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12회 생코 독서모임
*일시 - 2014년 10월 28일 화요일 오후 7시
*장소 - 놀몸연극놀이연구소
*참여자 : 9명
바우님, 들풀님, 권오름님, 고구마님, 조윤서님, 김수형님, 홍유진님, 옹달샘님, 윤동희
*텍스트 - 「과거의 거울에 비추어」, 이반 일리치
*발제 및 사회 - 고구마
*기록 - 윤동희
*발제 요약
1. 코페르니쿠스의 천구, <프레임>의 문제
코페르니쿠스의 천구는 주입 받은 사고의 예(프레임). 시대의 흐름 속에서 교육을 받아야만 인간으로 보는 경향은 부모, 학교, 정부 등의 사회화를 거치며 <설계된 인간>을 생산한다. 중세엔 마녀사냥과 공개처형이 당연했다는 것, 그리고 현 시대의 일부 지역에서도 여전히 그러한 점을 고려할 때, 프레임의 힘은 무척 강력하다.
2. 언어의 상품화에 관하여
언어 역시 양육의 결과이고, 언어적 차별을 통해 계급화를 달성하고 있다. 영어가 세계 공용어로 사용되고 있긴 해도 고급언어로 변질되는 측면이 있다. 그러나 <언어의 상품화>와 관련하여 언어 전파의 주장을 모두 동의하긴 어렵다. 언어는 누군가에 의해 설계되었다기보다는 생존의 역사, 즉 진화의 페달 속에서 어쩌다보니 활성화되었을 뿐이다(영어도 마찬가지).
3. 토착어에 관하여
토착어는 아이의 본능적 습득 언어로, 변질되지 않은 언어이며 살아있는 언어지만 의문이 드는 지점이 있다. 상품성 없는 언어의 비현실성이다. 토착어에 대한 논의는 용어에 대한 이해 때문에 오해의 소지가 많은 것 같다.
*토론 요약
조윤서 : 북한에 대한 편견, 교회에 대한 거부 등 프레임의 문제는 일상 곳곳에서 쉽게 발견할 수 있는 것 같다. 특히 언어의 경우 한국어를 배워야 생존할 수 있는 부류(동남아 이주노동자 등)와 한국어를 배우지 않아도 생존할 수 있는 부류(백인 영어강사 등)로 나누어 관찰할 수 있다. 언어 자체의 위계적 성질을 잘 드러내는 예가 아닐까 싶다.
윤동희 : 영어가 과연 세계 공용어인가.하는 문제는 차치하더라도 각 언어 간 위계구도가 진화의 페달 속에서 우연히 활성화되었다는 의견은 동의하기 어렵다. 종 간 경쟁과 족 간 경쟁은 다른 문제이고, 특히 인간에게 있어 민족이란 근대에 이르러 고안된 정체모호한 개념에 가깝다. 사회적 지배 구조에 깊이 뿌리박고 있는 영어 전파에 관하여 진화의 관점으로 접근하는 것은 위험하지 않나.
김수형 : 일본어는 서울 사람보다 안동 사람이 더 발음이 좋다. 억양을 조금만 고쳐도 되기 때문이다. 물론 일본어도 사투리가 있다. 각 언어마다 중앙의 표준을 정해두고 있지만, 지역의 언어가 거기에 못하다는 생각은 정말 잘못된 것이다. 한자, 라틴어 등 언어 독점에서 발생하는 권력의 문제는 역사적으로도 분명히 있어 왔고, 지금도 과점이라는 완화된 형태로 벌어지고 있는 일이다.
홍유진 : 언어와 계급 문제는 낯설다. 언어가 지배의 도구라는 개념은 아직 와닿지 않는다. 소통의 도구로서 언어를 바라보는데 익숙하다. 다만, 소통의 도구로서도 서로 다른 전제 때문에 결함이 많은 것 같다. 예컨대, 본질과 본분을 두고 어떤 사람은 거의 같은 용도로 사용하지만, 또 어떤 사람은 완전히 다른 의미로 사용하기도 한다. 올바른 단어의 뜻이나 유래를 알고 사용하는 것이 중요할 것 같으면서, 한편 서로 다른 토대 위에서 벌어지는 소통의 문제가 심각한 것 같다.
