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Ⅲ부 정통선의 향훈
마음의 성품 (3)
- 마음의 구성 : 십식
① 안식(眼識) : 눈, ② 이식(耳識) : 귀, ③ 비식(鼻識) : 코,
④ 설식(舌識) : 혀, ⑤ 신식(身識) : 몸, ⑥ 의식(意識) : 뜻,
⑦ 말나식(末那識) : 아치(我痴), 아견(我見), 아만(我慢) 등의 망식(妄識)
⑧ 아뢰야식(阿賴耶識) : 장식(臧識)
⑨ 암마라식(菴摩羅識) : 무구식(無垢識), 백정식(白淨識)
⑩ 건율타야식(乾栗陀耶識) : 진실심(眞實心), 견실심(堅實心)
그러면 대체로 우리 인간의 마음은 어떻게 구성되어 있는가?
마음풀이, 이것 역시 유식론(唯識論)이라,
불교심리학에서 말씀하는 것을 들어서 얘기하겠습니다.
우리 마음을 십식(十識)이라 합니다.
식(識)이라는 말도 역시 마음이나 똑같은 뜻입니다.
심(心)이나 식이나 같이 풀이합니다.
심식은 무엇인고 하면,
맨 처음 안식(眼識)이라, 우리의 시각(視覺)이고
그 다음 이식(耳識)이라, 청각(聽覺)이고
그 다음 비식(鼻識)이라, 후각(嗅覺)이고
그 다음 설식(舌識)이라, 미각(味覺)이고
그 다음 신식(身識)이라, 촉각(觸覺)이고
그 다음 제6 의식(意識)이라,
느끼고 판단(判斷)하고 분별하는 의식입니다.
그런데 우리 인간은 십식 가운데서
다만 보고, 듣고, 냄새 맡고, 맛보고, 감촉하고,
의식으로 분별하는 6식까지밖에는 못 씁니다.
인간 이외의 동물은 6식도 못 쓰고 5식까지만 씁니다.
의식 판단은 못하니까 말입니다.
식물은 아무 식도 못 씁니다.
그러나 식이 없다고 마음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불경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초목무심어생호소승(草木無心語生乎小乘)’이라,
풀이나 나무가 마음이 없다고 하는 말은
소승(小乘)에서 쓰인다는 말입니다.
대승(大乘)에서는 이런 말을 안 씁니다.
소승은 밀교(密敎)를 모릅니다.
말하자면 마음의 본질을 못 본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대승은 본질을 봅니다.
따라서 “동물이나 마음이 있지, 나무나 풀은 마음이 없다.”
이렇게 말하는 것은 소승에서만 나온 말이라는 뜻입니다.
비록 하나의 나무라 하더라도 다 마음이 있습니다.
다만 그것이 잠재해 있을 뿐입니다.
마음의 형상이 없어놔서 잠재해 있을 뿐입니다.
아, 보십시오.
같은 꽃이라도 똑같은 화분에다 심어 놓고서
하나에는 정성을 들이고,
또 하나에는 정성을 덜 들이면,
똑같이 거름도 주고 물을 주더라도
역시 정성과 마음을 쏟은 쪽이
더 성장하더라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초목(草木) 역시 잠재해 있을 뿐이지
마음이 있습니다.
다만 진화과정에 따라서 일반 동물은
그 가운데 잠재의식이 발동되고 계발되어 5식을 쓰고,
사람은 더 계발되고 진화를 거쳐 와서
6식까지 쓰는 것입니다.
그러나 6식이 모두가 아니라 6식 뿌리에는
또한 제7 말나식(末那識)이란 식이 있습니다.
또 말나식이 다가 아니라 말나식의 뿌리에는
아뢰야식(阿賴耶識)이라는 식이 있습니다.
또 아뢰야식이란 식이 우리 마음의 전부가 아니라
그 저변에는 암마라식(菴摩羅識)이 있습니다.
그리고 가장 밑바닥에는
또 건율타야식(乾栗陀耶識)이라는 식이 있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 인간이나 동물의 마음에나,
풀이나 나무 또는 하나의 전자(電子)나 어떤 것이나
십식이 있습니다.
우리는 전자라 하는 것이 무생물(無生物)이라 하지만,
어떤 소립자나 무엇이나 다 식이 있습니다.
다만 그것이 어느 만큼 계발되었는가 하는
정도 차이만 있을 뿐입니다.
제10식인 건율타야식,
곧 진실심(眞實心) 또는 견실심(堅實心),
이것이 불심(佛心)입니다.
이것이 불성이고 불타요, 진여입니다.
비록 계발만 못했을 뿐이지
일체 만유의, 존재의 근본은 모두가 다 불심입니다.
또한 이것이 청정자성심(淸淨自性心)입니다.
다만 그 존재 자체의 업 따라서
계발의 차이만 있을 뿐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수행을 하면
차근차근 6식에서 7식으로 나아가고
그 다음 8식이라, 깊이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10식의 끝까지 이르면
그때는 성불이 되는 것이지요.
우리는 이제 제일 밑바닥에 닿는다는 말입니다.
고향은 역시 여기입니다.
우리는 지금 현재 인간 존재가
비록 6식에 머물러 있다 하더라도
이런 것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일반 중생은 자기 보배를 모릅니다.
금은보화나 보배로 알지
영원의 생명을 가지고 있고
일체 공덕을 갖추고 있는 일체 만덕장(萬德藏),
즉 만덕의 곳집인 영원적인 불심은 잘 모릅니다.
