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소리의 개념
판소리의 개념을 정립하는 것은 그리 쉬운 문제만은 아니다. 판소리에대한 생각이 역사적으로 상당한 변모를 거듭해온 까닭이다. 그러한 변화는 물론 판소리 자체의 변화(예컨데 공연의 형태라든가 음 그 자체)에서도 기인하지만 근본적으로는 사람들의 판소리에 대한 인식의 변화로부터 기인하는 것으로 볼 수가 있다.
판소리는 노래로 불려지면서도 그 내용으로서 이른바 판소리계 소설을 거느리고 있는데 이로 인하여 그간 판소리 연구에 임했던 사람들은 가창물로서의 판소리와 독서물로서의 소설을 굳이 구분하지 않았었다. 판소리 연구의 초기에 판소리와 관련된 연구에 종사한 사람들이 대부분국문학자들이었다는 점도 판소리가 무엇인가에 대한 혼란을 가중시키는 원인이다. 이들은 자신의 연구영역과 관계된 측면에서만 판소리를 다루려고 하였는데 더 나아가 연극을 연구하는 사람들은 판소리를 연극의 일부로 보고자 하였다.
그간 판소리의 개념에 대한 주장들은 아래와 같다.
위 견해중에서 가), 나), 다)는 모두 문학적 입장에서 판소리를 규정하고 있다. 판소리가 노래로 불려지는 상황을 염두해 두지 않고, 그 가사를문자로 기록해 놓은 것을 보고 그리 칭하는 것이다. 판소리를 기록물로 볼 때도 그것이 기왕의 문학 장르중에서 어떤 것에 해당하는가는 역시 논란거리가 된다.
라)는 판소리가 나름대로의 특성을 갖고 있는 독자적인 장르임을 강조한것이지만, 그것이 어떠한 특성을 지닌 것이며 여타 예슬행위의 장르와의 관계가 명확하지가 않다.
마)는 판소리가 무엇보다도 음악으로 이해되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실제로 우리가 판소리를 우선 음악으로 보아야 한다는 것은 당연한것 같지만, 그렇다고 그것으로 문제가 다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최근에까지 판소리를 문학으로 규정하고자 하는 사람들은 거의 없다. 연구는 여러 부문으로 나누어 하고, 또 그러한 측면에서 언급은 할지라도, 판소리를 문학으로만 본다는 것은 타당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직도 판소리는 음악인가, 혹은 연극인가 하는 것이 논란거리로 남아 있다. 판소리는 음악이면서도 연극적인 요소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어떻든 판소리는 공연예술이며, 공연현장에서 판소리가 제 모습을 드러내어 문학적 요소, 음악적 요소, 그리고 극적 요소가 함께 어우러져서 예술적 감동을 이끌어 낸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별다른 이견이 없다.
판소리를 공연예술로 보고 판소리의 공연현장, 곧 판소리가 불려지고 있는 현장에 촛점을 맞추고 바라보면, 판소리에는 노래를 부르는 창자(소리꾼)뿐만 아니라 또 한 사람의 공연자가 등장한다. 곧 북을 치는 고수를 말한다. 판소리는 창자와 고수가 함께 엮어 간다. 창자는 오른손에 부채(접었다 폈다 할 수 있는 합죽선)를 들고 노래를 하는데, 노래도 잘 보면노래로 하는 부분과 말로 하는 부분이 섞여 있다. 노래로 부르는 부분을 '창(唱)이라 하고, 말(白)로 하는 부분은 '아니리'라고 한다. 또 소리꾼은 그냥 서서 노래만 하는 것이 아니고, 동작도 취한다. 이를 '발림', 혹은 '너름새'라고 하는데, 이것이 연극에서의 연기와 흡사하다는 이유로 판소리는 연극이다라는 견해가 나오게 된것이다. 고수는 북을 치며, 때때로 '추임새'라 하여, 소리 중간 중간에 '얼씨구', '좋다' 따위의 감탄사를 발한다.판소리 공연현장에서 또 하나 빼 놓을 수 없는 것이 '청중'이다. 청중이 없는 판소리 공연은 상상할 수 없기 때문이다. 청중은 판소리공연현장에서 고수처럼 추임새를 한다.
