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을 위한 서시(序詩)
김춘수(金春洙 1922- ) 경남 충무 태생. 1948년 시집"구름과 장미"로 등단. 일본 니혼대학 예술과 중퇴. 경북대, 영남대 교수 역임. 한국시인협회상 수상. 아시아 자유문학상 수상. 1946년 사화집 <날개>에 “애가(哀歌)”를 발표함으로써 등단. 초기시에서는 릴케와 서정주의 영향이 엿보였으나 시집 <부다페스트에서의 소녀의 죽음>(1959)으로 현실 인식의 시풍으로 들어섰다가 <타령조 기타>(1960) 이후부터 시의 이미지 구성에 집착하는 ‘무의미의 시’의 늪으로 빠져 듦. 시집 <늪>, <기(旗)>, <꽃의 소묘(素描)>, <처용 단장>, <꽃을 위한 서시>, <너를 향하여 나는> 등이 있음. 존재론에 근거하여 사물의 존재 의미를 형이상학적으로 추적하는 작품이 주를 이루며, 사물과 언어의 파탄이라는 새로운 언어관으로 무의미 시를 주창하기도 했음.
시 전문
나는 시방 위험한 짐승이다.
나의 손이 닿으면 너는
미지의 까마득한 어둠이 된다.
존재의 흔들리는 가지 끝에서
너는 이름도 없이 피었다 진다.
눈시울에 젖어드는 이 무명의 어둠에
추억의 한 접시 불을 밝히고
나는 한밤 내 운다.
나의 울음은 차츰 아닌 밤 돌개바람이 되어
탑을 흔들다가
돌에까지 스미면 금이 될 것이다.
…얼굴을 가린 나의 신부여.
핵심 정리
어조 : 사색적이면서 열정적인 어조
구성 :
1,2연 인식의 부재 상태
3,4연 인식에 대한 노력
5연 인식 실패의 안타까움
제재 : 꽃
주제 : 꽃의 참모습을 인식하지 못하는 안타까움.
존재의 본질 인식에의 염원
이해와 감상
시인 김춘수(金春洙, 1922~)는 ‘꽃의 시인’이라 불릴 만큼 ‘꽃’은 그에게 있어서 중요한 소재이며 이미지이다. 김춘수는 이 시 외에도 “꽃”, “꽃의 소묘”, “꽃 1”, “꽃 2” 등의 작품에서 꽃을 통하여 이미지를 형상화하여 왔다.
이 작품 역시 꽃을 소재로 한 시로서 존재의 본질을 탐색하는 관념시이다. 서정적이면서 주지적인 경향을 띠고 있으며, 사물의 존재에 대한 내면적 탐구 정신을 주제로 한다. 또한 ‘꽃’을 통한 존재의 본질을 상징적인 시어들로 표현하고 있다. 여기에서 ‘꽃’이란 마지막 행의 ‘얼굴을 가리운 나의 신부’라는 이미지로 집약된다.
화자는 ‘꽃’의 내면적 의미의 실상을 파악해 보려고 ‘추억의 한 접시 불을 밝히고’, 즉 자신의 지난날을 돌이켜보면서 ‘한밤내’ 치열하게 그 본질을 파악하려 하지만 끝내 실패한다. ‘나의 손이 닿으면 너는 미지의 까마득한 어둠이 된다.’는 표현처럼 어떤 존재의 진정한 의미를 파악하기란 매우 어려운 일임을 토로하고 있다. 그러나, 강한 의지와 성실한 자세로 사물의 본질을 추구하려는 노력과 정신 그 자체는 무엇보다 소중하다고 노래한다.
김춘수의 다른 시 “꽃”이 인식의 대상으로서의 화자가 남에게 바르게 인식되고 싶어하는 소망을 노래한 것이라면, 이 시는 그와 반대로 인식의 주체로서의 화자가 존재의 본질을 인식하고자 하는 소망을 읊은 작품이다.
이 시에서 '꽃'이 사물의 본질을 상징한다면, '미지'․'어둠'․'무명' 등은 사물의 본질을 깨닫지 못하고 있는 상태를 뜻하며, 화자는 그 무명의 세계에서 벗어나 사물의 본질, 즉 꽃의 의미를 파악하려고 몸부림치는 존재이다.
1연에서 화자는 사물의 본질을 모르는 자신을 '위험한 짐승'이라 하여 무지에 대한 자각을 보여 주고 있으며, 2연에서는 자신의 자각 없이는 '꽃' 역시 불완전한 상태임을 드러내고 있다. 또한, 3연에서는 '추억의 한 접시 불'이라는 모든 지적 능력과 체험을 다하여 존재의 본질을 파악하기 위한 화자의 몸부림과 절망을 '나는 한밤내 운다'로 표현하고 있으며, 4연에서는 비록 존재의 본질을 깨닫지는 못했어도 그것을 추구하기 위한 노력인 '나의 울음' 그 자체가 아름다운 것이라는 역설적 깨달음을 보여 주는 한편, 마지막 연에서는 결국 존재의 본질을 파악하지 못하고 만 자신의 안타까움을 '얼굴을 가리운 신부' - 꽃을 통해 제시하고 있다.
존재의 본질은 무엇일까? 존재의 본질적 특성을 아는 사람이라고 한다면 본질의 추구는 불가능하리라고 생각할 것이다. 이 세상 만물은 모두 변하지 않는 것이 없으므로, 존재의 본질은 궁극적으로 계속해서 변해 가는 것이므로 어느 한 순간의 존재의 본질을 두고 파악한다는 것은 어쩌면 어리석은 일인지도 모른다. 사물의 존재이든지 인생의 존재를 두고 하는 것이든지 간에···. 이 시는 그러한 사물의 본질추구가 궁극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끝까지 사물의 본질을 추구하려는 행동에서 더욱 시적인 행동인지도 모르겠다. 그것은 시인이 본질적으로 불가능한 일인지 알면서 끝까지 노력하려는 자세, 즉 인생에 대한 끊임없는 본질적 추구에의 노력을 통한 참 인생의 모습을 구현한 것이기 때문이다. 존재의 본질을 끝까지 보여주지 않겠지만 역시 인생(삶)의 본질도 어쩌면 끝까지 찾을 수 없을 것일지도 모르지만 인생에 대하여 두고두고 음미해 볼만한 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