싶어서였습니다. 그들에게 정말로 필요한 것은 평안이었기 때문입니다. 평안은 회개를 통해서 오기 때문입니다. 회개는 관계를 정리하는 것입니다. 회개는 죄와의 관계를 청산하는 것입니다. 회개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는 것입니다. 그 이후에 평안이 찾아옵니다. 평안은 회개 후에 자연스럽게 찾아옵니다. 회개는 아픕니다. 회개는 고통스럽습니다. 회개는 찢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회개는 마음을 찢는 것입니다. 회개는 죄 덩어리를 도려내는 것입니다. 그 후에 평안이 찾아옵니다. 회개는 덮는 것이 아닙니다. 회개는 묻는 것이 아닙니다. 회개는 숨기는 것이 아닙니다. 회개는 넘어가는 것이 아닙니다. 회개는 드러내는 것입니다. 회개는 죄를 들추는 것입니다. 회개는 허물을 까발리는 것입니다. 회개는 모순을 드러내 보이는 것입니다. 그후에 평안이 옵니다. 회개는 때가 있습니다. 회개에 주어지는 시간이 있습니다. 회개할 기회를 놓쳐 망한 두로와 시돈, 소돔을 예로 들고 있습니다. 고라신과 벳새다, 가버나움이 회개하지 않으면, 두로와 시돈, 소돔이 될 수 있습니다. 아니 그들보다 더 큰 심판을 받을 것이라고 하십니다.
왜 그렇습니까? 두로와 시돈, 소돔은 이방 나라로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입니다. 고라신과 벳새다, 가버나움은 주님의 권능을 가장 많이 경험한 사람들입니다. 주님이 권능만 행하시고 말았을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그들은 예수님께 복음을 가장 많이 들었던 사람들입니다. 주님이 전하신 메시지의 핵심이 무엇입니까?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회개하라는 말씀을 어느 고을보다 많이 들었을 거라는 말입니다. 그들은 회개에 대해 모르지 않았습니다. 알고도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이에 대해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눅 12:47-48절 ‘주인의 뜻을 알고도 준비하지 아니하고 그 뜻대로 행하지 아니한 종은 많이 맞을 것이요, 알지 못하고 맞을 일을 행한 종은 적게 맞으리라. 무릇 많이 받은 자에게는 많이 요구할 것이요, 많이 맡은 자에게는 많이 달라 할 것이니라.’ 우리가 알려고 하는 것은, 행하기 위해서입니다. 우리가 말씀을 배우는 이유는, 주의 뜻대로 살기 위해서입니다.
25-26절 ‘그 때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옳소이다. 이렇게 된 것이 아버지의 뜻이니이다.’
주의 뜻은 아무나 알 수 없습니다. 주의 뜻은 숨겨져 있기 때문입니다. 성경을 읽는다고, 주의 뜻을 깨달을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도, 스스로 깨달을 수 없습니다. 주의 뜻은 인간의 지혜와 슬기로 깨달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랬다면 나처럼 둔하고 미련한 사람은 주의 뜻을 깨달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렇다고 모든 사람에게 주의 뜻이 숨겨져 있는 것은 아닙니다. 어린 아이들에게는 나타내셨습니다. 어린 아이는 수용적입니다. 자기 생각의 틀이 굳어있지 않아서입니다. 차츰 성장하면서 생각의 틀이 굳어갑니다. 어른이 되면 아주 단단해집니다. 자기 생각과 맞지 않으면 수용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중간에 예수 믿는 사람이 대단하다고 한 것입니다. 또한 타종교에서 개종하여 예수 믿는 사람은 더 대단하다고 생각합니다. 아무리 종교 간에 통하는 게 있다지만, 그래도 그건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27절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아버지 외에는 아들을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느니라.’
주의 뜻은 아버지를 아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아버지를 아는 것이 아닙니다.
