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창 · 강릉 · 백천유(居昌 · 江陵 · 白川劉)씨는 宋에서 한림학사병부상서(翰林學士兵部尙書)를 지내고 고려에 망명, 귀화한 유전(劉荃)을 시조로 하는 성씨이다. 거창 · 강릉 · 백천의 세 본관을 쓰는 것은 유전의 후손 중에서 봉군(封君)받은 자의 후손인 분관(分貫)했기 때문인데, 시조가 같으므로 합보(合譜)하였다. 유전(劉荃)은 중국 송조(宋朝)의 팽성(彭城) 사람으로 병부상서(兵部尙書)의 관직에 이르렀다 한다. 송 신종 원풍(宋 神宗 元豊)년간에 청묘 · 취식법(靑苗 · 取息法)의 신법(新法)이 실시될 때 정치적 동기로 임팔급 · 설인검 · 허동 · 송규 · 최호 · 권지기 · 공덕수(林八汲 · 薛仁儉 · 許董 · 宋圭 · 崔沍 · 權之奇 · 孔德守) 등 8학사(學士)의 일원으로 고려에 망명하였다. 당시 그는 32세였으며 고려 문종36년(1082)이었다. 9經 · 백가서(百家書) 및 천문 · 지이(天文 · 地理)에 정통했다 하며 조정에서 불러도 나가지 않고 경북 영일군에 정착, 후진양성에 노력했다 한다. 유전의 후손은 세 갈래로 분관(分貫)되었다. 유전의 큰 아들 유견규(劉堅規)는 도첨의찬성사 · 정승(都僉議贊成事 · 政丞)을 지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치사(致仕)한 후에 거타(居陀)(居昌의 옛이름)君에 봉해졌으므로 그의 후손들이 거창을 본관으로 하게 되었다. 그의 후손 중에서12세조 유창(劉敞)은 조선개국 후 옥천(玉川)(江陵 의 옛이름)부원군(府院君)에 봉해졌으므로 그 후손들이 강릉(江陵)을 본관으로 하게 되었다. 유전의 세째 아들 유견익(劉堅益)의 8세손인 유국추(劉國樞)가 백천군(白川君)에 봉해졌으므로 그 후손들은 백천(白川)으로 본관을 삼게 되었다. 그리고 유전의 둘째 아들 유견구(劉堅矩)의 후손은 유견구의 아들인 유웅열(劉雄悅)이 아임군(娥林君)에 봉해져, 후손들이 거창 · 강릉 · 백천파와 구별해서 아임파(娥林派)라 하나 본관(本貫)은 거창(居昌)으로 한다. 劉씨의 시조부터 몇 대에 걸치는 세계(世系)의 기록에는 불비 한 점이 없지 않다. 시조인 유전이 고려에 귀화한 해는 문종36년이라고 하였다. 그런데 ‘을묘보(乙卯譜)’에 의하면 그의 손자인 아림군 유웅열(娥林君 劉雄悅)이 고려 태조가 신검(神劍)을 칠 때 보좌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또한 세째 아들인 유견익(劉堅益)은 참지정사(參知政事)를 거쳐 봉익대부 · 이조판서 · 대사헌(奉翊大夫 · 吏曹判書 · 大司憲)에 이르렀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알려져 있다시피 이조판서(吏曹判書)는 고려 충렬왕 이후에 변경된 관직명인 것이다. 고려조의 인물로는 고종 때 좌간의대부(左諫議大夫)로서 지공거(知貢擧)를 겸했던 유충기(劉沖祺)가 있다. 그는 시문에 뛰어나 ‘한임별곡(翰林別曲)’에서 “충기대책(沖祺對策)”이라고도 울려졌다. 유존혁(劉存奕)은 원종 때 대장군을 지낸 인물이다. 1270년 고려(高麗)가 몽고와 강화, 강화(江華)에서 개경(開京)으로 환도할 때 배중손(裵仲孫) 등과 함께 이를 반대하고 이른바 삼별초란을 일으켜 반란군 정부의 상서좌승(尙書左丞)이 되었다. 삼별초군(三別抄軍)이 근거를 진도(珍島)로 옮긴 후 남해현(南海縣)을 거점으로 인근 고을을 장악했다. 1271년 다시 근거를 제주도(濟州島)로 옮겨 몽고군과, 몽고에 항복한 고려정부에 끝까지 대항하다가 장렬하게 순국했다. 여말 조선의 왕조교체기에 유환(劉懽)은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절개로 거창(居昌)의 금원산(金猿山) 기슭에 은거했다. 이와는 달리 유창(劉敞)은 조선 개국에 적극적으로 참여, 출세의 길을 간 인물이다. 공민왕(恭愍王)20년 文科에 급제, 성균학유(成均學諭)를 거쳐, 박사, 문하주서(博士, 門下注書)에 올랐다. 