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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형도(奇亨度,1960.2.6.-1989.3.7)
한국의 시인
1. 안개, 벌판, 황혼
기형도의 시는 한 개인의 불행한 삶을 예시하는 데 그치지 않고, 이 세계의 어둠을 환기시키는 우울한 선율을 품고 있다. 시를 읽는 사람조차 침묵의 심연으로 이끄는 그 불길한 전염성은 젊은 영혼이 지녔던 절망의 정도와 깊이를 오랫동안 숙고하게끔 만든다. 특히 거대 도시의 삼류 극장, 채 가시지 않은 한기속에 닥친 갑작스런 죽음은 그의 시를 자기 운명에 대한 고통스런 고백으로,치명적이면서도 매혹적인 자기 암시로 만든다.
과연 어떤 죽음이 이처럼 시편과 혼연일체가 되어 그 자체 시적인 것으로 탈바꿈할 수 있겠는가? 1960년 피난민과 철거민,수재민이 모여 살던 경기도 외곽에서 기형도는 태어났다. 1985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안개」가 당선되어 등단한 후 종로의 한 심야극장에서 숨을 거두기까지 그는 5년이라는 짧은 기간 동안 단 60여편의 시를 발표했던 시인이다.
섬세한 감수성과 명석한 두뇌의 소유자였던 그는 생계조차 잇기 어려운 가난과 계속된 가족의 죽음으로 인해 이른 나이에 삶의 고통을 체험하는 불우한 유년을 보낸다. 대학입학과 더불어 본격적인 문학 창작의 길에 들어선 그는 1980년대의 암울한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독서와 창작이 유일한 위안이었던 듯,신문 기자로 활동하는 가운데서도 독창적인 시편들을 꾸준히 발표한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살아 생전 자신의 시집을 보지 못한 채 만 29세의 젊은 나이에 생을 마감하고 만다. 살아 있는 동안 크게 주목받지 못하였던 그는 그러나 유고집으로 발간된 『입 속의 검은 잎』(문학과 지성사,1989)이 커다란 문학적 반향을 일으키면서 세기말의 징후를 가장 정확히 묘파한 시인으로,못다한 젊음과 극적인 죽음으로 인해 시대를 표징하는 하나의 상징으로,끊임없는 관심의 초점이 되고 있다. 그의 죽음이 지닌 극적 파장은 시를 신비화시키는 경향이 없지 않지만 시인의 육체적 죽음이 있기 전부터 그의 시는 행복한 삶이 불가능한 곳에서의 위기 의식을 그리고 '지금 여기'의 기만적인 가면 속에 숨겨진 '거짓 긍정성'을 드러내 왔다. 현실의 부정성을 예리하게 간파하는 그의 시적 언어를 가리켜 김현은 '그로테스크 리얼리즘'이라 명명한 뒤, 그것의 미학적 전제 조건으로 낙관적 전망의 흔적조차 찾을 수 없는 극단적인 부정성의 세계관을 지적하였다.
스스로 고통이 되고 부정성이 됨으로써 현실의 거짓 긍정성을 전복시키는 언어와 도저히 비극적 세계관의 탁월한 결합은 기형도의 시를 1980년대 정치 투쟁적인 시들과 확연히 구분시킨다.
이 읍에 처음 와 본 사람은 누구나 거대한 안개의 강을 거쳐야 한다. 앞서간 일행들이 천천히 지워질 때까지 쓸쓸한 가축들처럼 그들은 그 긴 방죽 위에 서 있어야 한다. ...(중략)...
가끔식 안개가 끼지 않는 날이면 방죽 위로 걸어가는 얼굴들은 모두 낯설다 서로를 경계하며 빠쁘게 지나가고,말고 쓸쓸한 아침들은 그러나 아주 드물다. 이곳이 안개의 성역이기 때문이다.
날이 어두워지면 안개는 샛강 위에 한 겹씩 그의 빠른 옷을 벗어 놓은다. 순식간에 공기는 희고 딱딱한 액체로 가득 찬다. 그 속으로 식물들,공장들이 빨려 들어가고 서너 걸음 앞선 한 사내의 반쪽이 안개에 잘린다.
