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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7월 9일 주일예배 설교내용 – 성령님이 임재하시는 증거 1. / 聖霊様ご臨在の証拠Ⅰ。
본문; 로마서 8:12-17
요 15:12 ○그러므로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는 빚을 지고 사는 사람들이지만, 육신에 빚을 진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육신을 따라 살아야 할 존재가 아닙니다. 13 여러분이 육신을 따라 살면, 죽을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성령으로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 것입니다. 14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누구나 다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15 여러분은 또다시 두려움에 빠뜨리는 종살이의 영을 받은 것이 아니라, 자녀로 삼으시는 영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영으로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릅니다. 16 바로 그 때에 그 성령이 우리의 영과 함께,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임을 증언하십니다. 17 자녀이면 상속자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영광을 받으려고 그와 함께 고난을 받으면, 우리는 하나님이 정하신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더불어 공동 상속자입니다.
12. それで、兄弟たち、わたしたちには一つの義務がありますが、それは、肉に従って生きなければならないという、肉に対する義務ではありません。13. 肉に従って生きるなら、あなたがたは死にます。しかし、霊によって体の仕業を絶つならば、あなたがたは生きます。14. 神の霊によって導かれる者は皆、神の子なのです。15. あなたがたは、人を奴隷として再び恐れに陥れる霊ではなく、神の子とする霊を受けたのです。この霊によってわたしたちは、「アッバ、父よ」と呼ぶのです。16. この霊こそは、わたしたちが神の子供であることを、わたしたちの霊と一緒になって証ししてくださいます。17. もし子供であれば、相続人でもあります。神の相続人、しかもキリストと共同の相続人です。キリストと共に苦しむなら、共にその栄光をも受けるからです。
오늘은 예수동행시리즈 설교의 아홉 번째 메시지입니다. 2주 전에 성경의 말씀을 통해 우리 안에 계신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당신 안에 거하라는 가르침에 대해 나누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말씀과 가르침에 거함으로 주님께서 우리와 동행하시는 복을 누릴 수 있다는 것을 믿습니다. 그리고 주님과 동행하는 것이 아름다운 열매를 풍성하게 맺는 인생으로 사는 것임을 기억하실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오늘과 다음 주에 걸쳐서 우리 안에 성령님께서 계신 증거에 대해서 말씀을 통해 확증하는 시간을 가지려고 하는데요. 전에도 말씀을 드렸지만, 우리가 스스로의 존재가치를 눈에 보이는 것으로 헤아린다면... 이 땅의 가치가 소멸하게 될 종말이 올텐데... 그날에 이 세상과 함께 나도 멸망해 버리고 말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영원토록 주님과 동행하는 증거를 확실히 소유하고 있는 것이야말로 가장 가치 있고 지혜로운 능력이 되는 것을 믿습니다.
내가 인생을 살지만 동시에 영생을 살고 있다는 이러한 증거는 눈에 보이는 물질의 축복이나, 혹은 세속적인 성공을 누리는 것과 비교할 수 없는 놀라운 능력이 되는 것을 믿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우리 스스로 자신의 존재감과 그 가치를 점검해야 한다고 가르쳐 주고 계십니다.
너희는 믿음 안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는 버림 받은 자니라 (고후 13:5)
그런데 과연 우리는 예수님께서 지금 나 자신과 동행하고 계신다는 것을 어떻게 점검할 수 있을까요?
주변의 일상이 편안하면 주님이 함께 계신 것일까요? 나의 기도가 언제나 응답받고 모든 일들이 내가 소원하는 데로 이루어진다면 주님이 함께 계신 증거가 될까요? 아니면 나의 눈에 예수님이 보내신 천사들이 내 주변에 함께 있다는 것을 볼 수 있는 능력이 있다면 증거가 되는 것일까요?
