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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 영광이 세세 무궁토록...
(빌립보서 4:17-20)
“17 내가 선물을 구함이 아니요 오직 너희에게 유익하도록 과실이 번성하기를 구함이라 18 내게는 모든 것이 있고 또 풍부한지라. 에바브로디도 편에 너희의 준 것을 받으므로 내가 풍족하니 이는 받으실 만한 향기로운 제물이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것이라 19 나의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 가운데 그 풍성한 대로 너희 모든 쓸 것을 채우시리라 20 하나님 곧 우리 아버지께 세세 무궁토록 영광을 돌릴지어다. 아멘.”
하나님이 창조하신 모든 생명 속에는 그 생명이 스스로 살아갈 수 있는 비결을 넣어주셨다. 새는 나는 비결이 있고 물고기는 헤엄을 치는 비결이 있다. 사람은 하나님의 생명을 받아서 하나님을 표현하고 나타내고 하나님을 대리할 수 있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으셨다. 육체적으로 사람은 동물과 똑같다. 숨을 쉬고 걸어다니는 그런 것은 육체 안에 그렇게 살도록 하나님이 생명을 넣어주신 것이다. 그런데 사람이 다른 생명체와 다른 것은 이 그릇 안에 당신 자신의 영원한 생명을 불어넣어서 이 영원한 생명으로 하나님을 표현하고 하나님을 대신하고 하나님을 나타내도록 그렇게 하신 것이다.
정상적으로 하나님의 영원한 생명이 우리 안에 들어오게 되면, 우리는 어떤 방법과 수단이 필요 없이 우리 자신으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 수 있다. 이렇게 하나님 자신이 생명이 된 그 사람을 그리스도라고 이야기한다. 그리스도는 그 자신으로 하나님을 나타내고 하나님을 대리하는 그런 사람이다.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주셨다고 예수님은 말씀하고 있다. 이것이 정상적인 사람의 자리다. 사람은 원래 이 목적을 위하여 지어진 것이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모든 비결을 가진 자가 된다. 바울은 원래 그런 사람이 아니었지만 예수를 만나서 그리스도로 다시 태어난 사람이다. 이것을 바울은 ‘그리스도를 얻고’라고 표현했다. 또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되고'라고 표현했는데, 이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점점 성숙하게 자라가는 것이다. 그렇게 하니까 그 생명은 자동적으로 그리스도를 따를 수밖에 없는 생명이다. 그리스도와 함께 멍에를 같이 하는, 즉 동역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리스도를 배우고 듣고 본 바대로 사니까 자동적으로 자족하는 열매를 맺게 된 것이다.
궁핍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고 모든 일, 배부름과 배고픔의 일체의 비결을 배웠다는 것이다. 이것은 바울만 그렇다는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이렇게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 결과 빌립보 교회에게는 향기로운 제물을 드리게 하는 열매를 가져오게 되었고, 하나님에게는 영광을 돌리는 결과를 가져오게 되었다. 우리가 그리스도로만 만족하면, 즉 그리스도가 나의 모든 것의 모든 것이 되면 온 세상이 다 회복되는 것이다.
이 세상의 중심은 그리스도다. 참 사람이다. 사람만 회복되면 이 세상은 아무 문제가 없다. 이 세상의 모든 문제는 사람 문제다. 사람만 회복되면, 만물은 자연히 회복되게 되어 있다. 아담 한 사람이 자기 위치에 대해 만족하지 못했기 때문에, 온 인류가 죄 가운데 빠지고 거역에 내몰리게 되었다. 한 나라에서도 왕이 제 자리에 있지 않으면 온 나라가 혼란에 빠진다. 또 한 집안에서도 가장이 제 자리에 있지 아니하면 그 가정은 큰 풍파가 몰려오게 된다. 평화로웠던 동산은 하나님과 사람이 함께 살 수 없는 그런 상태가 되고 말았다.
동산 안에는 하나님과 사람이 살기에 완전한 모든 것이 다 준비되어 있다. 그런데 사람이 이탈되었기 때문에, 아름다운 동산은 함께 살 수 없는 상태가 되어 버리고 말았다. 이 창조된 모든 세계의 주인은 사실은 사람이다. 사람이 제자리에만 있으면 모든 만유가 사람으로 인해서 돌아가게 되어 있다. 사람은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자리에 있다. 영의정이 확실하게 자기 왕에게 굴복하면, 그 영의정은 왕을 대신하여 나라를 다스리는 사람이 된다. 이것이 사람이 위치다. 사람이 제자리에 있으면 만유도 제자리로 돌아가게 되지만, 사람이 제자리에 있지 아니하면 만유가 중심을 잃고 만다.
사람이 자족하려면 어떻게 하면 되는가? 다시 말해서 사람이 환경을 지배하려면 어떻게 하면 되는가? 이것은 방법의 문제가 아니다. 사람들이 좋은 방법을 연구하면 이 세상이 바르게 되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한다. 그래서 니고데모도 예수님에게 좋은 방법을 찾으러 온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니고데모에게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가 될 수 없다.'고 말씀하셨다. 여기서 거듭난다는 것은 그리스도가 내 생명이 되는 것이다. 이것이 그리스도를 얻는 것이다. 그리스도가 나의 생명이 되어서 그리스도 안에서 내가 자라면, 내가 환경을 자동적으로 지배하고 정복하고 통치할 수 있다.