그동안 고수와 청중에 대해서는 너무 소홀히 취급했었다. 거의 무시해 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사설 속에는 고수나 청중이 드러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판소리를 공연예술로 볼 때는 고수와 청중도 대단한 중요성을 지닌 존재로 다가오게 된다. 판소리를 어떠한 대상으로 보아야하는가 하는 것이 끊임없이 문제가 되는 것은 이처럼 판소리를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그 보이는 모습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판소리가 이렇게 복잡한 논란거리가 되어 온 것은, 앞에서도 말한 것처럼 판소리 그 자체가 단순한 대상이 아니고, 여러 측면을 지닌 복잡한 대상이라는 사실로부터 우러나온다. 따라서 판소리에 대해 이야기할때는, 판소리가 복잡한 대상이라는 것을 깊이 인식해야 할 것이다. 이상과 같은 점을 염두에 두고 판소리를 정의하면, 다음과 같다.
"부채를 든 한 사람의 창자(소리꾼)가 한 사람의 고수의 북장단에 맞추어, 창(소리. 노래), 아니리(말.白). 너름새(몸짓)를 섞어가며 긴이야기를 엮어가는 극적인 음악."
판소리의 어의
처음부터 판소리가 판소리라고 불려지던 것은 아니다. 판소리라는 명칭은19세기 말까지는 쓰이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19세기 말 경까지는 문헌에판소리라는 말이 등장하지 않고 있다. 1940년에 정노식의 [조선창극가]에 처음으로 판소리라는 명칭이 쓰인 것으로 보아, 일제 강점기부터 판소리라는 명칭이 쓰이기 시작한 것으로 보이며, 널리 쓰이기 시작한 것은 해방 후부터라고 판단된다.판소리라는 명칭 이전에는 타령, 잡가, 창, 소리, 광대소리, 창악(唱樂), 극가(劇歌), 가곡(歌曲), 창극조(唱劇調) 등이 사용되었는데, 판소리라는 명칭이 나온 후로는 다른 명칭둘아 절 보이지 않게 되었으나 요즘에도 소리, 창, 창악 등의 명칭을 사용하는 경우를 종종 볼 수 있다. 하지만 판소리라는 명칭이 뒤 늦게 만들어진 말인데 비하여 짧은 시간에 많은 사람들의 호응을 통하여 널리 쓰이게 된데는 ‘판소리’라는 명칭이 판소리의 특성을 가장 잘 드러내주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판소리는 ‘판’과 ‘소리’가 합쳐진 말인데, 우선 ‘판’에 대하여 알아보자.
1) ‘노름판’, ‘씨름판’ 등에서 볼 수 있듯이 ‘많은 사람들이 모여특정한 행위를 벌이는 장소, 혹은 상황’라는 의미.
2) ‘노름 두 판’, ‘씨름 한 판’ 등에서 쓰이는 바와 같이, ‘어떤 행위의 처음부터 끝까지의 완전한 과정’이라는 의미.
3) ‘판놀음’, ‘판굿’ 등에서와 같은 ‘여러 사람들을 모아놓고 전문인들이 벌이는 놀아나 행위’라는 의미.
판소리에서의 ‘판’을 1)과 같은 뜻으로 볼 때는, 판소리가 여러 사람을모아놓고 벌이는 행위라는 것, 곧 판소리가 공연예술이라는 점을 강조한 것으로 볼 수 있다.
2)에서의 ‘판’은, 씨름이면 씨름, 노름이면 노름의 승부가 완전히 결정났다는 것을의미한다. 판소리의 ‘판’을 이렇게 보면, 소리의 내용이 처음부터 끝까지의 완전한 줄거리를 갖춘 것이라야 한다는 의미로 받아들일 수 있다. 소리의 줄거리가 중간에 시작한다든가 중간에 끝난다든가 하여, 시작과 끝이 있는 완전한 것이라는 느낌이 들지 않는 것은 판소리라고 할 수가없다.
3)의 ‘판놀음’이니, ‘판굿’이니 하는 것은 조선조 말기 유랑 연예인 집단들이 벌이던 놀이이다. 이 경우 ‘판’이란 전문인들이 벌이는 놀이와 행위로 보여진다.
‘소리’에 대해서는 ‘노래’(놀다의 어간 ‘놀’과 명사화 접미사‘애'의 합성어)가 서정적이고 짧은 것을 가리키는 데 비해서, ‘소리’는 서사적인, 즉 이야기를 지닌 긴 노래를 가리킨다고 하는 견해가 있다. 그러나 남도 민요나 서도 민요를 ‘남도소리’, ‘서도소리’등으로 부른다거나, 들노래들도 ‘김매는 소리’,’’달구지 소리’ 등으로 쓰는 것을 보면, 이러한 구분은 타당성이 없어 보인다. 그보다는 소리와 노래의 차이는 동일한대상을 바라보는 시각의 차이에 기인한 것이라 보인다.
