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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두대간 [ 白頭大幹 ]
* 위 치 : 경북 영동, 상주
* 산행일시 : 2023년 04월 02일
* 교통편 : 안내산악회 (좋은사람들)
* 산행코스 : 추풍령~금산~들기산~사기점고개~작점고개~무좌골산~용문산(인증)~웅이산 국수봉~민영봉~큰재(18.74km/7시간)
- 출발지점 : 충북 영동군 추풍령면 추풍령리 203-5 도계공원 주변
- 도착지점 : 경북 상주시 공성면 우하리 522-5 백두대간숲생태원
* 산행시간 : 09:45~15:09 (산행 5:23분/휴식시간:0시간 30분)
* 산행속도 : 4.02 km/h
* 산행거리 : 19.65km
* 날씨 : 맑음
* 기온 : 16~22
* 약수터 정보 :
* 조망점 : 정상
* GPX 트랙 : 별도 첨부
* 100대 산 정보 :
* 산행난이도 : 고도차:중 , 거리:중상
* 주요 볼거리 : 능선길. 정상조망.
백두산에서 시작되어 동쪽 해안선을 끼고 남쪽으로 흐르다가 태백산 부근에서 서쪽으로 기울어 남쪽 내륙의 지리산에 이르러
우리나라 땅의 근골을 이루는 거대한 산줄기의 옛 이름이다.
이전에 이곳 추풍령에서 마쳤는데.
오늘은 당일로 이곳에서 시작하여 큰재까지 산행하는 코스이다.
모처럼 더운 날씨이다.
오늘 기온은 영상 20도 이상이 될 것 같아 오르막도 제법 있고 아무래도 더운 산행이 되지 않을까 한다.
당일이라서 그런지 우리 기존팀원들은 8명 정도 되고 나머지는 거의 대부분 처음 보는 사람들이다.
추풍령 주차장에 도착을 했다.
나는 미리 배낭을 다 챙기고서 제일 앞쪽에서 일행을 기다리고 있으며 이곳의 사진을 담았다.
[추풍령] 221m
충북 영동군 추풍령면과 경북 김천시 봉산면의 경계에 있는 고개. 경부선 중의 최고점으로 낙동강과 금강의 분수령이자 한국의 중부와 남부의 경계를 이룸. 높이 221m. 낮고 완만한 고개지만 전략상으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해 옛날부터 나라에 전쟁이 있을 때마다 이 고개에서 피 터지는 싸움이 벌어지곤 했다고 한다.
금강과 낙동강의 분수령이며, 예로부터 영남지방과 중부지방을 잇는 중요한 교통로였다. 지금도 경부선 철도의 추풍령역이 있고, 4번 국도가 통하며, 경부고속도로의 중간점으로 추풍령휴게소가 있다. 추풍령에서 갈재구간 산행기점인 당마루 새마을 앞에 추풍령 표석이 있다. 추풍령 표석은 88올림픽 성화봉송로를 기념으로 88년 9월 5일 영동군에서 세운 것으로, '구름도 자고 가는 바람도 쉬어 가는' 가수 남상규氏 노래 구절을 적어 놓았다.
그 옛날 남쪽지방 사람들은 한양으로 과거를 치르기 위해 또는 장사를 하려고 말을 타거나 걸어서, 또는 등짐을 짊어지고 달구지를 끌며 이 산등성이를 넘어 다녔을 것이다. 한국전쟁이 터졌을 때도 많은 사람들이 언 발을 절룩거리며 이 고개를 넘어 남으로 한 많은 피난길을 떠났을 것이다.
원래는 추풍령 일대가 분지이다 보니 인근의 지역보다 가을물이 일찍 들고, 고개치고는 발달한 분지 덕에 가을 걷이가 풍성하다 하여, 秋豊이라 했으나, 오늘날에는 대체로 秋風으로 불리고 있다.