먼저 아들이신 예수님이 아버지를 아십니다. 또 있는데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입니다. 그럼 아버지를 아는 우리는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입니다. 우리가 아버지를 아는 것은, 예수님의 소원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아버지를 알게 하시려고, 자신의 생명까지 내놓으셨습니다. 우리에게 그토록 아버지를 알게 하고자 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평안을 누리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이 제자들을 만나서 첫 번째 하신 말씀이 무엇입니까? 요 20:19절 ‘이 날 곧 안식 후 첫날 저녁 때에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의 문들을 닫았더니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우리는 이 땅에서 평안을 누려야 합니다. 지상 천국은 심령 천국에서 비롯되고, 심령 천국은 평안에서 비롯됩니다. 바울을 통해 하나님의 나라의 핵심으로 평강을 말했습니다. 롬 14:17절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 있는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 평강을 누리고 있습니까? 천국을 누리고 있는 것입니다. 환경과 무관하게 평안을 유지합니까? 자기 안에 하나님의 나라가 임한 것입니다.
신앙의 깊이를 어느 정도는 판단할 수 있습니다. 그 사람의 심령상태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환경에 따라 심령이 요동치고, 한 번 요동치면 걷잡을 수 없다면, 아직 신앙이 얕은 것입니다. 깊은 은혜의 강이 아닌 얕은 물가에서 노니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오해하지는 말아야 합니다. 신앙이 깊은 사람은 어려운 환경을 만났을 때, 미동도 하지 않는다는 뜻은 아닙니다. 사람인데 왜 안 흔들리겠습니까? 처음엔 심령이 요동칩니다. 기도하는 것마저 힘들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게 길게 가지 않습니다. 다시 심령에 평안을 되찾게 됩니다. 환경을 영적인 눈으로 바라봅니다. 징계인지, 시험인지, 연단인지, 고난의 보자기인지 깨닫게 됩니다. 그에 맞게 주님 앞에 나아갑니다. 깊은 물은 소리를 내지 않습니다. 얕은 물은 소리를 내어 흐르지만, 깊은 물은 소리를 내지 않습니다. 얕은 개울물은 소리를 내고 유속이 빠르지만, 깊은 강물은 소리도 내지 않거니와 유속도 가늠할 수 없습니다. 신앙의 깊이가 내공입니다. 신앙 역시 보이는 게 다가 아닙니다. 어떤 경우에도 평강을 잃지 않는, 깊은 신앙의 경지로 나아가기 바랍니다. 평안은 안식으로 연결됩니다. 평안과 안식은 이란성 쌍둥입니다. 이름은 다르지만 의미는 비슷합니다. 사전을 찾아보면 평안은 ‘걱정이나 탈이 없음, 무사히 잘 있음’이라고 풀이 되어 있습니다. 안식은 ‘편히 쉼’이라고 풀이 되어 있습니다. 안식을 위해서는 평안이 필요합니다. 마음에 걱정이 있고 마음에 탈이 났는데 편히 쉴 수 있겠습니까? 그건 정말이지 불가능합니다. 그럼 걱정과 탈로 가득한 인생에서, 어떻게 평안을 누린단 말입니까?
28절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주님이 해답을 제시하셨습니다. 수고와 무거운 짐을 주님께로 가져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해결책이 없습니다. 우리는 수고와 무거운 짐을 해결할 능력이 없습니다. 오직 주님이 답입니다. 주님께로 가져가는 게 답입니다. 어떻게 그것들을 주님께로 가져갈 수 있습니까? 빌 4:6절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기도로 가져갈 수 있습니다. 어차피 자기 힘으로 해결하지 못할 것을 붙들고, 괜히 힘 빼려고 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겁이 많은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작은 문제만 생겨도 기도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 겁내지 않고 간 큰 사람이 있습니다. 분명히 기도해야 할 상황인데 기도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지고 가다가 지쳐 쓰러졌는데도, 기도하지 않고 버티는 사람입니다.
