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층 구조 한반도를 재건축 합시다.
1) [삼국사기(三國史記)]의 우리 역사강역(歷史疆域)
<김부식(金富軾)>이 1145(인종23)년에 엮은 [삼국사기(三國史記)]에는 <신라(新羅)>, <고구려(高句麗)>, <백제(百濟)> 등 <삼국(三國)>이 BC.1세기(世紀)로부터 AD.7세기(世紀)까지 지금의 <만주(滿洲)>와 <한반도(韓半島)>, 그리고 <지나대륙(支那大陸)>에 있었다고 기술(記述)되어 있습니다.
2) [삼국유사(三國遺事)]의 우리 역사강역(歷史疆域)
1285(충렬왕11)년 <일연(一然)>이 지은 [삼국유사(三國遺事)]는 <단군(檀君)>의 사실(史實)을 불가(佛家)의 신화(神話)로 왜곡(歪曲)하고, <삼한관경(三韓管境)>하던 <아사달(阿斯達)> 연방(聯邦)을 <진수(陳壽)>의 [삼국지(三國志)]를 인용(引用)하여 <삼한(三韓)>이라고 왜곡기술(歪曲記述)하면서, 시대(時代)는 AD.3세기(世紀)로, 역사강역(歷史疆域)은 <한반도(韓半島)>로 끌어내려놓았습니다.
<일연(一然)>은 왜곡(歪曲)한 <삼한(三韓)>과 <신라(新羅)>, <고구려(高句麗)>, <백제(百濟)> 등 <삼국(三國)>과 <가락국(駕洛國)>의 역사(歷史)도 기술(記述)하여, 같은 시기(時期), 같은 강역(疆域)인 <한반도(韓半島)>의 1층에는 <삼한(三韓)>이 있고, 2층에는 <삼국(三國)>이 동시(同時)에 존재(存在)하도록 2층구조(二層構造)로 만들어 놓았습니다.
3) [역대사서(歷代史書)]의 우리 역사강역(歷史疆域)
<조선조(朝鮮朝)>에 들어서는 사대주의(事大主義) 사가(史家)들이 우리 [민족사서(民族史書)]들을 제거(除去)하고, [제왕운기(帝王韻紀)],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誌)], [동국지리지(東國地理誌)] 등 잇달아 지으면서 <마한(馬韓)>의 강역(疆域)을 경기(京畿), 충청(忠淸), 전라(全羅) 지역(地域)으로, <진한(辰韓)>은 낙동강(洛東江) 이동(以東), <변한(弁韓)>은 낙동강(洛東江) 이서(以西)로 비정(比定)함으로써, 우리 역사강역(歷史疆域)을 뒤틀리게 만들었습니다.
4) <삼국사기초기기록불신론(三國史記初期記錄不信論)>
<대한제국(大韓帝國)>을 강제침략(强制侵掠)한 <일제(日帝)>는 <명치유신(明治維新)> 때에 <만세일계(萬世一系)로 조작(造作)한 자신들의 <황실사관(皇室史觀)>을 합리화(合理化)하기 위해 <조선총독부(朝鮮總督府)> 설치 직후부터 우리 사서(史書)를 철저하게 수색탈취(搜索奪取)하고, <반도조선사(半島朝鮮史)>를 편찬(編纂)하여 우리의 역사강역(歷史疆域)을 <한반도(韓半島)>로 고착(固着)시켰습니다.
[삼국사기(三國史記)]와 [삼국유사(三國遺事)]만 남겨놓은 <일제(日帝)> <황실사학자(皇室史學者)>들은 <실증사학(實證史學)>을 빌미로 <삼국(三國)>의 건국(建國) 시기(時期)와 강역(疆域)을 지우기 위해 <삼국사기초기기록불신론(三國史記初期記錄不信論)>을 내세웠습니다.
<삼국사기 초기기록 불신론>을 처음 주장한 사람은 <조선사편찬위원회(朝鮮史編纂委員會)>의 황실사학자(皇室史學者) <쓰다 소키치(津田左右吉)>입니다.
