須菩提야 我念過去無量阿僧祗劫에 於然燈佛前에 得値八百四千萬億那由他諸佛하야 悉皆供養承事하야 無空過者호라
수보리야, 내가 과거 아승지 겁을 생각하니, 연등불을 뵙기 전에도 八백四천만억 나유타의 여러 부처님을 만나서 모두 다 공양하고 받들어 섬겼으며 헛되이 지냄이 없었노라.
圭峰 那由他者는 十億이 爲洛叉요 十洛叉가 爲俱胝요 十俱胝가 爲那由他니라
규봉 나유타란 十億이 낙차가 되고 십낙차가 俱胝가 되고 十구지가 나유타가 된다.
傅大士 如來說那由여 那由幾劫中고 我人衆生壽여 壽者盡俱空이로다 若悟菩提道하면 道者盡通同이니 二體俱實際라 際度出凡籠이로다
부대사 여래께서 나유타라 설함이여. 나유가 몇 겁 중인가. 我, 人, 衆生, 壽者여. 壽者가 다 함께 空함이로다. 만약 菩提道를 깨달으면 道란 다 통하여 같음이니, 二體가 實際를 갖춤이라. 實際의 度가 범부의 굴레를 벗어남이로다.
圭峰 二는 持經多中少分福이라
규봉 ㉸二. 經을 가지는 많은 일 中에서 작은 福이라.
若復有人이 於後末世에 能受持讀誦此經하면 所得功德이 於我所供養諸佛功德으로 百分에 不及一이며 千萬億分과 乃至算數譬喩로 所不能及이니라
만약 또 어떤 사람이 앞으로 오는 말세에 능히 이 경을 받아지니고 읽고 외우고 그 얻는 공덕은 내가 여러 부처님께 공양한 공덕으로는 백분의 일도 미치지 못하며 천만 억분과 내지 산수와 비유로도 미칠 수 없느니라.
說誼 佛不外求라 只向心覓이니 若欲見佛인댄 唯須內照니라 承事諸佛이 福則不無나 然亦未免向外馳求어니와 一念聞經하면 能生淨信하야 卽自見性하야 直了成佛일새 所以로 供佛의 不及持經이니라
설의 부처는 밖에서 구하는 것이 아님이라. 다만 마음을 향해서 찾는 것이니, 만약 부처를 보고자 하면 오직 모름지기 안으로 비출지니라(자신을 살펴라).
여러 부처님을 받들어 섬김이 복은 없지 않으나 또한 밖을 향해서 어지럽게 구함을 면치 못하는 것이니 한순간이라도 경을 들으면 능히 깨끗한 믿음을 내게 되고 스스로 見性하여 바로 성불해 마치리니 이 까닭에 부처님께 공양하는 것이 經을 가지는 것에 미치지 못하느니라.
六祖 供養恒沙諸佛하며 施寶滿三千界하며 捨身如微塵數한 種種福德이 不及持經은 一念에 悟無相理하야 息希望心하고 遠離衆生의 顚倒知見하야 卽到波羅彼岸하야 永出三塗苦하고 證無餘涅槃일새니라
육조 항하사의 부처님께 공양하며, 보물을 삼천세게에 가득히 보시하며 몸 버리기를 미진수와 같이 하는 갖가지 복덕이 經을 가지는데 미치지 못하는 것은, 한순간의 無相의 이치를 깨달아서 희망심을 쉬고, 중생의 顚倒된 知見을 멀리 떠나서 곧 저 언덕에 이르러 영원히 삼악도의 고통을 벗어나고 무여열반을 증득함이니라.
傅大士 然燈이 未敎化면 呼爲在佛前이라 得値河沙聖하야 供養不爲難이어니와 末法難調製에 開經暫展看하면 斯人은 無斷見하야 萬劫自安閑이로다
부대사 연등불이 교화하기 전에는 부처님 전에 있음이 된다 하도다. 항하사의 성인을 만나서 공양함은 어렵지 않으나 末法의 다스리기 어려울 적엔 經을 열고 잠시 펴보면 이 사람은 斷見이 없어서 萬劫에 스스로 편안하고 한가하리라.
冶父 功不浪施니라
說誼 持經一念圓證하면 直了成佛일새 所以로 功不浪施니라
야부 功은 헛된 베품이 아니니라
설의 經을 수지하여 한순간에 원만히 증득하면 바로 성불하는 것이므로 이 까닭에 功은 헛되지 않음이니라.