‘무거운 짐을 나 홀로 지고 견디다 못해 쓰러질 때,
불쌍히 여겨 구원해 줄 이 은혜의 주님 오직 예수’(337)
안식은 주일성수와 깊은 연관이 있습니다. 주일성수는 축복입니다. 육체와 영혼이 쉼을 얻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기계가 아닙니다. 쉼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존재입니다. 주일성수는 율법이 아니라 복음입니다. 주일성수를 통해 하나님의 안식으로 들어갑니다. 우리는 안식을 통해 심신을 회복할 수 있게 됩니다. 신앙을 위해 오늘 손해 보는 것이, 내일의 축복으로 돌아올 것을 믿기를 바랍니다. 주일을 지키는데 최선을 다하여야 합니다. 예배를 드리는데 생명을 걸어보기를 바랍니다.
29-30절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
우리에게 안식이 필요하지만, 그렇다고 안식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영원한 안식에 들어가기 전까지, 우리는 달려가야 합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멍에를 메고, 사모하는 주님 만나는 그 날까지 달려가야 합니다. 예전 우리의 멍에가 인생의 수고와 무거운 짐이었다면, 지금 우리의 멍에는 사명입니다. 예수 믿기 전의 멍에는 벗어던져야 합니다. 예수를 이미 믿으면서, 그 멍에를 아직 메고 있으면 안 됩니다. 우리는 두 개의 멍에를 동시에 멜 수 없습니다. 둘 중에 하나만 멜 수 있습니다. 어느 하나를 메면, 다른 것은 벗어야 할 수밖에 없습니다. 여러분은 어떤 멍에를 메고자 합니까? 세상이 주는 수고하고 무거운 짐인 멍에입니까? 주님이 주신 사명의 멍에입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세상에서 지친 인생 길을 갑니다. 지탱할 수 없어 쓰러집니다. 그런데 힘이 강한 분이 다가 옵니다. 그분이 나의 멍에를 함께 메십니다. 싐이 찾아옵니다. 죄와 죽음의 속박으로부터 자유하게 하는 일도 그렇습니다. 죄와 죽음의 속박을 누구도 감당할 수 없습니다. 죄와 죽음의 멍에를 이기신 주님이 함께 져주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자유합니다. 이렇게 보면,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것은 선택이 아니라 당위입니다. 영접하면 영생에 이르고, 거부하면 심판(영벌)에 이르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을 믿고 그리스도를 영접해야 할 합니다. 말로만이 아닌 순종으로 온유하신 주님을 의뢰해야 합니다.
미국 8대 애덤스 대통령의 일화입니다. 거리에서 친구를 만났습니다. 친구 : ‘그 동안 잘 지냈나?’ 애덤스: ‘그렇게 못하네. 머리는 새고, 벽은 허물어져 가고 있다네. 좋은 나라로 이민을 갈 준비를 하고 있네.’ 친구: ‘(노발대발하며) 아니 전직 대통령을 그렇게 예우하다니 그럴 수가 있나?’ 애덤스: ‘내 말은 그런 뜻이 아니네. 늙어서 기억력도 쇠해지고, 몸도 늙어서 무너질 날이 가깝다는 말일세. 죽어 육신의 장막을 떠나면, 자네들을 만날 날을 기다리면서 그곳에서 기다리겠네.’
우리는 오늘 주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우리 왕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가 어떤 분이신가를 만났습니다. 예수님은 온유하시고 겸손하신 분이십니다. 예수님께서 나를 그분의 온유함과 겸손함 가운데 부르시고, 내 안에서 일하실 때, 내 안에도 그분의 온유와 겸손이 일어납니다. 그리고 그 온유와 겸손이 내 안에서 자라기 시작할 때, 참된 쉼이 있습니다. 온유와 겸손의 마음을 받아 참된 쉼을 얻는 복을 받아 누리는 성도가 되기를 바랍니다.
< 기 도 >
하나님 아버지, 우리는 우리에게 진정한 쉼과 안식을 약속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게 하옵소서. 또한 그의 온유와 겸손과 짐을 지는 모습을 배워, 작은 그리스도의 향기를 드러내며, 충실한 그리스도의 일꾼으로 살기에 부족함이 없게 하옵소서.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믿고 의지함으로서, 인생의 무거운 짐을 주님께 맡기고, 행복한 삶으로 항상 하나님께 감사하는 성도가 되게 하옵소서.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고 하신 주님의 말씀대로, 주 안에서 쉼을 얻고 누리는 성도들이 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