예수동행운동을 하시는 유기성 목사님은 지금까지 많은 집회를 다니고 계시는데요. 그 와중에 예수님께서 믿는 자들과 언제나 어디서나 동행하고 계신다는 메시지를 전하면, 그 사실을 믿지도 못했고, 생각하지도 못했다며 충격을 받고 탄식하는 분들을 의외로 많이 만나신다는 것이에요. 그러니까 교회는 다니는데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성경)을 듣지도 않고, 혹여 듣는다고 해도 몸으로 순종하지는 않는 의외로 사람들이 많다는 것이지요.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시는 말씀에 순종하는 사람이 건강한 내면을 갖춘 지혜로운 사람이고, 그 자체로 형통한 사람이라고 성경은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 (마 7:24)
예수님께서 기억하시고 인정하시는 지혜로운 사람은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사람인 것이지요.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나와 동행하고 계심을 알 수 있는 기준도 예수님의 말씀인 성경이 가르쳐 주고 계신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이 세상의 그 어떤 설득력이 있는 말이나 놀라운 사건보다 주님의 분명한 말씀을 기록한 성경을 통해 우리는 주님께서 내 안에 임재하고 계심을 확증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대체로 7가지 증거로서 주님이 우리 안에 계신다는 증거를 가질 수 있습니다. 성경이 말씀하시는 것이 자신의 삶에 현실로 나타나고 있다면 분명히 주님은 내 안에 임재하고 계신 것을 믿을 수 있습니다.
첫째로 예수님을 구세주로 고백하고 있다면 그 사람 안에는 예수님의 영이신 성령님이 분명히 임하신 사람입니다. 여러분은 예수님께서 자기의 죄를 위해 십자가의 형벌을 대신 받으셔서 구원하신 구세주이신 것을 믿고 고백하십니까?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내 안에 성령님으로 임재하고 계신다는 것을 믿으셔도 좋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을 구세주라고 고백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성령이 아닌 다른 영이 역사, 즉 활동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성령이 아닌 다른 영이 그 안에서 역사하는 사람은 예수님을 알 수도 없을 뿐 아니라, 예수라는 인물을 안다고 해도 구세주로서는 믿지는 않는 거죠. 성경은 우리가 예수님을 구세주로 고백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영에 의해서 말하기 때문이라고 가르쳐 주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알리노니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아니하고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 (고전 12:3)
또한 요한 사도는 이렇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누구든지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라 시인하면 하나님이 그의 안에 거하시고 그도 하나님 안에 거하느니라 (요일 4:15)
예수님을 하나님 아들, 구세주로 고백하는 이는 지금 영생하시는 하나님 안에 있고, 하나님께서도 그 안에 거하신다는 것에요. 이것은 예수님을 구세주로 고백하는 사람 안에는 다른 영적 존재가 아닌 성령님께서 함께 계신다는 뜻입니다. 그러니 여러분, 예수님이 그저 역사적으로 훌륭한 일을 한 어떤 인물, 혹은 기적을 나타낸 사람, 또는 상상 속의 인물정도로 여기고 있다면 말씀을 더욱 진지하게 대하는 시간을 가지면서 회개해야 합니다.
내가 예수님은 구세주이시지... 라고 생각하게 하고 고백하게 하는 것은 인간적인 자신의 의지나 혹은 지성적인 사고의 차원보다 훨씬 깊은 영적인 영역인 것을 기억하시길 바랍니다.
두 번째로 우리 안에 임재하신 성령님은 우리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게 하십니다. 하나님은 창조주이십니다. 그리고 유일하신 신이십니다. 우리가 신이라고 부르는 것들은 진정한 신이 아니에요. 다만 우리 욕망이 만들어 낸 허상이거나, 사단 마귀의 졸개인 귀신의 장난으로 나타난 것 뿐이지요.
그런데 하나님을 전지전능한 유일한 신이면서 동시에 우리의 아버지, 즉 존재와 영혼의 근원과 원인이 되는 부모이신 것이 믿어지게 하는 분이 성령님이신 것이지요.