아담은 환경이 나빠서 자족하지 못했던 것이 아니다. 자기의 운명에 만족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흙으로 지어진 운명, 피조물의 운명, 형상의 운명, 하나님에게 제한된 이 운명에 만족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왜 나는 흙이어야만 하는가? 나는 왜 내 마음대로 하지 못하나? 이런 생각을 가지게 된 것이다. 이 틈에 들어오는 것이 사탄이다. 이 문제로 인하여 선악과를 먹게 되었고, 그 결과 우주의 평화가 깨지게 되었다. 유혹하는 자가 아무리 있어도 내 자신의 위치에 만족하고 감사하면, 유혹하는 자가 들어올 수 없다. 흙으로 지어진 이 자리가 감사하고, 피조물의 자리가 감사하고, 제한 받는 형상의 자리가 감사하면, 사탄이 들어올 수 없다.
아담은 동산에 있어서도 자족하지 못했지만, 그리스도 안에 있는 바울은 옥중에 있어서도 자족했다는 것이다. 이 편지를 쓰는 바울은 가장 열악하고,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없고, 자유가 완전히 제한된 로마 감옥에 갇혀 있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바울은 거기서 ‘내가 자족한다. 나는 어떤 환경에서도 만족한다.’고 말했다. 이것은 어떤 환경의 문제가 아니고 사람의 문제다. 구약에 보면 요셉이라는 사람이 나오는데, 모함을 받아서 옥중에 들어가서도 그 옥을 요셉이 다스리는 것을 알 수 있다. 환경을 지배하고 정복하는 그리스도의 생명이 있으면, 우리는 어떤 환경에서라도 만족하고 자족할 수 있다.
바울은 하나님을 '우리 아버지'라고 했는데, 이것은 바울과 빌립보 교회의 하나님이라는 말이다. 나를 나 되게 하신 하나님, 우리를 우리 되게 하신 하나님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막연하게 관념적으로 이야기한 것이 아니고, 자기 자신이 그런 사람이기 때문에 그런 사람이 된 그 하나님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나의 근원이 되고 나의 생명이 되신 하나님이시다. 이 하나님은 바울과 빌립보 교회에 자족하게 하고, 향기로운 봉사를 하게 하고, 풍성한 대로 채우시는 하나님이시다.
모든 것은 생명의 문제다. 우리 안에 생명이 왕성하고 생명이 충만하면, 봄이면 봄이 좋고 가을이면 가을이 좋고 겨울이면 겨울이 좋듯이, 그 환경을 넉넉하게 지배하고 정복할 수 있게 된다. 오히려 더 부정적인 환경을 통하여 그리스도가 더 분명하고 확실하게 드러나게 된다는 것이다.
바울은 빌립보 교회가 보내온 선물로 말미암아, 자기 속에 있는 자족함에 대하여 표현하고 있다. 바울은 빌립보 교회의 아름다운 향기를 맡고 난 다음에, 자기 속에 있는 하고 싶은 말이 마구 터져 나왔다고 할 수 있다. 우리가 교제할 때도 형제의 간증을 듣고 화답을 하게 되면, 생명이 더 분출되어 나오는 것을 보게 된다. 농부가 씨를 뿌렸는데 거기서 싹이 나왔다면 농부가 얼마나 기쁘겠는가? 그리고 열매가 나온다면 농부는 기쁨에 충만할 것이다.
하나님은 스스로 만족하시는 분이시다. 씨를 보면 씨는 그 안에 생명이 충만하다. 그렇지만 씨가 흙에 떨어지지 않으면, 그 충만한 생명이 밖으로 표현될 수 없다. 하나님은 씨와 같으신 분이다. 자기 안에 완전한 생명이 있지만, 그 생명을 나타내게 하는 대상이 있어야 하나님 마음이 나온다. 엄마의 마음에 사랑이 가득한데 아무에게나 그 사랑이 나오겠는가? 자식을 보면 엄마의 마음이 확 표현되어 나온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하나님에게 향기로운 제물을 드리면, 충만하신 하나님의 그 마음이 확 터져 나온다.
우리가 왜 하나님에게 제물을 드리는가? 그냥 의식적으로 하나님은 제물을 받으시는 분이니까 제물을 드리는 것이 아니다. 제물의 의미는 무엇인가? ‘제 자신이 제물입니다. 제가 당신의 만족입니다.’라는 뜻이다. ‘당신의 창조가 완전합니다. 내가 피조물로 지어지고 흙으로 지어지고 형상으로 지어진 이 자리가 전혀 부족하지 않습니다.’라는 뜻이다. 추석 때 자식이 부모에게 ‘아버지, 저를 낳아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는 당신의 아들이 된 것이 너무 만족합니다.’고 한다면 그 아버지가 얼마나 기뻐하겠는가? 이것이 제사를 천 번 드리는 것보다 낫다.
