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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북 영동군 양산면 누교리에 위치한 천태산(715m)은 뛰어난 자연경관과 잘 정리된 등산로 그리고 주변에 많은 명소가 산재해 있고 암벽등반 코스등 등산동호인들의 사랑을 받고 있는 산입니다.
충청북도의 최남단에 위치한 영동은 충남 금산, 전북 무주, 경북 김천과 이웃해 있는 전형적인 내륙 지방으로 성주산과 마니산, 천태산을 비롯한 600 -700m대의 험준한 산줄기를 거느리고 있습니다. 이러한 첩첩산군이 흘러 보내는 크고 작은 계류들은 금강의 상류를 이루면서 아름다운 풍광을 만들어 냅니다.
양산면의 양산팔경, 황간면의 한천팔경, 상촌면의 물한계곡이 바로 그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천태산 영국사라고 하는 천년사찰과 영동읍의 양촌고인돌, 부용리고분을 비롯하여 부용성, 주곡리성 등 수 많은 성터들 속에서는 역사의 숨결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 중에서도 천태산은 자연의 수려함과 역사의 맥박을 가장 실감나게 느낄 수 있는 영동의 대표적인 곳입니다. 특히 75m의 암벽 코스를 밧줄로 오르는 맛은 결코 빼놓을 수 없는 천태산만이 갖고 있는 매력이기도 합니다.
충북 영동군 천태산주차장에 도착합니다. 이곳은 많은 눈이 내려 아직 곳곳이 눈이 많이 쌓여 있습니다. 더욱이 오늘은 눈까지 내립니다.
얼어붙은 삼단폭포의 모습입니다.
천년고찰 영국사와 1,300년동안 영국사를 지키고 서있는 은행나무입니다.
충북 영동군 양산면 누교리 천태산 중턱에 조용히 내리는 눈속 무덤을 보니 문득 조선 중기 때 시인 석주 권필(石洲 權韠, 1569~1612)이 송강 정철(松江 鄭澈1536~1593)의 무덤을 지나며 남긴 유명한 시가 떠오릅니다.
過松江墓有感(과송강묘유감) 송강의 무덤을 지나며
空山木落雨簫簫(공산목락우소소) 빈산에 낙엽은 지고 비는 부슬부슬 相國風流此寂蓼(상국풍류차적료) 재상의 풍류가 여기에서 쓸쓸하여라 惆愴一杯難更進(추창일배난갱진) 슬프다, 한 잔 술 다시 올리기 어려우니 昔年歌曲卽今朝(석년가곡즉금조) 옛날 그 노래가 오늘의 일이라네
낙엽 지는 늦가을, 아무도 다니지 않는 빈산에 비가 부슬부슬 내리니 풍류로 유명했던 정철의 무덤은 더더욱 적막합니다. 권필은 송강 정철의 문인. 같이 술을 마시고 시를 지어 주고 받던 날들이 그 얼마나 많았겠는가. 그러나 이제 다시 한 잔 술을 권할 수도 없고, 시를 읊을 수도 없게 되어 버렸습니다.
비 내리는 빈산의 무덤가, 사람은 가고 노래만 남았으니 삶과 죽음의 경계가 서글픕니다.
시인 權韠(권필, 1569~1612)은 조선 중기 때의 사람으로 성격이 자유분방하고 어디에 구속받기를 싫어하여, 벼슬에 나가지 않은 야인으로 평생을 마쳤습니다.
또한 조선시대 문인, 임연(臨淵) 이양연(李亮淵, 1771~1853)의 “自挽(자만) 내가 죽어서“입니다.
自挽(자만) 내가 죽어서
一生愁中過(일생수중과) 한평생 시름 속에 살아오느라 明月看不足(명월간부족) 밝은 달은 봐도 봐도 부족했었지 萬年長相對(만년장상대) 이제부턴 만년토록 마주 볼테니 此行未爲惡(차행미위악) 무덤 가는 이 길도 나쁘진 않군
내 이제 죽는다니! 몹시도 슬픈 일이지만 그래도 한 가지 좋은 점은 있습니다. 한평생 괴로운 인생에 부대끼며 사느라 하늘에 뜬 밝은 달을 마음 편히 즐기지 못했으나 이제 내 죽게 되었으니 생전에는 누리지 못한 달빛 감상을 실컷 하겠구나. “무덤가는 이 길도 나쁘진 않군“이란 말에 죽음을 앞에 둔 노인의 체념과 달관이 느껴집니다.