오늘 본문의 15절에 보시면 우리가 자녀의 영을 받았다고 고백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담대하게 하나님께 대하여 아빠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다는 것이데요. 야고보서 2장 19절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네가 하나님은 한 분이신 줄을 믿느냐 잘하는도다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 (약 2:19)
이것이 무슨 뜻이냐면, 하나님을 유일신 혹은 창조주로서 믿는 것은 귀신들도 너무 잘 아는 사실이라는 것에요. 다만 귀신들에게 하나님은 두렵고 공포스럽기만 한 존재이시라는 것이지요. 어두움에 속한 귀신들은 빛이신 영광의 하나님을 무서워하고 떨며 두려워할 뿐입니다. 하지만, 예수를 구주로 고백하고 구원받은 성도들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받았다고 성경은 말씀하고 계신데요.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요 1:12)
예수님을 영접한 자는 곧 성령님을 영접한 사람이기도 합니다. 성령님을 영접한 사람은 성령님의 임재하심 안에 살아갑니다. 그가 곧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받았다고 성경은 이렇게 명확하게 기록하여 증언하고 계신 것이지요.
그러니 여러분, 하나님을 아버지로 자연스레 부르고 고백할 수 있다는 것은 너무나도 놀랍고 감격스러운 일이며 자격인 것이지요. 인간적인 아버지에 대해서는 각 개인의 경험에 따라서 호불호가 갈릴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믿음으로 부를 수 있는 하나님 아버지의 호칭은 그 어떤 것도 책임져 주시며 끝까지 포기하지 않으시고 기억하는 하나님의 사랑을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또한 우리의 육신적인 경험이나, 혹은 지적인 탐구에 의한 것이 아니라, 영적인 영역에서 이루어진 것을 믿습니다.
세 번째로 성령님이 임재하시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은혜를 안다, 혹은 은혜를 받는다(체감한다)고 표현하는데요. 실제로 하나님의 은혜가 주시는 특별한 감동이 있는 것입니다. 이는 세속적인 감각이나 느낌과는 사뭇 다른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고린도전서 2장 12절은 고백합니다.
우리가 세상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온 영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 (고전 2:12)
하나님의 은혜란 명확하게 말하면 하나님께서 나에게 베풀어주신 것이라고 표현할 수 있는데요. 무엇보다 직접적으로는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고 흐뭇해하시는 일들과 활동들을 통해서 감각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우리가 찬송이나 찬양을 부르고 들을 때 주시는 감동이 다른 여느 세속적인 노래를 들을 때 느끼는 기분과는 많이 다르지요. 예배를 드리는 이 시간과 이 자리를 지키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다른 여느 모임이나 대회, 혹은 행사에 참석할 때와는 다른 감동을 느끼게 되지요. 하나님께 기도할 때와 내가 누군가를 만나서 현실적인 고민들을 주제로 수다를 떨 때가 구별됩니다. 성령님께서 우리 안에 활발하게 역사 즉, 활동하고 계신다면 우리는 너무도 자연스레 기도와 말씀과 찬송, 그리고 예배하는 것과 같은 영적활동을 가장 기뻐하며, 흐뭇해하게 되는 것을 경험합니다.
그런데 만일 찬송과 기도, 그리고 예배의 시간을 지킬 때는 그저 마지못해 겨우겨우 힘겨워하면서 하고, 나머지 속된 활동들에서 활기를 얻고 있다면 자신의 내면에서 무엇이 더 활동적으로 움직이고 있는지를 점검해야 할 것입니다.
또한 은혜를 깨닫고, 은혜받는다는 것은 지금 나의 일상에서 경험하는 모든 것을 하나님께서 내게 허락하신 은혜라고 헤아릴 수 있는 감각이 살아난다는 것인데요. 그래서 세속적인 현실에 살고 있지만, 세속적인 즐거움과 하나님께 속한 영생의 기쁨을 구별할 수 있는 감각을 주셨다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비록 우리가 세속적인 환경에서 인생을 살고 있지만, 하나님의 은혜를 통해 영생의 삶도 함께 살고 있다는 것을 믿습니다. 인생은 육신의 피부로 느껴지지만, 영생은 내 마음의 성령께서 채우시는 은혜로 느껴지는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이 육신의 기분이 아닌, 은혜로 모든 것을 볼 수 있는 눈이 열리길 바랍니다.