그는 태조 이성계(太祖 李成桂)와 친교가 두터웠으며, 이런 연유로 조선(朝鮮) 개국에 참여, 2등 공신으로 대사성(大司成)에 올랐으며 그 후 좌부승지(左副承旨), 중추원부사(中樞院副使)등을 지내고 옥천군(玉川君)에 봉해졌다. 그는 조선개국공신들을 중심으로 왕권쟁탈전이 벌어져 왕자의 난이 일어났을 때는 태조 측에 속했는데, 태종(太宗)이 즉위하자 소요산에 들어가 버렸다. 후에 다시 관직에 나아가 예문관제학(禮文館提學), 대제학(大提學), 세자우부빈객(世子右副賓客) 등을 두루 거친 뒤1408년 참지의정부사(參知議政府事)에 올랐다. 태조(太祖)가 죽은 뒤 스스로 수묘관(守墓官)이 되어 3년 간 수묘(守墓)했다. 그는 태종(太宗)으로부터〈공심일시(公心一視)>라는 친필휘호를 받기도 했는데, 경북 칠곡에 있는 〈어필각〉에 보존돼 있다. 강릉유씨(江陵劉氏)의 대표적인 인물인 유창(劉敞)은 조선 태조1년 초대 성균관대사성(成均館大司成)을 지냈으며 옥성군(玉城君)에 봉해졌다. 태조4년에는 중추원부사(中樞院副使)가 되었으며 다시 옥천군(玉川君)에 추봉되었다. 그 뒤 태조6년에는 예조전서(禮祖典書)와 태종4년에 예문관대제학(藝文館大提學)을 거쳤으며 ‘공심일시(公心一視)’라는 어필(御筆)을 하사받기도 했다. 태종10년에 참찬 의정부사(參贊 議政府事)와 판한성부사(判漢城府事)에 이르렀고 그 뒤의 관력(官歷)은 세자시강원이사 보문각 대제학(世子侍講院貳師 寶文閣 大提學), 세종1년에 사빈(師賓)이 되어 옥천부원군(玉川府院君)에 진봉(進封)되었다. 이어 세종3년에 궤장(几杖)을 하사받고 그해 12월에 세상을 떠나자 영의정(領議政)에 추증되었으며 문희(文僖)라 시호(諡號)되었다. 은재 유한량(隱齋 劉漢良)은 문희공 유창(文僖公 劉敞)의 증손으로 무장현감(茂長縣監)으로 재직 중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병사 수백 명을 이끌고 진주(晋州)에서 왜군에 맞서 싸우다 순절하였다. 그 공으로 후에 그의 둘째 아들 유세형(劉世珩)은 부여현감(扶餘縣監)을, 세째 아들 유세영(鍮世瑛)은 양천현감(浪川縣監)을 제수받았다. 술재 유덕문(述齋 劉德文)은 전남 장성(長城)에서 창의(倡義)하여 의병장 김제민(金齊閔)을 도와 경기도 安城까지 진군하여 커다란 공을 세워 그 공으로 상호군(上護軍)을 제수받았으며, 경서(經書)에도 통달하였다 한다. 천방공 유호인(天放公 劉好仁)은 경서(經書)와 사기(史記)에 능해, 조헌 · 김장생(趙憲 · 金長生) 등 당대의 석학들과 교우하며 후진양성에 힘써 추앙을 받았으며, 선조27년 대기근으로 기우제를 지냈으나 비가 내리지 않자, 분신을 기도하니 천리사방에 큰 비가 내렸다 한다. 이밖에도 선조 때 경주부사(慶州府使)를 역임한 유경상(劉景祥) 등이 있다. 혜산 유숙(蕙山 劉淑)과 학石 유재소(鶴石 劉在韶)는 산수(山水), 인물(人物), 화조(花鳥) 등에 능통했던 문인화가였고, 조선조말 西學이 들어올 때 사역원 당상관(司譯院 堂上官)이었던 유진길(劉進吉)은 역관으로 사신을 수행, 1823년 천주교를 받아들였다가 후에 순교하였다. 유대치(劉大致)는 조선조말 오경석(吳慶錫)과 함께 일찌기 서학(西學)사상을 받아들였다. 원래 한의사였으나, 역관 오경석(吳慶錫)이 淸나라에서 가져온 ‘西學’서적을 탐독, 일찌기 개화에 눈을 댔다. 금옥균(金玉均), 박영효(朴泳孝), 서광범(徐光範) 등 개화당인사들의 막후에서 큰 영향력을 행사, 백의정승(白衣政丞)으로 불리기도 했다. 구한말 망국의 시기에 활동했던 인물로는 전라도 함평(全羅道 咸平)에서 백의정승(白衣政丞) 거병, 전라도 일대의 왜인들과 맞서 싸운 유병기(劉秉淇), 3.1운동 당시 33인 중 기독교대표로 참가했던 악포 유여대(樂圃 劉如大), 안중근(安重根)과 함께 하얼삔역에서 이등박문(伊藤博文)을 살해한 유동하(劉東夏)의사, 의열단(義烈團)에서 활약한 유석현(劉錫鉉)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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