고구마 : 한자가 고시의 필수였던 과거를 돌아보면, 언어가 제도적으로 인간을 관리하고 통제하기 편하도록 만들어진 계급화의 도구라는 개념을 좀 더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김수형 : 말콤X의 예를 들고 싶다. 감옥에서 말콤X는 언어를 새롭게 접근했다. 검은 것은 죄다 나쁜 의미로, 하얀 것은 거의 좋은 의미로 규정된 사전 속에서 스스로 자신을 규정할 수 있는 언어부터 찾아나갔다.
바우 : 외국의 글이나 말을 배우는 것은 예전부터 있어왔다. 일상생활에서 어릴 때부터 선택이 아닌 주입된 가치가 강하게 작용하는 것 같다. 거래 언어, 교습 언어 등 따로 교육 받아야만 사회적 지위를 향상시킬 수 있으므로 계층을 만들어가는 작동 양상이 되는 것 아닐까. 인간 설계의 구조가 더욱 일상화된 세계에 살고 있는 것 같다. 하지만 강압에서 벗어난 생각의 여유 또한 예전에 비해 다소 늘어났다고 생각한다.
고구마 : 자본의 운동에 따라 언어가 견인되는 것 아닌가.라는 말씀을 해주신 것 같다. 보험 가입 계약서를 보면 자본의 언어 선택이 통제의 도구가 되는 일례를 볼 수 있다.
들풀 : 모어와 토착어라는 표현 자체가 우리 사회에서는 의미가 모호해지는 표현이다. 언어 자체가 <좋은 백성을 만드는 제도화된 기구>가 되고 있다. 생활의 살아있는 모든 언어야말로 일리치가 관심을 둔 핵심이 아닐까. 일례로 “몸이 나았다.”는 표현에서 “병을 고친다.”는 표현으로 기계화된 언어의 변화를 살펴볼 수 있다. 우리 몸의 자생적 치유력을 배제한 표현이 삶 속에 침투한 것이다. 또다른 예로 군대에 가지 않은 여자들도 군대식 용어를 쉽게 쓰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이러한 일상적 사용의 이면에 깔린 언어를 살펴보는 것이 중요할 것 같다.
권오름 : 제주도에 축제가 있었다. 일본에서 스텝이 와서 일본어로 대화를 했는데 의사소통에 있어서 어려움이 있었다. 가까운 나라인데도 각자 언어가 너무 달라서 의사소통이 너무 힘들다. 언어의 장벽은 언제부터 있었을까 궁금했다. 몸짓, 발짓으로 소통하며 한국어만 쓰는 분들이 보였다. 통역의 누수 영역을 감안하면, 오히려 바디랭귀지가 더 정확한 소통의 도구가 될 수도 있는 것 아닐까. 한국인은 어느 정도 수준이 되기 전까지 외국어를 못한다고 말한다. 외국어를 못하는 것이 부끄러운 일이 된 것이다. 작게는 제주도의 재미나는 사투리들도 널리 알려졌으면 좋겠다.
고구마 : 인간은 꼭 교육을 받아야만 하는가? 교육 받지 않으면 어떻게 될까? 늑대인간 같은 예를 들면 사회적 공감 능력이 거의 없다고 볼 수 있다.
조윤서 : 교육이 인간의 필수요소는 아닌 것 같다. 삶의 질을 높이기 위해 교육을 받는다고 하지만 지금은 의미가 퇴색된 것 같다. 불편함을 느끼지 않는 정도면 충분한데, 지금은 교육 과잉의 시대다.