소리 정확하게 말하자면 목소리는 인간의 육체를 사용해서 내는 것이다. 그만큼 인간적인 표현에 뛰어날 수 밖에 없다. 음악에서 성악을 제일로 친다거나, 인간의 성대를 가장 훌륭한 악기라고 하는 것은, 인간의 목소리가 다른 악기를 사용해서 내는 소리보다 아름답다거나 정확해서가 아니고, 인간적이기 때문이다. 음악이 인간활동의 일부이고, 그것이 인간 생활에 있어서 중요한 위치를차지하고 있는 것이라면, 그것은 마땅히 인간적인 가치에 의해서 그렇게 되어야 한다. 인간에게 인간이상의 가치는 있을 수 없다. 이렇게 볼 때, 판소리가 인간의 목소리를 표현매체로 삼고 있다는 것, 그리고 그러한 사실을 명칭을 통해서 강조하고 있다는 사실은 참으로 중요한 점이 아닐 수없다.
이상의 여러 견해들은 각기 일면의 타당성을 갖고 있다. 따라서 판소리의 어의를 해석할 때 어느 한 측면만을 취하지 말고, 앞에 든 여러 가지 견해를 폭 넓게 수용하는 태도가 바람직할 것으로 생각된다. 그렇게 할 때판소리는 다양한 측면을 지닌 복합체로서의 자신의 참모습을 드러내게 될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판소리가 판을 이루는 예술 곧 공연예술이라는 점과 목소리를 표현매체로 삼는 성악의 일종이라는 점은 특히 강조되어야 한다. 또한 판소리라는 명칭이 짧은 기간 안에 널리 쓰이게 된 데는, 아무래도 판소리라는 명칭속에 담겨 있는 이러한 의미에 대한 일반인들의 공감도 크게 작용했을 것이다.
판소리의 기원
판소리의 기원으로 가장 널리 알려진 것은 <무가기원설巫歌起源說>이다.일제 강점기에 정노식에 의해 처음 거론되기 시작한 이 주장은, 그 후 많은 동조자를 얻어 가장 설득력있는 주장으로 자리잡았다. 판소리가 무당들의 노래, 그것도 시나위권이라고 일컬어지는 지역의 무당들의 노래로부터 나왔다고 하는 근거는 다음과 같다.
첫째. 판소리와 판소리 창자의 분포지역이 무가의 시나위권과 일치한다는점이다. 우리나라의 무가나 민요는 크게 세 권역으로 나누어지는데, 시나위권이란 경기도 남부, 충청도, 전라도, 경상도 서부지역을 가리킨다. 특히 이 지역을 시나위권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이 지역의 무당들이 굿을 할 때 연주하는 음악을 시나위라고 부르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배출된 판소리의 명인들을 보면, 거의 대부분이 이 지역 출신이었다.
둘째, 판소리의 여러 가지 특성이 이 지역의 무기와 같다는 점이다. 우선 판소리나 시나위권의 무가나 목 쉰 소리로 부른다. 물론 자세히 보면 무가는 판소리에 비해 힘을 빼 넋두리하는 듯한 느낌이 강한 ‘어정목’이라는 목소리를 사용하고, 판소리는 무가에 비해 훨씬 힘이 더 들어 가는 ‘패기음성’이라는 목소리를 사용한다는 차이는 있다. 또 판소리에서 사용하는 춤과 같은 동작(발림)이 시나위권의 무당들이 추는 살풀이의 춤사위와같은 양식으로 되어 있으며, 시나위권 무가의 장단이나 선율의 구성음이 판소리와 같다는 점도 중요한 요소이다.
셋째, 우리나라의 다른 지역에서는 대체로 강신(降神.신내림)에 의해 보통사람이 갑자기 무당이 되는 경우를 보이는데 비해 시나위권의 무당은 집안 대대로 이어져 전문적인 훈련을 통해 무당이 되는데 판소리 소리꾼들은 ‘비가비’라고 부른다. 극소수의 일반인 창자를 제외하고는 대부분이 이 무당 가계로부터 나왔으며, 이 또한 집안 대대로 이어지는 성격이 강했다. 이러한 판소리 소리꾼들의 대물림은 곳곳에 유명한 판소리 가문을 형성하였다. 남원과 구례를 중심으로 한 송씨 가문은 송홍록, 송광록(송홍록의 동생), 송우룡, 송만갑, 송기덕에 이르기까지 4대에 걸쳐 명창을 배출했으며, 강경과 장항 일대의 김씨 가문은 김성옥, 김정근, 김창룡과 김창진에 이르기까지 3대에 갈쳐 명창을 배출하였다. 또 보성의 정씨 가문은 정재근,정응민(정재근의 조카), 정권진에 이르기까지 3대에 걸쳐 명창을 배출하기도 하였다.