- 군사적 요충지
임진왜란 때에는 군사적 요충이 되어, 의병장 장지현(張智賢)이 추풍령 오룡동에서 의병 2천명을 이끌고 왜장 구로다 나까마사(黑田長政)가 이끄는 왜군 2만 명을 맞아 분전 끝에 물리쳤고(1차 전투), 다시 밀려온 4만 명의 왜군에게 패하여 장렬히 전사한 곳이다. 장지현은 영동의 매천리에서 태어나 한때 관서의 변방에서 신립의 부장으로 공을 세운 사람이다. 왜군의 선봉 고니시 유끼나가(小西行長)가 이미 한양의 성문을 열어젖히던 임진년 5월 2일의 일이었다.
- 영남과 호서의 접경, 당마루
추풍령 면소재지가 있는 작은 산읍이다. 본래는 경상도의 금산군(김천)을 따르던 마을인데 1906년에 충북의 황간군이 되었다가 훗날 황금면으로 이름을 바꾸어 영동군이 되었다. 오늘날엔 지방 자치가 되어 황금면보다는 추풍령면이 두루 소문을 얻기에 이롭다고 그렇게 바꾼 것이 이제 칠팔 년이 지났다. 백두대간의 분수령이 으레 그렇듯 물이 적어 불편하고 낮과 밤의 일교차가 심하여 곡식보다는 과수가 잘 된다. 물이 적고 토지가 메마르던 옛날에는 그저 메밀 농사가 고작이었다. 고갯마루가 온통 새 하얀 메밀꽃이었으니 추풍령의 다른 이름 백령(白嶺)은 그리하여 생겨났다. 일제 시대 사기점 골짜기에 저수지를 파 겨우 논농사를 지었으나 이제는 너나없이 작파하고 밭이란 밭은 모두 포도가 주업이다.
명색이야 백두대간의 고개지만 추풍령은 그리 높지 않은 탓에 가다보면 어느 틈에 그만 평지처럼 슬그머니 재를 넘는다. 소문난 고개치고는 별 볼거리가 마뜩찮고 흔한 당집이나 당목 한 그루도 없는데 웬 일인지 마을의 이름만은 예로부터 당마루라 불렀다. 마을을 둘로 쪼개어 경상도와 충청도가 나뉘었으니 당마루 역시 경북의 당마루와 충북의 당마루가 서로 생겨났다. 반쪽은 김천 시민이요, 반쪽은 영동 군민이다.
고갯마루에 배나무를 심은 작은 언덕 밭이 옛날 주막이 있던 자리다. 배나무 밭이 끝나는 밭둑에 도계를 알리는 경계석이 서 있는데 그 기둥돌을 사이에 두고 한때는 경상도 주막과 충청도 주막이 나란히 있었다. '통행금지'가 있던 시절, 밤이 아쉬운 경북의 술꾼들이 당마루에 올라와 경상도 주막에서 술을 마시다가 자정이 되면 통행금지가 없는 충청도 주막으로 건너오곤 했다는 일화는 두루 알려진 유명한 이야기다.
추풍령은 언제나 그렇게 구름이 모여들고 바람이 술렁대는 고개였다. 조선 시대에는 역과 원으로 이어진 관로(官路)였으며 일제 시대에는 경부선을 오가는 기차가 으레 빠짐없이 쉬어가는 곳이었다. 까닭이야 숨가쁘게 고갯길을 넘은 증기기관차가 물을 보충하기 위함이었지만 구름도 쉬어가고 바람도 자고 가는 곳이니 기차인들 그 냥 갈 수 없었을 터이다. 마땅히 역은 번창하고 많은 일본인이 모여 살았던 탓에 유곽의 규모 또한 매우 컸다고 한다. 흙먼지 고갯길을 힘겹게 올라온 목탄차 역시 사정은 마찬가지여서 도저히 그냥은 지나칠 수 없는 곳이 바로 추풍령이었다.