윤동희 : <본성과 양육>의 문제는 우리 모임 내내 생각할 거리를 던져주는 대목이 아닌가 싶다. 최근의 새 인간의 예를 보면 거의 측은지심을 느끼지 않는 짐승 수준의 생명이다. 그러나 생물학적으로 분명히 인간이다. 결국 우리가 말하는 교육과 인간의 관계는 사회적 인간에 대한 것이다. 지금도 몇몇 곳에서 남아있는 원시 부족적 삶의 세계에서는 언어의 지분이 현대 기계문명 사회에 비해 확연히 적다. 교육을 포함한 모든 양육, 즉 사회화의 강도 역시 그러하다. 그런 사회에 현대 기계문명 사회의 사회화 시스템을 갖다 꽂으면 계몽이 아니라 폭력이 된다. 반대로 지금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사회 역시 마찬가지다. 일거에 무언가를 바꿀 수는 없다. 변화의 속도는 저마다의 선택이고, 특히 외부 영향에 따른 변화의 속도가 빠를 땐 위험이 더욱 증가한다. 적어도 내가 발 딛고 살고 있는 사회에서 양육, 곧 사회화 자체는 필요해 보인다. 사실상 벗어날 수도 없고. 다만 <제도화된 교육>의 악영향을 줄이는 선에서 <사회적 인간>으로 살아갈 수 있는 지점을 모색해야 할 것이다. 변화의 지점은 다양하되, 외부 영향에 따른 변화의 속도는 느리게.
김수형 : 교육이 삶의 질을 개선하지는 않는다. 지금은 국민을 위해 국가가 있는 것이 아니라 국가를 위해 국민이 있다. 지역 교육과 국가 교육의 프레임으로 접근할 필요가 있다. 지역의 학습권을 옹호하는 선택이 보다 확산되어야 한다. 요즘 <문화콘텐츠>니, <스토리텔링>이니 하는 개념들이 떠다닌다. 막상 스토리텔링과 이야기의 차이가 무엇인지 물으면 대답도 못하면서 마구잡이로 사용하는 사람들이 많다. 개념적 허상을 너무나 쉽게 받아들이는 것이다. 누구나 자기만의 학습 방법이 있다. 다독이 정답도 아니다. 자유에 대해서 이야기를 많이 하는데, 핵심은 스스로의 해석 방법이 있느냐 없느냐에 달린 것 아닐까.
홍유진 : 교육의 종류는 삶의 본질을 향상시키는 한 가지와, 직업 훈련이나 어떤 전문성을 향상 시키는 한 가지로 나누어볼 수 있다. 전문성 향상보다는 지켜야될 관습이나 전통 등을 포함한 삶의 본질 향상이 더 중요함은 두말할 것 없다. 그런데 현실은 이게 거꾸로 되어 있다. 더 중요한 것이 밀리고, 중요하지 않은 것이 확산되어 버렸다. 그래서 두 가지 교육을 구분해서 접근하지 못하고 싸잡아 <교육은 나쁘다>는 인식이 생긴 것은 아닐까.
장영준 : 금강대다라니경에 보면 사람이 사람답게 살 수 있으려면 마음 공부를 많이 해야 한다고 언급되어 있다. 교육의 인위적 조작 위험성이 어쩌면 도를 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일본에서는 각 개체를 철저히 분해해서 표현하는 면이 있다. 규격화된 프레임으로 세상을 바라보는데 익숙한 것이다. 반면, 영어 표현에는 인격적 개체를 지칭하기보다는 한 무더기를 의미하는 표현이 많다. 한국은 나를 포함한 무더기라는 <우리>의 개념이 강하다. 각각 교육 받은 인간의 특징이라 할 수 있다.
김수형 : 외국의 사례를 들 때, 일반화의 오류를 범하는 것 같다. 일부 표현을 가지고 확대해석하는 것은 경계해야 한다.
윤동희 : 객관성이라는 게 사실 가능하기나 한가?라는 근원적인 질문을 던져보면, 결국 자기 해석과 판단의 지분이 보다 커지게 된다. 우리가 흔히 <사실>로 인정하고 있는 것들도 사실상 추상화된 주관에 가깝다. 객관적 근거 자료 따위는 찾아보면 상반되는 주장에도 수두룩하게 발견된다. 시체더미 같은 객관성보다는 차라리 주관적 선택의 가치가 보다 필요한 시대 아닌가. 멩이 선생님의 글에 부처와 예수에 관한 내용이 나온다. 그들을 두고 시대를 횡단한 사람들로 표현한 대목이 인상 깊었다. 시대와 맞서 싸우거나 시스템 자체를 변화시키기 보다는 상대하지 않고 건너가 버렸다는 것이다. <탈출하기>는 요즘의 청년들에게는 상당한 설득력이 있어 보인다. 변화의 속도는 느리게(모든 것을 일거에 바꿀 수 없기에), 그러나 변화의 지점은 다양하게 <탈출하기>.
