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 같이 돌자, 동시 한 바퀴 19
지난호 바로잡습니다
이안
한번 실수는 만회할 수 없다. 적어도 책 만드는 일에서는 한번 실수가 책가지상사(冊家之常事)로서 허용되지 않는다는 말이다. 그런데도 책 한 권에서, 특히 여러 사람의 글이 실리는 잡지에서 단 한 군데의 실수조차 허용하지 않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오죽하면 오랜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며, 그에 걸맞게 전문 편집자를 적잖이 확보한 유명 잡지의 목차에조차 ‘지난호 바로잡습니다’란 알림란이 드물잖게 등장하겠는가. 소소한(도무지 이런 표현이 있을 수 없지만) 띄어쓰기 착오는 말할 것도 없고, 오자나 탈자, 심지어는 주요 내용을 빠뜨리는 것도 모자라 작품 제목이 알 수 없는 경로를 거치며 바꿔지기도 하는 것이니, 오호라! 독자를 바라 한 점 부끄러움 없는 편집자의 길을 걷겠다는 것은, 과장하건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러움 없는 삶을 살리라는 것만큼이나 어렵다고 해야겠다.
가령 이번호 《동시마중》(2013년 9 ․ 10월호)에 실린 신작 동시 마흔두 편 가운데 제목이 어째 좀 이상하다 여겨지는 작품이 하나 있다. 시인에게서 작품을 넘겨받으며 1차 읽고, 전체 원고 교정 볼 때 2차 읽고, 인쇄소 넘어가기 전 3차 읽었는데, 1차, 2차에서 멀쩡했던 제목이 3차 교정지에 와서 엉뚱하게 바뀌어 들어가 있었던 것인데, 일이 안 되려니 참, 어이없게도 그 빤한 것이 보이지 않았다. 게다가 3차 읽을 때는, 제목이 왜 이렇지? 얼마간 모호하다는 느낌까지 받고도 원문과 대조해볼 생각은 눈곱만치도 하지 않았으니, 이 크나큰 실수의 출처가 내가 아니라면 누굴까. 한두 글자 잘못됐다면 시인에게 사과하고 ‘지난호 바로잡습니다’로 뒷갈망하며 송구한 대로 넘어가도 될 일이라지만, 이건 그 정도 사건이 도무지 아닌 것이다. 게다가 이 작품은 시인에게도 하나의 변곡점으로 기억될 만한 것이기까지 하다. 일단 시인에게 전화하여 사과하고 원문에 맞게 고쳐 재수록하겠다 약속했지만, 그러나 그런다 해도 한번 실수는 만회할 수 없는 것이다. 잘못을 바로잡지 않고 실린 그대로 전문을 소개해 본다.
연습
김유진
보라색 머리핀을 사고 싶었어. 가게 앞을 지날 때마다 유리창 너머 머리핀을 바라보았지. 누가 먼저 사가면 어쩌나 마음 졸이며 말이야. 어느 날 드디어 머리핀을 살 수 있었어. 머리핀을 꽂은 거울 속 내 모습이 예뻐. 가슴이 두근댈 정도로. 머리핀 하나로 행복했지. 그런데 보라색 머리핀에 어울리는 옷이 없네. 얼른 보라색 옷을 샀어. 보라색 옷에 어울릴 보라색 구두를 사고 보라색 구두에 어울릴 보라색 양말도. 보라색 가방과 모자도 샀지. 갑자기 필요한 게 너무 많아졌어. 보라색 장갑, 목도리, 수영복, 반지, 목걸이, 시계, 손지갑 참, 우산과 장화도 빼놓지 말아야지. 이제 내 몸에 걸친 모든 게 보라색이 되었어. 살짝 말하지만 속옷까지. 보라색 테두리에 보라색 렌즈가 달린 보라색 안경도 꼈으니 눈에 보이는 모든 게 보라색이야. 나도 온 세상도 보라색인 거야. 보라색 머리핀 하나 사고 싶었을 뿐인데. 그저 보라색 머리핀 하나 샀을 뿐인데.