그러면 아버지는 자기 마음이 확 열릴 것이다. 하나님의 만족함이 완전히 표현되는 것이다. 하나님이 만일 하나님의 만족을 표현하지 아니하면, 우리는 행복할 수 없다. 집에서 아버지가 입을 꽉 다물고 그냥 계시면 집안이 좀 긴장하게 된다. 그런데 아버지 마음이 완전히 열려서 그 마음을 표현하면, 온 집안에 꽃이 핀다. 하나님 마음이 열려야, 하나님이 만족을 표시해야, 우리가 행복하게 된다. 왕이 만족하면 백성이 행복하게 되고, 집안에 아버지가 만족하면 가족이 전부 행복하다.
우리가 향기로운 제물을 드리면, 다시 말해 우리 자신이 하나님에게 향기로운 제물이 되면, 하나님은 기다리셨다는 듯이 반사적으로 우리에게 당신의 영광을 채워주신다. 하나님의 만족을 우리 속에 표현하시는 것이 곧 우리에게 영광이 되는 것이다. 요한복음 17장을 보면 “아버지여, 아들을 영화롭게 하사 아들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옵소서.”라고 말씀을 드리니까, “내가 영화롭게 하였고 또 너를 영화롭게 하리라.”고 말씀하셨다. 이것이 아버지와 아들의 아름다운 관계다. 아버지는 아들을 영화롭게 하고, 아들은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는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인생을 지으신 목적이다. 이렇게 주고받고 하는 동안에 축복이 증가된다.
우리는 더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하나님은 더 우리에게 당신의 영광을 주는 것이 바로 하나님과 사람의 정상적인 관계다. 예수님과 하나님의 정상적인 관계는 우리 인간이 그렇게 되어야 할 관계다. 하나님은 바로 그 목적을 위하여 인생을 지으신 것이다. 포탄이 그냥 폭발하는 것이 아니다. 그 안에 뇌관이 있는데, 그 뇌관을 쳐 주어야 장약에 불이 붙고 장약에 불이 붙으면 드디어 포탄이 터지게 된다. 뇌관을 두들겨야 포탄이 터지는 것과 마찬가지로, 하나님도 사람의 뇌관을 때려주고 사람도 하나님의 뇌관을 때려줘야 하나님도 폭발하신다. 하나님의 축복이 폭발한다.
하나님이 우리의 뇌관을 때려줘야 우리가 찬양을 하게 된다. 서로가 서로에게 자극을 주는 것이다. 서로가 서로의 뇌관을 때려주는 것이다. 하나님이 사람의 뇌관을 친다는 말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으로 오시는 것이다. 나도 처음에 이 말씀이 들리지 않으니까, 교회 안에 앉아있어도 그냥 무덤덤했다. 그런데 말씀이 들리고 하나님이 내 인생의 뇌관을 치니까, 내가 하나님에게 향기로운 제물을 드릴 사람이구나! 내가 하나님을 만족케 하기 위하여 있는 사람임을 알게 된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에게 향기로운 제물을 드리고 또 우리가 하나님을 찬양하면, 하나님은 우리에게 축복으로 화답하시는 것이다. 이삭이 에서에게 '내가 이제 죽게 되었으니, 나에게 맛있는 별미을 가져오너라.'고 했다. 그래서 에서가 아버지에게 축복을 받기 위해 사냥을 하러 갔는데, 아버지의 말을 먼저 가로챈 사람이 있었으니, 그 사람이 야곱이었다. 얼른 보면 야곱은 인간적으로 너무 얄밉고 너무 교활하다. 그런데 결과적으로 누가 축복을 받았는가? 야곱이 축복을 받았다. 왜 그랬을까? 그때 아버지는 배고파 계셨다. 배고픈 아버지를 먼저 만족시켜 드리는 것이 축복받는 비결이다. 얼른 보면 에서가 받아야 되는 것이 법이다.
그런데 하나님을 내가 먼저 만족시켜드려야겠다고 하면 순서가 없다. 우리가 간증할 때도 그렇다. 간증할 때 순서를 정해 놨는데, 어떤 형제가 너무 급해서 순서를 어기고 자기가 먼저 마이크 잡고 간증할 때가 있다. 옛날 초창기 때, 형제들이 충만해서 서로 먼저 간증하려고 할 때가 많았다. 얼른 보면 굉장히 무질서한 것 같은데, 그것이 너무너무 재미있고 생동감이 넘친다. 전부 다 신사적으로 서로 양보하고 '네가 먼저 해라.'고 하면 굉장히 좋은 것 같지만, 충만한 마음을 먼저 하나님께 드려야겠다고 형제들이 앞다투어 하나님께 제물을 드리려고 한다면 얼마나 재미있는가! 하나님을 만족하게 하면 하나님이 우리를 축복하신다는 것이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먼저 달라고 하실 때는, 주실 것이 있기 때문에 우리에게 먼저 달라고 하시는 것이다. 가이사라 빌립보 지방에 갔을 때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라고 물으셨다. 그때 베드로가 머뭇거리지 않고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라고 고백했다. 예수님이 그 고백을 받고 얼마나 기뻐하셨겠는가!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고 예수님께서 화답하셨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이렇게 물어보시는 것은 예수님이 우리에게 무언가 축복을 해 주시기 위해 그렇게 하시는 것이다. 수로보니게 여인에게 예수님께서 도전을 하셨다. "나는 이스라엘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보내심을 받은 적이 없다."고 예수께서 말씀하시니까, 그 여인은 '맞습니다. 옳습니다. 개라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습니다.'라고 대답했다. 그 가난한 수로보니게 여인의 마음이 확 드러나지 않는가! 그러니까 예수님이 너무나 기뻐하시면서 "너의 믿음이 크도다."라고 하신 것이다.
