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 그리고 봄 여름 가을
가을을 마지막에다 두고, 겨울로부터 시작하여 봄, 여름의 순으로 제목부터 붙여본 까닭은, 달랑거리는 달력의 마지막 장에 눈이 머물자 그만 어깻죽지가 스산해진 탓이라 여기십시오. 단언하여 끝이란 선언적인 말에 심사가 뒤틀렸단 뜻입니다.
애초에 누군가가 봄을 필두로 정한 순서에 배반하지 않고 살아온 것이 문명이고 역사이다 보니, “억겁의 해를 순환하여 온 계절에 시작과 끝이 어디 있겠느냐?” 라는 나의 불문곡직不問曲直은 여지없이 우문일 뿐입니다.
굳이 아전인수我田引水 하나쯤 끌어대라 하신다면, “새벽에 일어나는 새가 먹이를 더 먹는다.” 등, 불변의 속담이 그만 무색해진 일 정도가 아니겠습니까. 말하자면 현대인의 시간 패턴이 변화무쌍하여 하루의 시작과 끝점이 없어진 것이니 한해라 하여 굳이 그 순서에 따라 관념적 희비에 휩싸일 일이 아니란 주장입니다.
이를테면 J 시인께서 계절에 관한 글을 엮으면서 그 순서를 여름으로부터 시작하여 봄으로 끝을 맺은 것을 보고, 통속적인 정의에 대하여 의아해했던 사람이 나 외에도 있다는 사실에 안도하는 정도라 여기십시오.
돌이켜 보니 나는 봄의 분주에 허둥댔으며, 여름의 풍요 속에서는 걱정을 잊었고, 가을의 결실이 그저 당연하다 여겼으니, 겨울의 소멸 또한 뭐 그리 대단한 안타까움이었겠습니까? 지나고 나면 또다시 봄이 오는 것이니 그저 타성 속에 안주한 아둔한 자의 삶이 아닙니까?
난데없이 겨울, 봄, 여름, 가을의 순서로 나열하는 것은 어깃장이 분명하나, 기회로 계절의 시작이라 여겼던 몇 번의 겨울을 추억해 본다는 것이 다행이라면 다행이겠습니다.
어느 해 겨울, ‘에덴공원’의 낙조가 그랬습니다.
장작불이 조명을 대신하던 통나무집을 흐르던 음유시인의 퇴폐적 저음과 쌀 막걸리의 텁텁함 그리고 ‘태양’ 담배의 연기, 무엇보다도 수면 아래로 숨을 꼴딱 삼킬 태양이 만드는 통속적인 조락의 장면에 취하고자 모인 대학입시를 막 끝낸 우리의 안도감이 시발이었습니다.
그러나 처음 먹는 술의 열기와 폭발 직전의 에너지를 주체하지 못하고 강변으로 튀어나온 우리는 그만 입을 다물지 못하고 하나 둘 강가에 늘어서고 말았습니다.
태양이 침잠할 대지는 곧 우리가 키울 가슴이며, 공기를 가르고 있었던 명징한 소리는 쓰러진 갈댓잎을 다시 세우라는 선언이고, 살을 에던 바람은 진리와 자유의 쪽으로 등을 떠미는 선동임을 청맹과니 우리가 짐작이나 했겠습니까?
무방비의 우리를 덮친 겨울 강변의 낙조는 실로 장엄하고 큰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봄이 오자 말쑥한 머리에 맞춤 양복 하나씩을 걸쳐 입고, 대학의 운동장에 분기탱천 섰던 것입니다.
한국 자생 춘란의 꽃을 겨울 산에서 발견했을 때의 감동도 못지않은 것이었습니다.
춘春이란 이름이 붙었기에 꽃이 엄동의 덤불에 숨어 있다는 것은 더더욱 경이로움이었습니다. 봄꽃 못지않게 벙글은 꽃봉오리는 물론이고 더러는 꿀샘까지 달고 있었으니, 종족보존의 매파인 벌과 나비의 유혹은 꿈도 못 꿀 추위 속에서 꽃의 의지는 실로 가상한 것이 아니었겠습니까? 새파란 잎과 잘 조화된 모습의 꽃은 봄의 분망함이나 여름의 충만 못지않게 당찼으니, 사람들이 피부로 겪는 온도에 의한 말초적인 두려움 따위가 춘란에게는 애초부터 아랑곳할 것이 아니었나 봅니다.