들풀 : 동희님에게 멩이 선생님은 일종의 우상이 되고 있는 것 아닌가. 결국은 교육된 것들을 만나는 셈이다. 스스로 몸으로 배우고 부딪치고 깨우치는 것이 무엇인지 돌아보아야 한다. 세상사 모든 지식과 이야기들은 교육되어진 것이 아닐까. 나는 전통이 사라지는 것에 대해 전면적으로 반대하진 않는 편이다. 사라지는 이유가 있기 때문에 사라지는 면이 있는 것이다. 우리 몸에는 유전되어온 많은 가능성들이 들어 있다. 교육 받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달성되는 부분이 있다. 내 안의 가능성이 주어진 환경에 맞게 발현되면, 삶의 많은 부분들이 생동감을 찾게 된다. 아는 것만큼 본다. 다만 그 앎은 교육된 것들 속에서 이루어지는 게 아니다.
김수형 : 배우는 것은 스스로 배우는 것이다. 보고 싶은 만큼 본다. 느낌은 모두 다르지만, 만들어진 지식, 인용의 가치도 충분히 있다. 학습의 기능은 활자에만 머물지 않는다. 몸의 배움, 깨우침도 학습으로 가능하다. 익힌다는 것은 늘 연습하고 돌아보는 과정에 있다. TV를 비롯한 매스미디어의 영향에 갇혀서 스스로 학습하지 못한다는 점은 단순히 교육의 영역을 넘어 정치권력의 문제다.
윤동희 : 얼마 전에 문경 바람공작소에서 음악제를 열었다. 나는 맨정신에 춤추고 뛰노는 걸 즐기는 편은 아니다. 같이 준비한 청년들이 내게 말하곤 했다. “동희씨는 책만 좋아하고, 노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는 것 같다. 같이 좀 놀자.” 나는 책 읽고, 글 쓰는 게 내가 가장 좋아하는 놀이라고 대답했다. 반대로 내가 좋아하는 놀이를 상대가 좋아하지 않는다고 하여, 상대가 놀 줄 모르는 인간이 되는 건 아니지 않는가. 책도 놀이고 음악도 배움이다.
들풀 : 우리의 상상이 제한적인 이유가 무엇일까? 상상이 왜 막혀 있는지에 대해 생각을 듣고 싶다.
윤동희 : 한 가지는 근본적으로 벗어날 수 없는 한계, 나머지 한 가지는 극복 가능한 한계 때문일 것 같다. 전자는 언어다. 우리는 언어를 장착하는 순간부터 이미 세계를 인식하는 근본적인 결함을 떠안게 되고, 죽을 때까지 여기서 벗어날 수 없다. 언어는 세계를 어떤 체계로 축소해서 보다 넓은 인식으로 이끌지만, 결코 세계를 있는 그대로 담지 못한다. 사실 감정의 영역도 언어 베이스의 체계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것에서 벗어날 수 있다면, 그건 거의 성인의 영역, 인간 초월이다. 아니면 애초에 언어 밖 세계에서 살아가는 인간이던가. 두 번째 극복 가능한 한계는 나도 모르게 선험적으로 갖게 되는 여러 가지 인상들이다. 예컨대, 공산당, 노동자, 하나님, 개벽, 동학, 유교, 기독교, 상업적, 자생적 등의 표현들을 접했을 때 잘 모르면서도 이미 호불호가 갈리는 걸 쉽게 발견할 수 있다. 자라면서 부모님, 교사 등등 나를 둘러싼 환경에 영향 받은 찌꺼기가 내 상상의 전제로 작용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것들은 스스로 짚어나가면서 조금씩 극복이 가능해 보인다.
들풀 : 우리의 상상마저 갇혀 있는 것은 <교육된> 것들만 다루기 때문이다. 잃어버린 내 안의 상상력을 찾기 위해, 교육에 기댈 것이 아니라 몸의 가능성을 다시 회복시키는 게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언어를 통해 읽어나가는 세계는 한계가 자명하다. 애초에 언어 밖 세계에서 살았던 인간들의 유전자도 우리 몸에 포함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그 감각을 깨움으로서 제한적인 언어의 세계를 뚫고 보다 자유로운 상상이 열리지 않을까. 즉, 상상력의 한계는 결국 몸을 깨울 수 있느냐에 달린 것은 아닐까.