- 내륙 한양길의 절반, 반고개
『신증동국여지승람』 금산군 편에 실린 조위(曹偉 1454-1503)의 글에는, “경상도와 충청도가 갈리는 곳에 있어, 일본의 사신과 우리 나라의 사신이 청주를 경유할 때에는 반드시 이 곳을 지나감으로 관에서 접대하는 번거로움이 상주와 맞먹는 실로 왕래의 요충”이라 하였다. 오늘날에 이른바 영남대로라 부르는 문경 새재 길에 견줄 만큼 추풍령 길의 통행이 많았다는 얘기다. 그러나 조위의 글은 그 목적이 금산군 동헌의 중수기였던 탓에 일정한 지역에 대한 부풀림의 한계를 안고 있다. 실제로 추풍령 길은 영남에서 한양으로 가는 길목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문경 새재에 비하면 턱없이 한가로운 길이었다.
가령, 한양을 중심으로 한 조선 시대의 대표적인 9개 국도는 모두 추풍령과는 무관하게 이어진다. 다만 문경 새재를 넘어 유곡역에서 제 4로(영남대로)와 갈려 상주를 지나 통영으로 가는 제 5로와, 천안, 공주로 이어지는 제 6로에서 각각 지로 (支路, 굳이 비교하자면 오늘날의 지방도로이다)를 내어 추풍령을 다스렸다. 그것은 추풍령이 다만 지역과 지역을 연결하는 고개였음을 의미한다. '청주를 경유할 때'라는 단서에도 불구하고 추풍령은 결코 부산과 한양을 연결하는 일반적인 역로는 아니었다. 다시 말해, 조선과 일본의 사신은 물론 영남과 한양을 오가는 나그네에게 있어 추풍령은 그저 하나의 사잇길에 불과하였고, 그것은 언제나 특별한 목적이나 형편에 따른 선택의 문제였다.
추풍령에서 북쪽으로 10리 남짓한 신안리에는 반고개란 이름의 고개가 있다. 추풍령에서 모동으로 넘는 고개인데 오랫동안 발길이 드물다가 최근에 포장길을 내어 두 지역 사람들의 왕래가 부쩍 늘었다. 신안리 사람들은 지금도 반고개가 한양과 부산길의 절반이라는 데서 유래되었다고 믿는다. 마을이란 으레 저마다의 유래와 신앙을 갖추기 마련이니 이는 반드시 깊이 따져 시비를 가릴 일은 아니다. 또한, 지금이야 경부선을 중심으로 대전과 대구, 경주를 연결하는 4번 국도가 추풍령에서 황간과 영동을 지나 대전으로 통하지만, 옛길은 분명 추풍령에서 북쪽으로 반고개를 넘어 보은과 청주로 올라갔다. 어떤 경로이건 추풍령을 넘었다면 그 길이 한양으로 가는 가장 빠른 길이었기 때문이다.
- 경부고속도로의 으뜸 쉼터
추풍령을 두고 흔히 말하기를, 부산을 비롯한 영남에서 서울로 통하는 중요한 관문이라 하는 것은 다만 오늘날의 이야기다. 그 길이 그만한 대접을 받게 된 까닭은 올곧게 경부선 철길과 경부고속도로 덕택이다. 역마의 시대가 문명의 시대로 바뀌면서 전에는 볼품없던 고을이 번성하고, 전에는 번거롭던 고을이 그저 한적한 시골로 변하였다. 충주와 청주가 서로 그 운명을 바꾸었고 공주와 대전이 또한 그러하였다.
추풍령은 서울과 부산의 중간 지점이라는 이유와 경부고속도로가 넘는 가장 큰 고개(사실은 작은 언덕이라 해야 옳지만)라는 까닭이 뭉쳐 바야흐로 오늘날 가장 부산한 고갯마루가 되었다. 그 분수령은 변함없이 백두대간이다. 옛날엔 영남대로로 백두대간을 넘어가던 문경 새재가 조선 팔도 고개의 맏형이었다면, 오늘날엔 경부 고속도로가 백두대간을 넘어가는 추풍령이 당연히 전국 고갯길의 으뜸이 되는 셈이다. 인물의 역사가 반드시 그 됨됨이의 깊이와 넓이만으로 전승되지 않듯, 고갯길의 역사 또한 꼭 그 높이와 크기로만 규정되는 것은 아니다. 그리하여 예나 지금이나 한반도 고갯길의 역사를 따질 적에 가장 중요한 잣대는 오로지 백두대간이다.