굳이 짝짓기 좋은 시절과 열매 맺기 좋은 계절을 피하여 피는 꽃의 심사를 여전히 헤아리지 못합니다. 다만, 수십 미터 아래의 땅의 온기와 수천 피트 상공을 흐르는 공기의 거대한 이동을 짐작해 보았을 뿐입니다. 보이지 않는다 하여 어찌 없는 것이며, 움직이지 않는다 하여 어찌 멈춘 것이었겠습니까?
모르긴 해도, 올바른 사유란 더 깊은 곳을 짐작하는 것과 더 먼 곳을 바라보아야 함을 꽃이 가르쳤던 것 같습니다. 겨울의 한가운데에서 꽃의 의지는 해마다 당당하였습니다.
그 훨씬 이전부터, 나는 겨울은 모든 것이 떠나는 계절임을 인정해버리는 우遇를 범하고 있었던 것 또한 사실입니다.
어머니 병상을 비우던 날 아침의 벽에 걸린 12월의 달력, 훨씬 이전 어느 해의 동짓달. 아버지를 태운 꽃상여 길엔 샛바람이 어찌 그리 모질게 불던가요? 영화 ‘겨울여자’ 에서 여배우가 남자와 이별하는 장면도 눈발 날리던 종로 거리였을 뿐더러, 친구 H의 어머니가 불미스런 일로 조리돌림을 당하고 어린 H를 데리고 동네를 떠난 얄궂은 기억도 어느 겨울 새벽의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스무 살을 훌쩍 넘긴 건장하고 미남이던 H를 남포동의 어느 골목에서 만났을 때의 안도감에 감사했습니다. 끝이 될 뻔도 했을 그해의 겨울과 고개를 넘는 두 모자의 발걸음을 잠시 짐작해 보았을 뿐, 안부를 물어보는 따위는 터무니없는 일임을 알았습니다.
스무 살이 채 되지 않았던 영화 속 여주인공의 상처인들 몇 해를 갔겠어요? 아마도 영화는 해피엔딩이었던 것 같습니다.
나 또한 그 두 번의 슬픈 겨울을 지나고 나서 소중한 것을 얻었습니다. 부모님의 부재는 우주에 생긴 블랙홀 같은 것이었으나 캄캄한 데로부터 내게로 온 것도 있었으니, 그리움에 익숙해지는 법과 추억을 써보는 일이었습니다. 부모님과 나 사이의 전설이 내 입으로 토설되어 내 아이들의 가슴에 기록되어 진다면 이별 또한 어찌 진화라 부르지 않겠습니까? ‘가족의 진화’, 소멸은 늘 새로운 탄생의 거름이 됩니다.
다시 겨울이 왔습니다. 그 와중에는 사위가 혹독하더라도 아랑곳하지 않고 뚜벅뚜벅 걸어 나오는 것들이 있습니다.
지난밤을 무사히 지난 야생 고양이의 기지개, 일찍 나온 철새들의 먹이 짓, 산사의 풍경을 울리던 새벽공기의 흐름, 첫차에 오른 노동자의 졸음, 시장 좌판의 뜨거운 국물, 두터운 목피 속의 보이지 않는 움을 짐작해 보려는 노인의 산책......, 나는 겨울에 일어나는 이런 미미한 것들의 야무진 도발이 좋습니다. 그러한 도발을 곰곰 헤아려봄으로써 내 어깃장의 저의를 더욱 뚜렷하게 하려는 욕심조차 생기는군요.
겨울의 땅이 따듯함은 이미 짐작한 바 있었습니다. 깊은 물속에 녹은 자양분과 높은 하늘을 흐르는 공기의 순환은 엄동에도 꽃을 피웠을 뿐더러, 겨울에 맞은 이별과 소멸의 상처는 또 다른 출발의 이치를 깨우치게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살진 봄을 위하여 오히려 겨울이 더 뜨거워야 함을 웅변하겠습니다. 혹, 나의 문장에 계절이 열거될 일이 다시 생긴다면 기꺼이 겨울을 필두로 세울 겁니다.
*J시인 : 시인 장석주
*에덴공원 : 부산 낙동강 변의 작은 공원
*태양 : 1970년대에 판매되던 담배의 이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