랩으로 읊어도 좋을 만큼 쉽고 경쾌하며 속도감 있는 문체, 시의 입구에서 출구까지가 기분 좋은 산책에 적당할 만큼의 내리막으로 짜여 있어, 시의 화자가 그 진술의 내리막길을 재잘거리며 걸을 적에 보라색 머리핀 사이로 몇 올의 머리카락이 바람에 살랑이는 것이 보일 듯하다. 그러나 조금 자세히 들여다보면 이 작품은 ‘지나다’와 ‘바라보다’의 구조, 그것이 신체든 의식이든 간에, 이동과 멈춤의 틀 안에서 호흡되고 있음을 알게 된다. 네 번째 문장, “어느 날 드디어 머리핀을 살 수 있었어.”까지는 ‘살까, 말까’ 사이에서 이루어진 이동과 멈춤, 무수한 망설임이 반복되었음을 요약적으로 제시한다. 그다음, “머리핀을 꽂은 거울 속 내 모습”부터 “어울리는 옷이 없네.”까지는 멈춤, “얼른 보라색 옷을 샀어.”부터 “이제 내 몸에 걸친 모든 게 보라색이 되었어.”까지는 욕망의 연쇄와 확산을 보여주는 이동, “살짝 말하지만 속옷까지.”는 이제껏 외부로 향하기 급급했던 시선을 내부로 거두어들이는, 좀 더 깊은 차원의 멈춤, 그에 이어지는 두 문장은 자기와 세상을 둘러보는 장면을 입체화한다는 점에서 이동(그러나 앞서와 달리 구심력을 지닌), 마지막 두 문장은 이동의 결과를 성찰하는 멈춤으로 구성돼 있다. 그러니까 이 작품에서 보여주는 이동과 멈춤의 반복 구조는, 소망 혹은 욕망의 실현을 중심에 놓고 외부와 내부가, 확산과 수렴이 반복되는 구조이기도 하다. 이러한 구조는 어떤 소망의 채택이 나와 이 세계에 불러일으킬 파장, 그리고 이 모든 변화를 불러온 그것(“보라색 머리핀”)의 의미를 캐묻는 내용에 적합하다. 마지막 두 문장이 큰 여운으로 남는 것은 이러한 이동과 멈춤의 반복 구조가 빚어낸 점층의 효과라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이 작품은 정작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메시지가 강한 듯 보이지만 메시지의 내용이 그리 명확히 다가오지는 않는다. “보라색 머리핀 하나 사고 싶었을 뿐”이고, “그저 보라색 머리핀 하나 샀을 뿐인데” “나도 온 세상도 보라색”이 되었다는 이 사태가 궁극적으로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무엇일까. 여기서 “보라색 머리핀”은 자기 자신도 미처 몰랐던 자기 존재의 관건, 일테면 도미노의 첫 팻말에 해당한다. 그것이 건드려지는 순간, 자신과 자신을 둘러싼 세계가 걷잡을 수 없이, 전면적으로 재편된다. 그 결과가 부정적인가 긍정적인가는 중요하지 않다. 시인은 그걸 말하려는 게 아닌 듯하다. “그저” “하나” “뿐”이라는 표현에서 알 수 있듯, 시인은 조금도 의심할 필요 없이 사소한, “보라색 머리핀” 같은, 그러나 결정적인 사태로 자신을 이끌어갈 존재의 스위치에 주목하고, 이로부터 파생되는 존재와 세계의 재편 과정을 압축적으로 펼쳐 보일 뿐이다. ‘그것’을 건드림으로써, 집어 듦으로써, 밀어냄으로써, 끌어당김으로써, 회피함으로써, 끊음으로써, 참여함으로써, 마주침으로써, 비껴감으로써 우리는 각각 이렇게 엄청난 나비효과의 주인공이 되었다. 그래서 독자는 생각하게 된다. 나의 “보라색 머리핀”은 무엇인가.
“그저 보라색 머리핀 하나 샀을 뿐인데” “나도 온 세상도 보라색”이 된 것처럼, 한번 실수는 만회할 수 없다. 그것은 어긋난 대로 길을 만들며, 제 나름의 이야기를 써나갈 것이기 때문이다. 이 글이 이런 모양이 된 것도 나의 “보라색 머리핀 하나” 때문이 아니겠는가. 나아가 김유진에게 이 작품은 자기 시세계를 요(凹)에서 철(凸)로 변화시키는 “보라색 머리핀 하나”가 될지도 모른다. 시력(詩歷)이 그리 오래된 시인은 아니지만 이 작품에서는 김유진의 이전 시와 뚜렷이 갈라지는 지점이 보이고, 애써 추구할 만한 지점을 갖추고 있는 것으로 다가온다.