몇가지 사소한 사건이 있었다. 방죽 위에서 취객 하나가 얼어 죽었다. 바로 곁을 지나는 삼륜차는 그것이 쓰레기 더미인 줄 알았다고 했다. 그러나 그것은 개인적인 불행일 뿐, 안개의 탓은 아니다.
-「안개」중에서
군부 파시즘을 등에 업고 경제 우선 정책의 성과가 자본주의 체제의 확립으로 이어진 1980년대는 산업 사회의 모순과 부조리,인간에 의한 인간 가치의 무화가 조직적으로 만연된 시대였다. 위 시는 이러한 시대 상황을 은유의 중첩과 환유의 효과적 사용, 반어적 어법 등을 통해 상징적으로 그리고 있다.
시의 배경을 이루는 '샛강이 있는 읍'은 완벽한 침묵의 공간으로 어떠한 추문의 흔적도 없이 타인의 무관심 속에 생명이 방치되고 죽음이 버려지는 곳이다. 자연과 정신의 마모가 정점에 다다른 이'읍'은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을 음울하헤 상징한다. 진실의 은폐와 그것의 암묵적 동의, 그 속에 숨겨진 현대인의 이기적 안주를 암시하는 "안개"는 지상의 모든 것을 빨아들이며 인간을 반토막 내는 보이지 않는 괴물이다.
"강", "군단, "식구", "주식"은 "안개"의 견고함과 지속성, 그 안에 감추어진 비시적인 물리력을 환기한다. 폭력에 노출된 채 서로에게 무관심한 "여직공 하나","취객 하나","상처 입은 몇몇 사내들"은 "안개"가 "명물"이 아닌 추물임을,"성역"이 아닌 황무지임을 드러낸다. 그곳에서 벌어지는 "몇 가지 사소한 사건"은 물신화가 야기한 비인간적 행태를 표상한다.
이 시의 이미지에 따른다면 마르크스가 자본주의의 증식을 가리켜 표현했던 문장은 다음과 같이 수정되어야 할지 모른다."견고한 모든 것은 "안개"속으로 녹아 사라진다"고 따라서 위 시의 "안개"는 밀실의 공작은 은폐의 속임수 속에 진행되어온 우리 사회의 자본주의화 양상을, 정점에 다다른 인간 가치의 붕괴와 소외 현상을 극단을, 보이지 않는 실체로서 생활 곳곳에 침투해 있는 통제 불가능한 거대 권력을 상징한다.
무엇보다 인간에 의한 파탄을 암시하는 이 인공의 스모 그 속에 무차별적으로 가해지는 폭력이 도사리고 있다는 점은 매무 문제적이다. 미세한 일상에 까지 스며들어 있는 폭력의 검은 뿌리는 기형도의 시 세계 전체에 걸쳐 감지되는데, 다음 시「입 속의 검은 잎」에는 물리적 위력 앞에 노출된 자의 공포감이 드러나 있다.