반도 이남의 동서가 만나는 고개, 추풍령 고갯마루는 그렇게 오늘도 인파로 출렁거린다. 한국 사람이라면 아마도 한 번쯤 그 고갯마루에 들러 쉬어가지 않은 이가 드물 것이다. 온갖 종류의 교통 수단들이 줄지어 늘어서고, 온갖 차림의 나그네들이 끊임없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불과 해발 200미터의 고개. 저 쟁쟁한 백두대간의 여느 고갯길에 견주면 그저 작은 구릉에나 불과하지만 추풍령은 이미 그 모 든 고개들의 우두머리가 되었다. 추풍령은 '국토의 대동맥'(경부고속도로)이 '국토의 척량'(백두대간)을 넘어가는 단 하나뿐인 고개이기 때문이다.
- 추풍령과 괘방령
옛날 과거길 보러갈 때 괘방령으로 넘어가면 장원급제 방이 내걸렸고 추풍령으로 넘어간 벼슬아치는 추풍낙엽처럼 벼슬자리 떨어졌다는 설이 전해져 오는 괘방령과 추풍령. 임진왜란 때 일본군이 추풍령으로 쳐들어갔다가 괘방령으로 쫓겨났고, 한국내전 때는 북한군이 추풍령으로 남진했다가 괘방령으로 퇴각했다는 역사가 전해져 오는 이 두 고개는 극명한 대조를 이루고 있다. 한순간에 수많은 차량들이 고속도로를 질주하는가 하면 괘방령은 한적하다. 진군과 퇴각, 번다함과 적막함.
이 길은 내려오는 길이고.
좌측으로 작은 도로가 있는데 그 도로를 따라서 계속 올라가면 축사가 있고 길이 끝난다.
길이 끝나는 지점 우측으로 등산로가 시작된다.
추풍령 마을에 있는 작은 공원이다.
축사가 끝나는 지점에 시작되는 등산로이고 처음부터 계단이 이어진다.
계단을 타 고서 조금 올라가면 조금 경사가 있는 등산로로 접어든다.
처음에 조금 가파르게 오른다.
아직 몸이 풀리지 않았을 것 같은데.
그래도 사람들은 잘 따라서 올라온다.
시작지점에서 약 900m 지점에 있는 첫 번째 봉우리인 금산이다.\
이곳은 별도 정상석은 없고 이렇게 표지판이 대신하고 있다.
저 위에 오르면 뒤쪽으로는 절벽이다.
낮에는 괜찮을 것 같은데 밤에는 조금 위험할 것 같다.
그래서 그 앞쪽으로 넘어가지 말라고 밧줄이 있는데.
밧줄을 넘어서 올라가면 탁 트인 전망이 보인다.
저 멀리 추풍령 저수지가 보인다.
아마도 좌측으로 제일 높은 산이 웅이산일 것 같고 그 앞으로 용문산일 것 같다.
저 저수지를 지나서 좌측으로 백두대간길이 꺾어진다.
이곳은 좌측으로 추풍령면쪽이다.
가야 할 능선 쪽이다.
앞쪽으로 들기산으로 저곳에서 좌측으로 90도 꺾어진다.
이곳에는 지금 진달래가 절정을 이룬다.
고도가 300m~500m 지점에는 진달래가 다 피어 있다.
곳곳에 이렇게 산벚꽃 들도 제법 피어 있다.
어느 곳은 이렇게 등산로가 또렸하고.
어느 곳은 아직도 낙엽이 많이 덥여 있지만.
그래도 백두대간길이라서 그런지 등산로는 잘 되어 있다.
하지만 오늘 이곳 산행에서 다른 산행자는 보지를 못했다.
대부분 백두대간 하는 사람들이 거쳐가는 길이라서 그런지 사람들이 보이지 않았다.