이스라엘 나라가 기근 때문에 거의 굶어죽게 되었을 때, 엘리야가 사렙다 지방에 가서 과부에게 빵을 달라고 했다. 엘리야가 과부의 사정을 모를 리가 없다. 그런데 그 과부에게는 아들과 함께 먹고 죽을 양만큼의 양식이 남아 있었는데, 마지막 남은 그것으로 빵을 만들어 엘리야에게 드렸다. 그랬더니 기근 동안 매일마다 양식이 계속 나왔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바로 이런 것을 기다리고 계신 것이다. 우리가 드린 것은 지극히 적은 것이다. 그런데 지극히 적은 것을 하나님이 받으시고, 우리가 감당하지 못할 복을 주신다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결국 우리 자신의 어떠함에 따라서 당신 자신의 축복을 우리에게 표현하시는 것이다. 우리의 표현이 너무너무 중요하다. 우리가 하나님에게 우리 자신을 드리는 것이 너무나 중요하다. 배부른 사람에게는 왜 천국이 안 되는가? 하나님 나라는 어떤 나라인가? 배고픈 사람의 나라이다. 가난한 사람의 나라이다. 목마른 사람의 나라이다. 그래서 과부와 고아의 나라라고 말씀하신다. 하나님 나라는 막달라 마리아 같은 그런 사람의 나라인 것이다.
그러니까 이런 사람은 아무도 못 말린다. 가난한 사람을 말릴 수가 없다. '사흘 굶으면 담을 넘어간다.'는 말이 있듯이, 정말 배가 고프면 목마른 사슴처럼 중간에 자기를 잡아먹으려고 기다리고 있는 사자가 있는 줄 알지만, 너무 목이 마르니까 사선을 넘어 물가를 찾아간다는 것이 아니겠는가? 하나님 나라는 침노를 받는다고 했다. 누가 침노하겠는가? 배고프고 목 마른 사람이 침노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 가난함이 하나님의 축복을 이끌어내는 것이다.
왜 우리 교회가 충만한가? 가난한 사람 때문에 충만한 것이다. 왜 우리 교회가 축복이 넘치는가? 하나님의 나라를 침노하는 사람이 있기 때문에 축복이 넘치는 것이다. 그러니까 하나님 나라는 큰 물탱크와 같다고 할 수 있다. 각자 자기 빨대 만큼 물을 뽑아내는 것이다. 가느다란 빨대를 대는 사람은 물이 쫄쫄 나온다. 그런데 파이프를 대 보라! 하나님 나라는 물이 부족하지 않다. 갖다 대기만 하면 물이 콸콸콸 나오지 않겠는가! 어떤 사람은 쫄쫄쫄 나오는 물로 사는 사람도 있고, 또 어떤 사람은 콸콸콸 나오는 물로 사는 사람도 있다.
이것은 왜 그런가? 가난하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그러니까 하나님 나라는 아주 공평한 나라다. 똑같이 나눠 주는 것이 아니고, 먹고 싶은 만큼 맘대로 먹으라는 것이다. 배고픈 사람은 많이 먹고, 배부른 사람은 많이 먹을 수가 없는 것이다. '나는 왜 이것밖에 안 줍니까?' 그렇게 말을 할 수 없는 것이다. 하나님이 그것밖에 준 것이 아니라, 배고픈 만큼 먹으라는 것이다. 그런데 내가 배가 불러 있으면, 하나님이 주신 것을 받아먹을 수가 없다.
말씀이 똑같이 선포되는데, 어떤 사람은 그 말씀을 듣고 너무너무 기쁘고 충만한데, 또 어떤 사람은 맹숭맹숭하다. 말씀이 다른 말씀인가? 아니다. 누가 가난한가? 얼마만큼 가난하냐? 바로 그 차이다. 그래서 생명은 아주 공평한 것이다. 하나님 나라는 배고픈 사람은 얼마든지 먹을 수 있지만, 배부른 사람은 먹지 못하는 그런 나라이다. 하나님은 갈급한 사람을 기다리고 계신다. 배고픈 사람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은 그 갈급함을 채워주기를 원하신다. 우리의 가난함이 하나님이 뇌간을 때리는 것이다. '하나님 저는 너무 배고픕니다. 너무 목마릅니다.'라고 하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막 쏟아 부어 주신다.