중국 동진(東晋)의 도연명(陶淵明, 365~427)은 스스로의 죽음을 애도하는 자만시(自挽詩)에서 “세상에 살아 있을 때 무엇이 한스러운가, 술 마신 것이 흡족하지 못 했음이라네 但恨在世時, 飮酒不得足(단한재세시, 음주부득족)“라고 했습니다. 이 말을 보고 과연 그가 죽음의 문제로부터 초연했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중국의 한(漢)나라 때 태사공(太史公) 사마천(司馬遷, BC 145~85)은 <사기(史記)>에서 “죽음에 대처하기 어렵다-處死者難(처사자난)”는 주제를 반복해서 말하며 “의미 있는 삶을 살아나가야 한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또한 죽음이란 태산같이 무겁고 기러기의 털같이 가벼운 것-死有重於泰山 輕於鴻毛(사유중어태산 경어홍모)이라 했습니다. 그는 동료인 이릉을 옹호하다 한(漢) 무제(武帝)에게 치욕적인 부형(腐刑-宮刑)과 같은 남성의 상징을 제거하는 형벌을 받습니다. 또한 그는 모친과 처자들 모두를 살해당합니다. 이에 그는 자기처럼 이름도 없는 관리가 설사 자살이든 피살이든 삶을 끊더라도 아홉 마리의 소 몸에서 털 한 개가 떨어지는데 불과하며[九牛一毛, 구우일모] 죽어 봤자 개미 한 마리가 죽는 것처럼 사람들이 거들 떠 보지도 않을 것이라 믿었습니다. 이에 그는 치욕을 견디며 삶이 있는 동안 쓰라린 고난을 무릅쓰고 영원히 남을 위대한 역사 저서 사기(史記)를 씁니다.
또한 신라 출신의 승려 혜초(慧超/蕙超, 704~787)가 나가라다나 절에서 입적한 어느 이름 모를 승려를 애도하여 “신령스런 그대 영혼은 어디로 갔는가, 옥 같은 용모가 재가 되다니. 생각하면 슬픈 마음 간절하거니, 그대 소원 못 이름이 못내 섦구나”라고 했겠는가. 그리고 그 끝에 “누가 고향 가는 길을 알리오. 돌아가는 흰 구름만 부질없이 바라본다”라고 존재의 불안을 토로하는 말을 했겠는가.
선인들은 이와 같이 죽음에 대처하면서 삶의 의미를 생각하고 자신의 본래성을 추구하였습니다. 죽음이 가져다줄 통절한 아픔과 슬픔을 가상으로 체험함으로써 죽음의 보편성을 배우고, 고독 속에서 홀로 겪게 될 죽음의 순간에 느낄 슬픔을 극복할 수 있었습니다. 또 죽음의 절박함을 알았기에 삶속에서 진정한 희열을 맛보고자 했습니다.
죽음에 대한 사색은 곧 삶에 대한 사색이자, 내 안의 숭고함을 되찾는 일입니다.
중국의 장자(莊子)는 죽음이란 영원한 고향으로 회귀하는 것이기에 그것이야말로 “참 진(眞)”이라고 했습니다. <"視死如歸(시사여귀)" 죽음은 집으로 돌아가는 것이다.>와 같은 담백함이 있습니다. 그리스의 철학자 플라톤은 소크라테스가 사형을 선고받고 사약을 먹으며 죽는 날(기원전 399년)을 배경으로 쓴 <파이돈>에서 이와 비슷한 말을 소크라테스의 입을 빌려 말합니다.
소크라테스는 행복하고 유쾌한 모습으로 묘사되고 있으며 죽음을 두려워하는 기색이라곤 전혀 발견할 수 없었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바로 영혼의 존재를 믿었고, 육체적 죽음 뒤에도 영혼은 살아남을 거라고 확신했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죽으면 영혼은 당연히 하늘로 올라갈 거라고 확신했습니다. 소크라테스는 모든 영혼들이 함께 살아가는 “플라톤의 왕국”을 믿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소크라테스는 모든 이들이 “형상(Form)”을 찾아 신의 왕국으로 가는 길을 알면서도 못가는 이유는 육체로 인해 발생하는 식욕, 성욕, 쾌락, 고통과 같은 혼란 때문이라고 합니다. 이런 육체적 욕망들 모두가 우리가 “형상(Form)을 찾아 하늘로 올라가는데 방해가 된다는 것입니다.