들기산 501.3m
추풍령이 해발고도 약 200m 정도 되고 금산이 385m 이곳 들기산은 500m 정도 되는데.
금산까지 가파르게 올랐다가 다시 잠시 내려와서 능선길을 걷는다.
그리고 돌기산 바로 아래에서부터 또다시 가파른 오르막이 된다.
고도차는 그리 많지는 않지만 이런 낮은 오르막이 제법 있어서 체력 소모가 제법 있을 것 같다.
등산로는 거의 대부분 육산으로 산행하기 편하다.
작점고개까지는 4.0km/hr의 평균속도가 난다.
이렇게 평탄하고 둘레길 같은 등산로가 이어진다.
곳곳에 진달래가 반겨주며.
활엽수 참나무에도 새싹이 다 돋아나 있다.
저기 저 봉우리는 난항산으로 저곳으로 가지는 않고
그 옆쪽에서 임도로해서 좌측으로 90도 꺾어져서 다시 가던 방향 반대로 작점고개 마을 쪽으로 내려간다.
곳곳에 진달래가 우리를 반겨주고 길은 평탄하여 시간 단축이 가능할 것 같다.
[사기점 고개] 390m
고개 남쪽의 김천시 봉산면 사기점리는 옛날 사기를 구워 팔던 마을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고개 이름이 사기점고개다. 이 고개 북쪽 너머는 영동군 추풍령면의 작점리다.
임도를 만나기 전 언덕에서 잠시 일행을 기다린다.
일행이 올 때까지 기다렸다가 함께 임도로 해서 내려갔다.
백두대간을 걷다 보면 약 6.7km 지점에서 임도를 만나는데 그 앞에 있는 산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이렇게 임도를 따라서 서북쪽으로 향한다.
임도를 따라서 약 1.3km를 내려가면 다시 산으로 향하는 길이 있다.
이곳이 백두대간 길에서 도로를 건너가는 곳이고 작점고개이다.
이곳 작점고개는 오늘 산행 중 거의 절반 정도의 거리이다.
이곳에서 사기점고개까지는 약 2.8km , 금산까지는 7.3km이며 눌의산까지 8.7km 정도 된다.
터널 위의 모습이다.
[작점고개] 능치재 340m
성황뎅이 고개, 여덟마지기 고개라는 별칭도 있다 하며, 김천 어모면에서 추풍령으로 넘어가는 한적한 고개다. 작점고개란, 고개 너머 서쪽(영동군) 마을인 작점리에서 딴 것이며, 여덟마지기 고개란, 충북 사람들이 이 고개를 넘어 여덟 마지기 농사를 지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며, 고갯마루 근처에 성황당이 있는 고개라 하여 성황뎅이 고개라는 이름이 붙었다. 그러나 정작 고갯마루 약간 아래 김천시쪽 정자에는 '능치쉼터'라는 현판이 달려 있다. 고갯마루 아래 능치마을의 이름을 딴 것이다.
대간 종주 자료에 대부분 작점고개라 적혀 있는 것은, 초창기 대간 종주 취재팀들이 고개 너머 서쪽(영동군) 마을인 작점리의 이름을 따서 붙인 것이다. 작점리 마을은 충북 최남동쪽에 위치하고 있으며 지금으로부터 300여년 전부터 유씨가 자리잡은 마을로 소백산 줄기이며 마을 뒷편에는 난함산 상단에 국영통신 시설이 위치하고 있다. 이 마을의 유래는 200여년전 전국에 제일가는 유기 생산 공장이 작점리 전 지역과 김천시 봉산면 태화동 일대까지 공장이 분포되어 있어 유기점포 판매상인도 많이 있었다고 한다. 새들이 많이 살고 있어서 새'작'자의 "雀"과 유기점포가 많아 "店"자를 따서 작점이라 마을 이름이 지어졌다고 한다. 장수하는 마을로 손꼽혀 있다.
영동쪽의 작점 마을이 김천쪽의 능치 마을보다 가깝긴 하나 이 고개를 살뜰히 보살피는 곳은 영동이 아니라 김천 사람인 것 같다.