冶父 億千供佛이 福無邊이나 爭似常將古敎看가 白紙上邊에 書黑字하니 請君開眼目前觀이어다 風寂寂水漣漣하니 謝家人이 秪在魚船이로다
說誼 他本에 謝家人이 在釣魚船이라 要識古敎在處麽아 似海之深이요 如山之高로다 要識古敎文彩麽아 煦日이 發生舖地錦하니 無紋印字錦上舒로다
請君大開娘生眼하야 十二時中에 常照了어다 常照了여 內外無侵眞境現하니 一人이 獨擅其中事로다 又古敎者는 以迹言之則古佛의 能詮之敎也요
以理言之則學人의 一卷經也라 此一卷經은 佛祖相傳底法印이며 衆生本有底一着子니 其來無始일새 故云古敎니라 白紙上邊書黑字者는 經卷에 本具文彩也라 白屬偏하니 自性隨緣二用也요 黑屬正하니 寂滅一體也니라
請君開眼目前觀者는 勸令諸人으로 不離日用하고 轉一大經卷也니라 風寂寂云云은 若轉得一大經卷하면 卽外而境風이 自寂하고 內而智水가 澄淸하야 隨緣任眞하며 逐處消遙가 一似虛舟駕浪에 自東自西하며 隨高隨下也니라
又風寂寂云云은 謂釣得錦鱗時에 也合風停而水面漣漣이요 觀照實相時에 也宜情忘而智水澄澄이니라 船爲釣魚之具요 敎爲悟眞之法이니 悟眞者가 專心悟眞之法하면 則必有悟眞之期요 釣魚者가 只在釣魚之船하면 則必有釣魚之時也니라
야부 억천 부처님을 공양함은 복이 끝이 없으나 어찌 옛 가르침을 항상 가져보는 것과 같겠는가. 白紙 위에 검은 글자를 써서 그대에게 청하노니 눈을 뜨고 눈앞을 볼지어다. 집 떠난 사람은 다만 魚船 위에 있도다.
설의 (다른 책엔 "집떠난 사람이 낚시배 위에 있도다"로 되어있음." 옛 가르침이 있는 곳을 알고자 하는가. 마치 바다의 깊음과 같고 산이 높음과 같도다. 옛 가르침의 무늬를 알고자 하는가.
아침 햇빛이 땅 위에 비단을 깐 듯이 무늬없는 도장을 비단 위에 찍음이로다. 그대에게 청하노니, 어머니가 낳아준 눈을 뜨고서 十二時中(하루종일) 늘 비출지어다. 항상 비춤이여! 안팎으로 침범함이 없어서 참다운 경계가 나타나니, 한 사람이 홀로 그 가운데 일을 오로지 함이로다.
또한 옛 가르침이란 그 자취로써 말한즉 옛부처님이 능히 가르침 말씀이요, 이치로써 말하면 學人의 한 권의 經이로다. 이 한 권의 經은 부처와 조사가 서로 전한 法印이며 중생들이 본래 지니고 있는 一着子(한물건)이니 그것이 오매 시작이 없으므로 옛 가르침이라 이르도다.
백지 위에 검은 글자를 쓴 것은 경전에 본래 갖춘 무늬로다. (우리 마음 경전에도 온갖 만행만덕과 온갖 견문각지의 作用이 있다.)
흰 것은 치우친 데(偏)에 속하니 自性과 隨緣의 두 가지 쓰임(用)이요 검은 것은 正에 속하여 寂滅이 하나의 體이니라.
"그대에게 청하노니 눈을 뜨고 앞을 보라"는 것은 모든 사람으로 하여금 日用을 떠나지 않고 一大經卷 굴리기를 권함이니라.
'바람은 고요하고~'한 것은 만약 一大經卷을 굴린다면 밖으로의 경계 바람이 스스로 고요하고 안으로 지혜의 물이 말쑥하여 인연을 따라 質에 맡기며 좇는 곳마다 逍遙하는 것이 빈배가 물결따라 저절로 동서로 가는 것 같으며 놀고 낮은 데를 따름과 같도다.
또한 '바람은 고요하다'한 것은 아름다운 물고기를 낚을 때엔 바람이 그쳐 수면이 잔잔함이요, 實相을 관조할 때엔 마땅히 情을 잊으니 지혜의 물이 밝고 맑음이니라.
배는 고기를 낚는 도구요 가르침은 진리를 깨닫는 법이니, 진리를 깨닫는 자가 마음을 진리 깨닫는 법에 오로지 할 것 같으면 만드시 진리를 깨닫을 기약이 있을 것이요, 고기 낚는 자가 다만 낚시배 위에 있으면 반드시 고기 낚을 때가 있으리라.
圭峰 九는 具聞則疑라
규봉 ㉷九. 갖추어 들으면 곧 疑心함이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