네 번째로 용서와 사랑의 마음이 생깁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이라고 한다면 용서하고 사랑하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어떤 이들은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이런 능력도 갖고, 저런 이적도 보이며 늘 대단한 실력을 과시하는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하지만, 능력 중의 능력은 용서하고, 사랑하게 되는 능력입니다. 이것은 인간의 경험이 아니라, 성경의 증언입니다. 요한 사도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요일 4:8)
하나님께서 사랑 그 자체이시기 때문에 누군가를 사랑할 수 있다면 우리는 이미 하나님의 능력을 내면에 받은 사람입니다. 그래서 누군가를 용서하고 사랑한다면 그 안에 하나님께서 살아계시는 흔적을 나타낼 수 있다는 것이지요.
어느 때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만일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그의 사랑이 우리 안에 온전히 이루어지느니라
그의 성령을 우리에게 주시므로 우리가 그 안에 거하고 그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줄을 아느니라 (요일 4:12-13)
그런데 누군가를, 혹은 무엇인가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없습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는 자도 자기가 좋아하는 사람을 사랑합니다. 그렇다면 과연 예수님을 구세주로 고백하지도 않고,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지도 못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느끼지도 못하는데 그저 누군가를 열렬히 사랑하기만 하면 그 사람도 성령님께서 임재하시고 계시는 것일까요?
성경이 말하는 사랑이란 감정적인 호감이 아니라 용서하는 사랑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가르쳐 주셨습니다.
너희가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면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 잘못을 용서하시려니와 (마 6:14)
만일 하루에 일곱 번이라도 네게 죄를 짓고 일곱 번 네게 돌아와 내가 회개하노라 하거든 너는 용서하라 하시더라 (눅 17:3)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복음을 믿는 자들의 가장 큰 능력은 바로 원수를 사랑하고 그를 위해 기도하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마 5:44)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창조의 권능을 선인과 악인을 구별하지 않고 베푸셨기 때문입니다.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추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려주심이라 (마 5:45)
사실 원수와 같은 이도 사랑하고, 내게 잘못을 저지른 이를 용서한다는 것은 일반적인 상식으로는 잘 이해하기 힘든 일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육신적인 소욕을 거스르는 것이지요. 성경은 말씀하십니다.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은 육체를 거스르나니... (갈 5:17a)
따라서 우리 안에 성령님께서 활동하고 계시면 육신의 이기적인 욕망을 거스르는 거룩한 걸림돌이 생기게 되는 것이지요. 이때의 걸림돌은 사실 우리에게 있어서 보석과 같은 존재이기에 거룩하다고 말씀드립니다. 마치 멸망으로 질주하는 우리의 육체적 탐욕을 제어하는 브레이크와 같은 역할을 하기 때문이죠.
만일 누군가와 다투었거나, 혹은 나의 이기적인 권한을 행사하는 것에 마음이 걸리는 일이 생겼다면 성령님께서 내 안에 계셔서 나의 탐욕을 절제하게 하시는 것이라고 믿어도 좋습니다. 성령님은 이렇게 우리의 내면에 오셔서 우리가 거룩한 자의 삶을 소명으로 삼고 살아가게 하시는 것을 믿습니다.
혹시 이런 증거들이 명확하지 않으신다고 해서 불안하거나, 또는 낙심 좌절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제 회개하고 구하며 주님께서 주실 것이기 때문이지요.
다음 주에는 예수님의 영이신 성령님께서 내 안에 살아계신 다섯 번째부터 일곱 번째의 증거를 나누기로 하겠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죄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셨지만, 사망의 저주를 끊으시고 부활의 첫 열매가 되셔서 하늘의 하나님 나라로 승천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서 우리를 위해서 중보하고 계십니다. 또한 성령님을 예수 믿는 우리에게 보내셔서 우리가 성령님의 임재하심 가운데 살 수 있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말씀을 통해 성령님께서 우리 안에 살아계신다는 것을 명확하게 증명해 주고 계십니다. 성령님의 임재하심으로 우리는 예수님을 구세주로 고백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로 고백할 수 있지요. 또한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고, 속된 기분과 감정을 구별해 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나 아닌 타인을 무조건 예수의 이름으로 용서하고, 원수까지 사랑하고 축복하겠다는 감동을 주십니다. 저와 여러분이 성경이 가르쳐 주시는 증거로 자신의 내면을 점검하여 언제나 나와 동행하고 계시는 예수님과의 감격스럽고 은혜로운 일상을 누리실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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