"하나님 곧 우리 아버지께 세세토록 영광을 돌릴찌어다." 우리의 생명이 되시고 우리의 근원이 되시는 아버지 하나님에게 세세토록 영광을 돌릴찌어다. 어떻게 우리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가? 우리가 하나님에게 향기를 드리면, 하나님께서 만족하고 영광으로 채워주신다. '당신의 창조가 완전합니다! 내가 사람으로 지어진 이 자리가 너무나 복됩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창조에 대하여 우리가 만족하고 찬양을 드리는 것이 향기를 드리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내가 너를 영광스럽게 하였고 또 영광스럽게 하리라."고 말씀하셨다.
교회생활을 보면 향기를 드리는 사람은 더 영광스럽게 된다. 그러면 더 향기를 드리게 되니까, 더 영광스럽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만족과 축복의 영원한 회전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주심에 대하여 만족하고, 하나님은 우리의 찬양을 받으시고 축복하는, 이것이 잘 돌아가는 집안이다. 아버지는 너무너무 풍족하신 분이다. 아들이 9급 공무원이 되어 '아버지, 제가 첫 월급을 탔는데, 아버지가 제일 좋아하시는 것을 제가 사드리고 싶어요.' 하면서 돈을 가지고 왔다면, 아버지는 그 돈을 받으시겠는가? 아들의 그 마음을 받으시겠는가? 아버지는 아들의 마음을 받으시고 난 다음에, 천 배 만 배로 되돌려 주시지 않겠는가!
우리가 하나님에게 드리는 것은 9급 공무원의 월급도 안 된다. 그런데 하나님은 왕이시다. 이 우주 안에는 어떤 축이 있어서, 그 축을 중심으로 모든 것이 돌아간다. 축이 제 위치에 있으면, 우주는 아주 정상적으로 돌아간다. 하나님에게 만족을 드리는 것은 아주 간단하다. 정해진 자기 자리에 있는 것이 하나님에게 만족을 드리는 것이다. '당신이 나에게 있으라고 하신 이 자리가 너무 좋습니다.'라고 하면, 하나님께서 그 사람을 중심으로 우주를 돌린다는 것이다. 참 신기하다!
하나님이 제 자리에 있는 사람을 보고 만족하시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모든 축복과 영광을 분배하시고, 또 우리를 통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축복이 다른 사람에게 흘러 나간다는 것이다. 사람은 자기를 좋게 하려고 하면 옹색해질 수밖에 없다. 내 월급을 받아서 미리 쓸 것을 계산해서 자기 뜻대로 쓰다가, 갑자기 무슨 일이 터지면, 자기가 계산한 것이 아무 소용이 없게 되는 것과 같다. 우리는 이렇게 자기를 위해 살려고 하면 옹색해진다.
그런데 아버지를 기쁘게 하면 아버지는 그것을 받으시고 자식에게 너무나 풍성하게 주실 것 아니겠는가! 그러니까 우리가 누구를 평안하게 해야 하는가? 하나님을 평안하게 해야 된다. 하나님을 만족케 해야 한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야 되는 것이다. 가뭄이 들어서 온갖 방법을 동원하여 해결하려고 해도 안 된다. 땅을 파서 아무리 물을 퍼 올려도, 지하수 원천이 말라서 소용 없다. 처음에는 물이 나올지 몰라도 조금만 있으면 메말라버리고 만다. 그런데 하늘이 열리면 모든 문제가 단번에 끝난다.
그러니까 하늘이 평안해야, 즉 하나님이 만족을 해야,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만족은 우리의 절대적인 문제가 되는 것이다. 왜 우주가 잘못 되었는가? 이 근본적인 원인은 아담의 불만이다. 사실 아담은 불만할 자격도 없다. 불만하는 자격도 없는 아담이 불만을 하니까, 모든 문제가 복잡해지게 된 것이다. 사실 우리 인생은 100% 선물이다. 나로 말미암아 된 것은 아무것도 없다. 선물의 내용이 무엇인가? 얼른 보면 선물의 내용이 별 게 아닌 것처럼 보인다.
금덩어리 정도 줘야, 좋은 선물인 것으로 생각한다. 그런데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선물은 무엇인가? '너는 흙이다. 너는 피조물이다. 너는 나의 형상이다. 너는 나에게 제한을 받아야 할 인생이다.' 이것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선물이다. 이것이 비밀인 것이다. 정말로 소중하게 쓰려고 하는 것을 자기 맘대로 하겠는가? 제한을 하겠는가? 소중하게 여기는 것일수록 제한하게 된다. 제일 소중하고 귀한 것은 어디에 두는가? 금고 안에 두는 것이다. 금고는 절대적 제한이다. 금고 안에 있는 보물이 '왜 나를 금고 안에 가둡니까?' 그렇게 따지겠는가?
제일 소중하니까 제일 제한을 가하는 것이다. 그런데 아담은 하나님의 마음을 모르고 표면적으로 '내가 왜 흙이냐? 내가 왜 피조물이냐? 내가 왜 제한을 받는 형상이냐?' 이렇게 생각하여 불만을 가졌던 것이다. 그런데 이제 우리 귀가 열려서, 이것이 정말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선물이구나! 흙으로 지어진 이 자리가 측량할 수 없는 선물이구나! 피조물의 자리, 형상의 자리가 백퍼센트 선물이구나! 이것을 깨닫게 되면, 이 자리가 만물을 지배하고 정복하고 다스리는 자리가 되는 것이다.