넷째, 판소리의 내용적 성격이 무가의 그것과 비슷하다는 점이다. 시나위권의 무가는 기본적으로 살풀이적 성격을 지니고 있는데, 판소리도 이와유사한 성격을 갖고 있다. 판소리의 내용은 처음에 온갖 시련을 거쳐 결국 모든 문제들이 해결되어 흥겨운 한바탕 축제적 분위기로 끝맺는 것이 많다.
이 축제적 분위기가 굿의 성격과 동일하다. 물론 이 축제는 ‘원한’,혹은 ‘살’로 상징되는 세상사의 어려움과 고통을 ‘굿’이라는 의식을 통해 해결하고, 새로운 삶의 의욕과 의지를 불러 일으키는 집단적 행위에 의해 유발되는 것인데, 판소리 또한 이점에서는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이상과 같은 판소리의 무가기원설은 다시 몇가지로 파생되면서 구체화되었다. 그중에 하나가 ‘육자배기토리 기원설’이다. <육자배기>는 남도 민요를 대표하는 음악이며, ‘토리’란 민요 선율의 지역적 특색을 가리키는말이다. 육자배기토리는 전라도 향토 선율형으로, 시나위조.육자배기조와 같은 것이다. 음계는 Mi-Sol-La-Do-Re이며, 본청(기본음)은 La이다. 대부분이 La로 끝나며 간혹 Mi로 끝나는 경우도 있다. 악상(樂想)은 여성적이고, 한스럽고, 처절하고, 부드럽다. 바로 이 육자배기와 판소리의 중심선율을 이루는 게면조가 동일한 구성음과 악상으로 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 주장은 무가기원설을 음악적인 면에서 구체화한 것이다. 시나위권의 무가는 육자배기토리로 되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 기원을 무가보다 범위가 넓은 민요에서 찾는다는 차이가 있을 뿐, 육자배기토리 기원설은 무가기원설을 보완하는 위치에 있다.
무가기원설과 근본적으로는 동일한 부류에 속하면서도 사회적 제도와 관련해서 기원을 논한 것으로는 <광대소학지희廣大笑謔之戱기원설>을 들 수 있다. 우리나라의 민속 예능은 무당가계 출신의 남자들(巫夫)에 의해 대대로 계승되어 왔는데, 국가적인 행사에 대비하여 전국적인 조직을 가지고 있었다. 특히 궁중의 가장 큰 연례행사의 하나인 나례(儺禮)는 고려때부터 조선조 말까지 이어내려온 것으로, 연마에 사악한 귀신을 쫓고 국가의 안녕과 태평을 기원하는 일종의 굿이었다. 이 나례는 처음에는 의식이 중점이었으나, 나중에는 곡예와 갖가지 연예까지 곁들여진 대규모 행사로 발전하였다. 이중에서 곡예 중심의 놀이를 규식지희(規識之戱)라고 하고, 연예 오락 중심의 놀이를 소학지희(笑謔之戱)라고 하는데, 판소리는 바로 이 소학지희 중에 전국 각지에서 올라온 광대들이 각자의 재주를 겨루다가, 어느 광대가 이미 존재하고 있던 남도 무가의 음악과 양식을 사용하여, 우리 민속 가운데 흐르고 있는 설화를 긴 노래로 엮어부른 데서부터시작되었으며, 조선조 후기에 이르러 국가 재정상의 이유로 나례가 폐지되기에 이르자, 생활기반을 잃은 광대들이 생존을 위한 노력으로 간단한 인원, 고도의 전문성을 확보하면서 발전했다는 것이다. <광대소학지희 기원설>은 판소리를 처음 부르기 시작한 사람으로 알려진최선달, 하은담이 무부들의 조직인 ‘신청(神廳)’의 대방이니, 도산주니 하는 직책을 맡고 있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는 문헌 증거를 댈 수 있다는 강점이 있다.