이것만 깨달으면 천지가 자기 것인데 말입니다.
이것을 깨닫는 것이 불교입니다.
이것을 깨닫는 지름길은 참선입니다.
따라서 불교를 믿는다 하더라도
일반적인 사람들은 그냥 끄덕끄덕 하나둘씩 올라갑니다만,
참선은 그냥 비약적으로 불심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 마음의 본성
심즉시불(心卽是佛)이라,
중생의 마음이 곧 부처라는 말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감가나 박가나, 지금 우리 마음은
모두가 다 이런 제6의 의식 단계에 있는 셈이지요.
그런데 마음이 곧 부처라,
비록 우리가 아직 정화되지 못해서
이런 불심은 미처 못 되어 있다 하더라도
불심과 내 마음은 곧바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둘이 아닙니다.
한 마리의 파리도,
파리 마음밖에는 못쓸망정
그도 역시 본질은 같은 부처입니다.
부처와 이렇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하나의 전자도,
겉으로 인간의 눈에 보이는 것은 전자지만
본바탕은 역시 불심입니다.
불심과 이렇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이렇게 따져 볼 때는
천지우주 모두가 다 불심을 바탕으로 합니다.
겉에 뜬 것을 중생이 잘못 봐서 정유리무(情有理無)라,
망정(妄情)으로 봐서 나무요, 소요,
중생이 가짜로 이름 지어서 무슨 산이요,
그렇게 부르는 것입니다.
바로 보면 다만 불심이 이렇게 저렇게 변화한 것에 불과합니다.
따라서 도인들은 전부를 다 부처로 본다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우리가 성불하는 방법도
여기에서 추출이 되어서,
구경지(究竟地)인 우리가 가야 할 고향,
여기를 딱 집어 들고서 안 놓치고 항시 생각하면
그때는 빨리 가겠지요.
바로 이렇게 연결되어 있으니까 말입니다.
자기 마음 떠나서 저만치 불심이 있는 것이 아니라,
내 마음의 본바탕이 바로 불심이기 때문에
불심이라는 그 마음 안 놓치고서 곧장 파고들어 가면,
그때는 우리가 불심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내가 생명인지라,
내 바탕, 천지만유의 바탕인 불심은
그야말로 보다 더 큰 생명이 되겠지요.
그래서 그런 생명을
하나의 원리로만 구하면
그때는 바싹 말라서 납득이 잘 안 되는 것이고
무미건조합니다.
생명이기 때문에 역시 흠모, 추구하는
그러한 감성으로 구해야 합니다.
고도한 문화종교는
모두가 다 신앙 대상을 생명으로 구합니다.
기독교는 ‘하느님’, 천도교는 ‘한울님’,
이슬람교는 ‘알라신’ 모두가 다 생명을 구합니다.
따라서 우리 신앙 대상을 생명으로 구하는 것은
우리 수행법의 가장 중추인 것이고,
기타 방법은 하나의 개별적인 특수에 불과합니다.
화두를 든다, 무자(無字)를 든다, 이런 것은
그때그때 사람에 따라서 특수한 것에 불과한 것이고,
줄거리는 생명 자체를 그대로 수용하는 것입니다.
때문에 화두를 들어서 의심하는 것이나,
가만히 앉아 있는 것이나,
어떠한 방법이든지
우리 본바탕 곧 불성을 참구하는 것이
기본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부처님 당시나 도인들은
모두가 다 생명을 생명으로 수용하는 근본으로써
우리를 지도해 왔던 것입니다.
불교는 일체 만법을 간직하고 있기 때문에
모든 법을 다 수용합니다.
어떤 법이나 본질은 부처이기 때문에
어떻게 구하든지 들어가서 끄트머리에 가면
그때는 다 부처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어떤 법이나 다 용납할망정,
주장된 우리 수행법은
역시 부처님을 생명으로 구하고,
생명으로 생각하고, 생명으로 외우면서
다른 방법도 종적(縱的)으로 용납해야 하는 것입니다.
부처님을 생각하는 것은
별것이 아니라고 생각할는지 모르지만,
부처님을 생각하는 그 순간
우리한테 공덕(功德)을 많이 줍니다.
기독교인들이 ‘오, 주여!’ 하는 그 생각도 역시
굉장히 많은 공덕을 주는 것입니다.
흐트러지고 망정(妄情)밖에 없는 우리 중생이
완벽한 존재를 구하는 그 마음으로 해서
우리 마음은 승화(昇華)되어
본심에 가까워지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불경에도 ‘신위도원공덕모(信爲道源功德母)’라,
신앙심은 도의 근본인 동시에
공덕의 어머니라는 말입니다.
믿는 마음이 없으면 도는 못 통합니다.
우리 중생은 안 보이지만
부처님이나 성인의 말씀을 우선 믿어야 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우리에게 실상이 보입니까?
그러나 부처님이나 성자는 거짓말이 없습니다.
우리가 못 믿는 것은
그만치 업장이 무거운 소치입니다.
우리 마음의 광명이 밝아서
실상의, 불성의 지혜가 우리한테 좀 더 빛나 있다면
빨리 믿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어두워서
우리 본래마음인 불성광명(佛性光明)이 빛나 있지 않으면
잘못 알고 믿지 못하는 것입니다.
☞ 출처 : 본정 김영동 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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