<쓰다>는 [고사기 및 일본서기 연구(古事記及び日本書紀の硏究:1919)]의 부록인 <삼국사기의 신라본기에 대하여(三國史記の新羅本紀について)>에서 [고사기(古事記)]와 [일본서기(日本書紀)]의 <왜(倭)> 관련 기록과 [삼국사기(三國史記)]의 <왜(倭)> 관련 기록이 서로 다른 것은 둘 중의 하나가 사실과 다르게 정치적 목적에 의해서 조작된 것이라는 주장을 했습니다.
<쓰다 소키치(津田左右吉)>는 [일본서기(日本書紀)]의 14대 <쥬아이텐노(仲哀天皇)>까지는 신화시대의 천황으로 조작된 것이고, 15대 <오진텐노(應神天皇)>부터 실재했던 국왕이라고 주장했는데, [삼국사기(三國史記)]의 초기 기록도 신화라고 주장한 것입니다.
<쓰다>는 [삼국사기(三國史記)]에 <한반도(韓半島)> 남부(南部)에 있어야 할 <임나일본부(任那日本府)>를 기록하지 않아 믿을 수 없다고 주장한 것입니다.
5) <식민사관(植民史觀)>의 모순(矛盾)
광복 후 한국 주류 사학계는 <국사교과서>에서 <임나일본부>를 삭제해 버렸습니다.
<임나일본부>를 부정했으면 <삼국사기 초기기록>은 되살려야하는데, 우리 사서(史書)인 [삼국사기(三國史記)]의 <초기기록>은 계속 부정하고, 지나사서(支那史書)인 [삼국지(三國志)]를 그대로 베껴 우리 역사를 해석하고 있습니다.
현행 <국사교과서>의 ‘여러 나라의 성장’ 부분에는
‘부여, 고구려, 옥저와 동예, 삼한’ 순서로 기술하면서 ‘신라와 백제’를 누락시켰습니다.
진수의 <삼국지> 동이열전의 ‘부여, 고구려, 동옥저, 읍루, 예(濊), 한(韓)’과 같은 순서의 기술을 그대로 따른 것입니다.
쓰다 소키치가 <삼국지> 동이열전을 빌미로 <삼국사기> 초기기록을 부정한 <황실사관(皇室史觀)>이 <국사교과서>에 그대로 살아 남은 <식민사관(植民史觀)>이 된 것입니다.
지금 우리의 <국사교과서>는 <일제>의 <조선총독부>가 1935년에 발행한 [반도조선사(半島朝鮮史)]를 그대로 답습(踏襲)하고 있는 것입니다.
<7차 교과과정>의 <국사교과서>부터는 삼국(三國)의 초기 왕들의 재위연대도 수록했지만, 주류 사학계가 자신들의 고대사 인식의 문제점을 반성하고 넣은 것이 아닙니다.
<한일역사공동연구위원회>에 참여했던 교육부 공무원들이 문제의식을 가지고 강력히 요구한 결과 마지못해 수용한 것입니다.
이 과정에서 초기 왕들의 재위연대를 누락시킨 채 인쇄했던 일부 <국사교과서>를 폐기 처분하는 소동까지 있었습니다.
이런 소동을 거쳐 현행 <국사교과서>의 부록에는 삼국 초기 국왕들의 재위연대가 들어갔지만 본문 서술에서는 여전히 초기 국왕들의 존재가 부인되고 있습니다.
고구려는 태조왕, 백제는 고이왕, 신라는 내물왕 때 사실상 건국했다고 서술하고 있는 것입니다.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의 고고관에는 <원삼국실(原三國室)>이라는 전시실이 있습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원삼국시대에 대해 “서력 기원을 전후로 한 시기부터 300년경까지 약 3세기 간을 이른다.”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 기간 동안 <삼국(三國)>은 존재하지 않거나 아주 작은 부락(部落)단위에 불과했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해당 시기의 유물이 출토되면 삼국의 유물이라고 하지 않고 원삼국이라고 분류하는 것입니다.
제7차 교육과정에 따라 2002학년도부터 사용하는 국정 고등학교 국사교과서의 '삼국의 성립'편을 보면,
삼국 중 제일 먼저 국가체제를 정비한 것은 고구려였다.