그런데 아담은 이것을 모르고, 이것을 시시하게 생각했다. 원천적으로 우리 존재가 하나님의 선물인 것을 안다면, 우주가 아주 잘 돌아갈 것이다. 아담의 불만족, 이것은 자기 자리를 모르는 것이다. 이것 때문에 사탄의 유혹에 넘어가서 선악과를 먹게 되었고,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지게 되어 이때부터 인생의 문제가 시작된 것이다. 하나님이 주신 제일 좋은 것을 시시하게 생각하니까, 그 다음부터 자기 스스로 금덩어리를 얻기 위해 흙을 버렸다. 하나님같이 되려고 하기 때문에 피조물의 자리를 버렸다. 또 자기가 생명이 되려고 하니까 형상의 자리를 버리고 말았다.
바로 이것이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지는 것이다. 이것이 이마에 피땀이 흐르는 것이다. 그래서 "땅은 너희에게 엉겅퀴를 낼 것이고 이마에 땀을 흘려야 먹고 살 것이다."라고 말씀하셨다. 하나님께서 모든 걸 다 주셨는데, 그것을 시시하게 여긴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을 보면, 어떻게 우주가 예수님으로부터 회복이 됐는가를 확실하게 알 수 있다. 오직 예수 한 사람이 하나님이 주신 자기 존재에 만족했다. 다시 말하면 '당신의 창조가 완전합니다. 흙으로 지어진 이 자리가 너무 복됩니다. 나는 당신 앞에 피조물입니다. 내가 내용이 아니고 당신이 나의 내용이요 나의 생명입니다.' 예수는 이 자리에 계셨다. 다른 건 아무것도 없다. 바로 이것이다.
예수님은 이 자리에 만족하셨다. 이의가 없으셨다. 하나님이 주신 선물에 대하여 만족했을 때, 이 우주가 새로 회복되기 시작했다. 그래서 축을 잃어 버렸던 우주가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회복이 되니까, 여기서 우주가 제대로 돌아가게 되었다. 예수님이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으실 때에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 같이 예수에게 임하더라."는 말씀이 나온다. 그리고 "이는 내 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셨다.
예수님은 인생의 자리를 만족하신 분으로 세례를 받으신 것이다. 그래서 우주의 축이 제자리로 돌아오게 되었다. 정상적으로 돌아가는 예수의 축에 우리가 톱니바퀴처럼 연결되면, 시계가 축에 연결되어 잘 돌아가듯 우리도 하나님을 온전하게 나타내는 자가 된다. 이제 이 축에 합류해서 돌아갈 것인가? 아니면 옛날 방식대로 돌아갈 것인가? 하는 문제이다. 이것이 노선의 문제이다. 예수의 노선이냐? 아담의 노선이냐? 하는 문제이다.
예수님은 아담의 불만을 만족으로 바꾸셨다. 아담의 부정을 긍정으로 바꾸셨다. 우리는 누구를 따라갈 것인가? 만족한 사람을 따라가느냐? 불만족한 사람을 따라가느냐? 이 문제이다. 우리가 누구를 따라가는 것은 너무 중요한 일이다. 세상에는 개척자를 매우 위대하게 본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에서 개척자는 망하는 자리이다. 하나님 나라는 따라가는 자리이다. 이미 길을 다 개척해놓았다. 경부선은 이미 닦아 놓았으니 이용만 하면 된다. 그 위로 차를 몰고 달려가면 된다.
우리가 누구를 따라가는 것이 하나님 나라이다. 어떤 형제가 과정을 거친 후 아름다운 간증을 내놓았는데, 나도 한번 해 봐야 한다며 닦아놓은 길을 무시하고 자기가 새로 길을 닦는다면 얼마나 고생인가. 우리는 닦아놓은 길을 가면 된다. 사망에 빠진 사람을 따라가면 사망에 빠지고, 행복한 사람을 따라가면 행복하게 된다. 간단하다. 사람은 이 노선으로 갈 수도 있고, 저 노선으로 갈 수도 있다. 행복의 노선으로 가는 사람에게 붙을 수도 있고, 사망의 노선으로 가는 사람에게 붙을 수도 있다.
“하나님 곧 우리 아버지께 세세 무궁토록 영광을 돌릴지어다.” 자기 인생을 통해서 하나님의 영광이 현재적으로 나타나고 있는 사람의 찬송이다. 현재적으로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면 ’하나님 아버지께 세세토록 영광을 돌릴지어다‘ 하는 찬송이 나온다. 이것은 입술의 찬송이 아니라 존재의 찬송이다. 우리가 사는 것은 내일을 사는 것이 아니라 지금 현재를 사는 것이다. 현재가 만족하면 과거가 다 축복이 되지만, 현재가 만족하지 못하면 지난날이 다 원망이 된다.
