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열국지의 세계에 탐닉하다
- 1부 황하의 영웅 (44) -
🌄 제 1권 난세의 강
제7장 황새도 잡고 조개도 잡고 (1)
정장공(鄭莊公)이 송나라를 침공하여 노도 땅을 점령한 것은 정장공 31년 5월의 일이다.
이 해는 주환왕 7년에 해당하며 B.C 713년이다.
그로부터 두 달 후, 송나라는 위나라와 합세하여 오히려 정나라 수도인 신정을 포위했다. 발빠른 움직임이었다. 이 포위 작전을 입안하여 실행에 옮긴 사람은 송나라 대사마인 공보가(公父嘉)였다.
송나라 땅 깊숙이 들어와 있는 정장공(鄭莊公)을 물리치기 위한 비상수단으로서였다. 이 계책은 송나라로서는 매우 적절하고 훌륭한 작전이었다.
- 신정 함락이냐, 상구(商丘)함략이냐.
일방적으로 불리하던 상황을 삽시간에 대등한 상황으로 몰고 갔기 때문이었다.
공보가(公父嘉)의 예상대로라면 신정 수비군은 당연히 이 급보를 정장공(鄭莊公)에게 알려야 했다.
'그렇게만 해준다면 9할 이상의 목적 달성!'
이렇게 생각했다.
그런데 가장 중요한 순간에 공보가(公父嘉)의 작전이 어긋나고 말았다.
신정 수비군의 지휘관인 제족(祭足)의 입에서 정반대 명령이 떨어졌기 때문이었다.
- 주공에게 연락할 필요 없다.
이 한마디 명령으로 공보가(公父嘉)의 작전은 5할 이상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 뿐만 아니었다. 제족은 또 하나의 명령을 수비군에게 내렸다.
- 굳게 지켜라!
제족의 수비 작전은 공보가(公父嘉)에게 있어서 결정적인 타격이었다.
대체로 방어를 결심한 성을 공략하기 위해서는 수비군보다 열 배의 병력이 필요하다. 그런데 지금 공보가(公父嘉)와 우재 추가 이끄는 병사들은 빠른 이동을 목적으로 한 경병(輕兵)이었다.
병력도 신정 수비군보다 두세 배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성문을 굳게 닫아걸고 싸움에 응하지 않는 신정 수비군을 공략하기에는 무리가 뒤따랐다. 공보가(公父嘉)는 신정 공략에 무려 20여 일이라는 시일을 소모했다.
공보가(公父嘉)는 끝내 아무것도 얻지 못했다.
분했지만 철수를 할 수밖에 없었다.
위나라 장주 우재 추가 물었다.
"조금만 더 몰아치면 신정을 무너뜨릴 수 있는데, 어째서 철군하려는 것이오?"
공보가(公父嘉)는 침울하게 대답했다.
"군사를 휘몰아 적을 기습하는 것은 상대편의 방비가 없는 틈을 타기 위한 것이오. 그런데 지금은 그런 상황이 아니오. 공연히 여기서 꾸물거리다가 회군하는 정장공(鄭莊公)의 군대를 만나기라도 하면 우리는 꼼짝없이 독안에 든 쥐 신세가 되고 말 것이오. 그래서 나는 여기를 떠나려 하는 것이외다."
우재 추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러나 역시 아쉬움이 많이 남는 표정 이었다.
"그대 말이 옳긴 하오만 기껏 군사를 동원해 여기까지 왔는데, 아무런 소득 없이 돌아간다는 것이 어쩐지 섭섭하구려."
아무런 소득이 없다는 것은 전리품을 얻지 못했다는 뜻이다. 대체로 다른 나라를 돕기 위해 군대를 출병할 때에는 전리품을 노리는 경우가 많았다.
공보가(公父嘉)는 우재 추의 마음을 짐작하고 다시 입을 열었다.
"정히 그러시다면 돌아가는 길에 정나라와 교분이 두터운 대(戴)나라를 쳐부수도록 합시다. 아무튼 여기서는 하루라도 빨리 벗어나야 할 것이오.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어물어물 늑장을 피우다가 정장공(鄭莊公)의 군대를 만나기라도 하면 큰 낭패를 당할 수가 있소이다."
"대(戴)나라라면 송나라와 인접해 있는 나라 아니오?"
"그렇소. 하지만 그 곳에서 위나라로 돌아가는 길도 열려 있으니, 귀국하는 데는 별 어려움이 없을 것이외다."
"좋소. 당장 대(戴)나라를 치러 갑시다."
의논을 정한 공보가(公父嘉)와 우재 추는 곧 신정에서 철수하여 동쪽 길을 따라 행군에 나갔다.
그러나 송, 위나라의 두 장수는 대(戴)나라를 너무 만만하게 보았다.
그들은 대성(戴城) 10리 밖에 진채를 내리고 군사를 몰아 대성을 공격했으나, 대(戴)나라 군사의 저항은 거셌다.
대(戴)나라는 소국이었으나 하왕조 이래 오랜 전통을 지닌 나라였다.
결속력이 그만큼 강했다. 병사들이 죽기 살기로 싸웠다. 전략도 기민하고 재빨랐다. 지키는가 싶으면 성문을 열고 나와 싸우고, 싸우는가 싶으면 얼른 성안으로 들어가 지키곤 하였다.
이러는 사이, 양편은 사상자가 숱하게 나고, 서로 포로가 되는 병사들이 속출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공보가(公父嘉)는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안 되겠소이다. 채(蔡)나라로 사람을 보내 원군을 청합시다."
채(蔡)나라는 정나라 남쪽에 위치한 후작의 나라이다. 송나라와도 국경을 접하고 있었기 때문에 평소 가깝게 지내왔다. 정장공이 왕명을 사칭하여 동원령을 내렸을 때에 응하지 않았기 때문에 공보가(公父嘉)는 특별히 채(蔡)나라를 생각해 낸 것이다.
이 무렵 채(蔡)나라 군주는 채환후(蔡桓侯)였다.
그는 송나라와의 우호를 생각하며 일부 병력을 뽑아 공보가(公父嘉)에게로 보냈다.
채(蔡)나라 원군이 도착하자 공보가(公父嘉)는 더욱 거센 공격을 퍼부었다. 하지만 좀처럼 대(戴)나라 성을 함몰시키지 못했다.
초조감이 극에 달했다.
그러는 사이 두 달이 또 훌쩍 지나갔다.
이 기간이 송나라를 치고 있는 정장공에게는 황금과도 같은 시간이 될 줄을 공보가(公父嘉)는 전혀 알지 못하고 있었다.
🎓 다음에 계속........
출처 - 평설열국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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