택시 운전사는 어두운 창밖으로 고개를 내밀어 이따금 고함을 친다. 그때마다 새들이 날아간다 이곳은 처음 지나는 벌판과 황혼 나는 한번도 만난 적 없는 그를 생각한다
그 일이 터졌을 때 나는 먼 지방에 있었다 먼지의 방에서 책을 일고 있었다 문을 열면 벌판에는 안개가 자욱했다 그해 여름 땅바닥은 책과 잎들을 질질 끌고 다녔다. ...(중략)... 그해 여름 많은 사람들이 무더기로 없어졌고 놀란 자의 침묵 앞에 불쑥불쑥 나타났다 망자의 혀가 거리에 흘러넘쳤다 택시운전사는 이따금 뒤를 돌아다본다
나는 저 운전자를 믿지 못한다. 공포에 질려 나는 더듬거린다. 그는 죽은 사람이다 그 때문에 얼마나 많은 장례식들이 숨죽여야 했던가 그렇다면 그는 누구인가, 내가 가는 곳은 어디인가 나는 더 이상 대답하지 않으면 안된다. 어디서
그 일이 터질지 아무도 모른다. 어디든지 가까운 지방으로 나는 가야하는 것이다 이곳을 처음 지나는 벌판과 황혼 내 입 속에 악착같이 매달린 검은 잎이 나는 두렵다 -「입속의 검은 잎」중에서
목숨을 부지하는 것조차 힘들만큼 폭압적인 상황과 그 가운데서 갈 곳 몰라 방황하는 자의 두려움와 공포가 생생하게 나타난 위 시에서 "그일"이란 80년 광주사건을 가리키며, "그"는 학살 속에 죽어간 자들을 암시한다. "벌판"은 황폐화된 현실의 "안개"는 그 현실을 감추는 허언의 은유이다. "그해 여름 땅바닥은 책과 검은 잎들을 질질 끌고 다녔다"는 구절은 "망자의 혀"와 사람들이 무더기로 없어졌다"는 구절을 통해 사람뿐만 아니라 자연조차 죽어가고 있음을, 책읽기를 대응 방식으로 삼은 "나"의 관념적 행위가 무력 앞에 나약하기 그지없음을 아울러 의미한다.
따라서 "검은 잎"은 자연의 죽음과 인간의 죽음을 가리키며, 동시에 내굳은 "혀"의 은유인 "입속의 검은잎"과 연결되어 침묵하는 자의 삶이란 죽어있는 상태와 다를 바 없음을 뜻하게 된다.
이처럼 원인 불명의 죽음이 난무하는 곳에서 느끼는 두려움과 자신의 삶도 죽어가고 있음을 인지하는 "나"의 공포는 "택시운전사"가 "그"의 환영과 겹쳐지는 부분에서 극에 달한다. 그리고 "이곳은 처음 지나는 벌판과 황혼"이라는 은유를 통해 기억하고 싶지 않은 과거의 불행이 아직 끝나지 않았으며, 따라서 '그 일"이 터질지 모르는 현재야말로 더욱 두려운 순간임이 드러난다.
비정상적인 불구자만이 생존할 수 있는 극한 상황에 대한 공포,최소한의 은신처,혹은 탈출구조차 부재하는 현실에 대한 공포가 위 시에는 가득 차 있다.
2. 어느 푸른 저녁,"김"의 울음
마스크를 낀 승객 몇몇이 젖은 담배 필터같은 기침 몇개를 뱉어내고 쉽게 잠이 오지않는 축축한 의식 속으로 실내등의 어두운 불빛들은 잠깐씩 꺼지곤 하였다.
-「조치원」중에서
새벽은 화차 속의 쓸쓸한 파도를 한 삽씩 퍼올렸다. 땅 속 깊이 불을 저장하고 우리는 일어섰다. 날음식처럼 축축한 톱밥이 우리를 쳐다보았다. -「폐과촌」중에서
사라지지 않는 안개에 둘러싸인 자는 늘 축축하게 젖어 있을 수 밖에 없다. 그런 이에겐 차갑고 축축한 촉각이 대상을 감지하는 가장 원초적 감각이 된다. 기형도의 시에서 외부 세계의 스산함과 을씨년스러움은 주로 차갑고 축축한 이미지를 통해 구체화된다. 이러한 촉각적 이미지는 진눈깨비나 장마비,눈,얼음 등으로 변용되는데 무겁고 습한 이 물 이미지 때문에 외부 세계는 봄은 오지않고 겨울만이 지속되는 곳으로 그려진다. 시인이 세계를 "어둡고 축축한"(오래된 서적) 곳으로 펴표현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그런데 기형도의 시에 나타나는 촉각은 대상에 대한 구체적인 느낌이 있는 그대로 드러내는 정직한 지각 방식도 아니며,대상에 가까이 다가가는 친밀한 감각도 아니다. 오히려 차갑고 축축한 촉각에 의해 사물은 변형된 형태로 나타나며, 그 결과 외부세계는 기괴한 풍경으로 그려진다.