고구마 : 위대한 성현들의 이미지는 철저히 우상화 되어 있다. 수많은 가르침들은 결국 자기 말을 따르면 무언가에 이를 것이라는 얘기다. 자기계발서를 포함해 각 종교에서 이야기하는 성인의 가르침 또한 무턱대고 신비스럽게 추앙하게 되면 오히려 위험하다고 생각한다. 언어 밖 세계에서 살았던 인간은 분명 현대인과 감각의 차이가 있을 것이다. 예컨대 사냥으로 연명해야 했던 생존의 절실함 속에서 몸의 감각이 예민하게 발달된 인간과 지금 컴퓨터만 두드리는 인간의 세계 인식은 전혀 다를 것이다.
윤동희 : 부처나 예수는 제자들에게 가장 큰 뒤통수를 맞았다. 우상화된 성현, 조직화된 교리가 아니라 하나의 인격체로서 바라보는 것이다. 그들이 하는 이야기는 결코 <자기 말>을 따르면 무언가에 이를 거라는 얘기가 아니다. 오히려 들풀님과 고구마님이 얘기하는 맥락을 담고 있다. 무언가를 우상화하는 것은 위험하지만, 내가 스스로 배울 땐 좋은 소스가 되지 않나.
고구마 : 언어의 계급화, 상품화가 언어의 자존성을 훼손시킨다는 점에 대해서는 다들 어떻게 생각하는가?
홍유진 : 화장품 판매원을 뭔가 있어 보이는 이름으로 부르는 예가 생각난다. 판매를 목적으로 무언가 고급화된 느낌을 주는 수식어를 붙인다. 별 것 아닌데, 괜히 영어 이름으로 아리송하게 이미지를 생산하는 방식은 생활 곳곳에서 만날 수 있다. 그런 식의 이름 붙이기에 우리는 너무 익숙해져있다.
조윤서 : 비슷한 예로 어떤 외국인이 한국에 와서 아니, 한국엔 왜 이리 영어 간판이 많은지 물었다는 일화가 생각난다.
윤동희 : 회전율 때문이 아닐까. 옷이 옷 자체의 기능과 가치를 잃기 전에 우리는 옷을 버리고 새로 산다. 옷만이 아니라 모든 상품을 그렇게 버리고 산다. 소비 문화는 결국 회전율을 높이기 위해서 확산된다. 영어의 세계적 침투 또한 회전율 향상을 위한 소비문화 확산의 일환이 아닐까. 그렇다고 해서 꼭 한글만을 고집해야 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오뎅은 어묵이 아니라 오뎅이라 불러야 입에 착 붙는다. 오뎅은 일본어지만, 우리의 생활에 밀착된 언어로 살아있기 때문이다.
들풀 : 필요와 상품 그리고 불만족의 상관관계를 살펴보아야 한다. 만족의 한계가 있어야 하지 않을까. 만족하지 못하면 상품화가 촉진될 수밖에 없다. 소비문화는 매스 미디어 등 다양한 외부 환경의 영향도 있겠지만, 결국 그것을 거부할 수 있는 것은 내 안에서 시작한다. 내 안에서 만족하지 못하면 벗어날 수 없다.
고구마 : 마지막으로 첨언한다면?
들풀 : 일리치는 많이 아팠던 사람이 아닐까. 다들 아플 겨를도 없이 스쳐가는 것들을 하나 하나 아파하지 않았을까. 그런 생각이 든다.
*결정 사항 - <과거의 거울에 비추어>를 매회 장별로 읽어서 좀 더 많은 이야기를 나누기로 함.
*차기 발제 및 사회 : 홍유진님(3장)
|
첫댓글 오우~ 재미난 토론회가 되었던 것 같군요... 사회자도 정리자도 모두 감사합니다. 참가는 못했지만 덕분에 잘 읽었습니다.
샘이 있어야 더 재밌는뎅! ^^ 화요일에 뵙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