부잣집 아들이 망하여 가난하게 되었는데, 가난하게 살아본 적이 없어서 적응을 못하는 것에 대해 원망을 하는데, 차라리 내가 가난하게 태어났으면 좋았을 텐데 왜 아버지가 나를 풍족케 하셔서 지금 이렇게 고생을 하게 하느냐고 불평을 한다. 옛날에 아무리 잘 살아도 소용없고, 지금 내가 만족하면 모든 것을 다 만족하게 된다. 내가 지금 만족하지 못하면 과거의 모든 것이 다 원망이 된다.
우리가 아무것도 아닌 우리 인생, 무익한 우리 인생을 깨닫게 되면, 이 인생을 가지고 하나님깨서 자기의 형상을 만드셨으니 감사하지 않을 수 없다. 행복한 사람은 감사하는 위치에 있는 사람이다. 감사는 위치의 문제이지, 조건의 문제가 아니다. 우리 인생이 근본적으로 무익하다는 것을 깨닫는다면, 손해 볼 게 있겠는가? 옛날 나는 무엇을 손해보는 줄 착각했다. 지금 생각해보니 내가 손해볼 것이 하나도 없다. 내가 완전히 파산했다 할지라도 원래 자리로 돌아가는 것이다. 아무것도 아닌 자리가 원래 자리였다.
주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십니까?'라고 할 때 하나님은 대답이 없으셨다. ’원래 너는 피조물이고 흙이고 아무것도 아니지 않느냐?‘라고 하신 것이다. 더 이상 내려갈 수 없는 만물의 찌꺼기로 우리 인생이 지음받았다는 사실을 알면, 우리는 아무것도 손해 볼 것이 없다. 그런데 내가 뭔가 잘났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만족이 없다. 이것을 밑 빠진 독이라고 한다. 사람의 자리에서 벗어나면, 아무리 물을 부어도 우리 인생에 만족이 없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받아들이면 하나님께 감사와 찬송을 드리게 된다. 그리스도를 믿고 받아들인다는 말은 십자가에서 내려올 수 없는 그 운명, 아무것도 없는 그 운명, 하나님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라고 해도 아무런 응답도 받을 수 없는 그 운명을 내 자리로 받아들이면, 우리 인생은 더 이상 내려갈 바닥이 없다. 이 자리에서 우리는 참으로 하나님을 알게 되고,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게 되고, 하나님 말씀이 들리게 되어 감사하게 된다. 감사는 제일 밑바닥에서 오는 것이지, 어떤 조건으로 오는 감사는 불완전한 감사이다.
이번에 중국에 **형제라는 분이 53세의 나이로 죽었다. 그 형제가 살았던 이야기를 들으니, 그 삶이 너무나도 비참했다. 세상에서 버려지고 버려진 밑바닥 인생을 살았는데, 십자가에 못 박혀 내려올 수 없는, 버림받은 그 예수 안에 자기 인생이 발견되었고, **형제의 인생을 통해 하나님이 온전하게 표현되는 그 간증을 듣고, 중국의 형제들이 자기 앞에 놓인 모든 조건과 부끄러움과 문제들이 사라지고, 함께 찬송하고 간증하는 모습을 보았다.
우리 인생의 가장 밑바닥에 있는 그 자리는 누구에게 필요한 자리인가? 하나님께 필요한 자리이다. 그 자리를 감사하게 되면, 세상에서 버려진 인생을 하나님께서 필요로 하신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래서 우리 인생이 절대적으로 하나님께 필요한 존재로 알게 된다. 예수를 굉장히 놀랍고 능력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그는 너무너무 가난하기 때문에, 자기 자신이 아무 것도 아니기 때문에, 그럴 수밖에 없는 사람이었다. 자신이 흙이기 때문에 흙이라고 표현하였고, 피조물이기 때문에 피조물이라고 표현하였고, 형상이기 때문에 형상이라고 표현하였다.
예수님께 물으면 '나는 나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무것도 없고, 나는 아버지로 말미암아 왔다.'고 말하였다. 예수님의 말은 모두 피동적이지 능동적인 말은 없다. 자기 스스로 된 것은 아무것도 없고, 모두 하나님으로부터 온 자신을 말한다. 사람으로 태어났기 때문에 사람으로 살면 된다. 그런데 우리가 사람을 부끄럽게 여기고 사람의 자리를 벗어나면,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지게 된다. 예수님은 사람으로 태어났기 때문에 그냥 사람으로 사셨다.
천사는 왜 타락했는가? 그의 날이 너무나 화려했는데, 화광석 가운데 왕래하더니 마침내 너무나 자고해졌다는 것이다.(겔28장) 천사가 태어나는 날을 이렇게 말하고 있다. '각종 보석과 홍보석과 황보석과 금강석과 홍만옥과 청옥과 남보석과 홍옥과 항금으로 단장되었다. 그리고 네가 지음받던 그 날에 소고와 비파가 예비되었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니 천사가 태어난 그 날은 사람이 태어난 날과 너무나 다르다. 그런데 천사는 자기가 너무 아름다워서 자고해졌다. 불행한 사람은 자기가 무엇이 된 줄 알고 불행하다. 다른 사람이 자기를 인정하지 않으면 금방 화가 난다. 자기가 아무것도 아닌 줄 알면, 아무리 흔들어도 흔들리지 않는다.