또 최근에 등장된 것으로 <판놀음 기원설>을 들 수 있다. 판소리는 육자배기토리 무악권(巫樂圈) 창우(倡優. 주로 노래를 부르던 유랑 연예인을 가리키는 말임) 집단의 광대소리로 부터 발생했다는 것이다. 판놀음 기원설에서는 판소리의 육자배기토리 기원을 인정하면서도, 무가 - 판소리의 발전도식에 대해서는 부정적이다. 무가와 판소리는 성음. 시김새. 장단이다르고, 판소리 소리꾼과 단골의 복색(服色)도 다를 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판소리 근원이 된 설화가 전라도 단골 무가(巫歌)에 보이지 않기 때문에, 무가에서 곧바로 판소리가 나왔다고 볼 수 없다고 한다. 따라서 무가와 판소리 사이를 이어줄 공연 부문이 있어야 하는데, 이 공연 부문이 바로 ‘판놀음’이라는 것이다. 판놀음은 조선조 후기 전문 놀이군들이 돈을 받고 벌이던 놀이인데, 판소리는 바로 이 판놀음의 주요 구성 주체의하나인 창우 집단의 광대소리와 성음. 주요 장단. 조(調). 공연 방식. 공연자 편성. 사설의 형태와 양식. 사설의 율조 등에서 동질성이 발견되기 때문에, 판소리는 육자배기토리 무악권 창우 집단의 광대소리에서 발생한것으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상의 판소리 기원설들은 . 어떤 주장이 되었건, 무가와 무당 가계의 범위를 크게 벗어나 있다고 보기는 어렵다. 따라서 판소리의 기원에 관한 여러 학설들은 서로 상치되어 대립하고 있다기보다, 논의의 측면과 차원만을 달리하면서 상호보완적인 관계에 있다고 볼 수 있다. 요컨대 판소리가 남도 지역(시나위권, 혹은 육자배기토리권)의 무가와의 갚은 관련 속에서 생성되었다는 것을 움직일 수 없는 사실로 보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판소리적 특성으로 내세우고 있는 점들은 판소리 전체를 포괄하는 게 아니고, 판소리의 일부일 뿐이다. 무속적 요소니, 육자배기토리니 하는 것들이 판소리의 중요한 요소인 것은 분명하지만, 그것만으로 판소리가 이루어진 것은 아니다. 판소리에는 무속적인 것 외에도 충. 효. 열(烈)과 같은 유교적 관념도 중요한 요소로 들어 있으며, 신선사상이나 불교적 관념도 곳곳에서 만날 수 있다.
판소리의 음악적 요소에도 육자배기토리만 있는 게 아니고, ‘추천목’이나 ‘경드름’과 같은 경기도 민요의 선율이나, ‘메나리조’와 같은 경상도 민요의 선율도 들어 있으며, 심지어는 한시의 시창이나 시조. 가곡성(사대부들의 성악으로서 시조창과 비슷한 가곡의 음색을 가리킴)과 같은 사대부들의 음악인 정악의 요소도 상당 부분 차지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염불과 같은 불교 음악도 들어 있다.
판소리 창자들도 무당 가계에서 대부분이 나왔으나, ‘비가비’라는 일반인 출신 광대들도 있었던 게 사실이다. 특히 판소리를 맨처음 불렀다고 하는 최선달도, 선달이라는 호칭을 쓴 것으로 보아 무당 가계가아니었음이 분명하다.
이렇게 보면, 판소리의 기원을 어느 하나로 정해 버릴 경우에는 그에해당하지 않는 요소가 남아 있기 마련이어서, 명백한 반론의 여지를 항상 남기게 된다. 여기서 민족음악학자들이 주장하는 ‘사회 문화적 기원설’의 입지가 마련된다. 그들은 모든 종족의 음악은 사회와 문화속에 이미 존재하고 있는 바를 추인하는 것이며, 사회 문화적 과정의 산물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판소리에서 드러나는 여러 가지 이질적인 요소, 예컨대 민요니, 무가니, 정악이니 하는 것들 모두는 우리 민족의 문화와 사회속에서 선택된 것들이며, 판소리에 이런 여러 가지 것들이 섞여 있는것은 바로 우리의 사회와 문화 속에 그런 것들이 섞여 있기 때문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문화는 인간의 삶에 의해 형성된다. 그러므로 결국 판소리는 한국인의 삶의 결정체, 다시 말하면 수천 년에 걸친 한국인의 삶의 표상이라고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