작점고개이다.
이곳에는 정자가 있어서 이곳에서 다 같이 식사를 하였다.
점심은 무좌골산이나 하산지점에서 먹는 것이 원칙인데.
어디 앉을 곳이 없어서 이곳 작점고개의 팔각정에서 대체를 했다..
점심을 하면서 뒤쳐진 일행도 기다리고..!
함께한 일행들과 사진을 담았다.
오늘은 내가 처음 백두대간 시작을 하면서 만난 외국인 처자와 함께했다.
그때가 2022년 2월인데 1년 만에 다시 만난 것이다. 그때 100대 명산을 70% 정도 했다고 했는데.
지금은 외국인으로 100대 명산을 끝내고 지금은 백두대간도 벌써 40%를 했다고 한다.
아직 대학원생인데 정말 산이 좋나 보다.
작점고개에서는 또다시 오르막이 이어진다.
그리 험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제법 오르막이 이어진다.
무좌골 474m 산이다.
이곳까지 약 9.8km 정도 된다.
용문산 맷돌봉을 오르기 전 작은 봉우리이다.
[무좌골산]
전에는 474m 삼각점봉이었다.
무좌골산을 잠시 올랐다가 내려가서 다시 용문산까지 가파르게 올라야 한다.
작점고개에서부터 웅이이산까지 약 5km를 완만하게 올라야 한다.
용문산을 오르는데 낙엽이 많이 쌓여서 흙길보다 힘이 더 들었다.
고도가 500m 넘어가니 풍경이 틀려졌다.
초록이었던 나무들은 아직 싹이 나지 않았고.
곳곳에 이렇게 진달래만 피어 있었다.
저 앞쪽 높은 곳이 용문산이다.
더워서 그런지 아니면 가파라서 그런지 제법 힘도 든다.
[갈현]
용문산 자락을 완전히 내려와서 만나는 노루목이다. 죽전리와 능치리를 연결하는 소로가 교차한다. 이름은 '칡고개'라는 의미다.
용문산 정상에는 이렇게 몇 그루 할미꽃이 우리를 반겨 줬다.
그렇지 않아도 잔디가 있는 곳에 할미꽃을 한번 볼 수 있지 않을까 했는데..!
이렇게 이쁜 할미꽃을 볼 수 있었다.
용문산 708.3m 정상이다.
[용문산] 710m
1800년 무렵 박생이란 유생이 산세를 보고 龍門山이라 했다는 설이 있으나 확실치 않다.
1940년경 나운몽 목사가 입산하여 근처에 기도원(애향숙)을 세운 뒤, 일명 용문산 운동을 전개해 나갔던 곳이다. 서울과 부산 사이 바로 중간에 위치하고, 영남과 호남의 분계선이며, 서북쪽으로 낙동강이 흘러 남북 양대 강의 분수령이 되는 산의 특성으로, 남한 중신에 위치한 소위 "성산"으로 파악한 것이다.
초창기 애향숙은 신앙적인 목적보다 일제하의 설움에서 오는 계몽운동의 일환으로서 출발하였다가 이후 애향숙이 재건되는 과정에서 기도원 운동으로 면모를 바꾼 것이라 한다. 현재 전국 3만여 명의 신도가 연중행사로 기도대집회를 열고 있다.
이제 웅이산 국수봉으로 향한다.
용문산에서 국수봉까지는 능선길이지만.
작은 오르막 내리막이 4개를 거쳐야만 오를 수 있다.
그러다 보니 능선이 다 보기엔 그냥 오르막 같다.
오라막을 오르면 다시 내리막.
가끔 이렇게 바위길도 있다.
저 위가 바로 웅이산 국수봉이다.
제법 높은 봉우리가 앞으로 보인다.
웅이산을 오르는데 갑자기 청운봉 734.2m이 보인다.
별다른 안내도 없이 이곳 청운봉이 위치하고 있다.
오늘 중 가장 높은 곳의 웅이산 국수봉이다.
