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
손진숙
연꽃을 보러 가기로 한 날이었다.
여름비가 내리고 있었지만 결심을 뒤집고 싶지는 않았다. 아주 못 지킬 상황이 아니라면 그대로 밀고 나가는 게 나을 때도 있는 법. 아직 밟아보지 않은 곳에 대한 기대와 설렘을 안고 집을 나섰다.
연못에 막 도착했을 때 장대비가 내렸다. 그렇다고 발길을 되돌릴 수는 없었다. 드넓게 펼쳐진 연밭을 바라보며 걸었다. 연잎처럼 생긴 우산을 썼지만 비바람의 들이침을 막지는 못해 아랫도리가 흠씬 젖었다. 어쩌면 연꽃 향내를 함빡 머금은 비였는지도 모른다.
연꽃비를 맞으며 오는 이를 기다리고 있었던 걸까? 눈앞에 이층찻집이 신기루처럼 나타났다. 망설임 없이 목조건물 계단을 밟고 올랐다. 조심스럽게 디뎠는데도 삐걱거리는 울림이 났다. 눅진한 발자국이 또박또박 그려지기도 했다. 어디에나 오고 간 흔적은 남게 마련인가 보았다.
따뜻한 찻잔에서 피어나는 아늑한 향기가 전신에 스며들었다. 음습한 기운을 달아나게 해 주었다. 마음이 차차 평온해지면서 몸은 차츰 보송해졌다. 밤새 연잎 위에 떨어진 이슬방울이 아침 햇살을 받아 사라져 버리듯이.
빗소리도 강약의 어울림이 필요했을까. 장중하던 비의 선율이 잔잔한 음률로 바뀌었다. 그 순간이 오기를 기다린 것처럼 찻집에서 나왔다. 빗방울은 은구슬이 되어 연잎 위에서 묘기를 부렸다. 진기명기의 한 장면이었다. 신기하게 바라보는 내 눈동자도 은구슬을 닮아가는 듯했다.
연은 진흙 속에 뿌리를 내렸으나 연꽃은 어느 구석에도 더러운 표식이 없다. 한 점 티끌의 그림자도 비치지 않는 청정한 꽃…. 인당수에 몸을 던진 심청의 모습이 저와 같이 정결했을까? 연꽃 한 송이를 들어 보인 석가모니의 표정이 저처럼 오묘했을까? 심청이 행하려던 효도의 실체는 무엇이며, 부처가 전하려던 진리의 실상은 무엇이었을까? 부모은중경에 이어 묘법연화경이 떠올랐다. 한참 동안 연잎이 빗방울을 굴리 듯 생각방울을 머릿속에 굴려보았으나 뚜렷이 잡히는 것은 없었다.
밤의 연못은 고요하고 평화로웠다. 어디선가 어두운 정적을 깨트리고 몸을 뒤채는 소리가 들려왔다. 어여쁜 연꽃봉오리를 터뜨리기 위한 간절한 몸부림인가. 속세의 번뇌를 버리고 정진하는 구도자의 염불 소리인가. 들끓는가 싶다가도 미약해진 움직임에 온 세상이 조용히 귀를 모으고 있었다.
저절로 피어나는 꽃이나 우연히 이루어진 도道는 아마도 없으리라. 두타제일 마하가섭이 이심전심의 묘리를 깨달음에는 엄격하고 철저한 수행이 따랐을 것이다. 무수한 고난의 시간이 연꽃잎 한 장 한 장에 새겨져 반짝였다. 그것은 심한 진통 끝에 탄생한 귀하고 아름다운 경전經典이었다.
그 밤이 지나고 청명한 아침이 왔다. 막무가내 내리던 비는 그쳐 잠잠했다. 찌푸려 울던 하늘도 방그레 웃고 있었다. 어제 우쭐대던 바람은 연잎의 허리에 기대어 천진난만한 기색이었다.
비에 말끔히 씻긴 누리는 더없이 밝고 푸른 정경이었다. 번잡하던 주변이 단순하게 정리됨을 느꼈다. 댓줄기처럼 쏟아진 연밭의 빗소리는 흐리던 나의 정신에 내리친 죽비소리나 다름없었다.
그날, 그날은 내 마음의 밭에 연꽃 한 송이 뿌리내린 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