끝으로, 잘못 붙인 제목을 바로잡아 다시 한 번 전문을 소개하며 글을 마치려고 한다. 그런데 바로잡은 제목에서 멈칫, 멈추게 된다. 본문의 마지막 두 문장으로 이동해 본다. “보라색 머리핀 하나 사고 싶었을 뿐인데. 그저 보라색 머리핀 하나 샀을 뿐인데.” 샀다는 뜻일까, 사지 않았다는 뜻일까. 제목으로 다시 이동해 본다. 〈보라색 머리핀 하나 사고 싶었는데〉. 그래서 샀다는 뜻일까, 사지 않았다는 뜻일까. “보라색 머리핀 하나 사고 싶었는데” 이러저러한 사태가 예견되어 사지 않았다는 뜻인 것도 같고, “사고 싶었”던 건 “보라색 머리핀 하나”였는데 그에 맞추어 이만저만한 것들을 하나둘 사 모으다 보니 “나”뿐만 아니라 온 세상이 보라색으로 보여 난감하다는 뜻인 것도 같다. 본문에서는 샀다는 뉘앙스에 가깝고 제목에서는 사지 않았다는 뉘앙스에 가깝다. 사지 않았다면 내다보는 것이고, 샀다고 하면 돌아보는 것이지만, 돌아보면서 내다보는 것이고 내다보면서 돌아보는 것이라고 읽어도 무방하겠다. 그러니 제목 〈보라색 머리핀 하나 사고 싶었는데〉와 마지막 두 문장, “보라색 머리핀 하나 사고 싶었을 뿐인데.”, “그저 보라색 머리핀 하나 샀을 뿐인데.”는 시인이 의도적으로 궁리해 배치한, 정교한 모호성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것의 효과는 독자의 시선을 제목에서 본문으로, 본문에서 제목으로 이동하고 멈추게 하며 다시 이동하게 한다는 것, 그리하여 시의 손쉬운 독해를 지연시킴으로써 독자의 시선을 좀 더 오래 시에 머물게 한다는 것이다. 어쨌든 이 작품이 시인에게도 독자에게도 잘 잊히지 않는 “보라색 머리핀 하나”를 달아준 것만은 분명하다. 그런데 〈보라색 머리핀 하나 사고 싶었는데〉가 어떤 경로를 거쳐〈연습〉으로 둔갑하여 들어간 것일까. 정말 귀신 곡하고 자빠질 노릇이다.
보라색 머리핀 하나 사고 싶었는데
김유진
보라색 머리핀을 사고 싶었어. 가게 앞을 지날 때마다 유리창 너머 머리핀을 바라보았지. 누가 먼저 사가면 어쩌나 마음 졸이며 말이야. 어느 날 드디어 머리핀을 살 수 있었어. 머리핀을 꽂은 거울 속 내 모습이 예뻐. 가슴이 두근댈 정도로. 머리핀 하나로 행복했지. 그런데 보라색 머리핀에 어울리는 옷이 없네. 얼른 보라색 옷을 샀어. 보라색 옷에 어울릴 보라색 구두를 사고 보라색 구두에 어울릴 보라색 양말도. 보라색 가방과 모자도 샀지. 갑자기 필요한 게 너무 많아졌어. 보라색 장갑, 목도리, 수영복, 반지, 목걸이, 시계, 손지갑 참, 우산과 장화도 빼놓지 말아야지. 이제 내 몸에 걸친 모든 게 보라색이 되었어. 살짝 말하지만 속옷까지. 보라색 테두리에 보라색 렌즈가 달린 보라색 안경도 꼈으니 눈에 보이는 모든 게 보라색이야. 나도 온 세상도 보라색인 거야. 보라색 머리핀 하나 사고 싶었을 뿐인데. 그저 보라색 머리핀 하나 샀을 뿐인데.
이안
1999년 《실천문학》 시 부문 신인상으로 등단했다. 시집 《목마른 우물의 날들》 《치워라, 꽃!》, 동시집 《고양이와 통한 날》 《고양이의 탄생》을 냈다. 동시 전문지 《동시마중》(http://cafe.daum.net/iansi) 편집위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