삼차원의 공간이 이차원으 평면으로 추상화되고 ,무생물과 관념이 시각적으로 의인화되며 생명 있는 유기물이 딱딱하게 사물화되는 것은 이러한 시각상의 특징에게 기인한다.
그런 날이면 언제나 이상하기도 하지 나는 어느새 처음 보는 푸른 저녁을 걷고 있는 것이다, 검고 마른 나무들 아래로 제각기 다른 얼굴들을 한 사람들은 무엇엔가 열중하며
걸어고고 있는 것이다. 혹은 좁은 낭하를 지나 이상하기도 하지,가벼운 구름들같이 소를 통과해가는 ....(중략)...
이상하기도 하지 가벼운 구름들같이 서로를 통과해가는 나는 그것을 습관이라 부른다. 또다시 모든 움직임을 홀연히 정치 하고,거리는 일순간 정적에 휩싸이는 것이다. 그러나 안심하라,감각이여! 아무일 없었다는 듯이
검은 외투를 입은 그 사람들은 다시 저 아래로 태연히 걸어가는 것이다 어느 투명한 저녁 -「어느 푸른 저녁」중에서
위 시의 시적 자아는 "검은 외투를 입은" 사람들을 보며 걷고 있다. 그러나 실제로 보게 되는 것은 사람의 몸을 빌려 떠다니느 "보이지 않는 거대한 숨구멍"이다. 이 구명이 "가벼운 구름"처럼 서로를 스쳐가며 통과하고 있다. 유령과 같은 "거대한 숨구멍" 그것은 어둡고 축축한 세계에서 존재 의의를 상실한 현대인들으 내면적 공허를 상징한다.
어느덧 하나의 공허 덩어리로 변해 버린 인간은 식탁에 앉아 물을 마시는 초라한 사내든(장미빛 인생),인파 속을 헤치고 다니는 중년 남자든(가수는 입을 다무네), 모두 불길한 환상 속의 인물로 우리 앞에 나타난다. 환상의 주인공들은 더 이상 특이하고 괴상한 인물이 아니라 지극히 평범한 일상인인 것이다. 자신의 눈을 의심하며 "안심하라! 감각이여"라고 말하는 상황은 세계가 실재와 환상의 경계조차 사라진 곳이 되었으며, 감각 체계조차 혼란을 일으킬 만큼 정상성으로부터 이탈하고 있음을 보여 준다.
김은 상체를 꾸부린다. 빵 부스러기처럼 내게 얼마나 사건이 많았던가, 콘크리트처럼 나는 잘 참아왔다 그러나 경험 따위는 자랑하지 말게 그가 텅텅 울린다. 여보게 놀라지 말게,아까부터 줄곧 자네 뒤쪽에 앉아 있었네 김은 약간 몸을 부스럭거린다. 이봐 우린 언제나 서류뭉치처럼 속에 나란히 붙어있네,김은 어깨를 으쓱해 보인다 ...중략... 김은 중얼거린다, 누군가 나를 망가뜨렸으면 좋겠네, 그는 중얼거린다 나는 어디론가 나가게 될 것이다, 이 도시 어디서든 나는 당황하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당황할 것이다 그가 김을 바라본다,김이 그를 바라본다
한번 꽂히면 김도, 어떤 생각도, 그도 이 도시를 빠져나가지 못한다 김은, 그는 천천히 눈을 감는다. 나는 블라인드를 튼튼히 내렸었다. 또다시 어리석은 시간이 온다. 김은 갑자기 눈을 뜬다. 갑자기 그가 울음을 떠뜨린다. 갑자기 모든 것이 엉망이다. 예정된 모든 무너짐은 얼마나 질서 정연한가 김은 얼굴이 이그러진다.
