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 국수
손진숙
밥맛이 착 가라앉은 날, 점심때가 가까워진다. 무슨 음식이 깔깔한 목구멍으로 술술 잘 넘어갈까 생각해 본다.
“국수 삶아 먹을까요?”
“국수 먹고 어떻게 힘쓰노?”
단번에 퇴짜를 놓는다.
퇴직한 이래 특별히 하는 일도 없는 처지에, ‘힘’을 강조하는 남편의 속내를 이해하기가 어렵다. 고작 일이라야 매일 목욕탕에 출입하는 일과 집 부근 야산 등지를 산책하는 일이 일과의 전부다. 보온밥통에 남은 밥을 확인하고, 나 혼자라도 먹기 위해 국수를 삶는다.
어릴 때 나는 국수를 무던히 좋아했다. 하루 세끼를 국수만 먹어도 좋다고 여겼으니 말이다. 이 정도면 국수 사랑이 대단하다고 인정해 줄 만하지 않은가.
냄비 속 끓는 소면을 긴 나무젓가락으로 젓고 있다. 문득 옛 고향마을 풍경이 그리워진다. 시골 우리 집에서는 밀을 갈았다. 밀을 심어 가꾸던 들녘 밭이 눈앞에 펼쳐진다. 마을의 입구이자 출구인 멸곡滅谷을 넘어서면 초등학교가 보이고, 초등학교 앞길은 들길로 이어진다. 들판 길 양옆 보리밭 위로 종달새들이 ‘비비쫑 비비쫑’ 경쾌한 가락으로 날아오른다. 들을 가르는 철로 건너에 내[川]가 있고, 그 냇가 모래밭을 개간한 밀밭. 밀들이 강바람에 일렁일렁 춤춘다. 우리 가족은 그 밭을 ‘공굴 밭’이라 불렀다. 하천을 십(十)자로 가로지른 철교 아래 큰 공굴이 있어서였다.
내 키가 넘게 자란 밀의 이삭이 여물 무렵, 오빠가 한 단쯤 먼저 베어와 짚불에 그을려 먹기도 했다. 짚불에 그을린 밀을 손바닥으로 비벼서 껍질은 버린 뒤 먹으면 고소하고 존득했다. 존득한 밀을 껌을 만들겠다며 꼭꼭 씹기도 했다. 간식이 귀했던 시절, 아이들에게 그을린 밀은 심심치 않은 군입거리였다.
수확한 밀을 가마니에 담아 소달구지에 실어 읍내 방앗간으로 향했다. 정미소에서 밀가루를 빻고 그 밀가루로 국수도 뽑았다. 부모님을 따라서 장에 간 날. 방앗간에 맡겼다가 장보기를 끝내고 찾으러 가면 국수 만드는 과정을 볼 수 있었다. 제면기에서 뽑아낸 국수를 널어 말리는 광경은 흰 천을 풀어 매단 것 같기도 하고, 하얀 문종이를 펴서 달아맨 것 같기도 했다.
잘 거두어들인 밀은 밀가루와 국수가 희고 깨끗하고 매끄러웠다. 비를 맞아 싹이 트거나 습기가 덜 걷힌 밀은 밀가루와 국수가 거뭇하고 거칠고 맛도 개운치 못했다.
40여 년 전, 오월 어버이날이었다. 마을 부녀회에서 어버이를 위한 잔치를 열었다. 국수를 삶아 대접한다고 마을 방송으로 알렸다. 잔치가 열리는 장소는 뒷동산이었다. 참나무가 듬성듬성 서 있고 잔디가 푸른, 평평하고 넓은 곳이었다. 따뜻한 봄이면 아이들이 모여 찜뽕도 하고 짠다구 뿌리를 캐 먹거나 삘기를 뽑아서 먹기도 하는 놀이동산이었다.
부녀회원인 올케는 국수를 삶아 내기 위해 아침나절부터 행사장에 나갔다. 점심때가 되자, 가슴에 카네이션을 단 엄마는 남동생에게 업히다시피 하여 참석했다. 나도 친구와 함께 가서 구경도 하고 국수도 맛보았다. 국수 고명으로 미나리나물이 파릇하고 향기로웠던 기억이 새롭다.
‘노세. 노세 젊어서 노세. 늙어지면 못 노나니….’를 부르며 덩실덩실 어깨춤을 추고 노시던 어버이들 모습이 한 폭 풍속도를 그리고, 그때 꼼짝 않고 제자리를 지키는 참나무들도 가지를 들썩이는 듯했다. 지금은 이 세상에 계시지 않는 어버이들, 저 세상에서도 그날의 흥겨움에 취해 있을까.
요즈음도 가끔 고향 읍내에 갈 때가 있다. 동행한 친구와 함께 구석구석 추억의 장소를 둘러보다 배가 출출하면, 소문난 읍사무소 앞의 ‘할매국수집’을 찾는다. 노란 양은냄비에 담아 주는 잔치국수는 예나 지금이나 내 입맛을 사로잡는다.
국수를 좋아했다는 전직 대통령이 떠오른다. 칼국수를 먹고 정사를 돌보기에 힘이 부쳐 IMF 사태를 맞은 걸까. 밀가루로 빚은 국수를 먹든 찹쌀로 지은 찰밥을 먹든 음식의 근기와 더불어 정신의 근기가 솟아나는 게 힘 아닐는지.
남편 말마따나 국수가 힘이 없을는지는 모르지만 국수 가닥의 길이는 길다. 한 가닥씩 이으면, 어느 음식에 뒤지지 않으리라. 긴 국숫발처럼 오래 잘 살라는 의미로 회갑이나 돌잔치, 결혼식의 음식상에는 국수가 귀한 대접을 받는다. ‘잔치국수’라는 이름마저 당당하게 달고 있지 아니한가.
저녁에 또 국수를 삶아야겠다. 낮에 만든 양념간장과 멸치 국물이며 미나리나물 등 꾸미가 남아 있지만 국수 먹고 힘 못 쓴다는 남편을 위해 쇠고기를 꾸미에 살짝 보탤까 한다. 곧 밤이 오고 잠자리에 들 텐데 국수를 먹고선 잠 잘 힘조차 없다고 하려나.
《인간과 문학》 2023 가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