소크라테스가 말하는 ”형상(Form)“의 개념은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우리 모두가 추구하는 익숙한 물리적 세상과는 다른 차원에서 존재하는 왕국을 말합니다.
즉 영혼, 정의 ,수학, 아름다움, 완벽한 원, 진리, 진실 등등을 말합니다.
소크라테스는 이상적 존재에 집중하려면 욕망을 외면하고 육체로부터 가능한 멀리 떠나 있으라고 조언합니다. 실제로 소크라테스는 이를 위해 평생 노력했습니다.
어쨌든 소크라테스는 육체적 죽음 뒤에 정신적 영혼은 플라톤의 천국으로 올라갈 것이며, 거기서 형상과 직접 작용하게 될 거라고 믿었습니다.
그러므로 소크라테스는 죽음을 맞을 때 행복하고 유쾌한 모습을 보이고 있으며 죽음을 두려워하는 기색이라곤 전혀 발견할 수 없었습니다.
즉 소크라테스는 육체와 영혼이 함께 하는 일원론이 아닌 육체와 영혼은 분리 가능한 이원론을 믿고 있었습니다.
여러분은 소크라테스의 생각이 불가(佛家)의 부처가 주장하는 인연설과 공(空)과 비슷하다는 생각을 할 수도 있습니다.
붓다도 그의 전 생애를 걸쳐 해결하고자 했던 것은 인생의 고(苦)에 관한 문제였습니다.
붓다는 <잡아함>의 삼법경(三法經)에서 “(고(苦)의 문제가 없었다면) 모든 붓다 세존께서는 세상에 나오지 않았을 것이다. (설사 세상에 나왔다 하더라도) 세상 사람들은 모든 붓다, 여래께서 깨달으신 법을 사람들을 위해 널리 말씀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였을 것이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는 그의 가르침을 한마디로 “나는 단지 고(苦)와 고(苦)에서의 해탈(解脫)만을 가르친다.”라고 표현하기도 합니다.
붓다는 먼저 고(苦)를 발생시키는 원인을 추구한 뒤 그 원인을 제거함으로써 고(苦)에서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그것이 “열반(涅槃)”입니다. 열반(涅槃)이란 ‘고(苦)의 소멸(消滅)’ 또는 ‘고(苦)에서의 해탈(解脫)’을 의미합니다.
즉, 불교의 모든 교리의 유일한 목표는 고(苦)의 해결, 즉 열반(涅槃)의 성취입니다.
그런데 불가에서는 윤회의 원리로서 인간이 살아 있는 동안에 짓는 모든 업(業)은 틀림없이 결과를 낳게 되고, 그 결과가 다음 생(生)을 존재하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업(業)의 결과가 남아 있는 동안에는 윤회(輪廻)는 계속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업이 소진되어서 없어지면 윤회는 끝나게 됩니다. 이것이 해탈(解脫)이며 열반(涅槃)입니다.
열반(涅槃) 후 인간과 천상의 2도(二途)라는 선업(善業)을 지은 존재들이 사는 좋은 세계로 선도(善途)에 다달아 인간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은 특혜입니다. 인간도(人間途)에는 고(苦)도 있지만 그러나 이곳에서만이 수도(修道)를 할 수 있고 열반(涅槃)을 성취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붓다나 소크라테스 모두 육체와 영혼이 분리되는 이원론을 펴면서 현재 살고 있는 동안에는 욕망을 억제하고 떳떳하게 살며 고통으로부터 해방되는 수행의 과정을 거쳐 죽음 후에 이르는 영원한 “천국의 세계”와 “해탈(解脫)과 열반(涅槃)”을 성취하기를 주장합니다.
과연 여러분은 죽음에 대하여 어떤 생각을 갖고 계십니까?
지나온 천태산을 뒤돌아 봅니다.
망탑봉입니다.
진주폭포입니다.
오전에 출발한 주차장으로 위험한 눈길산행을 마치고 무사히 돌아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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