-「오후 4시의 희망」중에서
위 시의 "김"은 관료화된 조직 사회 속에 자기 상실되어 가는 인물이다. 흥미로운 것은 "김"의 자아가 "그"라는 새로운 인물로 마치 외부 세계에 실재하는 "김'의 분신처럼 나타난다는 점이다. 흡사 섬망중에 걸린 자가 자기 분신을 대하듯 "김'은 "그'를 본다. 자아가 분열된 채 스스로를 통제하지 못하는 "김'의 이러한 상황은 일종의 자기 부재상태이다.
비정의 도시로부터 자기 상실의 상황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하는 "김"의 울음과 무너짐 , 그것은 객체화된 페르소나, 그리고 그것의 독백 형식을 빌려 형상화된 시인의 분열된 내면 풍경이다. 불치의 분열증 속에서 시인은 "나와 죽음이 서로를 지배하는(포도밭 묘지) 미래,"죽음도 살지 못하는 곳"(오후 4시의 희망)에서 살아가야하는 미래를 보게 된다. 조로(早老)를 향한 질주와 죽음에 대한 욕망 외에는 더 이상 기대할 것 없는 미래가 그의 앞에 놓여 있는 것이다.
3. 죽음으로의 내적 망명
"벌판과 황혼"의 현실 속에서 미래를 박탈당한 자가 꿈꿀 수 있는 유일한 희망은 무엇일까? 기형도의 시에서 그러한 희망의 흔적을 찾기란 참으로 힘들다. 희망을 두고 "길 위에서 일생을 그르치고 있"(길 위에서 중얼거리다)다고 말하는 극도의 절망은 시를 읽는 사람에게 조차 긍정적인 삶의 기대를 포기하게 한다. 그럼에도"나 내 사랑 잃었네"(그집 앞)라는 고백 속에서 느껴지는 상실의 아픔은 시인이 사랑의 성취를 통해 현실을 견디려 한 것은 아니었을까 잠작케 한다.
영원히 사라지지 않은 '안개"속에서 생의 파탄을 직시한 참혹함을 해소하기 위해 죽음이 고려되는 것은 스스로 "일생 몫의 경험을 다 했다"(진눈깨비)고 여기는 자에겐 필연적인 것일 수밖에 없다. 결국 시인은 스스로 '죽는', 죽음으로의 내적 망명을 시도하게 된다.
내가 살아온 것은 거의 기적지거이었다 오랫동안 나는 곰팡이 피어 나는 어둡고 축축한 세계에서 아무도 들여다보지 않는 질서
...(중략)...
나는 한번이라도 본 사람은 모두 나를 떠나갔다, 나의 영혼은 검은 페이지가 대부분이다. 그러니 누가 나를 펼쳐볼 것인가,하지만 그 경우 그들은 거짓을 논할 자격이 없다
거짓과 참됨은 모두 하나의 목적을 꿈꾸어야 한다.단 한 줄일 수도 있다
나는 기적을 밎지 않는다 -「오래된 서적」중에서
생의 종말은 생이 끝나는 순간 오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처한 '지금여기'의 현실 속에서 이미 시작되고 있음을 직시하는 시인에겐 서둘러 죽는 죽음 이외의 대안을 찾기란 불가능하다. "내가 살아온 것은 거의/기적"이었으나 "나는 기적을 믿지 않는다"는 역설은 자기 삶의 극단적 부정이며, 희망도 버리고 절망도 버리고 미래가 과거인 시간의 정지 속에 스스로 죽어 갔음을 고백하는 것이다.
자신의 영혼을 "검은 페이지'라고 말하는 순간, 시인의 내면은 극복될 수 없는 어둠 속으로 더욱 가라 앉아간다. 죽음이 난무하는 곳에서의 두려움을 이처럼 죽음의 형식으로 푼다는 것. 이것은 역설 중에서도 가장 끔찍한 역설이다. 이러한 역설적 상황이 그의 시를 가리켜 비극적이라고 말할 수 있는 이유가 된다. 즉 죽음의 직시가 불러일으키는 위기감을 죽음으로밖에 해결할 수 없었다는데 이 시인의 비극이 있다.