이곳은 오늘 중 가장 조망이 좋은 곳이다.
이곳에서도 저 정상석을 넘어서도 조망이 참 좋다.
[국수봉] 763m
충북 영동, 경북 상주의 경계를 이루며 백두대간중 추풍령 - 큰재구간에 속해있으며 큰재에서 남쪽방향으로 약 4km 지점의 능선상에 솟은 산이다. 국수봉에 서면 상주의 너른 평야와 백학산. 서산, 기양산, 갑장산, 묘함산, 황악산, 민주지산등 주변의 산들이 전개되고 날씨가 좋은날이면 백두대간 상주, 문경, 김천구간과 소백산까지도 조망된다. 국수봉은 웅산(熊山), 용문산(龍文山), 웅이산(熊耳算) 또는 곰산 등 여러 이름으로 불리어 지고 있다. 정상은 충북과 경북의 경계이고 아울러 낙동. 금강의 분수령이므로 국수(菊水)라 한 듯 하고 웅신당(일명 용문당)이라는 대가 있어 천제와 기우제를 지내기도 하였다. 전해내려 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중국의 웅이산과 같이 시초(蓍草)가 난다고 하여 웅이산이라고 하며, 상주의 젖줄인 남천(이천)의 발원지이기도 하다.
-> 掬水(움켜쥘 국)와 菊水(국화 국)가 정상에는 혼용되어 쓰이고 있으나, 의미상 정상석의 국수(掬水)가 맞는 듯함.
웅이산 국수봉 795m 이곳에서 정상석 뒤로는 조망점이고.
백두대간은 이곳에서 좌측으로 내려간다.
내려가는 길은 가파른 돌길이라서 조금은 조심해야 한다.
조망점에서 바라본 풍경이다.
상주시 공성면 쪽으로 북동쪽의 모습니다.
하산길이다.
처음에는 가파른 내리막이지만 잠깐잠깐 이렇게 오르막도 있다.
봉우리도 아닌 683m의 고도의 이름 없는 봉우리다.
드디어 오늘 산행이 끝나는 지점 큰재에 거의 다 왔다.
큰재로 하산하는 길이다.
이 철조망이 보이면 큰재에 다 도착을 한 것이다.
하산지점 큰재에서의 이정표이다.
큰재 바로 앞에는 백두대간생태교육장이 위치하고 있으며.
화장실등 조성이 잘 되어 있다.
[큰재] 320m
해발 300m가 겨우 되는 영동군 모동면에서 상주시 공성면으로 넘어가는 2차선 아스팔트 고갯길이다. 공성면의 3번 국도와 모동면의 977번 지방도로를 연결하는 920번 지방도로가 백두대간의 주능선을 가로지르는 곳이다. 예전에 고갯마루에는 금강과 낙동강의 분수령을 알리는 안내판이 있었고 폐교(옥산초등학교 인성분교)와 민가 한 채가 마주보고 있었다.
지금은백두대간 숲생태원이 들어서 백두대간 생태교육의 장으로 활용되고 있다.
오늘은 벚꽃이 활짝 핀 날이다.
이렇게 큰재 동서로 뻗은 도로에 벚꽃들이 만개하였다.
마지막 단체사진을 담아보았다.
이렇게 개나리와 벚꽃을 동시에 보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닌가 한다.
보통은 개나리가 다 시들어야 벚꽃이 피는데.
올해는 모든 꽃들이 동시에 다 피었다.
GPS 트랙
본산행의 트랙
설명이 포함된 트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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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꽃길을 걸으셨군요.
아주 보기가 좋습니다.
그런데 웬 외국인 처자가 대간길을 걷네요.
네
딱 진달래 철인듯 합니다.
곳곳에 진달래가 많은데.
고도가 조금만 높아져도 꽃이 없네요..!
이제는 봄도 깊어가는 것 같아요.
바람이 없으니 덥던데요.
우리나라에서 학교를 다니고 있는데.
산을 정말 좋아하는 것 같더라구요.
예전에도 한번 만났는데.
이번에는 백두대간을 하시던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