이 우주 가운데 축은 무엇인가? 십자가에서 내려올 수 없는 그 사람이 우주의 축이다. 그 사람이 기초가 되어서 그 기초 위에 하나님이 이 우주를 새 창조하기를 원하신다. 사람의 인격이 제 위치에 있으면 우주가 잘 돌아가게 되지만, 제 위치를 이탈하면 모든 것이 비틀어진다. 우리의 무익한 인생을 하나님께 드린다면 그 사람이 바로 기초이다. 그 기초 위에 모든 것이 잘 운행될 것이다. 우리 교회의 기초가 바로 목사님이다. 우리 목사님은 십자가에서 내려올 수 없는 그 자리를 자기 자리로 알고 살아내고 있다. 그래서 우리 교회가 잘 돌아간다.
하나님의 영광이 세세 무궁토록 있기를 바란다면, 흙으로 지어진 우리 자신을 하나님께 드려야 된다. 그래야 피조물의 자리에 만족하게 된다. 형상의 자리가 지고로 아름다운 자리이다. 이렇게 하나님께 자신을 드리면, 하나님은 그 사람을 가지고 당신 자신을 나타내신다. 그러므로 우리의 위치가 얼마나 소중한가! 우리는 너무너무 소중한 존재이다. 나 한 사람으로 인해서 온 만유가 저주를 받을 수도 있고, 축복을 받을 수도 있는 위치이다.
우리는 개인이 아니라 내가 속한 사회의 중심이다. 우리 형제들 자매들의 가정이나 직장은 소우주이고, 나로 인해 그 소우주가 축복을 받을 수도 저주를 받을 수도 있다. 그러니 우리의 자리가 어디인지 확고히 알아야 한다. 왜 목사님이 십자가에서 내려올 수 없는 자리를 매일 말씀하시는가? 집을 지으려면 제일 중요한 게 기초인데, 이 기초만 잘 되면 그 위에 단단한 집을 지을 수 있다. 미국 맨하탄에 높고 큰 빌딩을 지을 수 있는 이유는 그 기초가 반석이기 때문이다. 우리 인생의 반석은 바로 십자가에서 내려올 수 없는 그 자리이다. 그 자리가 내 자리로 확고하면, 하나님은 이 사람을 통해 당신의 영광을 나타내신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고, 그를 따르고, 그를 배우고, 그와 함께 멍에를 같이 할 때, 다시 말해 우리 자신을 하나님께 드리면, 하나님께서 세세 무궁토록 영광을 받으신다. 하나님이 영광을 받아야 우리는 평안하다. 하나님이 만족하셔야 우리가 복을 받는다. 우리 자신이 드려져서 하나님이 만족하시고, 또 하나님께서 채워주시고 우리는 또 감사하는, 이것이 생명의 선순환이다. 우리 몸도 순환이 잘 되어야 건강한 것처럼, 하나님과 우리 사이도 이런 선순환이 되면 점점 축복이 상승하게 된다.
나는 교회 생활을 통해 어제보다 못한 오늘이 없다는 말이 실제로 경험되고 있다. 날마다 새롭고, 날마다 좋고, 날마다 만족하는 이것이 선순환이다. 우리가 드려지는 정도에 따라 우리의 행복과 축복도 상승한다. 우리가 하나님께 인색하게 드리면, 내가 인색한 인생을 살게 된다. 내 인생에서 가장 좋은 것을 하나님께 드리면, 내 인생 자체가 가장 좋은 인생이 된다. 사람과 사람 간의 생명의 선순환, 하나님과 사람 간의 생명의 선순환의 현장이 바로 교회이다. 우리의 소원은 무엇인가? 내가 잘 되는 것이 아니라, 나의 전 존재가 드려져서 하나님의 영광이 세세 무궁토록 나타나는 것이다. 이런 소원을 가진 사람은 얼마나 복된 사람인가!
[ 기 도 ]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께서 당신 자신의 모든 것을 상속하기 위해, 만물의 가장 낮은 자리에 있는 우리를 취해서, 당신의 형상으로 만드시고 당신의 피조물로 만드셨습니다. 아담은 이것이 시시해서 동산을 버렸지만, 이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아담이 버린 이 자리가 얼마나 영광스럽고 아름답고 존귀한 자리인지 우리의 눈을 들어 보여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담 안에서 돌아갔던 우주의 축은 너무 혼란스럽고 무질서했지만, 예수 그리스도 안에 새롭게 회복된 축은 축복과 영광과 찬양과 감사가 순환되는 아름다운 회복된 자리가 되었습니다. 주님, 이제 우리의 소원은 하나님 아버지께 세세 무궁토록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우리 인생이 하나님을 만족케 하고 형제를 만족케 하는 인생이 되게 하여 주옵시고, 하나님께 향기로운 제물을 드리는 인생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주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렸습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