봄은 살아있지 않은 것은 묻지 않는다 떠다니는 내 기억의 얼음장마다 부르지 않아도 뜨거운 안개가 쌓일 뿐이다 잠글 수 없는 것이 어디 시간 뿐이랴 아아, 하나의 죽음은 얼마나 큰 죽음들을 거느리는가
나리 나리 개나리 네가 두드릴 곳 하나 없는 거리 봄은 또다시 접혔던 꽃술을 펴고 찬물로 눈을 행구며 유령처럼 나는 꽃을 꺾는다 -「나리 나리 개나리」중에서
'하나의 죽음'이 더 '큰 죽음들을 거느린"다는 것, 그것은 살아 있는 자들에 대한 죽은 자의 지배를 의미한다. 누이의 죽음(나리 나리 개나리)이 삼촌의 죽음(삼촌의 축음_겨울판화4)이 그리고 아버지으 죽음(폭풍의 언덕)이 "거느리는"산 자들의 삶이란 가난과 슬픔, 고난과 회한의 연속이다. 죽음은 산 자들에게 예상치 못한 삶의 어려움을 안겨주면서 그들의 행복을 방해한다.
유년시절을 그린 여러 시편들이 맑고 투명한 아름다움을 발하면서도 처연한 슬픔에 잠겨있는 것은 죽음이 확인시킨 삶의 누추함과 쓸쓸함이 시인의 영혼 속에 깊이 각인되어 있기 때문이다. 죽은 자들로 인해 불행 속에 살아야 하는 산 자들, 그리고 그들에 의해 계속해서 반추되는 죽음은 사라지지 않는 고통만을 남긴다는 사실을 시인은 너무나 잘 알고 있다. 그리하여 죽음을 영혼의 안식처로 삼을 수 없는 시인은 "그렇다면 도대체 또 어디로 간단 말인가!(여행자)라는 비통한 절규를 남긴다. 풀리지 않는 원환의 고리처럼 착종되어 있는 이러한 내면 세계로 인해 기형도의 시는 비극적 교착상태의 전형으로 우리앞에 나타난다.
그이 시가 영원한 죽음의 신화가 될 수밖에 없는 것은 바로 이러한 극한상태, 즉 미로 속에 갇힌 채 해결의 기미가 보이지 않는 한계상황을 육체적 죽음이 해결한 듯 보이기 때문인지 모른다. 그러나 스스로 죽음을 향해 걸어가는 이러한 내적 망명은 시대의 어둠을 환기하는 시적 방법이자 동시에 그의 시 세계를 떠받치는 공고한 정열이다.
자기 자신의 의해 영향을 받음으로써 유지되는 시적 파토스, 그것은 현실로부터의 도피를 막는 한편, 현실과 맞닥뜨릴 수 있는 용기를 북돋우는 의지이자 정열이었던 것이다. 그의 시가 여전히 강한 전염성과 항구력을 지니고 있는 이유는 이러한 죽음에 대한 예감이 과장된 포즈나 선험적인 예견에 머무르지 않고 우리가 속한 세계의 추한 본질을 다시금 반성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그의 시적 언어는 예측불가능한 현대문명이 그것을 떠받치는 제도화된 권력과 그 속에 감춰진 폭력, 그리고 병든 현실에 안주한 채 불구가 되어가는 우리의 영혼이 더 비참한 죽음의 상태에 놓여 있음을 알려 준다. 그에 비하면 자신의 죽음은 결코 불행한 것이 아니라는 듯이. 시인 기형도는 곽격하진 않았으나 결코 우유부단하지 않았던, 그리고 시대가 낳은 절망을 생의 근원적 아픔으로 끌어안은 탁월한 전위 중의 하나이다.
우리의 눈앞을 가리는 '안개'가 걷히지 않는 한,'안개'속에 진행되어 온 위기의 역사가 극복되지 않는 한, 기형도는 동시대인으로서 영원히 기억될 것이며,단명했던 그와 달리 그의 시는 운명을 계속 이어갈 것이다. 그런 점에서 그는 분명 행복한 시인이다.
출처 : [기타] 도서: 새로쓰는 한국시인론(백년글사랑,200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