졸본성에서 국내성으로 도읍을 옮긴 고구려는 대무신왕(大武神王) 때에 정복국가로 발돋움하고 1세기 후반 태조대왕(太祖大王) 때에 이르러 정복활동을 활발히 전개했다. (중략)
백제는 한강 유역의 토착세력과 고구려 계통 유이민세력의 결합으로 성립되었는데(B.C. 18), 우수한 철기문화를 보유한 유이민집단이 지배층을 형성했다.
백제는 한강 유역으로 세력을 확장하려던 한(漢)의 군현(郡縣)을 막아내면서 성장했다.
3세기 중엽 고이왕(古爾王) 때 한강 유역을 완전히 장악하고, 중국의 선진 문물을 받아들여 정치체제를 정비했다.
이 무렵 백제는 관등제를 정비하고 관복제를 도입하는 등 지배체제를 정비하여 중앙집권국가의 토대를 형성했다.
신라는 처음 진한(辰韓) 소국의 하나인 사로국(斯盧國)에서 출발했는데, 경주 지역의 토착집단과 유이민집단의 결합으로 건국되었다(B.C. 57).
이후 동해안으로 들어온 석탈해(昔脫解) 집단이 등장하면서 박, 석, 김의 3성이 교대로 왕위를 차지했다.
유력 집단의 우두머리는 이사금(왕)으로 추대되었고, 주요 집단들은 독자적인 세력 기반을 유지하고 있었다.
-'고등학교 국사' 49~50쪽-
삼국의 성립을 기술한 이 부분에서는 <삼국(三國)>의 시조(始祖) 부분이 빠져있습니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 따르면 <신라(新羅)>는 기원전 57년에 <혁거세거서간(赫居世居西干)>에 의해 건국되었고,
<고구려(高句麗)>는 기원전 37년 <추모왕(鄒牟王)>에 의해 건국되었으며,
<백제(百濟)>는 기원전 18년 <온조왕(溫祚王)>에 의해 건국되었습니다.
그런데 국사교과서는 건국 시조의 이름을 모두 뺐을 뿐만 아니라
<고구려사(高句麗史)>는 <태조대왕(太祖大王)> 때에 이르러서야 역사적 사실로 믿을 수 있고,
<백제사(百濟史)>는 <고이왕(古爾王)> 때,
<신라사(新羅史)>는 <내물왕(奈勿王)> 때에 이르러서야 사실로 믿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건국 순서도 <고구려>, <백제>, <신라> 순으로 바꾸어 놓았습니다.
여기에는 일제강점기에 창안되어 현재까지 한국 사학계의 주류로 행세하고 있는 특정한 고정관념이 숨겨져 있습니다.
바로 <삼국사기 초기기록 불신론(三國史記初期記錄不信論)>, <일제(日帝)> <식민사관(植民史觀)>이 뿌리 내리고 있는 것입니다.
6) 2층구조 한반도의 역사 강역을 바로 잡읍시다.
지금 우리는 [삼국유사(三國遺事)] 이래 <사대주의사관(事大主義史觀)>으로 <몽유병(夢遊病)>을 앓은 후에 <일제(日帝)>의 <황실사관(皇室史觀)>의 세뇌(洗腦)로 <식민주의사관(植民主義史觀)>의 고질(痼疾)로 시달리고 있습니다.
우리는 1천년 동안 역사강역(歷史疆域)의 모순(矛盾) 속을 헤매다가 아름다운 <홍익인간정신(弘益人間精神)>은 흐려지고, 정치(政治), 경제(經濟), 사회(社會), 문화(文化) 모두가 총체적위기(總體的危機)를 맞았습니다.
지구촌(地球村) 인류(人類)도 바야흐로 물질문화(物質文化)의 누적(累積)된 오염(汚染) 때문에 공멸(共滅)의 위기(危機)에 놓여 있습니다.
우리 천손민족(天孫民族) ᄒᆞᆫᄇᆞᆰ겨레의 자랑스러운 역사(歷史)를 바로 세워 <홍익인간정신(弘益人間精神)>으로 깨어나서 21세기(世紀) 미래(未來) 인류공영(人類共榮)을 선도(先導)해야 아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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